제1부 하현달 (9)
1. 하현달
2. 어머니는
3. 사제지간
4. 눈에 밟힌다
5. 그 길 지날 때마다
6. 떨이요, 떨이
7. 어린 왕자가 심어 놓고 간 꽃씨
8. 한강
9. 어둠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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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현달
모처럼
산중 초막이
달빛으로 북적거리더니
추석 쇠고
떠나는 자식들
배웅하는데
"할비 같이 가자"
울어버린 손녀
도연이가 할비 닮았다며
눈물 감추는 어미
떠나는
뒷모습에
하현달 따라나선다
2. 어머니는
내 안에
계시는 어머니는
진즉 돌아가시고
내 곁에 안 계셔도
자나 깨나
나와 함께하신다
이 세상일 끝내고
나 저승 가는 길에도 동행하실 것이다
3. 사제지간
<부제:장무상망長毋相忘>
황량한 설원 가운데에
갈필로 그린 소나무 두 그루
비스듬히 앉쳐놓은 토담집
왼쪽에 잣나무 두 그루
오른쪽 상단에
세한도歲寒圖라 쓰고
그 옆으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적고
그 밑에 늙은 소나무 가지 길게 꺼내 받쳐 들고
오른쪽 하단에는
오래오래 우리 서로 잊지 말자며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새긴 인장을 찍는다
연경에 다녀올 때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유배지를 찾아준 제자 이상적,
그가 나의 오래된 스승과 벗으로부터 구해 온 책과 반가운 소식 전해줄 때 이 빠진 이 늙은 호랑이 끄억끄억 눈물로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라 새긴 낙관
꾹 눌러 찍는다
우선이 이 그림을 들고
청나라 연경에 가서 보이니 열여섯 문사들이 강남제비 반기듯 앞다투어 제화 시題畵詩 더하고 더하니 그 길이가 14미터에 이르네
세한도에는 바람이 없다
설한풍 이미 지나간 후였다
세한연후歲寒然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른 절개를 볼 수 있다는 옛 성인 태사공太史公과 공자孔子의
진언을 빌려 사제지간의 우정을 오롯이 담아낸 추사의 세한도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 李尙迪(1803~1865): 호는
우선藕船, 시인, 역관
*우선시상藕船是賞 :상적이 이것 보시게
*長毋相忘:우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4. 눈에 밟힌다
메콩강변 몽족 야시장
군침 도는 먹거리와 수공예품
작고 왜소하기만 한 몽족의 눈 구경꾼들을 구경하면서
나는 야시장에 빠져든다
한켠, 철 지난 뜨개 소품 몇 점 바닥에 깔고 앉은
어린 자매와
젖먹이 아이 안고 있는 여인
그 모습에 발길이 멈춘다
저녁은 먹었을까
한참을 바라보다
시장 한 바퀴 돌아
떡볶이 한 그릇 사들고
다시 찾아가 보니
그대로다
옛날에 긴 봄날 녹동 부둣가
해넘이 저잣거리
미나리 푸성귀 팔던
앉아계신 여인
"너희들만 보고 있으면
배가 부르다"
하시던 우리 어머니
눈에 밟힌다
5. 그 길 지날 때마다
석촌역 7번 출구
'상추 한 묶음 3천 원'
써놓고 앉아계신 할머니
5천 원 건네고
검정 봉투 받아 든 젊은이
거스름돈
챙겨 가라는
할머니에게 꾸벅
손사래 뒤로하고
뚜벅뚜벅 앞서간다
그 길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젊은이
6. 떨이요, 떨이
''여보게 젊은이야
이 물건 좀 사 가시게''
해 질 녘 횡성 장터
푸성귀 팔고 있는 할머니
나는야 많이 먹었어
두고두고 잡수시게
젊을 땐 전혀 몰러
이놈의 세월을
낙엽은 이렇게 지는데도
그놈은 안중에 없어
한이 있는 육신으로
끝없는 망상만 쫓고 있거든
이놈아 봄이 온다
꼬들기지 말거라
네놈은 울긋불긋
세월 가는 줄 모르지만
먹는 건 나이뿐이다
떨이요
떨이요, 떨이
7. 어린 왕자가 심어 놓고 간 꽃씨
의식 상태로
내시경 한다
화두가 내시경을 따라
위속으로 들어선다
들숨 날숨, 숨은 길게
위속을 수색한다
내시경이 화두가 되고
화두가 내시경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어
사하라 사막을 뒤지고 다닌다
어둠 속에 펼쳐지는
불안 초조 인식의 제전
이 뭣고? 용종이다.
어제저녁에 어린 왕자가 다녀 갔어 별 B-612, 제 고향에서 가져온 꽃씨 심어 놓고 간 거야
어린 왕자가 말했지
별에는 보이지 않는 꽃이 있어 아름답고,
사막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 아름답다고
그 양(羊)이 꽃을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 그 羊: 어린 왕자에게 그려준 羊
8. 한강
눈물이 납니다
당신의
노벨문학상 소식
흥분이 돼서
들떠
좋아서 눈물이 납니다
한강!
대한의 딸이여!!
민족의 영웅이여!!!
24년 10월 10일
9. 어둠을 밝히고 있다
아직도 잔설에는
고라니 발자국이 선명하다
뭣고를 기다리고 있다
뭣고는 나의 애견
내가 짓고 있는 화두
녀석은 고라니와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탑돌이 하던 나의 도반이었는데
달포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후 토굴은 빈 주막이었다
호랑이가 물어갔을까
산사람 따라갔을까
살아 있다면 돌아올 것이다
적막을 깔고 앉아
비몽사몽 어둠을 짓고 있다
뭣고 이 녀석
눈앞에 나타나
주모에게
술 한상 내놓란다
주거니 받거니
선정에 취해
어둠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