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사제지간
1.하현달
모처럼
산중 초막이
달빛으로 북적거리더니
추석 쇠고
떠나는 자식들
배웅하는데
"할비 같이 가자"
울어버린 손녀
도연이가 할비 닮았다며
눈물 감추는 어미
떠나는
뒷모습에
하현달 따라나선다
2.어머니의 존재
어머님가
돌아가셨다니?
아니야
어머니는 살아계신다
내가 죽어도 같이 하신다
3.사제지간
<부제:장무상망長毋相忘>
황량한 설원 가운데에
갈필로 그린 소나무 두 그루
비스듬히 앉쳐놓은 토담집
왼쪽에 잣나무 두 그루
오른쪽 상단에
세한도歲寒圖라 쓰고
그 옆으로 우선시상藕船是賞, '상적이 이것 보시게'라 적고
그밑에 늙은 소나무 가지 길게 꺼내 받혀 들고
오른쪽 하단에는
오래오래 우리 서로 잊지 말자며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새긴 인장을 찍는다
연경에 다녀올 때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유배지를 찾아준 제자 이상적,
그가 나의 오래된 스승과 벗으로부터 구해 온 책과 반가운 소식 전해줄때 이 빠진 늙은 호랑이 끄억끄억 눈물로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라 새긴 낙관
꾹 눌러 찍는다
우선이 이 그림을 들고
청나라 연경에 가서 보이니 열여섯 문사들이 강남제비 반기듯 앞다투어 제화시題畵詩 더하고 더하니 그 길이가 14미터에 이르네
세한도에는 바람이 없다
설한풍 이미 지나간 후였다
세한연후歲寒然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른 절개를 볼 수 있다는 옛 성인 태사공太史公과 공자孔子의
진언을 빌려 사제지간의 우정을 오롯이 담아낸 추사의 세한도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 李尙迪(1803~1865): 호는
우선藕船,시인, 역관
*長毋相忘:우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4.김부업 우리어머니
메콩강변 몽족 야시장
군침 도는 먹거리와 수공예품과 작고 왜소하기만 한 몽족의 눈과 구경꾼들을 구경하면서 시장통에 빠져든다
철 지난 뜨개질 소품 몇 개 바닥에 깔고 앉아 있는 난전에
어린 자매와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발을 붙잡는다
저녁은 먹었을까
한참을 바라보다가 시장 한 바퀴 돌며 떡볶이 한 그릇 사들고 다시 와 보니 그대로다
옛날에 긴 봄날 녹동 부둣가
해넘이 저잣거리에 미나리 풋거리 팔고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이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이 어미는 너희들만 보고 있으면 배가 부르다" 그 말씀이 가끔 목에 걸린다
5.들꽃향기
퇴근길 지하철역 입구
'상추 한 묶음에 3천 원'
종이상자에 써놓고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5천 원 건네고 검정 봉투 받아든 젊은이
거스름돈 챙겨 가라는 할머니에게
손사래 뒤로하고 걷고 있는 들꽃
터벅터벅 앞서간다
오래오래 기분이 좋다
ㅡ6.또다시, 우리 함께
12지 동물은
뛰어서
걸어서
기어서
날아서
섣달그믐날 자정에 광화문 보신각에 도착했다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나쁜 일 언짢은 기억은 23년에 묻어버리고
아름답고 고운 생각으로 희망찬 23년 새해를 맞이하자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호랑이가 머리띠 풀어 토끼에게 건넨다
송구영신(送舊迎新)
제야의 종소리
푸른 초원을 걸어
하늘에 오른다
또다시, 우리 함께
7.떨이요, 떨이
''여보게 젊은이야
이 물건 좀 사 가시게''
해질녘 횡성 장터 푸성귀 팔고 있는 할머니
나는야 많이 먹었어
두고두고 잡수시게
젊을 땐 전혀 몰러
세월의 무상함을
낙엽은 이렇게 지는데도 그놈은 안중에 없어
한이 있는 육신으로
끝없는 망상만 쫓고 있거든
이놈아 봄이 온다
꼬들기지 말거라
네놈은 울긋불긋 세월가는 줄 모르지만
먹는건 이놈의 나이 뿐이라
떨이요
털이요, 떨이
8.어린왕자가 심어 놓고 간 꽃씨
나는 오늘 의식 상태로
내시경을 한다
화두가 내시경을 따라
위속으로 들어 간다
들숨 날숨, 숨은 길게
위속을 수색한다
내시경이 화두가 되고
화두가 내시경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어
사하라 사막을 뒤지고 다닌다
어둠속에 펼쳐지는
불안 초조 인식의 제전
이 뭣고? 용종이다.
어제 저녁에 어린왕자가 다녀 갔어 별B-612, 제 고향에서 가져 온 꽃씨 심어 놓고 간거야
어린왕자가 말 했지
별은 보이지 않는 꽃이 있어 아름답고,
사막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 아름답다고
그 양(羊)이 꽃을 먹을것인지 안 먹을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인생이 달라 질 것이다
※.그 羊: 어린왕자에게 그려준 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