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4)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2장 자객 예양(豫讓) (4)
진나라 권력은 조, 한, 위씨 삼가(三家)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들의 영지 또한 공실의 주인인 진애공보다 훨씬 넓었다.
이제는 삼가가 곧 진(晉)이었다.
지씨를 멸족시킨 조양자(趙襄子)의 권세는 대단했다.
그는 지난날 세 신인(神人)이 앞날을 예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곽산에 사당을 짓고 해마다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조양자(趙襄子)는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모욕을 준 지백(知伯)에 대해 원한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그는 지백의 목을 친히 벤 것으로도 모자라 그 해골을 잘 닦아 칠을 하여 요강으로 사용했다.
여기서는 요강이라고 했지만 <사기(史記)>나 <전국책(戰國策)>의 원문에는 '음기(飮器)'로 되어 있다.
예전부터 많은 학자들 사이에 이 '음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술잔'으로 해석하며, 또 어떤 이는 '변기(便器)'로 해석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간에 조양자(趙襄子)의 원한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좀더 그 원한을 강조하기 위해 '변기'라고 해석한 사람의 주장을 따랐다.
- 조양자(趙襄子), 지백의 해골을 요강으로 사용하다.
이것이 또 한사람의 자객을 출현케 했다.
다름아닌 지백의 가신이었던 예양(豫讓)이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가장 자객다운 자객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바로 이 '예양(豫讓)'을 꼽겠다.
아니 어쩌면 그는 '자객'에 분류될 것이 아니라 '의협(義俠)'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옳을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자객열전>을 쓰면서
제환공을 위협한 조말(曹沫)과 오왕 요(僚)를 죽인 전제(專諸)에 이어 예양(豫讓)을 세 번째 자객으로 선정하여 기술했다.
물론 시대순에 따라 세 번째로 놓은 것이다.
만일 시대순으로 배열하지 않고 자객다운 요소로 순위를 매겼다면 사마천 또한 예양(豫讓)을 제 1순위로 배열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예양은 의협을 바탕으로 하여 자객을 자청했다.
<전국책(戰國策)>에 의하면 예양은 진(晉)나라 의협도(義俠徒) 중의 한 사람인 필양(畢陽)의 손자다.
의협도란 벼슬을 하지 않은 의로운 협객이란 뜻인데, 요즘으로 치면 의인(義人)이요, 나쁘게 말하면 주먹질로 살아가는 깡패인 셈이다.
필양의 손자라고 하니 예양의 본래 성은 '필(畢)'이 분명하다.
'필'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필만(畢萬)이다.
진헌공 때의 대부로 나중에 성을 '위(魏)'로 바꾸었다.
진문공의 유랑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위주가 바로 그 필만의 손자가 아니던가.
필만(畢萬)은 성을 '위(魏)'로 바꾸었지만 그 일족 중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필'이라는 성을 사용했을 것이다.
예양(豫讓)은 바로 그 필씨 성을 가진 사람의 후손이 아니었을까?
그가 어떻게 필씨 성을 버리고 '예양(豫讓)'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나타나있지 않다.
당시의 이름은 곧 그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많았으므로, 추정해보면 예양은 무척 겸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豫)란 '즐기다'라는 뜻이요, 양(讓)은 '양보하다' 또는 '겸손해하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그는 '양보를 즐기는 사람'으로 비쳤던 것일까?
예양(豫讓)은 평생 불운한 생을 살아왔다.
그는 처음 범길사(范吉射)를 섬겼다.
그러다가 범길사의 사돈인 순인(荀寅)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 딸이 순씨에게로 시집갈 때 잉신(媵臣)으로 따라갔음에 틀림없다.
예양(豫讓)은 어느 한 부분에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순인(荀寅)은 예양을 중하게 쓰지 않았다.
그런 중에 순씨와 범씨 일족이 난을 일으켰고, 그들은 지씨, 조씨, 한씨, 위씨의 연합 세력에 멸족당하고 말았다.
이때 순인의 가신이었던 예양(豫讓)은 지백의 아버지 지갑(知甲)에 사로잡혔다.
지갑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그 아들 지백(知伯)이 부탁했다.
- 예양은 어질고 의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제게 주십시오.
예양은 지백에 의해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다
이때부터 그는 지백의 심복 가신으로 활동했다.
지백, 예양(豫讓)을 매우 존중하고 총애하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열전>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주인인 지백(知伯)이 죽자 도망친 예양은 석실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죽인 것으로 그쳤다면 예양(豫讓)은 평생 숨어살며 조용히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섬뜩한 소문이 들려왔다.
-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의 해골을 요강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예양(豫讓)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자신 오줌을 뒤집어쓴 듯 심한 모욕감을 받았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때 예양의 말을 <사기(史記)>와 <전국책(戰國策)>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단장한다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이 말은 '의리'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일 만큼 유명한 말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어 예양(豫讓)은 입술을 깨물며 각오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지백(知伯)만은 나를 알아주었다.
이제 지백이 죽어서도 모욕을 당하고 있으니, 내 어찌 은인에 대해 보답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나는 기필코 조양자(趙襄子)를 죽여 지백의 혼백을 위로하리라!"
그때부터 예양(豫讓)은 낮이나 밤이나 조양자를 죽일 일에만 골몰했다.
그는 허름한 옷을 입고 변성명(變姓名)을 한 후 석실산을 떠났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첫댓글 류회장님, 오늘도 고맙습니다.
날이
풀릴 듯하더니 다시 얼어붙는 듯합니다.
건강 유지 잘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