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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0
느헤미야의 귀국
느헤미야는 슬픈 얼굴을 하고아닥사스다 왕 앞에 섰습니다.
그것은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왕이 느헤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휴가를 허락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에 도착하자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을 알아보기 위해 밤에 성벽을 조사합니다.
그런 다음 유다 지도자들을 모으고 자신의 계획을 알립니다.
(1)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하나니가 수산 성을 방문하고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한 지 이십 년 니산월에 왕과 대면하기 까지는 4개월이 경과했습니다.
동안의 동절기에 느헤미야는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예루살렘과 그 자신의 계획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성벽을 재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게획을 구상하면서 부단히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인 느헤미야는 왕에게 술을 바치고 그것의 맛과 안전을 확인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궁정에서 맡은 위치 때문에 느헤미야는 왕을 알현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아마 연회로 보이는 그러한 기회가 다가오자 느헤미야는 술이 있기로 들어 왕에게 드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일지에서 이전에는 왕의 면전에서 그렇게 슬픈 기색을 한 적이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4개월 동안 느헤미야는 금식과 기도를 하면서도 안색에 변화를 보이지 않고 즐거운 기색을 잃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근심스러운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혹은 어떤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안색을 관리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느헤미야가 큰 위험이 따르는 것을 무릅쓰고 이 특별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왕 앞에서 수심어린 표정을 그대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통적으로 니산월은 페르시아인들에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었습니다.
신년 축제에는 종종 왕이 특별한 호의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와 같은 축제때가 왕의 은혜를 구할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안색에 변화가 있는 것을 즉각 알아챈 왕은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동방 군주의 그런 말은 특별히 위로를 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페르시아 군주들은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면전에서 개인적인 근심을 드러내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한 의전 위반은 음모나 왕에 대한 불경으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닥사스다의 다음 말에는 느헤미야가 일말의 희망을 기대해도 된다는 조짐이 보입니다.
왕이 자신의 종의 기색을 제대로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3)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4)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회가 또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왕에게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의전적 예를 갖추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사적 질문으로 왕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 처럼 왕이 그러한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해 줄것을 기대합니다.
고대의 묘실에 대한 존중심은 고대 민족들, 특별히 제국 황제들에게 큰 관심사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과 그 거민들의 의도를 불신하고 그 성벽을 무너뜨리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명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만 그것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그 성벽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그 성문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말을 듣는 상대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최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 위한 내용으로 자신의 근심을 표현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거나 마음의 짐을 덜고 자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습니다.
왕은 궁정의 언어를 쓰지만 느헤미야가 무엇인가 심중에 의도하는 것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갈고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대화에 중대한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왕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몇 개 안되는 묵도의 예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아마 도움과 자비를 구하는 긴박한 요청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께 기도하고 나서야 페르시아 왕에게 대답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5-8절은 느헤미야의 요청 사항이 설명됩니다.
(5)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느헤미야는 궁정 예법에 따른 정중한 언어로 말을 시작합니다.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그러고 가서 그는 바로 자신의 요청을 왕에게 아룁니다.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역시 예루살렘이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성벽을 거론하지도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왕에게 간청하고 자기 조상들의 성을 복구하고 싶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에 계속 초점을 맞춥니다.
(6)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느헤미야의 요청과 왕의 반응 간에는 시간적 격차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고 쓰고 있습니다.
왕후가 합석한 데서 암시하듯이 더 사적이고 친밀한 배경으로 장면이 바뀌었을 가능성이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왕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고문들에게 자문을 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느헤미야는 왕후가 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역사가들은 아닥사스다가 여인들의 입김에 많이 좌우되었다는데 동의합니다.
다마스피아(왕후)의 참석은 느헤미야에게 호의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왕은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고 묻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일을 마치고 궁정의 직무로 복귀하기를 기대합니다.
왕의 질문에 느헤미야는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했음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느헤미야의 계획과 계산 속에 12년간 궐석 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12년간 자리를 비웠습니다.
(7)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가 지난 4개월을 기도로만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 앞에서의 그 순간을 고대하며 그는 계획을 실행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에게 또다시 간청하며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지나갈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총독들과 관리들과 하급 관리들은 왕의 통치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종종 자신들의 관할지역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고, 때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강 서편의 관리들이 이전에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를 선동했고 왕의 승낙을 얻어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왕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아삽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왕의 삼림감독은 느헤미야처럼 고위직에 진출한 유다인이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세가지 작업을 위해 목재가 필요했습니다.
첫째, 그는 전에 속한 영문의 문을 만들기 위해 목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귀환한 유다 포로들이 성전 언덕으로 적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전 북쪽 편에 지은 요새였습니다.
둘째, 성곽을 위해 목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아닥사스다의 명령으로 폐허 상태로 있는 성벽에 대한 첫 언급입니다.
아마 느헤미야는 왕의 관심을 끌지 않게 하기 위해 중간에 그것을 슬쩍 끼워 넣었을 것입니다.
셋째, 그는 자신이 거주할 집을 짓는데 목재가 필요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장기 체류를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 하나니의 보고를 참고해 옛날 조상들이 살던 집을 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다름아닌 하나님이 직접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자신의 이전 조서와 반대되는 조서를 내리고, 술 맡은 관원이 구한 모든 요청을 허락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게 하셨음을 확신했습니다.
(9)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를 출발해 예루살렘으로 행했습니다.
도중에 그는 왕의 친서를 자신이 통과하는 지역의 여러 총독들에게 전했습니다.
마치 여담처럼 느헤미야는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시기로라는 내용을 덧붙입니다.
아마 아닥사스다왕은 총독들의 독립적인 경향을 이해했을 것이고, 단순한 편지만으로 통하지 않을 때 군사력을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강 서편 지역을 통과할 때 그는 미래의 대적들과 마주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조서를 보여줄 때마다 느헤미야의 계획이 적어도 지방 관리들에게 공개되었을 것입니다.
산발랏은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바벨론식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의 총독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다인의 계획을 강력히 반대하고 저지한 지역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를 호론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산발랏이 하찮은 시골 출신임을 가리키는 경멸조의 표현입니다.
도비야는 유대식 이름입니다.
그는 아마 산발랏의 수하로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가진 사마리아 관리였을 것입니다.
암논 사람이라는 느헤미야의 표현은 아마 튀기와 비슷한 비하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비야는 혼혈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의 반감은 일차적으로 느헤미야를 겨냥했지만, 그는 그들의 적대감을 하나님의백성들인 이스라엘인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습니다.
아마 산발랏과 도비야를 가장 괴롭힌 것은 느헤미야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11)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12)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13)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지 3일지 지난 후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갔습니다. 긴 여행 끝에 3일 간을 휴식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아마 예루살렘에 자기 사람들을 심어두었을 것이고 느헤미야는 그들의 감시를 받고 있을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유댜인들은 강력한 대적들이 있었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겠다는 그의 계획을 환영할 자들은 없었습니다.
황제의 명령과 그를 수행하는 군인들 때문에 일반적인 복구 계획이 알려졌다 해도 요새와 같은 성을 재건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여전히 기밀에 속했습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일행은 야음을 틈타 골짜기 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이 성문은 서쪽 성벽에 위치했고 이곳으로 아래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즉 용정 방향으로 분문에 이를 때까지 성벽을 따라 이동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소화된 이 목재 문은 예루살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동하면서 느헤미야는 성벽의 모든 부분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14)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그런 다음 느헤미야는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렀습니다.
샘문은 샘으로 가는 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느헤미야는 무너진 잔해들이나 가파를 언덕 때문에 성벽에서 약간 벗어나 우회해 못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그는 걸어가야 했습니다.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계속 도보로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가면서 성벽의 동쪽 편을 조사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되돌아서 되돌아오거나 그 골짜기에서 벗어나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벽 주위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았습니다.
(16)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느헤미야는 성벽 조사작업이 전적으로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방백들은 그와 함께 동행한 페르시아인들 일수 있고 혹은 지역의 정치적 기득권 중 일부였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페르시아 관리들과 의논하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부적절한 일로 보였습니다.이는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일차적인 의무가 유다 공동체에 대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생활을 대표했습니다.
귀인들은 가문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방백들은지역의 정치 지도자들을 의미했고, 그 외의 사람들은 후에 그 일을 하게 될 사람들을 가린키는 포괄적인 표현이었습니다.
(17)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18)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가 계획을 밝힙니다.
그는 유다인 중 중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중을 밝힙니다.
그는 그들에게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단순히 그들에게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핵심은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추치를 받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민족적, 영적 유산에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안전이 아니라 명예와 존경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은 그들의 종교적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느헤미냐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왕도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동참할 수 있고 페르시아 정부를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을 들은 이들은 그의 보고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습니다.
(19)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즉시 느헤미야의 야심찬 계획에 대한 반발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빠른 반응은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예루살렘의 동향을 계속적으로 보고해주는 동조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예루살렘의 동향을 계속적으로 보고해 주는 동조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근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함께 유다인들의 노력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게셈은 산발랏과 도비야처럼 페르시아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북부 아라비아에서 이집트 국경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인 게달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게셈은 페르시아 통치하에 있었지만 막강한 독립적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가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을 기뻐했다면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일에 함께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불확실해 집니다.
예루살렘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이 강성해지면 그 지역의 판도에 변화가 올 수 있고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더 견고해 질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아닥사스다가 이전에 예루살렘 복구를 중지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고발때문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이렇게 조롱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심을 약화시키고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이미 있었던 과거의 일을 상기 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20)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왕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변호하거나 두려운 마음으로 왕의 조서를 꺼내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야심이 가득찬 차들이며 페르시아나 아닥사스다에 대해 특별한 충성심을 가진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들처럼 변론하고 고발하는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와 그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중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처음부터 끝까지 느헤미야의 힘과 확신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