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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열려라 하늘문
요한복음 9장 8~12절/구원의 두 영역
우리가 얻은 구원은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 좋거나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구원은 누구나 동일한 조건 속에서 얻습니다. 그 조건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계심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상황 아래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조건이 있거나 우리의 요청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외에 다른 것을 덧붙여 기독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말씀을 읽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구원이 주어진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기도하고 주일을 쉬지도 않고 온종일 봉사만 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을 냅니까? 우리가 여기에 와 앉아 있는 것과 앉아 있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라는 질문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은 이 같은 문제들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받았음은 구원받은 이후에 깨닫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결단을 주도적 근거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회개하였습니다.'라는 고백이 대표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근거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구원을 얻는 것과 확신과의 사이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낳았을 때 개별적인 인격자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고 아픈 것을 느끼고 기쁨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시기는 보통 사춘기 시절입니다. 최소한 10살이 넘어야 자신이 개별적 인격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가장 오해되었던 것은 영적으로 출생하는 것과, 출생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과는 시간적으로 다를 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에 대한 제2의 발견, 즉 '자아의 인식이 곧 출생이다'라는 공식을 너무 많이 적용시켜 왔습니다. 그 인식이 없는 자는 마치 구원을 아직 얻지 못한 자 같은 취급을 당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았기에 구원의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맹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10절) 이 질문 속에는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어떻게? 라는 방법론만을 묻고 있습니다. 대답도 또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1절에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맹인의 대답 중에서 예수라는 이름과 진흙을 눈에 발랐다는 것 중에 어느 것에 더 초점이 가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와 진흙 중 어느 쪽이 더 확고한 경험입니까? 그것은 진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이 없지만 진흙이 그의 눈에 발라졌다는 것만은 확실한 체험입니다. 이 체험의 고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도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진흙을 발라서 눈을 뜨게 된 이 경험만이 맹인에게 있어서는 빼앗을 수 없는 확실한 자기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 뜬 것이 진흙을 발라서 생긴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맹인을 붙잡으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땅에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작업을 하시고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일입니까? 이 사건의 은혜로운 점은 예수님이 맹인을 붙잡으시고 침을 땅에 뱉어 진흙으로 이기신 것을 그의 눈에 바른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맹인 같고, 죽은 자인 우리들을 고쳐 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가르침이 아니라, 죽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 죽음도 십자가에서 대신 죽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행위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위해서 많은 수난과 비하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진흙을 이기는 행위 속에 뭉그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이 경험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진흙을 바르는 것에서 부터이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던 예수님의 행위를 그는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때까지 그는 맹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부터 압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때부터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예수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들은 내 죄를 씻어 주신 결과로 생기는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근거도 과정도 아닙니다. 또 하나 덧붙일 것은 믿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35~36절에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되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 말씀에 근거해 볼 때에 맹인에게 언제 믿음이 동원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 맹인이 눈 뜬 것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내어 쫓김을 당한 다음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질문하시자 맹인의 대답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 하고 대답을 합니다. 맹인은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내어 쫓김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믿습니다.'가 아니라, '믿고자 하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눈뜬 사건이 있었던 이후에 그 경험의 결과로서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과연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리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이 인식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것이 조건이 되고 근거가 되어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단 하나입니다. 거기에는 이유도 없이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붙잡힘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죤 뉴톤 목사님은 찬송가 305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것을 영어로 표현할 때 'Amazing Grace'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Amazing이란 우리말로는 적당하게 그려낼 수 없는 놀라운 감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것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에 대해서 한 번도 잘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며, 그 분에 대해서 감각도, 관심도, 요청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더러움 가운데 빛이 비취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그것은 내가 믿기로 하고 회개해서 찾아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찾아 오셨기 때문에 회개가 있었고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왜 나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으로' 받은 구원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요한복음 9장에서 설명하고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구원에는 이유가 없이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이루어 주셨다면 우리가 주일마다 나와서 예배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하는데...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제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서 해답부터 먼저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이 계속해서 제멋대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천국에 가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구별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두 가지 영역
구원에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의 영역은 신분의 변화이며, 다른 하나의 영역은 수준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의 신분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탄에 노예 된 자들의 신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이끌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은 취소되지 않고, 우리의 요청이나 우리의 됨됨이나 조건과 열심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분의 변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신분에 변화에 그치지 않고 수준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조각가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조각가가 길을 가다가 흙탕물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 나무로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그 나무를 건져내어 깨끗하게 씻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 동작으로서 건진 것을 못 쓸 부분은 깎아내고 다듬어가는 작업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또 하나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크게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라는 자리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옮겨 놓으시는 일차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건과 신분과 열심과 그 무엇과도 관계없이 주님 독자적으로 해 내시고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할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데로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에 불과합니다.
이제 깨끗하게 되어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깎아내고 다듬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본인의 동의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에게 만들어져야 할 성품과 인격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노예 되었던 자리에서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나가십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한 완성품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마치 진흙 구덩이에서 놀고 있던 아이를 꺼내어 물로 씻어서 깨끗한 옷을 입혀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혀 집에 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더러운 진흙 구덩이에서 끄집어내고 더러운 옷을 벗겨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옷을 입혀야 합니다. 더러운 옷을 벗길 때에는 찢어 내도되지만 새 옷을 입힐 때에는 아이의 동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집에서 지켜야 할 어떤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데도 아이의 동이가 있어야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로서 씻고 닦아 놓으시는 것까지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들에게 동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동의를 요구받는 부분에서 우리는 의지를 발동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결심이 있어야 되고, 우리의 열심이 있어야 되고, 항복이 있어야 되고, 순종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니 우리가 진흙 구덩이에서 놀고 있을 때,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꺼내어 씻어 주셨으니 다시 들어가도 또 꺼내시겠네요?' 물론 또 씻어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집에 가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죄 가운데 사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신자들이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진흙 속에서 놀고 있을 때 거기서 날 끄집어내어 깨끗케 해주셨듯이, 또 내가 세상 속에 들어가 놀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날 끄집어내어 씻어 주셔서 깨끗하게 해 주는 식으로 세상의 더러운 죄악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이 신자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깨끗해진 성도는 이제 보내어질 곳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를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훈련합니다. 그 훈련의 기간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남은 생인 것입니다. '아니, 예수 믿고 천국 갈 준비가 다 되었는데 왜 안 데려 가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식구들끼리 밥상 앞에서 앉아서 감사합니다. 할 때에 그대로 천국에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험하고 힘든 세상을 그만살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내라는 것은 더러운 자리로부터 나와서 깨끗하게 되라는 즉,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의 적극적인 면을 들어보십시오. 로마서 6장 4~8절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에서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 말씀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그 죄로부터 탈출케 한 이유는 새 생명, 즉 부활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 안에서 살라.'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6장 4절 이후의 말씀은 1절에서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변인 것입니다. 그 질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질문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구원을 주셨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신앙을 위해서 열심히 살며, 열심히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시작하신 이가 마무리 지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신앙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는 논리로 묻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답변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죄에서 나온 것은 은혜로 나왔다. 왜 은혜를 베풀어 죄에서 끄집어내었는가 하면, 이제부터 의로운 삶, 부활의 삶인 새 생명을 살게 하려고 한 것이다. 새 삶을 위한 파티에 보내려고 이렇게 깨끗하게 차려 입혀 놓았는데 왜 또 다시 진흙에 가서 놀려고 그러느냐?'는 말이 로마서 6장 4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잘 혼동하고 있는가 하면 이 두 번째 영역에서입니다. 즉, 성화라는 부분에서 실패하면 어디까지 돌아가는가 하면 진흙에까지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거기서 생각하기를 '역시 난 아닌가 봐 역시 예수님과는 무관한 자야, 난 내 마음대로 살다가 지옥에나 갈 테니 건드리지 마시오.' 하면서 진흙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태는 자기 자신에게서 구원의 조건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조건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오직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만으로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구원을 누구도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 운명의 성질의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성화의 출발로 이어져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베푸신 이 구원 앞에서 도무지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 갈등이고 고민이요, 혼동일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결심과 열심이 어디에서 동원이 됩니까? 그것은 성화의 단계에서부터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원해서 되었다거나 우리가 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에서는 우리의 동의를 얻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맨 처음 하시는 일이 '네가 내 백성이다. '네가 구원을 얻었다. 는 확신을 시키는데서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확인되지 않는 일에 누가 동의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에 너무 오래 집착하여 시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전부가 아닙니다. 물론 구원의 확신은 대단히 중요한 축복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성화를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확신은 이제 성화를 위한 첫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설명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요한복음 8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9장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맹인을 만나게 되십니다. 누가 만나는 것입니까? 맹인입니까? 예수님입니까? 맹인이 언제 눈을 뜬 적이 있어서 누구를 만납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맹인을 만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의 요청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성경은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일이면 좋든 싫든, 자의든 타의든 어김없이 이 자리에 나아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깊은 의식 속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보다 확실한 믿음의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과 같이 '내가 주를 믿습니다.'라고 내 쪽에서 내놓는 어떤 것으로 화끈하게 주님께 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들 중에는 과연 내가 구원받았는가 하는 확신 문제로 혼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지금 눈이 뜬 맹인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라는 그 분. 정도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고자 합니다.'(36절) 라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눈을 떠서 구원을 받았는데도 기껏해야 한다는 말이 '예수라는 그분을 이제 믿고자 하나이다. 이 정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맹인이 아는 정도가 무엇뿐입니까? 그 분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겼는데, 거기까지의 과정은 잘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눈에 진흙의 감촉이 닿아 발라진 것밖에는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중에서도 종종 이런 사람이 생겨납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신학이 무엇인지 교리가 무엇인지... 오직 내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전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난 교파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지만 이것만은 압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무엇인가 굉장히 진지하고 단순하지만, 열정적이고 괜찮은 정직한 고백이라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종종 성경이 말하는 것들을 제대로 파악하는 길을 방해 받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경험한 것이 중심이 되어 성경을 추적하려는 버릇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는 분위기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울 만한 분위기와 시원한 분위기가 다른 것은 모르지만 내가 분명히 받은 것, 같은 것들만을 요구하는 단편적 신앙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인 후에 성화의 출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것들은 눈을 떠서 신앙의 출발을 분명히 하기 위한 확신적 체험의 단편이요, 조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눈을 뜨시거든 진흙을 발랐더라는 체험에만 머물러 있지 마시고, 8장에서 말씀하신 진리가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풍성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의 그러한 예수님의 풍성한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아무도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누구를 위한 말씀이었습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9장의 맹인이 눈뜨는 사건과 같이 앞으로 눈을 뜨게 될 신자들을 위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체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더 풍성한 단계로 나아가ㅑ기 위한 하나의 시발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이 체험 그 자체로 머물러 있으면 부작용을 낳고 맙니다. 그 체험은 더욱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풍성한 말씀의 세계를 접하게 되는 이정표로 쓰여 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 체험을 성경으로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분명한 확신의 근거나 체험이 없으면 가짜로 매도해 버리며, 자신의 확신의 떳떳함을 자신으로부터 출발시키는 과오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따질 때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네!' '예수를 아십니까?' '네!' '그리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하면서 여기까지 짚어 보아야만이 확신에 있는 자라고 여기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글세요, 그걸 믿는다고 그래야 될까요?' 하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아십니까?'라고 재차 묻습니다. '알지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 싶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그럼요!'라는 대답이 이끌어 진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99.9%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라는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나온 맹인같이 주님을 믿고 싶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은 이미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주어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기껏 한다는 소리는 '예수라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그의 앞에 오셔서 '네가 나를 믿느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바로 앞에다 두고 되묻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그 즉시 쉽게 내가 얻은 구원이 무엇이며,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확인하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무엇이 시작된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성화입니다. 구원의 확인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정상적이고도 공식적인 성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지 못해서 교회에 왔다갔다만 하는 사람이 있고,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있어서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면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열심과 의지가 요구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5~10절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그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니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 말씀을 볼 때 구원 얻기 전과 후의 생활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됩니다. '너희는 옛날에 욕지거리나 죄 된 생활, 악한 짓밖에 할 줄 몰랐다. 왜냐하면 죄인이었고 죄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제는 구원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새사람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해야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악당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훈련과 의지적인 결단을 발동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결단과 의지의 작용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옛날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한다는 것이 악당의 짓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다시 옛 사태로 돌아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분명한 데 옛날의 그 바보짓에 빠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 구습을 벗으라.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사람을 입으라. 너희가 이제는 누구냐?'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 얻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항복하여 진심으로 의지와 열심을 바쳐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나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구원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더라도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까지 확실하게 말하였는지 아십니까?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복음을 분명히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소리들이 너무도 인간들의 조건들을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뿐입니다. 왜 내가 뽑혔는지 모릅니다. 왜 하필이면 저 같은 것을?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말할 수 없는 긍휼로' '긍휼에 풍성하신 자비가'라는 말을 계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긍휼, 풍성하신 자비,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이란 말이 우리에게는 어떤 조건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번번이 등장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에게 이제부터 요구되는 것은 그의 자녀답게 완성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이후부터 계속하여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라.' '자기를 부인하라.' '경건을 연습하라.' '지식에까지 새로움을 입도록 부름 받지 않았느냐?' '악의를 벗어 던져버리라.' '너희의 입에 더러운 말은 올리지도 말라.' '눈에 힘을 주고서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는 요구들을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랑이 여러분이 실수하면 취소되고,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면 없었던 걸로 간주되는 그런 부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 말씀은 무엇이 이미 된 상태에서의 이야기입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어떤 자비와 긍휼로 너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였느냐? 그러니 이제부터는 너희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데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