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산답사기 선운사 편>
한 마음으로 일주문(一柱門)에 들어서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을 하여 깨달음 즉 지혜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종교며, 사찰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행하는 도량(道場)이다.
따라서 사찰에 가기 위해서는 그 첫 번째 문인 일주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문을 '산문(山門)'이라고도 부르며, 또한 일주문은 세속과 불국토의 경계를 뜻하는 두 개가 아닌 단 하나의 문인 불이문(不二門)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건물에는 기둥이 여러 개 있는데, 일주문은 작은 보조 기둥은 있으나 큰 기둥 두 개가 가로로 한 줄로 서 있어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면 한일(一)자가 된다 해서 일주문이란 명칭이 유래되었는데, 하나의 기둥은 일심(一心)을 상징하기도 하고, 모든 이치는 하나로 통한다는 뜻도 있다.
어느 사찰을 막론하고 일주문에는 문은 있으되 문짝이 없다. 모든 건물에는 출입하는 문이 있으면 열고 닫는 문짝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일주문에는 여닫는 문짝이 없는 것이다. 이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믿고 안 믿고를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무신교(無神敎)란 것을 말하고 있으며,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깨달음을 원칙으로 하는 종교란 뜻이기도 하다.
불교가 무신교란 것은 부처님의 열반유훈(涅槃遺訓)에 잘 나타나 있다. 열반 유훈에서 부처님은 “나는 신이 아니다. 여러분과 똑 같은 사람이다. 다만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신앙의 대상이나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마라라. 법을 등불 삼고, 법에 귀의하며,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 의지하라.”고 저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문은 신성한 사찰의 세계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정수로 말끔히 씻고 한마음으로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즉, 사찰 금당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정진하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불법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僧)과 속(俗)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일주문에는 그 절 이름을 현판으로 걸게 되어있고, 절 이름 앞에는 반드시 산이나 바다 등의 그 절을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이름이 붙게 되어있다. 선운사는 '도솔산 선운사(兜率山 禪雲寺)'란 현판이 붙어있고, 부산의 용궁사는 '해동용궁사'란 현판이 붙어있다.
또한 불교에서 쓰는 한문은 빌려다 쓰는, 음차 된 한문이 더러 있는데, 도솔산의 ‘도(兜)’자를 기존의 옥편에서 찾으면 안 나온다. 본래 투구 두(兜)자이기 때문이다. 탱화의 ‘탱(幀)’자도 그림 정(幀)자로 찾아야 하며, 사바하의 바도 파(波)로 찾아야 나오고 우리는 보통 도장(道場)이라고 읽는데 불교에서는 도량이라 읽는다. '무가애고'에서 ‘가(罣)’도 걸 괘(罣)자로 찾아야 하는 등의 음차(音差)된 한문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선운사 일주문의 건축양식은 다포계의 공포형식과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처마 밑에는 상징적인 편액(扁額)을 걸어 사찰의 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선운사 일주문은 도솔산선운사(兜率山禪雲寺)이고, 대표적인 일주문으로는 양산 통도사, 부산 범어사, 합천 해인사 일주문 등을 꼽을 수 있다. 통도사의 일주문에는 ‘영축산통도사’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좌우 기둥에 ‘불지종가(佛之宗家)’와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주련(柱聯)을 붙여서 이 절의 불보종찰로서의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일주문을 통과하여 부처님 계시는 법당으로 가는 길, 오른 편에 스님들이 입멸 후 누워계시는 부도전(浮屠殿)이 있고 오른 편에는 도솔천(兜率天)에서 흐르는 계곡 물이 하계(下界)로 하계로 흘러가며 끊임없이 자연의 법문(法文)을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자연법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더 수행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묘연(渺然)한 깨달음의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