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의 문학화, 교시성의 형상화
- 한국산문 8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사람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성찰한다. 이러한 성찰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면 감동과 공명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수필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세련되지 않은 표현이나 심미적 가치가 배려되지 않은 소재는 문학적 의의가 없다. 수필이 고백 문학이라고 했을 때는 그 고백에 흥미를 갖고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견지되어야 한다. 신작에세이 13편이 전부 독특한 가치로 평자에게 속삭인다. 우리 주인이 쓴 수필이 괜찮지 않느냐고. 평자의 답은 이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장기오의 <꽃의 의미>는 제목만으로 보면 식물성적인 향기로움이 전해져오는 자연친화 수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화락 유실’의 이치를 인생에 비유한 철학수필이다. 유년 시절의 적빈에서 오는 고통을 ‘아스피린을 먹을 때와 같은 미열과 혼돈’으로 표현하면서 발단을 여는 이 수필의 주는 감동은 ‘절문이근사’에서 온다. 작가는 자연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애기똥풀과 대화하면서 인생을 반추하기를 즐긴다.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이런 통찰과 성찰에 있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흐름은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한다. 다만 그 상황에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의 고통에서 더 큰 고통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시기에 맞는 새로운 의욕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장기오는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그 유년 시절의 절망을 생각하고, 노랗던 하늘과 꽃과 줄줄 흘러내리던 코피를 떠올리며 고통을 이겨내었다는 인생스토리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헌신으로 결실을 맺는 꽃의 의미는 생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고, 봄에도 일종의 슬픔이 있을 것이라는 결말부의 멘트가 ‘본질을 잃을 위기감에 빠질 때, 나는 꽃의 세계로 간다.’는 유장한 분위기를 안겨준다.
최홍이의 <뜨거운 여름날의 오후 2시>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오며 겪은 이야기를 통해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수필이다. 누가 수필에는 눈물, 소박, 진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가. 이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온기의 총체를 담고 있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어 교시성이 있다. 이 수필의 맛은 삶의 진실을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고, 죽음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체화해내고 있는 데 있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높은 차원의 교시성이 깊은 감동을 준다.
박기숙의 <장발장과 용서>에는 어떤 아픔도 처벌보다는 용서의 미학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작가의 확신이 들어있어 감동을 준다. 참신한 예화와 삽화를 통해 구체화된 인간애는 진정한 인생 승리자의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참된 용기를 말하는 이 글마당에 서면, 기분이 좋아짐을 느낀다. 이 수필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인품이 훌륭한 어머니의 지혜 엿보기다. 친정 어머니의 뜻을 따르며, 용서를 실천하는 작가의 견고한 인성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수용임과 동시에 동양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듯하다. 서양에서는 내 주변보다는 내가 우선되는 게 상식이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작가는 한사코 한국적 정황과 현실 속에서 인간의 도리와 규범을 설정하려 한다. 공존의 전제는 양보 정신이요, 비움의 철학이다. 그는 장발장과 그를 용서한 미리엘 주교를 떠올리며 갈등이 해제된 투명한 삶에 젖고자 한다. 바로 구도의 자세다. 전 재산을 훔친 아이를 용서하며, 잘 살기는 하는지, 바르게 살고 있는지 걱정하며 보고 싶어 하는 마음씨가 감동을 준다.
정민디의 <엔딩 노트>는 죽음에 대한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자신의 생각을 우울증 할머니의 버킷 리스트를 통해 피력하고 있다. 죽음에 대처하는 작가의 생각이 남다르다는 데에 중점을 두어 읽어나가면, 삶과 죽음 속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조금은 보일 듯하다. 이 수필은 살아있을 때보다 물러날 때의 처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묘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며 아픔의 늪을 헤매고 있는 인간상의 모습도 보여주고자 한다. 삶에 대한 솔직한 표현과 사색은 삶의 진정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죽음을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조용히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욕망의 허망함을 아는 사람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작가는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었을 때 몇 가지나마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 할머니의 자유 의지는 존엄했다고 평가한다. 사람은 누구나 여한이 남아있는 한, 한 순간도 죽음 앞에서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이 수필은 실존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선택하는 가치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주제의식을 죽음의 문제 앞에서 잘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김형도는 협소한 중심주의적 철학적 가치를 <곡선의 미학>을 통해 해체적 관점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평자는 수필 <햇빛을 가린다지만>을 쓴 김영환의 논리에 매우 공감한다. 논리의 설득력을 위해 다양한 근거를 차용해 햇빛 가리개 착용에 대한 거부감을 잘 표현했다. 특히 햇빛 가리개를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Darth Vader)의 얼굴상’ 비유한 것이 절묘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어머니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보인 이상태의 <아이스께끼>도 서늘한 감동을 주었다. 장은경의 <설거지할 때 설거지만 해>라는 수필도 깨달음의 미학을 보여주었고, 이은하의 <별장과 애인>은 체험의 수필적 가치도 있었고, 솔직성이 수필 장르의 매력을 힘껏 더해 주었다. 정진권의 <김 선생의 근황>은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그 안에는 소중한 삶의 교훈이 보석처럼 빛난다. ‘입 안의 혀 같은’ 친절한 생의 안내자를 구한다는, 문정혜의 <내 삶의 내비게이션>도 체험의 문학화, 교시성의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