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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장류어서(源遠長流御書)라고 불리우며 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始)중(中)종(終) 버리지 않고 대난을 이겨 나가는 사람은 여래의 사자이니라.』
금일의 어문 창가학회 영원의 5지침 중 난을 극복하는 신심과 사도어감죄초, 형제초의 내용 등을 주제로 전해드립니다.
이 어서는 니치렌대성인이 가마쿠라 문하의 중심자이던 시조깅고에게 주신 편지로, 1278년 9월에 집필하셨다고 전해졌으나, 현재 연구로는 1279년 9월로 추정합니다.
1274년 대성인이 미노부에 들어가신 후, 깅고는 주군인 에마 씨를 절복하기 위해 과감히 도전한 것이 도리어 주군에게 반감을 샀고, 또 깅고를 질투하던 동료들의 공격과 료칸 일파의 모략으로 소령을 몰수당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스승이 지도한 대로 신심을 관철해서, 1278년경에 다시 주군에게 두터운 신뢰를 되찾고 이전보다 세배나 넓은 영지를 받는 등, 훌륭한 승리의 실증을 보였습니다.
본초는 새롭게 영지를 받는다는 보고에 대한 답서이고, 대성인은 깅고가 주군을 깊이 생각해서 절복한 신심의 공덕이라고 기뻐하며, 강은 수원(水源)이 멀면 흐름이 길듯이 깊은 신심이 있으면 먼 미래까지 틀림없이 번영한다고 지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법화경 경문대로 대난에 시달리며 광선유포에 전심(專心)하는 대성인이 바로 여래(如來)의 사자(使者)이고 일염부제를 이끄는 성인(聖人)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고난이 아무리 계속 밀어닥쳐도 깊은 신심으로 삶을 끝까지 관철하면 미래 영원한 번영이 열린다는 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시조깅고는 주위의 참언에 빠진 주군에게서 법화경의 신심을 버리라고 강요당했으나, 대성인 지도대로 깊은 신심을 관철하고 철저히 성실하게 행동했습니다.
깅고에 대한 질투는 계속되었으나, 깅고는 이를 끝까지 인내하고 주군의 신뢰를 되찾아 이전보다 큰 영지를 받고 주군에게 불법의 법문을 강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성인은 깅고의 깊은 신심을 마음 깊이 칭찬하면서 중국 천태대사가 설한 '원원유장(源遠流長)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즉 법화경은 생명근원에 다다른 부처의 진실한 지혜를 밝혔으며, 뿌리가 깊은 나무에 가지가 왕성하게 자라고 먼 수원(水源)에서 시작하는 강은 긴 흐름이 되어 대지를 널리 윤택케 하듯이, 말대악세까지 힘이 미쳐서 모든 중생을 구합니다. 대성인은 이 원리를 통해서 깅고도, 깅고를 신뢰하는 에마 씨도 묘법에 대한 깊은 신심 덕분에 언제까지나 번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신심이 깊으면, 인생의 도상에 아무리 고난이 몰아쳐도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하는 궤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선유포를 위한 모든 노고는 미래 영원히 광포의 대발전과 학회의 번영으로 반드시 이어지므로, 깊은 신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가학회의 영원한 5지침이 있습니다.
그중 우선 일가 화락의 신심, 행복을 획득하는 신심, 난을 극복하는 신심인 이 세 가지 지침은 1957년 75만 세대 원업을 달성한 직후에 도다 선생님이 발표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 지침에는 간결한 표현 속에 신앙의 목적은 무엇이고, 신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 본질이 빠짐없이 나타나 있다.”고 지도해 주셨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 2003년 이케다 선생님은 건강장수의 신심과 절대승리의 신심을 새롭게 추가해 영원한 5지침을 발표하시며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침은 전 세계 동지가 단연코 장마에 지지 말고, 광선유포의 삶을 관철해 절대적으로 행복한 경애를 열어 승리하기 바란다는 기원을 담아, 일생성불을 위한 핵심을 밝혔습니다.
마와 투쟁하지 않는 한, 진정한 화락도 행복도 건강장수도 절대승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장마에 절대로 지지 않고 난을 극복하는 신심이 바로 신앙의 목적인 화락과 행복 그리고 건강장수와 절대승리를 성취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점을 가르치셨으며, 이것은 인생에 반드시 난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말씀하신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이 없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 난과 투쟁하는 일념 속에 절대적 행복경애가 열립니다.
따라서 신심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때부터 난에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난에 맞서는 가운데 생명이 연마되고, 다이아몬드와 같은 신심이 단련됩니다.
난에는 개인의 숙명과 싸운다는 차원과 삼류의 강적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법난의 차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난은 결코 별개가 아닌 신앙을 파괴하려는 삼장사마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공통되며 그 뿌리는 이어져 있습니다.
삼장사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천자마 즉 제육천마왕의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심을 교란하고, 단결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제육천의 마왕이 노리는 것입니다.
둘째. 제육천의 마왕이라 해도 그 본질은 생명에 잠재하는 원품의 무명이 마의 작용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경애를 넓히려 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으려는 힘이 작용하며, 인간혁명의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심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마의 본질입니다.
대성인 불법은 역경에 처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종교입니다.
고난에 처한 사람일수록 그것을 극복했을 때 굉장한 힘이 나오게 되며,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불행한 사람들의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지용의 사명을 자각하면 위대한 힘이 나오며, 난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원해서 받은 난이며, 그것을 이겨내면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소원을 이룰 수 있기에 결국, 난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 내가”라는 한탄에서 “그렇기 때문에 내가”라는 긍지로 난을 대하는 자세를 크게 전환해야 합니다.
제육천의 마왕이란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저마다의 생명 속에 잠재하는 원품의 무명에서 기인하는 근원적인 악의 작용을 말합니다.
선의 생명을 발동시키는 연인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르면 원품의 법성이 작용을 일으켜 제천선신의 가호의 작용이 나타나고, 반대로 악연으로 원품의 무명이 발동되면 신심을 방해하는 제육천의 마왕의 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념대로 우리의 생명에 무명도 나타날 수 있고 법성도 나타날 수 있으며 어느 작용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선과 악을 고정적인 실체로서 또 단순한 대립관계로서 이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불법에서는 생명은 본디 선과 악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마를 타파하는 것은 이 사람은 악인이고 저 사람은 선인이라고 사람을 분별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권선징악의 투쟁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 본질적으로는 마를 타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심(己心)의 마를 타파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대난 속에서 비로소 부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껍질을 부수고 내면의 묘법과 일체인 대아의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제목을 끝까지 부르고 사자왕의 마음을 끄집어내어 난과 격투를 벌여야 합니다.
인간은 운명을 한탄하고 숙명에 농락당하며 괴로워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난을 극복하여 자타 함께 행복을 쟁취한다, 그 힘을 무한히 해방시키기 위한 철리가 묘법입니다.
그러기 위한 신심이기에 경애혁명, 인간혁명을 달성하려면 불석신명의 실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형제초 1088에,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함은 육파라밀경(六波羅蜜經)의 문(文)이니라. 설사 어떠한 괴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꿈으로 돌리고 다만 법화경의 일만을 사색하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며, 마음이야말로 소중합니다.
마음에는 생명에 더할 나위 없는 존극성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한편 무명에 동요해 타락하는 것 역시 마음이므로 모든 일의 근간은 마음을 변혁하는 일입니다.
그때 범부가 동요하는 자신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으면 삼장사마라는 열풍(熱風)이 부는 험준한 산등성이를 오르지 못합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성불이라는 정상을 응시하며 마음의 스승을 끝까지 구도하는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바로 『마음의 스승은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는 구절입니다.
마음의 스승, 다시 말해 단연코 동요하지 않는 부동의 근거는 '법' 뿐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깨닫고 홍통하는 부처가 설해 남긴 경전이 중요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어본존 근본, 어서 근본의 자세가 마음의 스승을 구도하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법과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 불법을 실천하는 '스승'이라는 존재입니다.
자기중심의 만심이 아니라 사제불이라는 구도의 신심을 끝까지 관철하는 일이 다름 아닌 마음의 스승을 구도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도어감죄초(佐渡御勘罪抄) 어서 891에는,
『부처가 되는 길은 반드시 신명을 버릴 만큼의 일이 있어야 만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추측하였는데, 이미 경문과 같이 악구(惡口), 매리(罵詈), 도장(刀杖), 와력(瓦礫), 삭삭견빈출(數數見擯出)이라고 설해져서 이러한 일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법화경을 읽는 것 이라고, 더욱더 신심도 일어나고 후생도 믿음직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어감죄초는 사도로 가기 직전에 쓰신 어서이며, 이때는 문하에게 불신과 불안이 소용돌이치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대성인은 엄연히 부처가 되는 길은 반드시 신명을 버릴 만큼의 일이 있어야만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난 속에서 비로소 부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작은 껍질을 부수고 내면의 묘법과 일체인 대아(大我)의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제목을 끝까지 부르고 사자왕의 마음을 끄집어내어 난과 격투를 벌여야 합니다.
인간은 운명을 한탄하고 숙명에 농락당하며 괴로워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난을 극복하여 자타 함께 행복을 쟁취하여 그 힘을 무한히 해방시키기 위한 철리가 묘법이며, 그러기 위한 신심입니다.
이 경애혁명, 인간혁명을 달성하려면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실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개목초 234에,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어떠한 난이 닥쳐와도 의심하지 않고 신심을 감연히 관철하면 반드시 불계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때에 스승의 말씀을 잊지 않고, 한번 정한 사제의 길을 동지와 함께 단호히 끝까지 나아가는 신심이 중요합니다.
경문대로 실천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신심을 관철하여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사는 사람은 범부의 몸 그대로 가슴속에서 대성인과 똑같은 가장 존귀한 생명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의 내면에 깃든 부처의 힘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신심은 그러하기 위한 비술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기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