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좌우 날개로 목적지를 향해 날아 가듯이, 정법과 정법시대
요새 불자 가운데에
이른 아침에 불교방송을 듣다가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들었다. 마치 나에 대하여 말하는 듯한 방송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새 불자 가운데에 지성인측에서 교리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그러는데, 무슨경전이나 다 부처님의 소중한 진리가 담겨 있는 법이기는 사실이나 그러한 경을 올바르게 보지를 못하고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데 맛을 붙여 가지고 그렇게 해서 거기에 집착하면 그 나무토막이 강물에 떠 내려 가다가 뱅뱅도는 그 소용돌이 속에 한번 들어가면 밤낮 그 자리에서 돌기만 하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못하기 때문에 바다에는 도달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16일자, http://www.bbsi.co.kr/ )
교리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불자에 대한 질타의 말이다. 이는 문자와 언어에 집착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문자와 언어를 떠나서 뜻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인데, 문자와 언어는 ‘사량분별’된 것이기 때문에 교리공부만으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선사는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착각일지 몰라도 지난 3월 24일자 글(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용화선원 송담스님의 불교방송 법문을 듣고)에서 선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방송된 내용을 ‘비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사는 방송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소승법’이고 ‘방편법’이라 하여 일축 하였다. 또 소승법으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는 등의 법문을 하여 사실상 영혼을 ‘인정’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논파한 부처님 당시 정통브라만의 아뜨만과 영속주의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힌두교의 범아일여와 선사의 영원합일주의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하여 공개질문 형식으로 글을 썼었는데, 16일자 방송에서 그에 대한 답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표적설교
‘표적설교’라는 것이 있다. 교회에서 목사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지목하여 설교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설교권을 갖는 목사가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된다고 한다. 그런 표적 설교를 학교 다닐 때 당해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웠다는 그 학교는 일주일 두번의 방송예배,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번의 성경시간, 한달에 한번 전교생 예배, 일년에 3일간은 수업을 전폐하고 교회에 들어가는 등 학사일정이 온통 선교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였다.
그 중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예배를 보는 시간이 있었다. 교실의 의자를 가지고 운동장에 앉아 장시간 예배와 찬송과 설교를 들어야 했는데, 어느 목사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 하였다. 사실 그때 당시 열심히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거론 하면 할수록 반발감이 생겨 마음속으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알았는지 목사는 정확하게 짚어 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느 대상을 향하여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을 표적설교라고 한다.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는 법문
그런데 이번 불교방송에서 선사의 법문을 듣는 과정에서 마치 ‘표적법문’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선사는 불자 가운데 교리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표적을 정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어 법문을 이어 갔다.
선사는 법문중에 목동과 두꺼비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어느 경전에 근거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선사가 하는 법문의 특징중의 하나는 결코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동과 두꺼비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그 내용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동이 법문을 들을 때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그 지팡이 끝에 꽂혀서 죽은 두꺼비가 한마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목동은 부처님 듣는데 너무 골몰한 나모지 자기 작대기 끝이 두꺼비등에 놓어져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열심히 듣가 보니 계속작대기에다 힘을 주어가지고 작대기가 두꺼비 등어리를 뚫고 창자를 뚫어 맞창이 났던 것입니다.
두꺼비가 비명을 질렀으면 그 목동이 깜짝놀라서 그 작대기를 치웠을 텐데, 그 두꺼비란 놈은 자기가 빽빽하고 소리를 지르면 목동이 깜짝놀라가지고 부처님 법문듣는데에 방해가 될까봐 차라리 내가 이대로 죽을지언정 어찌 법문 듣는 것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목동의 작대기에 찔려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두꺼비는 죽어서 바로 사천왕에 태어나서 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천자가 되어서 가만히 생각하니 너무너무 부처님 은혜가 지중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천자의 옷차림을 하고서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부처님을 뵈옵고, 전생에서는 두꺼비의 몸으로 법문을 들었지만 금생에는 내가 천자의 옷을 입고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리라 그리고 감사한 예배를 올리리라 이래 가지고 꽃비를 내리면서 찬란한 모습으로 부처님 처소로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 하여 천상으로 올라 갔던 것입니다.
(송담스님,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16일자, http://www.bbsi.co.kr/ )
두꺼비가 지팡이 찔러 죽어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찾으려고 검색해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청정도론에 실려 있다. 개구리 ‘만두까(Manduka)이야기’가 그것이다.
전생에 개구리였던 만두까(개구리)라는 신의 아들 등이 여기서 그 보기이다.
세존께서 각가라 강변에서 짬빠 시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개구리 한 마리가 세존의목소리에서 표상을 취했다.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눌리면서 서 있었다.
그는 죽어 곧 바로 삼십삼천의 12유순이나 되는 황금 궁전에 태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고‘오, 참으로 내가 여기 태어나다니! 내가 어떤 업을 지었을까.’하고 살펴보다가 세존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궁전과 함께 세존께 가서 세존의 발아래 절을 올렸다.
세존께서는 아시면서 물으셨다.
“이런 신변과 이 만큼의 수행원으로 광휘를 드날리며 아름다운 안색으로 사방을 비추면서 어떤 자가 나의 발아래 절을 하는가?”
“저는 전생에 물에서 사는 개구리였습니다. 설법을 들을 때 목동이 저를 죽였습니다.(Vv.49)”
세존은 그에게 법을 설하셨다. 8만4천의 중생들이 법을 관통하였다. 신의 아들도 예류과를 얻은 뒤 미소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청정도론 제7장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51절)
청정도론에서 언급한 개구리 만두까이야기는 부처님의 10호 가운데 천인사(Sattha devamanussanam)를 설명하기 위하여 ‘천궁사(Vimanavatthu,Vv)’라는 경전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선사는 경전을 밝히지 않은채 거의 ‘창작수준’의 법문을 이어 같다. 목동과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의 구성은 비슷하지만 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내용과 달랐다.
말 한마디 내 뱉은 과보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이 하늘과 인간의 스승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구리 만두까이야기를 실었으나 선사는 말 한마디 내 뱉은 과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부모 자식간에 한마디씩 내 뱉은 것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만 한생각 내뱉고 한생각 움직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나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상처내고 남을 죽인다고 하는 그 과보는 비단 오백생이 문제가 아니라 무량아승지겁을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를 받고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 입니다.
(송담스님,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16일자, http://www.bbsi.co.kr/ )
목동과 두꺼비의 전생담을 이야기하면서 말 한마디 한 과보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을 비방하거나 해치는 말을 하였을 때 오백생을 개구리로 지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량아승지겁 동안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한다. 그것도 나올 기약이 없는 한량없는 세월이라고 한다.
반문자주의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선종의 특징이기도 한데 두가지를 든다면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이다. 이런 용어는 지난 2010년 8월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열린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에서 어느 외국인 학자가 사용한 것이다.
그 학자는 간화선을 하는 선사들에게 왜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라는 딱지를 붙였을까. 그것은 선종의 역사가 잘 말해 준다.
선종의 가장 큰 목적이자 교의는 ‘견성성불’이다. 모든 인간이 내면에 본래부터 부처(불성)를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수행을 통하여 자기 내면에 있는 본래 부처를 발견하여 성불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와 언어를 통하여 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사자상승에 따른 이심전심으로 법이 전달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경전이나 교리를 멀리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외국인 교수는 선종과 선사들에 대하여 ‘반문자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는 무엇일까.
반지성주의
선종에서는 문자와 언어를 배격하고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실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문자를 사용하거나 알음알이로 묻는 것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도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차나 한잔 하게나”하며 마치 동문서답식으로 대답한다. 더구나 상근기의 제자가 언어로 물었을 때 이에 대하여 ‘분별’한다고 질책하며 ‘할’과 ‘방’을 쓰기도 한다. 고함소리와 몽둥이로 일깨워 주는 것이다. 심하면 ‘코 비틀기’나 ‘발길질’도 예사로 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질문에 친절한 말로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동문서답식의 선문답 또는 고함소리, 방망이질, 코비틀기, 발길질 등과 같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현상에 대하여 외국인 학자는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무능력자’를 양성하는 곳
이처럼 선종과 선사들에 대하여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로 대표되는 부정적 측면의 이미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문자주의를 배격하다 보니 교리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방에서는 책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오로지 이심전심,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강조하다 보니 교리에 대하여 모르게 된 것이다.
선사들이 법문을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설령 법문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이야기 위주이다. 경전을 근거로 한 법문을 보기 힘든 이유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일아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현 실정>
한국에서 강원도 안 가고 선방에만 다녔다는 스님들이 미국에 오면 이분들은 포교의 열정도 없을뿐더러 부처님이나 불교 교리도 잘 모르고, 설법도 못하고, 강의도 못하고, 어린이, 학생들, 청년 지도도 할 줄 모르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거기다 선방만 다녔기 때문에 염불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맨 주먹으로 싸우겠다는 식이지요.
이런 스님을 사찰이나 신도들이 환영할 리가 없지요. 이 스님을 이렇게 무능력자로 만들어 슬프게 하는 근본원인은 “강원 안가도 기초선원만 나오면 구족계 받는다.”는 종단의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입니다. 일생을 참선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소임이나 사찰운영 등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참선만을 한다 해도, 배운 사람이 참선하는 것은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기초선원 제도는 없어져야 됩니다.
LA 불교의 모습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스님들을 서당식 강원교육에 선교육만 시키니 한탄스럽습니다. 작금의 종교편향으로 불교를 무시하는 현상은 기독교의 훼불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사안일로 일관해온 스님들의 결과입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이심전심과 같은 교외별전만 강조하다 보니 스님들이 교리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선방을 떠나 세상속으로 들어 갔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능력자’를 양성하는 곳이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책을 보지말라는 S스님의 말을 곧이 믿고
이런 지적은 어느 스님이 불교관련 인터넷 신문의 댓글에서도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해인사의 주지이신 OO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ㅅㄱ스님, 불교닷컴 댓글에서)
해인사 모스님은 책을 보지말라는 S스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것이 가장 후회스러웠다고 한다. 이는 반문자주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정법에 어긋난다면
선사들이 책을 보지 않아서, 공부를 하지 않아서 교리에 대하여 무지할 때 법문을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불자들이 교리에 대하여 물어 볼 때 답변을 잘 하지도 못할 것이다.
스님들이라면 교리에 대하여 꿰뚫고 있어야 민중들을 교화할 수 있고, 불자들에게 법을 전할 수 있고 또한 타종교와의 교리 논쟁에서도 이길 수 있을텐데 한국불교에서는 그것이 되어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방송에서 송담스님은 재가불자들이 교리공부를 하여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것 같다. 교리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는 것에 대하여 ‘사량분별’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교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없다. 출가한 스님들이야 사자상승에 따라 이심전심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만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들에게 있어서는 경전을 보아야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전이 스승인 것이다.
경전을 보는 것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더구나 선사들의 법문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몹시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매우 ‘편협’한 것이다. 선사의 가르침이라도 정법에 어긋난다면 지적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법은 어떤 것일까.
정견이 서로 다르다보니
선사들이 말하는 정법과 부처님 말씀한 정법은 다르다. 이는 정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정견은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부처님이 졸고 있다가 잠깐 꿈을 꾼 것이 중생들이고 누구든지 꿈을 깨기만 하면 다시 부처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이때 ‘꿈속의 나’는 ‘작은 나(i)’에 해당되고, 꿈속의 나와 꿈속의 모든 기세간을 만들어 내는 ‘꿈 꾸는 나’는 ‘큰 나(I)’에 해당될 것이다. 이것이 선사들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견성성불’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르다. 부처님이 말하는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초기경에서 명확하게 말씀 하셨다.
이렇게 선사들이 믿는 정견과 부처님 말씀 하신 정견이 다르다보니 목적지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팔만사천리나 동떨어진 결과가 되었다. 그런 법문을 불자들은 라디오를 통하여 TV를 통하여 듣고 있는 것이다.
정법이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정법이란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주석에 다음과 같이 정의 되어 있다.
삿담마(saddhamma)
삿담마(saddhamma)에서 sad/sat는 주로 합성어의 앞에 놓여서 ‘바른, 참다운, 진실한’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sad(바른)+dhamma(법)으로 분해되며 ‘바른 법, 참된 법, 정법(正法)’을 뜻하고 주석서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른 법은 교학(pariyatti), 수행(pa?ipatti), 통찰(pa?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1) 교학(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 수행(pa?ipatti)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 통찰(pa?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61. 바른 선행과 그릇된 선행 1번 주해)
빠알리어 삿담마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정법(正法)’이 된다. 그런 정법은 교학과 수행과 통찰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종에서와 같이 문자를 세우지 않는 불립문자 즉 반문자주의와 명백히 다른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교학적 바탕위에 수행을 하는 것이고 최종적으로 도와 과를 증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새가 좌우 날개로 목적지를 향해 날아 가듯이
이렇게 교학과 수행과 통찰의 세가지가 정법이라는 것은 어떤 경을 근거로 할까.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게송이 있다.
Abhi??eyya? abhi???ta?,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vetabba?ca bh?vita?;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tabba? pah?na?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 buddhosmi br?hma?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Brahmin, realzing, what should be realized, developing what should be developed. I have dispelled what should be dispelled, therefore I'm enlightened."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학(pariyatti, 빠리얏띠)을 말한다. ‘닦아야 할 것’은 수행(pa?ipatti, 빠띠빳띠)을 말하고, ‘버려야 할 것’에 대한 것은 통찰(pa?ivedha, 빠띠웨다)을 말한다.
새가 좌우 날개로 목적지를 향해 날아 가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교학과 수행이라는 양날개를 이용하여 도(magga,막가)와 과(phala,팔라)라는 목적지로 날아 가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법에 대한 것이다. 그런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 한다.
정법시대란
일반적으로 정법시대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셋째,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은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있는 빠알리경전을 말한다. 이는 교학과 관련이 있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실천 수행에 대한 것이 ‘사념처 위빠사나’이다. 열반을 성취한 성자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말한다. 이러한 사쌍팔배의 성자가 배출되는 세상을 정법시대라 한다.
육안으로 영혼을 보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우리나라 불교는 정법불교일까. 그리고 지금 정법시대일까. BBS불교방송을 통해서 듣는 선사의 법문은 정법같지 않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법문이 있다.
그 영혼이 얼마동안 시일이 지난뒤에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육안으로 영혼을 보게 될 날이 머지 않아 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 .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테야라는 어의는 앞으로 7일 뒤에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종의 자식이 되어 본적이 없고, 나에게 종의 자식이라고 나를 희롱하고 욕하는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하였는데, 네가 성현을 갖다가 입에 못 담을 그런 욕설을 퍼붓고 수행하는 수행승을 자비와 신심으로 치료를 해 드리지 않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다루어가지고 수행인을 죽게 한 그 과보로 너는 7일 뒤에 피를 토하고 죽되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예언을 수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송담스님,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17일자, http://www.bbsi.co.kr/ )
선사는 법문에서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영혼은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밝혀질 날도 머지 않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육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영혼을 부정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자아나 영혼등 어떤 변치 않는 고정 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무더기(오온)로 분해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철저하게 ‘분별’하여 설하였다. 선종에서는 분별하지 말것을 주문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해체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야훼 같은 부처님?
선사의 법문에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부처님의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법문에서 역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에서 아테야라는 꼬살라국의 국왕 어의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아테야가 부처님에 대하여 “종놈의 자식”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막 다루는 바람에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노한 부처님이 ‘그 어의는 7일 이내에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라 하고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법문하였다. 마치 유일신교의 구약에서 ‘야훼’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과연 부처님은 선사의 말대로 참을성 없고 더구나 잔인한 심성을 가졌을까. 불자들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모욕당했을 때
자신에게 종놈의 자식이라고 모욕을 주었다 하여 분을 참지 못하고 화풀이 하듯이 극언을 퍼 붓는 부처님을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다. 이런 모욕을 당했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에서 수호경으로 불리우는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Katv?na ka??ha? udara? iva gabbhin?y?, 까뜨와나 깟탐- 우다랑 이와 갑비니야 Ci?c?ya du??havacana? janak?ya majjhe. 찐짜야 둣타와짜낭 자나까야맛제 Santena somavidhin? jitav? Munindo, 산떼나 소마위디나 지따와 무닌도 Ta? tejas? bhavatu me jayama?gal?ni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망갈라니.
여인 찐짜가 자신의 배에 통나무 넣고
(자야망갈라가타 5번 게송)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doc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pdf
자야망갈라가타 5번 게송에 부처님이 모욕당하는 장면이 있다. 바라문교에서 부처님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여인 찐짜로 하여금 배에 통나무를 집어 넣고 거짓으로 임신한척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게송에 따르면 고요함과 부드러움을 섭수하였다고 하였다. 자신을 모독 하였다고 하여 7일 이내에 죽을 것이라든지,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무랑아승지겁 동안 한량없는 세월이 지나도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이 한국불교와의 차이점 일 것이다. 테라와다 불자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은 선사가 말하는 야훼 같은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법불교만이
오늘날 수도권에서 가장 불교 교세가 낮은 지역이 인천이다. 16개의 광역 행정구역에서 전북을 제외 하고 불교의 교세가 두 번째로 낮은 곳이 인천인데 불자는 인구대비 고작 13.8%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인천지역에서 천주교와 비교할 때 불과 0.1%많은 수치이다.
이런 수치는 2005년도 인구조사 당시 통계이기 때문에 2015년에 조사가 이루어지면 역전 되어 있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게 되면 인천의 불교는 1위인 개신교와 2위가 될 천주교에 이어 3등 종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모든 지역이 마찬가지이지만 인천지역 역시 사찰과 스님들이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라 본다. 더 근본적인 요인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널리 전파 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불교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청소년과 젊은 층에게 매력있는 불교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정법불교이다. 정법불교만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2012-04-17 진흙속의연꽃 |
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