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
1. 뜻: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세 번 이사한 일
![이사가는날~[5]](https://search4.kakaocdn.net/argon/0x200_85_hr/CF7v87EU7TN)
2. 세번 이사한 이유
맹자가 어렸을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 장(仉)씨는 수절을 했다.
묘지 근처에서 살았는데, 맹자는 장사를 지내는 일이나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우는 것을 흉내 냈다.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살게 할 곳이 못 되는구나.”라고 말하고 그곳을 떠나 시장 근처 도살장이 가까운 곳에 집을 정했다. 맹자는 장사하는 것과 도살하는 일을 흉내 냈다.
어머니는 또 “이곳 역시 아이를 살게 할 곳이 못 되는구나.”라고 말하고 이어 학교 옆으로 이사를 했다.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원들이 문묘에 들어와 예를 행하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읍하고 사양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를 행했다.
맹자는 그것을 보고 일일이 익히고 기억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은 정말 아이를 살게 할 만한 곳이구나.”라고 말하고 드디어 그곳에 살았다.(昔孟子少時, 父早喪, 母仉氏守節. 居住之所近於墓, 孟子學爲喪葬, 躃踊痛哭之事. 母曰, 此非所以居子也. 乃去. 舍市, 近於屠, 孟子學爲買賣屠殺之事. 母又曰, 亦非所以居子也. 繼而遷於學宮之旁. 每月朔望, 官員入文廟, 行禮跪拜, 揖讓進退. 孟子見了, 一一習記. 孟母曰, 此眞可以居子也. 遂居於此.)」
이 이야기는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는데, 이처럼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데서 ‘삼천지교’가 유래했다. ‘맹모삼천(孟母三遷)’ 혹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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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종종 맹자 어머니의 삼천지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시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날마다 북적거리는 시장판에서 맹자가 배울 것은 소리지르며 물건을 파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는 이사를 결심한다. 그래서 다음에는 조용한 곳을 선택했다. 그것이 무덤이었다. 시장보다는 조용했다. 그러나 조용한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맹자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I go, I go, They go.."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맹자는 그들이 읊는 곡(哭 )소리를 따라하곤 했다.

다시 맹자의 어머니는 이사를 결행한다. 이사를 간 곳이 서당근처였다. 맹자는 비로서 글을 읊는 소리를 따라하다가 학문에 입문한다. 그리고 그가 오늘의 맹자가 되었다. 그의 배후에는 올바르게 가르치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위의 해석이 사실이라면 맹자의 어머니는 결코 성공한 어머니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실패를 밥 먹듯이 했다는 사실이다. 실패는 한 번이면 족하다. 시장에서 모방을 했다면, 그 다음은 서당 근처여야 했다. 그러나 맹자의 어머니는 그리하지 못했다.
둘째는 시장, 무덤에서 분명히 배울 것이 있었지만, 그녀는 배울 것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이러한 해석은 문벌 출신의 사람의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즉 글을 읽어야 출세한다고, 화이트 칼라가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철학의 소유자가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맹자의 어머니가 참으로 성공한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맹자의 어머니의 행로에는 심상치 않는 의미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결코 맹자의 어머니는 시행착오 끝에 문벌가의 대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들 맹자가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을 온전히 알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금 맹모삼천지교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 해석이 다음과 같다.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김상준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인터뷰] 김준형 교수 "트럼프가 선사한 호기…朴 하야해야" / 각자도생의 서부극, '로스트 인 더스트'](https://search4.kakaocdn.net/argon/0x200_85_hr/26j2F3tm1YF)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이사를 결심한다. 그녀가 처음 간 곳은 시장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시장은 경제활동의 중심이요,
앞으로 정치가 아니라 경제가 세계역사의 중심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시장에서 진정한 경쟁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향한 열정적인 경쟁, 이것이 펼쳐지는 곳이 시장이다.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는 곳이 세상이다.
따라서 세상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쟁을 알고 경제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이러한 세상을 알게 한 맹자의 어머니는 또 다른 가르침을 위하여 무덤으로 이사한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에게 인생의 또 다른 면을 가르치기 원한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와 삶의 심오함이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나게 마련이다.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 명예, 부, 여자, 환락, 평화, 행복 모든 것이 이 땅에서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뿐이다. 한계를 아는 자만이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야 겸허하고, 겸손해질 수 있다 .여기에 삶의 심오함이 있다.
무작정 성공하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이나 무식함이 허용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는다. 떠나갈 것을 알기에 머무르는 동안 소유는 나눔을 목적으로 존재함을 안다. 참된 나눔이 있을 때 참된 의미있는 삶이 존재한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제 비로소 이사를 한다. 서당 근처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과 무덤을 통해서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것을 안 다음에 문장을 깨우치게 한다. 다시 말하면 글을 배우고, 글을 익히고, 글을 쓴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한 것이다. 인생을 알지 못하면서 다작(多作)에 열을 올리는 허무함,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열띤 토론, 순간을 잡으려는 헛된 소유욕에서 벗어난 참된 학문에의 길을 도야(陶冶)하게 한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문벌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인간도 안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죄와 죄성을 판단하게 하는 사법고시에 목숨을 거는 자가 아니다. 경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공인회계사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과 생명의 존엄성도 모른 채 돈벌기 위한 의사의 길로 뛰어둘게 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삶의 본질을 파악하고 참된 삶을 경영하기 위한 학문에의 길로 정진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덕치정치를 주장하는 맹자가 나타난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 나는 그를 신사임당, 설리반 이상의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교육을 이와 같은 맹자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비춰질까? 요사이 교육행위는 많으나 교육이 존재하지 않고, 교육에 쏟아 붓는 돈은 많으나 참된 교육은 부재하며, 교육에 종사하는 자가 많으나 교육자는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 단지 자식의 영달을 위해서 사교육에 열을 올리고, 해외유학에 달러를 쏟아 붓고, 스스로 공부하게 하기 보다는 듣는 공부에 부모의 삶 까지 쏟아 붓는 허탄한 교육이 난무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도 결코 다르지 않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와 사랑이라는 이름이 "열정"으로 변화되어 장애자녀의 내적인 동기와 수용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 이상으로 제공되어지는 교육은 때로는 "지나침"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예견해 본다. 인간은 없고 교육행위만 존재하는 현실이 장애인 교육현장과는 무관한 것일까?
맹자의 어머니는 인간의 약함을 체휼하게 했다. 인간의 약함, 한계를 경험하고, 그 위에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약함, 한계를 인정하여야만 더불어 사는 길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참교육이 있다. 제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고 건강하고 재물이 있고 명예가 있어도, 혼자 사는 법에 익숙하다면, 혼자만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불행이요 실패이다. 이는 맹모삼천지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경쟁도 더불어 살기 위한 것일 때 의미 있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것일 때 투쟁이 된다. 더불어 살기 위한 경쟁이어야만 맹모삼천지교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참된 교육을 위해서 시행착오 없이 단아한 결단으로 참배움의 자리를 걸어간 맹자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오늘 진정한 교육의 길이 무엇인가를 성경적 관점에서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