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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찬덕 선교사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에 방문하셨는데, 거기 다섯 행각 안에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이 움직일 때 그 못에 먼저 들어가서 자신의 병을 치유 받고자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많은 병자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중 병든지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주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준 일과 그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한 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하여 주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베데스다[자비(은혜)의 집] 연못 곁에 병든지 삼십팔 년 된 무기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무기력한 사람은 몸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 사지를 움직이지 못해 살아 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무기력한 사람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그에게 생명이 공급되어 그 무기력한 몸이 치유되고 살아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삼십팔년 된 병자사건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종교의 헛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은혜)의 집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병자들의 모습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살아는 있지만 몸이 병들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움직이지도 못한 채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모습은 죽은 사람과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 5장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여기서 양문(羊門)은 양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양문은 율법을 지키게 하는 종교라는 양 우리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합니다.
또한 위 5장 2절 말씀에 베데스다 연못과 행각 다섯이 등장합니다.
행각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게 하는 종교라는 피난처가 바로 행각입니다. 행각은 양 우리와 같은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행각 다섯 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에 관해 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5장 3절에 양문 가까이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고 거기에 있는 다섯 행각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 곧 종교라는 양 우리 안에 앞을 볼 수 없는 눈 먼 자들, 다리 저는 자들, 손발이 오그라진 자들,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 곁 행각에는 물의 움직임을 오래 동안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 곧 힘이 없고, 거동하기도 어려운 무기력한 사람들이 유대교에 기대어 자신의 병을 낫고자 갈망하였으나 오랜 세월 동안 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교라는 종교는 실질적인 생명의 문제에는 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 외형적인 의식과 엄격한 행위에만 몰두하는 생명 없는 형식주의의 종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유대교 외에도 수많은 종교들이 너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유대교는 단순한 신화가 아닌 실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그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신앙의 역사(언약, 율법, 성전, 예배 방법, 성전, 예언, 예언의 성취 등)를 토대로 형성된 종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다른 종교와 견줄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에 따라서 만들어진 종교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고 섬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양문 가까이 베데스다 연못과 행각 다섯이 있고 그곳에 38년 된 병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비록 유대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종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다른 종교는 물론 가장 탁월한 유대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병과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유대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줄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역사를 토대로 유대교가 생겨났을 지라도 그 유대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구약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여 주시고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만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 곧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주시려는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영적 갈망에서 만들어진 종교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인 행위와 공로를 평가하여 그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해줄 계획이 전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은 그 가치를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그 어떤 행위나 이 세상 그 무엇을 주고도 취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유대교를 제외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가까이하고 싶은 염원에서 만든 인간의 산물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중간기에 경전인 구약 성경(율법) 해석과 전통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 예배 의식과 철저한 율법 준수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 행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님 말씀의 본 뜻에서 벗어나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가 되어버려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큰 짐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비판하며 바로잡고자 한 예수님과 유대 종교자들 사이에 큰 마찰과 논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 종교 지도자 간의 마찰]
결국 형식적인 성전 예배 의식과 율법 준수를 비판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한 예수님께서는 왜곡된 유대종교 이념을 절대시 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신성모독 죄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인간의 사상(누룩)이 가미되어 변질된 종교와 그 이념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최악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태복음 16:6)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시록 2:9)
하나님은 이 땅의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을 통해 보여준 계시는 장차 오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만세 전에 택한 세상의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과 구속과 영광이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창세 전에 계획하신 뜻을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셔서 구약 성경을 기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한 채 구약 성경 말씀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신들의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수많은 규례와 전통들을 더하여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로 변질된 유대 종교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접촉하고자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념으로 변질되어버린 유대 종교 곧 수많은 율법과 규례 전통과 예배 의식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지만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따라서 우리 눈에 아무리 선해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만나려 하고 경배하려는 모든 일과 행위들은 생명 없는 종교 활동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 곁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일에 불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아들 예수만 인식하고 믿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을 인식하고 믿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인식하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해야만 종교가 아닌 참된 신앙인으로서 그분의 생명을 소유 받을 수 있는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만 찾는다든지 또는 그리스도만을 찾는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동시에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접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모든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유대교라는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열심을 다 했던 모든 행위들은 허무하게도 그 어떤 결과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과 생명과 의와 거룩 그리고 구원과 영광과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하여 오실 분이심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룩한 구약 성경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계시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의 본 뜻에서 왜곡되고 변질되어버린 유대교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극렬히 배척하고 핍박하였고 결국 그들의 종교법에 따라 하나님을 모독한 죄명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던 것입니다.
유대교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은 사람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예수를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오실 구원자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신성모독 죄로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이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는 법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위기 24:16)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인식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관한 말씀이 요한복음 5장 18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2천년 전에 주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도록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혔을 때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념으로는 이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뿐이며 이외에 다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은 오직 여호와 엘로임 곧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바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찌니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예수가 절대 하나님일 수 없고 그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유대교 관념에 안에 있던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한 것에 대해서 사람에 불과한 예수가 자신을 신성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것이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므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여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던 실체가 바로 종교 가운데 가장 탁월하다는 유대 종교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요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을 부인하고 반대합니다.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우월한 유대 종교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그분이 보내신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해 그분을 부인하고 극렬히 반대하고 핍박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도 늘 충돌하고 분쟁하며 핍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의 무기력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친 사건을 보면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율법 정신과 부합하는 일임에도 자신들이 변질시킨 형식적인 율법 준수를 더 가치 있게 여긴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극렬히 대적하고 박해를 하는 모습 속에서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우월한 유대 종교일지라도 얼마나 부족하고 불충분한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 곁에 병든 지 38년 된 병자 사건을 통하여 무기력한 유대 종교를 통하여 생명을 소유하는 일이 얼마나 헛되며 불충분한 것인지를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38년 된 병자를 오랜 세월이 지났을지라도 그의 생명을 소생시키지 못한 유대 종교(율법)의 무능력과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병자를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즉시 소생시킬 만큼 그분의 생명의 능력은 충분하고도 넘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38년 된 병자와 같이 살아는 있으나 온몸이 마비되어 실상은 죽어 있는 모습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것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위 말씀이 요한복음 5장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요지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38년 된 병자, 무기력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유대 종교(율법)를 통해서는 결코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소유하는 일에 있어 인간의 행위 중심적인 유대 종교는 너무나 모자라고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유대 종교)은 이 세상에 참 생명이 오기 전에 사람들을 그 참 생명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임시적인 것이지 그것 자체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24)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경배는 철저한 율법 준수라고 생각해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써 수 없이 많은 세부적인 율법 준수 행위에 관한 규례와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고 가르쳐 왔으며 이를 어긴 자들은 종교적 사회적으로 비판과 책임을 물었던 것입니다. 유대교는 생명을 살리는 본래의 율법 정신과는 달리 형식적이며 외형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38년 된 병자 이야기는 인간의 어떤 종교적 노력과 철저한 율법 준수도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구약 성경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법이기에 죄 있는 인간이 아무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 할지라도 지극히 의로운 그 법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죄 있는 인간의 율법 준수 행위로서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경배를 결코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의 의를 충족시킬 분으로서 죄 없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오셔야만 했고 그분은 인간을 대표한 둘째 아담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지극히 의로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충족시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8)
유대인들의 신앙에 있어 자신들의 조상들이 섬겨 온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 신앙의 첫번째였고 그 다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었습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유대 종교의 핵심중의 핵심이었고 절대적인 대상이었고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모세 율법]
그래서 유대교를 지극히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선한 것 일곱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를 살펴보면 거룩한 땅 예루살렘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거룩한 예루살렘 성,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절기이며 그 중에서도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지키는 거룩한 안식일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천사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전해주었던 모세 그리고 구약 성경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 종교가 선하게 여기는 일곱 가지의 선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38년된 병자와 같이 무기력해서 유대인들의 손상된 생명을 소생시킬 수 없음에도 그들은 그것들을 지극히 신봉하며 하나님을 접촉하여 치유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유대교(율법)의 치유 수단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과 행각 다섯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병자들, 눈 먼 자들, 다리 저는 자들, 혈기 마른 자들이 낫고자 하여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특별히 율법에 갇힌 사람을 상징하는 38년 된 병자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본문에 나오는 양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또 베데스다 연못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종교에서 선한 곳으로 여겨지는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 종교가 자랑하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 안에 치유의 수단이 있다고 생각해 그것에 소망을 품고 자신들의 손상된 생명이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의 선한 것들로 여겨진 거룩한 예루살렘 땅, 그 안에 있는 거룩한 성, 거룩한 성전 그리고 거룩한 절기(거룩한 안식일) 그리고 간혹 방문하는 천사들, 구약성경, 율법을 친히 전해주었던 모세, 이런 것들을 의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38년 된 병자가 걸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라는 종교가 그것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혜택은 죄로 인해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소생되어 그들이 활기차게 걷고 움직이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유대교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에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신봉하고 쫓는 유대교는 다른 세상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종교의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7가지 선한 것들을 믿고 지향한다 할지라도 유대 종교는 병자들이 소망하는 혜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유대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율법을 외형적으로 철저히 지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 곧 율법을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라고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절에 나오는 양문이 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서 종교라는 양 우리로 들어가는 입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못의 이름은 자비(은혜)의 집을 뜻하는 베데스다였지만 그 이름과는 달리 유대 종교를 좇아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실제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채 그 못 곁에서 병든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나타난 실상이 병들어 무기력하고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철저한 율법 준수를 지향하는 유대종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지만 참 베데스다,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베데스다 이름을 통해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 또한 사람의 어떤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이방인들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세기 18:18)
그리고 연못 곁에 병자들이 누워있는 행각들은 무엇입니까?
다섯 행각들은 유대 종교의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마치 양 우리가 양을 보호하는 피난처인 것처럼 다섯 행각은 유대 종교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피난처라는 것이며 행각 다섯의 숫자는 하나님의 책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을 움직이게 하는 천사, 그 중재자 천사는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이를 갈라디아서 3장 19-21절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율법을 섬기느냐? 그것은 범법함 때문에 더해진 것이라. 한 중보자의 손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된 것인데 약속하신 그 씨가 오실 때까지라.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이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중보자의 손에서 천사들을 통해서 제정된 율법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져다줄 수 없고 그것은 약속된 씨 곧 우리에게 참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만 임시적으로 우리를 죄에서 보호하는 피난처 역할의 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가끔 한 번씩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간 자는 치유된다는 이 이야기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하여 사람들이 온전케 될 수 있다는 유대종교의 이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유대 종교에서 선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땅에 들어가 거기 있는 거룩한 성을 바라보고 또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희생 제물을 바치며 거룩한 절기들을 철저히 지키며 천사의 손을 통해 율법을 받은 모세와 그 율법을 의지하고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통해서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종교의 틀에 갇힌 유대 종교의 이념을 따라 율법을 철저히 지킬지라도 그것으로는 소망하는 바를 이룰 수 없고 모든 행위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일은 왜 안 됩니까?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지라도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해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할지라도 모두가 실패하였고 인간의 생각에 온전히 지켰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율법의 의의 기준에 너무나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는 것은 마치 우리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라가려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하늘로 결코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야곱의 꿈에서 보여주신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닥다리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절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라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곧 죄성을 가진 모든 육체는 죄로 말미암아 연약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결코 온전히 준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 곧 율법에 기대어 소망을 품고 치유를 되기를 갈망했던 사람은 그 긴 시간 동안에도 치유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도 없는 죽은 자 같아서 비록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에도 맨 먼저 물 속에 들어갈 수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치유함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까?
바로 모든 인간은 38년 된 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는 결코 생명을 치유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이 든 38년의 기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예전에 교제의 말씀을 나눈 적이 있는데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고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에서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을 건설한 뒤에 그곳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으나 열두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명은 가나안 땅을 결코 점령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이를 들은 백성들이 모두 슬퍼 통곡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죄에 대한 징계로서 이스라엘 백성 중 이십 세 이상으로서 하나님을 원망한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게 하셨는데 그 기간이 바로 38년이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신 2:14)
이것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그들을 인도하였던 모세 곧 율법을 통해서는 생명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생명의 가나안 땅으로는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이처럼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38년의 긴 광야 생활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던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연약해진 율법, 그 무기력한 율법을 통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땅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율법 그 자체가 흠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하고 선하며 영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본성이 날 때부터 죄로 오염되었기에 연약한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롬 7:12,13)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병들어 움직이지도 못한 채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의 38년 된 병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우리가 구원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주님 보시기에 병들어 무기력한 사람은 살아 있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결코 걸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살아는 있으나 병들어 움직이지 못해 실상은 죽은 것과 같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나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 이야기는 율법을 통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받을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공급해 줌으로써 죄로 죽어가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숨을 쉬고 보고 듣고 먹을 수 있지만 그 팔과 다리가 그 기능을 잃어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은 실상은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1절에서 율법을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 무엇은 하지 말라 요구만 할 뿐이지 결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생명이 결핍된 인간은 연약하여 절대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간의 본성은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소유 받지 못해 생명이 결핍해져 연약한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기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중재자인 천사들이 있고 또 병을 치유케 하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다 할지라도 병들어 기력이 없는 사람들은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스스로 그 연못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병을 치유 받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병들어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 곧 살아 있으나 실상 죽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 율법을 준수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생명을 치유를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를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결핍된 인간은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한 병자들
같아서 결코 그 율법에 다다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유대교는 철저한 율법 준수 곧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참 모습은 범죄한 존재로서 율법을 충족할 만한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종교가 가리키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혜택을 결코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38년 된 병자와 같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생명 곧 죄로 오염된 천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이 너무나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자비의 연못을 한없이 바라보며 그것에 소망을 두고 기다린지 38년이 된 그 무기력한 사람이 있었던 곳은 바로 베데스다 연못 곁에 있던 행각이었습니다. 그 다섯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누워서 자기를 구원해 줄 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개의 행각 아래 있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피난처 곧 하나님의 율법 아래 거하며 소망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모습은 생명이 빈약하여 살아는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다섯 행각에 거하는 병자들]
피난처라 불리는 다섯 행각 안에서 자비의 연못에 소망을 두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준수함으로써 생명을 소유 받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다섯 행각들 안에 수많은 모든 병자들이 한없이 누워 있습니다. 그곳에는 38년 된 병자도 있고 눈 먼 자들도 있고 다리 저는 이들, 손이 오그라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천사가 내려와 그 베데스다 물이 움직여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에 소망을 두고 생명을 소유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실제 이와 같은 병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선한 것을 말하며 소망을 품게 하지만 실상 그것 안에는 아무런 생명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수많은 병자들이 행각들 안에 치유 받지 못한 채 한없이 누워 있는 모습이 그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피난처로 삼아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으나 눈 멀어 볼 수 없는 장님들,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들 그리고 생명이 부족하여 손과 발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피난처 아래 곧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기쁨과 평강이
없고 오직 병들어 고통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많은 병자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던 베데스다 연못에 방문한 때가 바로 명절이었다는 말씀은 모두가 기쁨을 누려야 하는 절기가 도래했음에도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 9절에는 38년 동안 병을 앓았던 사람이 주님께 치유 받아 자기의 자리를 들고 가는 내용이며 바로 그날이 안식일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38년 된 병자가 주님께 치료받기 전까지 율법을 좇아 수 없이 많은 안식일을 지켜 왔지만 치료받지 못해 모두가 안식해야 할 그날에도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 전혀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병자들은 멀고 손발이 마비되는 등 신체의 기능을 잃고 고통속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공급받지 못해 살아 있으나 실상은 완전히 죽어 있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는 율법 준수를 통한 치유 수단 곧 베데스다 연못과 피난처로서 다섯 개의 행각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무기력했기에 그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어떤 유익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무기력한 사람들이 지켜낼 만한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이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행하기를 요구하고 있지만 인간은 생명이 부족한 무기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전혀 지킬 수 없고 지킨다고 힘써 노력할지라도 온전하지 못해 율법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가 자랑하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 거룩한 성전 등 일곱 가지 선한 것들은 생명이 결핍해 병들어 무기력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 곧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그 곁에 있는 다섯 행각을 피난처 삼아 누워서 하나님의 자비를 한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이 바로 참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혜택을 공급받기 위해서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죄로 인해 그 본성이 오염된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자비이신 주님은 인간의 생명을 소생시키는데 있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즉시 소생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결코 인간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준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없었으나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죽은 자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고 5장 2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한복음 5:21)
그래서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인간은 다섯 행각 아래 누워있는 연약한 존재들로서 율법을 준수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열심은 모두 헛되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신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들을 근거로 생겨난 종교로서 다른 종교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많은 선한 것들을 주셨고 유대인들은 유대 종교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을 통해서 혜택을 받고자 하지만 그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땅을 주셨고 거룩한 예루살렘 성을 주셨으며 거룩한 성전을 주셨습니다. 천사들과 거룩한 말씀인 구약 성경, 거룩한 절기들 그 중에서도 거룩한 안식일, 거룩한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지만 이런 것들로는 죽은 사람들의 생명을 소생시켜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것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의 증거는 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본질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 거룩한 말씀, 거룩한 절기들 역시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들이지만 이것들 역시 그 병자들을 친히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의 절기들이 있었고 거룩한 안식일이 있었지만 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가운데 그 절기들과 안식일은 전혀 기쁨을 줄 수 없었고 또 안식을 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는 구약의 종교 안에 있는 율법을 통해서는 병자 한 명이라도 결코 도울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있는 자비의 연못 베데스다에 어쩌다 천사가 내려와 그 물을 움직이게 할지라도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혜택을 그저 멀뚱멀뚱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나사렛 출신의 작은 사람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 다섯 행각 아래에 놓인 병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은 천사도 아니었고 천사장 또한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비천한 나사렛 출신으로 유대인에게 조롱받고 무시당하며 배척당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2장 2,3절은 그분에 대하여 고운 모양과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으며 그분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슬픔의 사람이었고 질고에 익숙하였고 누구도 그분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분에게 주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던 그리스도]
그때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미리 아시고 그리스도의 품에 그녀를 넣어주시기 위하여 야곱의 우물가를 예수님께서 방문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택한 자인 38년 된 무기력한 병자를 주 예수님의 품에 넣어주고 그로 생명을 소유받게 하시려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그에게 다가가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인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38년 동안 그는 자신의 병이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찾았으며 베데스다 연못의 천사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조그만한 관심도 주지 않았었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 38년 된 불구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나사렛 출신의 주 예수님의 생명을 소생시키는 말씀을 듣고 즉시로 치유 받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8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5장 9절에는 그 사람이 즉시 나았고 그가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 갔으며 그날이 안식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말씀으로 즉시 치유됨으로써 그가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 갈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38년 된 병자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려 힘을 다해 노력하다 치유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온전히 치유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병자가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 예수님의 입술에서 선포된 생명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38년 된 병자가 치유될 수 없었지만 생명의 주님의 입술에서 나온 살아있는 말씀을 그가 들었기 때문에 불치의 병을 즉시 치유 받았던 것입니다.
전에는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침상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가 옮겨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소생된 그가 자신이 누웠던 그 침상을 들고 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38년 된 병자]
어떻게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5장 24절과 25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나니 바로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
그 38년 된 병자는 몸의 기능이 마비되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였지만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그의 귀로 들었기 때문에 그의 병이 치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 또한 소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죽은 자였던 그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사망에서 나와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남으로 사망에 있던 생명이 영원한 새 생명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5장에서는 병을 치유받고 생명이 소생되는데 있어서 유대 종교 안에 있는 율법과 베데스다 연못과 천사는 전혀 필요치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안에 있는 율법과 베데스다 연못과 천사는 우리 병을 치유하고 생명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고 불충분합니다.
하지만 생명이신 주 예수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자 누구의 생명이라도 소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 종교가 제시하는 것들 곧 율법과 베다스다 연못의 물과 천사 그리고 거룩한 절기, 안식일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있다면 그 외의 것들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소생시키는 분은 바로 나사렛 출신의 작은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이시며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유익과 혜택이 되시며 생명을 소생시키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요한복음 5장 말씀을 통해서 이를 바로 직시해야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이십니다. 생명이신 주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38년 된 병자는 그의 생명이 즉시 소생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 안에는 선한 율법이 있어 병자들이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들어 아무런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준수하라는 그 방법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실상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날 때부터 본성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인 율법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써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 할지라도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은 그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 연약하여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5절 말씀처럼,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생명으로 치유 받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생명을 소생시키실 때 율법처럼 어떤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38년 된 병자를 치유한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무기력한 사람이 그 귀로 주님의 음성만을 들었을 때 소생되었다는 것이며 요한복음 5장 25절 말씀도 듣는 자들은 살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나니 바로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
38년 병자와 같이 영적으로 병들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우리가 주님의 생명의 음성을 듣고 생명이 소생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구하며 오늘 교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