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고향에 못 가셨다. 세상에 와서 칠십 년을 살다 가신 한 생의 부르지 못한 노래를 사람들은 알까. 당신에겐 불가항력이었고 평생 속앓이 병을 가져다준 일들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휴전선 저쪽, 함경남도 ‘라남’시가 아버지의 고향이다. 생사를 넘나들던 전쟁 중에 잠시 피란 행을 하셨던 길이 철조망 하나에 꿰어 버렸다. 한반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휴전선이 있는 한, 당신의 고향은 꿈속에나 갈 수 있는 ‘이북’일 수밖에 없는 게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노래한다면 실향민에겐 너무 무심한 말이다. 사람들은 부르고 싶어도 차마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많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알았다. 두고 온 산천과 부모 형제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정한 금기 사항처럼 함구하셨던 당신이시다. 가끔 식사 중에 어머니에게 이런 음식은 우리 고향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퇴근길에 술이 거나하여 들어오신 취중에라도 고향 얘기를 하거나 식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으셨다. 눈물뿐만 아니라 소리 높여 크게 웃으시는 모습도 본 기억이 없다. 당신의 성정 탓이라기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물조차 말려버린 기막힌 그리움을 안으로 삭여내느라 늘 혼자, 않으셨던 것 같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나였다. 가슴 깊이 태동하고 있던 내 꿈을 생각하면 ‘법이 없어도 될 사람’이라고 할 만큼 유순하신 성품인 아버지의 무능력이 원망스러웠다. 겉으로 다정다감하게 들어내지 않는 당신 식의 자식 사랑도 마음속 옹이가 되었다. 날이면 맞닥뜨리는 일상은 내 몫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회의를 일게 하던 사춘기였다. 한잔 술의 얼큰한 취기로나마 자주 아픔을 눌러야 할 만큼 아버지 앞에 시리게 와 닿았을 삶과 당신 안의 외로움은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내게 화인으로 찍혀 버린 모습이 있다. 여고 일 학년 때였을 게다. 처음으로 당신의 각혈 같은 울음을 본 것이다. 술을 많이 드신 날 밤이었다. 잠드신 줄 알았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팔꿈치로 벽을 치시며 절규하듯 “할아버지.” 하는 소리와 함께 꺽꺽 슬픔을 토하셨다. 철조망 하나에 귀향길을 꿰어버린 고칠 수도 없는 통증을 그날만은 어찌할 수 없으셨을까.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라며 ‘꿈에 본 내 고향’ 노랫가락에 실향의 한을 소리소리 내지르기라도 하셨다면 내 마음이 좀 나았으련만 노래는 결코, 부르지 않으셨다. 아마 부르기도 전에 목에 걸려 소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울음은 내 온 가슴을 훑으며 목울대를 뻣뻣하게 했다. 아버지는 울지 않는 사람이며 척추처럼 꼿꼿하게 서야 하는 사람인 줄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제야 소갈머리 없는 딸의 존경도 받지 못한 당신의 외롭고 힘든 삶이 보였고, 정든 고향과 혈육까지 잃게 한 전쟁의 혈흔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것은 형벌이었다. 누구를 향해서 인지도 모를 분노 같은 것이 끓어올랐다. 그러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옆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죽여 우는 일뿐이라는 것이 나를 기막히게 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시간은 지나긴 것들을 잊게 하는 묘약이지만은 않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다가 어느덧 저려오는 그리움은 나이가 들수록 짙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보고 싶으면 만날 수 있는 혈육과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있어도 종종 먼산바라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아버지는 어떠셨을지, 이제나저제나 고향 찾을 날을 그리셨을 아버지는 끝내 눈도 감지 못하신 당신의 마지막을 내 속에 또 하나의 낙인으로 찍어 놓으셨다. 가끔씩 TV를 보거나 길을 가다가 이북 말씨의 어르신이라도 만날라치면, 따가워 오는 가슴을 먼저 문질러 대야 한다. 그 독특한 억양은 귀에 익은 아버지의 음성이고 모습이며 아버지의 고향 냄새 같아서.
부모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세상에서 나를 반겨 줄 고향도 함께 잃어버린다. 아프고 외롭고 지쳤을 때 찾아갈 곳이 없다. 어쩌면 나그넷길이기도 한 인생에서 ‘고향’이란 말은 오이 향내 같은 추억 냄새가 배어난다. 부모 형제 오순도순 모여 살던 집과 정든 마을은 가장 순수한 때 만났던 세상이 아닌가. 밤하늘엔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던 그때의 달과 신비하게 빛나던 북두칠성 별자리, 여름날 마당으로 낮게 날던 고추잠자리, 한낮의 고요 속을 흐르던 도랑물과 빨랫방망이 소리, 코흘리개 우리들이 첨벙대던 물소리와 자잘한 웃음소리, 어릴 적 마음 밭에 심어진 풍경과 해맑은 시간들은 영 지워지지 않을 것들이다.
아버지의 푸른 날이 담긴 고향은 어떤 곳일까. 생전에 이북 그곳에 대해 직접 들은 적이 없다. 그만큼 실향의 당신에게 고향은 피 울음이었으며 그리움을 넘어 아예 종교 같은 것이었으리. 지난날의 아버지처럼 내가 부르는 노래 중에도 ‘타향살이’라든가 ‘꿈에 본 내 고향’이라는 곡목은 절로 삭제되었다. 철 지난 유행가여서가 아니다. 그 가락 속엔 실향민의, 차마 소리 내어 부를 수 없었던 가슴 말이 들어있기 때문인 게다.
엊그제 하나씩 잎을 떨쳐내던 가로수들이 어느새 맨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마른 가지 끝에도 다시 봄을 잉태할 준비를 하고있는 나무들이다. 어느 생(生)인들 외롭고 아프지 않을까만, 제 몸을 말려 계절을 견디는 겨울나무를 보면 삶이 눈물겨우면서도 엄숙해진다. 끈끈히 흐르는 핏줄 속으로 생생하게 수혈된 초록의 피돌기가, 아프게 맺힌 매듭을 풀어 언젠가 무성한 잎을 맺게 하리라.
동여맨 허리끈으로 견뎌 온 날들이 있는 사람에게 새봄의 의미는 남다르다. 남과 북이 하나로 합쳐지는 날, 곧장 북으로 달려간다 해도 이제 와 아버지의 옛날을 돌려놓을 순 없다. 그래도 나는 소망 하나를 심어 두고 있는 중이다. 그날이 오면, 반쪽이 아닌 온전한 나라로 꽃피우는 계절이 온다면, 고독하고 안타까운 이름 아버지! 꿈길에라도 아이처럼 졸랑졸랑 따라나설 참이다. 철없는 여식의 마음속 아픈 고향이기도 한 아버지의, 그리 간절했던 북녘땅 고향길에, 말이다.
겨울나무 앞에 설 때면 침묵하는 것들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다.
첫댓글 염 작가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실향민은 아닙니다만,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순간 눈가가 따뜻해져 옴을 느꼈답니다. 자식들 에게 있어 아버지의 사랑은 겉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속 깊은 울음이지요. 이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네요. 건강 챙기시어 좋은 글 기대합니다.
염 작가님의 글을 읽고 저도 울컥했답니다. 데이빗님 다녀가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