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믿을까?] ㅡ kjm / 2022.7.28
나는 사람을 살리려는 사람은 믿지만, 죽이려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믿지 않는다.
[믿음에 관하여] ㅡ kjm / 2021.7.28
문제, 앎, 믿음, 진실, 사실, 절차
중세 신학자인 안셀무스의 "앎이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의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앎이란 오늘날의 과학에 의한 객관적 지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신앙을 위한 지식이다.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나님은 계시냐 안 계시냐, 계시다는 걸 어찌 믿느냐, 어떻게 알고 믿느냐 하는 문제(난관)에 봉착해서 제기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천착해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문제를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싶어 한다. 실체로서의 진실, 즉 실체적 진실을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건의 실체에 도달하기 위해선 절차, 즉 관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해야만 실체가 보인다는 것이다.
법이란 뭘까?
법이 바로 그 관문을 가리킨다.
법은 지식(앎)의 정보가 아니라 믿음의 정보다. 법이 명령하는 것은, 이 길로 가면 실체가 보이니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차적 정의라 말한다. 이 절차적 관문은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는 가장 정확한 길이다.
여기엔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견해는 배척(배제)된다. 왜냐하면 선입견으로 출발할 수 있고 중도에 편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확히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이를 수 없다. 그런 믿음을 법이 제공하는 것이다. 법적 지식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의 주장들이 다 다른데, 그리고 그 주장들이 각기 다른 길을 가리키는데, 어떻게 의견들의 합을 구할 수 있겠는가. 각자의 지식들을 모두의 합의 합력된 믿음으로 모으려는 게 법이다.
이런 믿음(신뢰)이 깨지면, 묶어서 가둬두었던 각자의 이익적 주장들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면 어떤 문제이건 수습할 길이 없어져버린다.
그러면 믿음은 왜 깨지는가.
믿음을 주는 증거, 증인, 증거물이 오염됐기 때문이다.
증거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증인을 회유 협박해서 위증을 강요하고, 증거물을 조작해서 거짓을 진짜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바로 그 원인이다.
그런 일들이 법을 주관하는 검사들이나 판사들에 의해서 저질러진다면, 마치 신을 섬기고 신의 역사를 주관하는 신관들이 타락한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신관이 신을 모독하고 신의 의지를 자기 뜻대로 바꾸었을 때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보라. 마찬가지로 법관들이 법을 믿을 수 없게 한 죄는 그에 버금할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응징과 처벌도 일반인과 다르게 무시무시할 것이다.
믿음이 전제되었을 땐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믿음이 무너지면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지식(앎)도 원래의 회의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이 있고 또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절차를 따랐을 때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게 실체적 진실에 도달한다는 믿음,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모두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이 존재한다는 믿음,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면 가장 합리적 결론에 도달한다는 믿음. 배신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이런 것들이 없다면 공동체적 삶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공동체적 삶을 무너뜨리는 죄악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 없다면 또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어렵다.
앎도 도구요 믿음도 도구이지만, 동전의 양면으로서 작용해야만 우리가 원하는 진실을 보존케 할 수 있다.
진실은 빵이 아니다. 진실은 빵을 먹도록 하는 것이다. 진실은 빵이 썪지 않게 하고, 마침내 우리가 죽지 않고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훼손하는 것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해도 좋다.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