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월 16일 이승만 대통력은 고적 부석사를 탐승했습니다.
한국 주재 미국 요인들과 함께 한 자리였는데요.
당시 부석사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겠습니다.
그때는 지금 부석사를 상징하는 그 유명한 문구 '무량수전 배훌림 기둥에 기대서서'류의
유장함을 발견하지 못했더랬죠.
16일 밤 전용열차로 서울역을 출발해서 자그마치 이튿날 아침에 풍기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전설같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대통령 부처는 플랫폼에서 곧바로 자동차에 올라 부석사로 향합니다.
시골 역사의 플랫폼 넓이가 저렇게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걸 새삼 알게 됩니다.
부석면사무소에서 4km를 더 들어가면, 부석사가 나옵니다.
사찰 밑에는 오직 풀숲과 들판 그리고 저건너 산만 있습니다.
그떄는 보려고 든다면, 저 건너 소백산의 산세의 아름다움을 '육안'으로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본다는 것은 '맨눈'으로 안되고 '학습'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때는 아무도 그런걸 몰랐습니다.
당시 스님들의 위상은 지금하고 달랐죠.
앞서서 이끄는 게 아니라 뒤이어 수행하는 형색입니다.
영상에서는 봉황산 아래라고 하고 있지만, 작금의 현판은 태백산 부석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태백산이 어디쯤 있길래?
1989년 한국일보사에서 낸 '신 한국의 여로 - 안동 주왕산'편에 의하면,
'태백산의 낙맥(落脈)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우뚝 솟은 봉황산'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흐음.....
저멀리 솔밭에 몇개의 간판이 보입니다.
무얼까 궁금한데, 아마 '도벌(盜伐) 금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저는 안타깝게도 부석사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가보신 분들은 곧바로 알겠지만, 이렇게 고색창연함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찰에서 '쇄락의 정조'의 아름다움을 느낄 곳은 어디에 있을까요?
좌측의 건물은 무슨 건물인지 모르겠지만, 난간이 훼손되어 있군요.
그래도 인근에 있는 희방사가 6.25 전화를 많이 입은 데 비해 부석사는 비켜갔다고 합니다.
기둥이 형편없이 썩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스님들에게 무언가 간곡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옆에 기둥은 더 썩어서 사찰측인지 관광객이 그러했는지 돌까지 집어 넣여져 있습니다...
지금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겠죠...
2014년 충청일보에는
국보 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훼손이 심각하다.
처마 밑 부분이 썩고 우아한 배흘림기둥 일부에 금이 가고 벽체가 벗겨졌다.
화재 피해를 막기 위해 문화재청이 지난 2004년부터 목재에 방염재를 뿌린 후부터
목재가 크게 상하기 시작했다.
라고 '비극적' 정조로 이야기 하고 있군요....~
예전 사진에서 이렇게 '무량수전'이라는 문구가 있으면 곧바로 부석사임을 알아야 하듯,
댁에 있는 흑백사진에 이 '원통보전'이라는 현판만 있어 어디인지 궁금할 수도 있겠는데요.
낙산사입니다.
의외로 이 곳에서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김주지'라는 호칭의 주지스님은 이렇게 적멸보궁 앞에 비단을 깔고,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들을 대통령 부처와 외국 인사들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이렇게 할 이 아무도 없겠죠...
이승만이 직접 '부석'을 흔들어보았다고 말하고 있네요.
사찰 이름의 계기가 된 부석의 각자가 좀 작은 느낌이 듭니다.
배순우선생과 유홍준 선생의 미문에 의해
지금 우리가 부석사에서 그리 찾고자 하는 '조망의 아름다움'을 그때는 몰랐죠...~
그때는 주로 '국보'나 '보물'이런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쪽에 하얗게 열을 짓고 있는 것은 야외 테이블입니다.
이승만과 주요 요인들이 저곳에서 티타임을 가졌나 봅니다.
저시절에는 사찰 안에서 저렇게 해도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전 문화재 전문가인 유홍준이 전각안에서 삼겹살을 구어 먹어 논란이 되기도 했죠..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으로 오르는 도중의 3층석탑.
탑의 모서리가 깨진 건 6.25전쟁때 일일까요...
이승만은 즉석에서 실에 돌을 메달아 탑신의 기울기를 측정도 합니다.
살짝 기울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럴려나....~~~
이 흐름한 곳이 어디일까 궁금하여 찾아보니, 역시 국보인 조사전이더군요...
김주지가 들고 있는 부석사 글씨...
이승만 대통령이 쓴 글씨이고 지금의 안양문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김형국 교수는 부석사를 가장 아름다운 가람으로, 이 현판은 금상첨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는 1956년 11월 30일 이곳에 찾은 기념으로 남겼다고 적고 있는데, 오기로 보입니다.
그는 귀경길에 원주역에 들립니다.
역사에 빽빽히 도열해 있는 학생들....
당시 익숙한 저 풍경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플랫폼에 있는 간식꺼리가 '국수'라는 거.
그리고 또 국수집이 있다는 것...
우리의 고단함과 배고픔을 이겨낸 건, 저렇게 국수였다는 거.
이승만 부처는 이들에게 연설을 하려 내립니다.
뒷편에 비서가 들고 있는 무릎담요... 저시절에도 체크무늬의 무릎담요가 있었군요...
제천여자중고등학교의 환영 플랭카드.
중학생으로 보이네요. 1943년생 전후쯤이라고 하면, 지금은 70대 중반이 되어 있군요.
그들은 아직도 저때의 흔치않은 기억을 갖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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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을 찬탄합니다.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사찰의 구조와 저멀리 소백산의 풍광을 완상합니다.
그리고....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라는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서" 나오는 아름다운 문장을 곱씹어 봅니다.
1957년 한국인들의 마치 구석기^^같았던 안목에서 자그마치 50년이 흘러야 가능했습니다.
그때는 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