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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대중교통을 이용한 산행 계획을 세울 때는 '일림산 주차장 → 삼수 삼거리 → 능선 삼거리 → 보성강 발원지 사거리 → 일림산 정상 → 삼거리 → 작은봉 → 골치 사거리 → 사자미봉 → 간재 → 곰재 → 제암산 → 휴양림 삼거리 → 제암산 자연휴양림'의 16.43km, 6시간 30분 코스를 종주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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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산[帝岩山]
높이: 779m
위치: 전남 장흥군 장흥읍 안양면
제암산(帝岩山) 정상은 임금 제(帝)자 모양의 3층 형태로 높이 30m 정도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수십 명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 정상의 바위를 향하여 주변의 여러 바위와 주변의 봉우리들이 임금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형상이어서 임금바위(제암)이라고 부르며 이산을 제암산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정상에 서면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인 천관산, '호남의 금강'으로 불리는 월출산,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과 팔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자산은 곰재를 사이에 두고 제암산과 마주 보고 있으며, 동서로 400m의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산 이름은 거대한 사자가 누워서 고개를 든 채 도약을 위해 일어서려는 형상한 데서 유래하였으며, 일본의 후지산을 닮았다 하여 장흥의 후지산으로도 불린다.
제암산은 남도 끝자락에 있는 데다 철쭉군락지가 해발 630m 부근에 있어 5월 초순 남해의 훈풍을 받아 화려하게 피어올라 만개한다. 제암산에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제암산과 사자산 사이.
제암산 정상에서 30여 분 거리인 곰재에서 곰재산 오르는 능선과 곰재산 위의 산불감시초소와 여기서 사자산으로 오르는 능선 안부의 간재까지가 최대 철쭉군락지이다. 이 능선은 수만 평의 너른 땅이 온통 철쭉으로 뒤덮여 있다. 철쭉 군락지에 잡목을 제거하여 키가 작은 철쭉만 남아 있는 곰재에서 산불감시초소 오르는 능선은 도로처럼 훤하다. - 한국의 산하
일림산[日林山]
높이: 667.5m
위치: 전남 보성군 웅치면
일림산은 해발 600m대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호남정맥의 기운을 다시 일으킬 만큼 힘찬 산세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8부 능선에 형성된 무릎 높이 크기의 산죽밭은 일품. 게다가 정상 일원 억새밭 산세도 산중 고원처럼 드넓고 부드럽고 정상에서의 전망 또한 뛰어나다.
북서쪽으로 사자산에서 제암산으로 힘차게 뻗어 오른 호남정맥을 비롯해 장흥 천관산과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도 한눈에 보인다. 일림산 정상에 서면 제암산(807m), 무등산(1,186.8m), 월출산(809m), 천관산(723m), 팔영산(609m) 등 전남의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림산 주변은 우리나라에서 차밭이 가장 많다는 보성에서도 차밭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녹차가 전국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림산 아래 도강마을과 영천마을은 서편제의 본향으로 명창이 여럿 나온 곳이기도 하다. 서편제는 남성적인 판소리인 동편제와 달리 한 맺힌 여성의 소리가 특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림산은 625.6봉(일림산)과 667.5봉(삼비산)으로 나뉘어 보성군과 장흥군 간에 갈등이 있었으나 2006년 국토 지리 정보원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삼비산이 일림산에 편입되면서 일림산 주봉이 되었다. - 한국의 산하
체력이 좋았을 때 그리고 안내산악회를 이용하기 전, 산행을 위해 대중교통으로 수도권을 벗어나 힘들게 지방에 가서, 10km에도 못 미치는 산 하나만 달랑 오르는 건 가성비 최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체력이 옛날만 못한 요즘도 하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 산행 계획을 세울 때는 몇 개의 산을 묶어 연계하는 산행이 많았고, 실제로 그런 산행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안내산악회라는 걸 알게 되고 그걸 이용하면서, 당시에 세워둔 계획 중 안내산악회로 갈 수 있는 건 편리성이나 비용면에서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 산악회 계획에 맞춰 다녔다. 물론 안내산악회가 장점만 있는 게 아니라, 산행 시기, 코스 등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단점도 존재하지만.
이번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연계 종주는 아직 산악회를 알기 전인 2018년 11월 일괄해서 산행 계획을 세울 때 만든 거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안이었다. 이후 안내산악회 상품 목록에 있는 산행이라는 걸 확인하고 산악회 산행으로 변경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장흥까지의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인지, 제암산에서 일림산까지 종주는 무박으로, 당일 산행은 제암산과 초암산의 1 일 2 산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1 일 2 산이란, 먼저 제암산을 왕복한 후 버스로 초암산으로 이동해 초암산도 왕복하는 산행을 지칭하는 거로, 인증꾼은 좋아하나, 나는 제일 싫어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안내산악회에게는 산행 계획이 상품이라 인기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걸 고려하겠으나, 중요한 게 시기인 거 같다. 사계절이 뚜렷하다 못해 극단적인 여름 겨울을 가진 한반도는 봄에는 야생화 또는 철쭉, 여름에는 계곡 피서,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 등으로 시기에 따라 산행의 목적이 다른데 그 모든 걸 갖춘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산은 드물고 대개 한두 개에 특화된 산이 대부분이다. 고로 안내산악회를 이용하는 이상 내가 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시기에 맞춰가야 한다. 당연히 인파를 피해 산에 갔는데, 산이 더 붐비는 경우도 발생한다.
남도의 산은 봄 진달래나 철쭉에 특화된 산이 많고, 봄철 산불 통제로 북쪽 지역 산이 대부분 입산 통제라, 이 시기에는 거의 모든 산악회와 여행사가 남도 상춘 산행에 집중한다. 아쉽게도 제암산도 철쭉으로 유명한 산이라, 봄이 아니면 안내산악회에서 산행계획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봄철 한때 진행하는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종주는 무박이라 그동안 망설이고 있었는데,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2022년에는 무박이든 아니든 무조건 다녀올 생각을 하고 여러 산악회를 뒤적이다가, 한 곳에서 무박이 아닌 당일에 세 산을 연계 종주하는 산행 계획을 발견했다. 출발지가 기존의 양재나 교대가 아닌 일산이라 좀 망설였으나, 백석역이라 불광역을 기준으로 하면 오히려 교대보다 가까워 일단 회비를 입금하고 자리를 하나 배정받았다.
다만, 제암산도 철쭉으로 유명한 산이라. 당일 같이 가는 산악회에서 출발지가 다른 3대와 다른 산악회에서도 4대의 버스가 출발한다. 물론 서울이 아니라 다른 지역 산악회와 여행사 산악 팀의 버스도 있을 거다. 고로 지난 서산 가야산 개심사 왕벚꽃 산행 못지않은 인파가 몰리지 않을까? 물론 꽃의 아름다움보다 붐비는 인파의 소음을 더 싫어하는 내게는 산행 시기를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다. 고로 인파는 고민거리 밖이고, 걱정은 다른 산악회는 이 코스를 무박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 산악회는 당일로 진행한다는 거. 산행에 주어진 시간, 6시간 30분 안에 17km가량을 종주해야 해서 그나마 점심시간이라도 확보하려면 시속 2.8km/h가 넘는 속도로 가야 한다. 한번은 달려야 할 산들이라, 대간을 달리듯 달리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산행 준비는 평소와 같이 한다. 다만,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나, 한 번도 배낭에서 나온 적이 없는 장비는 다 두고 갈 예정이다. 비록 하산주할 시간 확보는 쉽지 않겠지만, 일단 날머리 주변 식당은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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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애용하던 양재역 국립외교원 앞이 아니라, 일산 백석역 1번 출구라 불광역을 기준으로 하면 15분가량 적게 걸려 집에서 나오는 시간도 그만큼 늦어도 되나, 열차 운행 시각에 맞춰야 하고 처음 가보는 거라 평소와 다름없이 5시 45분에 배낭을 둘러메고 나왔다. 마을버스로 불광역에 도착해 역으로 내려가자 양재 방향으로 가는 5시 57분 차가 막 들어오고 있어, 그 차를 타기 위해 뛰어내려가는 승객을 보자 평소라면 나도 뛰어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하며, 반대편으로 갔다. 그리고 승차장으로 내려가 보고 약간 놀랐다. 종점이나 다름없는 대화로 들어가는 6시 10분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이 승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열차가 오려면 아직 13분이나 남았는데. 애초 나를 포함 10여 명의 승객이 있을 거로 예상했었다. 일산하면 베드타운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혀 의외다. 어쨌든 예정된 시각에 도착한 열차를 타고 6시 36분경 백석역에 도착해 1번 출구로 나가 건너편의 '고양종합터미널'을 보고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니 분위기 파악을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차를 기다리는 거로 봐서 백석역 1번 출구도 일산 지역의 등산객과 관광객의 성지였다. 6시 43분에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관광버스를 선두로 산악회 버스도 속속 도착했다. 그리고 6시 48분에 영남알프스로 떠나는 버스의 뒤를 이어 제암산으로 출발하는 버스가 들어왔다. 당연히 빨간 버스라 산악회 소속이라 생각했는데, 전세 낸 관광버스라 미처 그걸 확인하지 않은 걸 자책해야 했다. 산악회 버스와 일반 관광버스는 충전하는 방식이 달라, 산악회 버스 기준으로 충전케이블을 들고 왔으니, USB 케이블이 아니라 이 버스에서는 충전할 수 없다. 보조 배터리가 있으나 최대한 핸드폰과 패드의 배터리를 아껴야 한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어쨌든 짐칸에 배낭을 넣고 핸드폰과 패드, 카메라, 슬리퍼가 든 파우치를 들고 버스에 올라 내 자리에 가 앉았다.
이 안내산악회의 대화 출발 백석역을 경유하는 이 코스를 신청한 이유는 산행지인 전남 장흥까지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릴 테니 양재에서 출발하는 거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들머리에 도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디서 출발하든 산행에 주어진 시간은 6시간 30분으로 같으니, 이른 귀가를 위해서는 들머리인 장흥 도착이 빨라야 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해서 다른 산악회는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기 위해 제암산~일림산 종주를 무박으로 진행한다. 거기다 양재보다 10분 이른 6시 50분 출발에 죽전이나, 신갈에서 승객을 태우지도 않으니 당연히 양재보다는 최소 30분은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 왕복 1시간이다! 그런데 예정된 시각에 백석역을 떠난 버스는 한강을 건너 남진하는 게 아니라, 강변북로를 따라 북진하고 있었다. 멀쩡한 정신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어, 밖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창밖만 보고 있다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코스로 달린다는 건 한남대교까지 가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럼 7시 양재 출발보다 15분가량 늦다. 완전히 사기당한 기분으로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나마 죽전이나, 신갈에서 승객을 태우지 않는 걸 감사하며! 부연하자면 죽전, 신갈 경유 얘기가 없어 당연히 서해안 고속도로로 달릴 거라 생각한 것도 있다.
한남대교에서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나서 약간 정체가 있고 난 뒤 거침없이 달리던 버스가 주춤거려 창밖을 보니,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멀지 않았다. 당연히 최고의 정체를 보이는 그 고속도로로 접어들 거로 생각했는데, 지나치고 계속 경부로 달렸다. 경부에서 바로 호남을 탈 거란 얘기로, 이 결정은 버스 기사의 탁월한 판단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막힘없는 경부고속도를 달린 버스는 8시 42분 죽암 휴게소에서 20분간 휴식이라, 신선한 공기를 위해 버스에서 내려 볼일을 보고 만원의 휴게소 주차장에서 관광버스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둘러봤다. 거의 다 "황매산"이다. 작년까지 가끔 이용했던 산악회는 2호차까지 있어, 음 역시 황매산이 인기네 하고 버스로 돌아가다가 우리 차 바로 뒤에 있는 버스를 보니, 같은 산악회의 3호차다! 그리고 지금 이용하는 산악회에서도 3대가 출발했다. 2018년 5월 친구의 초대로 황매산을 이미 다녀왔기에 저 대열에 끼지 않은 걸 감사하며[산행기], 그리고 제발 제암산이 황매산 분위기가 아니기를 빌며 버스에 탔다.
휴식이 끝나고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인솔 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번 산행의 코스와 주의사항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코스에 대한 주의보다는 시간에 대한 주의가 많았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할 거로 생각되면 일림산까지 가지 말고 그 전인 골치재에서 탈출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제암산이 해발 807m에 불과하나, 바다와 가까워 거의 표고차 600m가량이라 생각보다 높이 올라가야 해서 초반에 힘이 들고, 그 외에는 표고차 100m 정도의 기복이 있는 산행이라고 했다. 대장은 별 게 아닌 거처럼 얘기하나 표고차 100여 미터 기복의 능선이라면 아주 힘든 산행이다. 대장도 승객이 백두대간을 달리던 팀이니 그렇게 생각하고 달리면 된다고 했다. 사실 이번 산행 구간이 호남정맥이다. 버스가 예정보다 늦게 산악지대로 접어들자 대장이 마감을 6시 20분으로 한다고 공지했다. 예정인 11시 20분보다, 30분 늦은 11시 50분에 도착한다는 얘기다. 해서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산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서둘러 등산화로 갈아 신는 등 산행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버스가 대형차량 주차장에 들어설 때 보니, 이미 4대의 버스가 주차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주차한 버스 바로 옆은 예상대로 양재 출발 같은 산악회 소속이다.
2 - 2
11시 46분 버스에서 내려 휴양림 입장료 1,000원을 내고 들어서자 바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곰재와 전망대로 갈라지는 길이다. 당연히 전망대 방향으로 가야 해서 그쪽으로 가자 한 무리의 등산객이 포장도로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고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 그런데, 그들은 위로 올라가서 모두 건물로 들어갔다. 화장실이다. 해서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이정표가 눈에 띄어 위로 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해 등산 앱의 지도를 보니, 지도에는 없는 길이다. 그리고 전망대 방향으로 가려면 그 포장도로를 따라갔어야 했다.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하산주를 위해서는 왔던 길을 돌아가는 시간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등산 앱의 지도를 주시하며 계속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현재 위치가 지도상의 정규 등산로와 가까워졌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숲을 뚫고 길을 만들며 등산로 방향으로 올라갔다.
관목의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숲을 뚫고 100여 미터를 올라가자 임도가 나타났다. 물론 등산 지도에 없는 길이다. 이정표에도. 여기서 다시 숲을 뚫고 올라갈까 하다가, 정규 등산로와 만나는 곳이 멀지 않아 보여 정체불명의 임도를 따라 150여 미터를 반대편으로 가자 저 앞에 등산객이 이정표를 사진 찍는 게 보였다. 예상대로 정규등산로다. 12시 4분에 전망대 갈림길에 도착해 기념으로 이정표를 사진으로 남기고 본격적인 제암산행을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린 지 18분 만이다. 초반에 길을 잘못 들어 낭비한 시간을 만회하고 하산주를 위해 내 나름 정한 마감 시각인 5시까지 날머리에 도착하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데, 위에 금줄과 경고문이 있는 게 보였다. 뭐 "등산로 아님" 등의 경고라 생각하고 올라가서 보니, 다른 산에서는 보지 못한 경고문이 아닌 안내문이다. 편한 길과 빠른 길을 안내하는!
그 친절함에 감사하며 당연히 험하고 급경사라 힘드는 빠른 길을 선택해 위로 올라가며, 몇 사람의 등산객을 추월했다. 처음에는 나와 같이 온 일행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후 추월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산악회에서 왔으면 대부분 배낭에 매달고 다니는 산악회 명패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럼 일행은 아니란 얘긴데 어쨌든 그렇게 헉헉대면 오르자 저 위로 다시 금줄이 보였다. 빠른 길이 다시 편한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금줄을 넘어 들어가자 이정표가 있는데, 휴양림 삼거리로 제암산까지는 1.3km가 남았다. 그 시각이 12시 20분이다. 빠른 길과 합류한 정규 등산로로 정상을 향해 13분가량 가자, 다시 빠른 길 편한 길 갈림길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었다. 그 친절함에 다시 감사하며 이번에도 빠른 길로 들어서 4분 후인 12시 37분에 위의 합류점이자 갈림길에 도착했다.
그저 위만 보고 묵묵히 올라가고 있는데, 12시 40분경 등산로는 암릉으로 바뀌어, 자연스럽게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서 바위 능선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저 위로 제왕의 관을 닮아 제암(帝巖)이라 불리는 바위가 보였다. 인솔 대장에 의하면 원래 제암산, 사자산을 합쳐 사자산이라 부르고 제암산은 그저 제암이라 불렸는데, 나중에 제암산으로 독립했다고. 그리고 옆으로 바다가 보인다. 막연히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가까울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러니 서울에서 5시간 가까이 걸렸지. 간혹 있는 암릉은 정상이 멀지 않음을 알려주고, 그래서인지 등산로는 생각보다 편하고, 주변에 키가 작은 철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자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다. 호남정맥과 만난다. 그 시각이 12시 49분이다.
호남정맥과 제암산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에 의하면 제암산 정상까지는 300m, 일림산까지는 9km가 남았다. 제암산이 멀지 않아 환호할 만한 일이나, 일림산까지의 거리에 약간 당황했다. 등산 앱이 음성으로 알려주는 거리와 속도 정보로 이미 남은 거리를 알고 있었으나, 막상 이정표를 보니 과연 5시까지 날머리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해서 2차 목표를 5시 20분으로 잡은 후 일단 1차 목표에 집중하기로 하고 호남정맥을 따라 정상을 향해 전진했다. 그런데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807m의 제암이고, 거기까지 300m에 불과해 모든 산과 능선이 발아래로 보이는데, 저 멀리 능선을 따라 붉은 띠가 보였다. 멀어서 자세하지는 않으나 그 붉은 띠 사이로 이어지는 검은 선은 등산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철쭉 터널이다. 철쭉 터널을 지난다는 즐거움과 그 경사가 만만치 않은 것에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길을 재촉했다.
제암산 정상은 두 거대한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인데,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울창한 숲에 가려 주변이 보이지 않는데 왼쪽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이 두 암봉 중 앞에 있는 봉우리로 올라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급경사의 진흙탕을 조심조심 올라가니, 봉우리는 맞으나, 정상의 두 바위 봉우리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암봉이다. 놀라운 건 그 정상에 묘가 있다는 거. 그리고 바람에 쓰러진 거로 보이는 비석도 있었다. 딱 봐도 암봉인데, 거기다 묘를 쓴 위세에 감탄하며, 실수로 올라오기는 했으나, 뭐라도 건져갈 생각에 암봉 끝으로 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묘에서 다시 내려와 정상을 향해 가는데, 우뚝 선 기둥이 보인다. 비석바위로도 불리는 촛대 바위다! 그걸 사진으로 남기고 뒤로 돌아 정상에 묘가 있는 묘봉도 찍은 후 마지막 깔딱을 올라가자 삼거리다. 제암은 뒤로 가야 한다. 해서 삼거리에서 사자산 쪽으로 조금 간 안부에 배낭을 벗어 두고 카메라와 핸드폰만 들고 제암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두 암봉 사이로 등산로가 나 있어 굳이 안부로 가지 않아도 좋았으나, 초행이 저지르는 실수를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해서 바위로 올라가려고 보니, 왼쪽 암봉은 손쉽게 올라갈 수 있고, 오른쪽보다 낮았다. 해서 왼쪽은 버리고 오른쪽에 바위 봉우리로 다가갔다. 직벽이기는 하나, 오르는 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위로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로 좀 더 먼 쪽은 쉽게 오를 수 있고, 가까운 쪽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기어올라가는 재미가 좋아 보인다. 당연히 가까운 쪽에서 가볍게 암벽을 기어올라 정상에 올라서니, 생각보다 넓다. 그리고 한쪽에 정상석이 서 있다. 풍파에 시달린 모양새로 봐서는 꽤 오래전에 설치된 거로 보인다. 일단 정상석만 사진으로 찍고 자세히 보니, 제암산이 아니라, 장흥군이라 음각되어 있다. 고로 뒷면이라는 얘기다. 해서 반대쪽을 보니, 예상대로 "제암산", "해발 807m"라 음각하고 흰색을 칠했다. 그런데 위치가 절묘하다. 정상석에서 조금만 더 가면 직벽이라, 정상석을 배경으로 찍히는 자는 문제가 없으나, 사진사는 대단히 위험했다. 해서 까만 소는 봉우리 아래 안부에 있는 정상석을 인증처로 삼고 있는 듯했다.
위험해서 차마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할 수 없어, 정상석만 인증으로 남기고, 장흥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서 주변을 감상 후 내려가려고 하는데, 내가 정상석의 앞뒤를 살피는 걸 유심 지켜보던 등산객이 가까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줄지 물었다. 물론 상부상조하자는 얘기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서로의 사진을 찍어줘, 기대하지 않았던 정상석을 배경을 찍은 인증을 남길 수 있었다. 애초 서울에서 내려올 때는 최소 5대 이상의 버스가 동원됐을 거라는 생각에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길 생각을 안 했으나, 정상석이 위험한 곳에 있는 덕분에 남길 수 있었다. 세상사 정말 모를 일이다! 인증을 찍은 후 정상석에서 벗어나 저 멀리 남해와 앞으로 가야 할 능선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원칙대로 올라왔던 코스가 아니라 다른 코스로 내려가려고 보니, 줄 서서 올라오고 있어, 다른 코스를 찾아 유연한 몸을 이용해 개구멍으로 내려왔다.
1시 9분에 제암산 정상 암봉에서 내려와 배낭을 놓아두었던 안부로 돌아가 배낭을 둘러메고 다음 목표인 사자산으로 향했다. 물론 점심시간이 지났으니 밥 먹기 좋은 장소를 찾으며. 그런데 아래에 휴양림도 있어서인지, 등산로 곳곳에 쉬어갈 수 있는 의자나, 평상이 있어 좋았으나. 이미 등산객이나, 관광객이 끼리끼리 차지하고 앉아 점심이나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종주팀과 1일 2산 팀이 서로 만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안내산악회를 이용하다 보면 서로 안면을 트게 되어 생기는 일이다. 물론 다른 산악회의 무박 팀도 있고, 청주 산악회도 있고, 와중에 관광객도! 암봉 아래에 있는 까만 소 인증 정상석에서는 한 팀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암봉에서 인증을 남겼으니 여기서 또 찍을 이유가 없어, 인증 대상이 바뀌는 틈을 이용해 정상석과 뒤로 보이는 암봉만 사진으로 남기고 바로 떠났다.
1시 12분에 사자산에서 3.8km의 거리에 있는 '상동마을' 갈림길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남해가 더 잘 보인다. 해서 남해도 사진으로 남겼다. 이후 이정표를 떠나 3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데크 전망대에 도착했는데, 가운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절묘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것도 사진으로 남기고 데크로 올라가 다시 주변의 사진을 찍었다. 와중에 인솔 대장을 포함된 팀이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는 걸 보고, 방해받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 자리를 피해주었다. 어차피 같은 대상을 사진으로 남기는 거라 대상의 크기만 다르지, 사진이 다 비슷비슷해 더 찍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주변의 철쭉을 남기며 혼밥하기 좋은 식당을 찾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올랐으니, 내려가는 건 당연한데, 제발 100m 이상 내려가지 않기를 빌며.
다시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자 돌탑이 있다. 해서 철쭉과 함께 그 돌탑을 사진으로 남기고 정상을 넘자, 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 돌탑이 있는 정상이 삼거리로 직진은 사자산, 좌회전은 장흥 공설묘지다. 당연히 직진해 내려가자, 등산로에서 조금 벗어난 왼쪽 소나무 아래에 혼밥하기 좋은 장소가 보여, 그리로 들어가 늘 먹는 거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사람이 있었다는 모든 인적을 인멸하고 나와 다시 사자산으로 향했다.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가자 이정표가 있었는데, 내려온 방향 300m 지점에 돌탑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돌탑봉? 아, 그 돌탑이 있는 언덕을 얘기한다. 봉우리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어쨌든 그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등산객이 바위를 보며 사진을 찍고 있어 자세히 보니, 무언가 의미가 있는 바위 같아 사진이 가장 잘 나올 거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었다. 당시만 해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며 이정표를 자세히 보니, 몸체에 "가족 바위"라 적힌 게 보인다. 가족 바위란다.
1시 41분에 '곰재 사거리'에 도착했다. 아래 주차장에서 막 산행을 시작했을 때 만난 갈림길에서 왼쪽 계곡을 따라 올라오면 도착하는 사거리다. 곰재를 떠나 위로 올라가자 곰재봉이 나타나고 본격적인 철쭉지대다. 당연히 철쭉 터널도 있고. 해서 동영상을 찍으며 철쭉 터널을 통과하며 계속 전진하는데, 그 길이가 상당했다. 저 앞으로 사자산이라 생각되는 봉우리를 보며 5시까지 하산주를 마실 ‘용추폭포가든’에 도착하기 위해 등산 앱이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철쭉밭을 지났다. 그런데, 정보가 이상하다. 시속 2.8km/h인데, 평균 속도는 3.6km/h란다. 이 등산 앱은 얼마 전에 업그레이드 실패 후 사용자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은 다음 몇 번의 수정으로 정상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또 사용자가 모르는 사이에 업그레이드해 등신으로 만들어 놨다. 지금까지 지난 온 트랙을 살펴보니, 중간중간 끊어져 있다. 마치 날아다니는 거처럼. 이러니, 평균 속도가 빠를 수밖에.
철쭉밭 끝에 언덕이 있고, 그 주변에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보였다. 버스에서 인솔 대장이 산행에 주어진 시간이 6시간 30분인데, 평소라면 무리 없는 시간이나, 철쭉 시절에는 사진 찍는 인파 때문에 또는 스스로 사진을 찍느라 늦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본인에게 반드시 전화하라고. 정확했다. 철쭉 터널 곳곳에 온갖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는 인파 때문에 전진이 어려웠다. 사진 찍기를 기다렸다가 가려니, 지체가 심했다. 그렇다고 한 장만 찍고 마는 것도 아니고, 이래서는 도저히 시간 내에 날머리 도착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철쭉평원 표지석을 지나고 나서는 사진을 찍든 말든 무시하고 지나갔다.
등산로 중간의 암릉을 오르고 내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사자산을 향해 가는데, 저 멀리 울창한 숲사이로 난 길이 보인다. 당연히 철쭉 터널이다. 다만, 오르막이라, 쉽지 않아 보이는 게 문제지만. 동영상을 찍으며 오르막으로 올랐는데,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그 터널을 지나자 이번 산행의 두 번째 산인 사자산이 정면에 있다. 전체 사자의 형상에서 꼬리 부분이라고 했던가. 헉헉대고 사자산 정상 바로 아래의 전망대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남해가 바로 앞이고, 정상까지 철쭉밭을 지나, 정상에 도착하니, 산 소개 글이 있다. 사자앙천형(獅子仰天形) 산으로 사자가 산으로 도약하는 형상이란다.
사자산은 까만 소 인증 대상이 아니어서 정상석 주변이 한가했다. 해서 정상석에서 인증을 찍고 있는 등산객에게 부탁해 사진 몇 장을 남겼다. 이후 정상에 있는 이정표를 보니, 정상인 꼬리에서 머리인 두봉까지 2km라고. 엄청난 크기의 사자다. 정상에서 벗어나, 다음 목표인 일림산으로 향하기 위해 남해 방향으로 난 등산로로 가자, 당연히 바로 아래에 남해가 펼쳐진다. 장관이다. 날씨만 좋았다면 금상첨화였을 산행이라 아쉬워하며 그 조망을 파노라마로 남겼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으니,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이라 데크 계단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많이 내려가지 않기를 빌며. 생각보다 급경사라 거의 뛰다시피 내려가는 바람에 시간은 단축했으나, 너무 많이 내렸왔다. 고로 일림산까지 올라가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상에서 내려와 평지나 다름없는 등산로를 따라가니 앞에 원두막형 쉼터가 있다. 그 쉼터에서 2명의 등산객이 쉬고 있고 한 명은 이제 막 출발했고. 그 쉼터는 "소나무숲 갈림길"에 있는 거로, 제암산까지는 4.6km, 일림산까지는 4.4km로 대략 이번 산행의 중간 정도다. 현재 시각 2시 46분, 목표한 5시까지는 2시간 14분이 남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3시간 정도 걸렸으니, 목표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 서둘러야 한다. 사진도 이동 중에 찍어야 하고, 습도가 높아 땀이 비 오듯 하는 건 이동 중에 배낭 옆주머니에서 500mL 생수를 꺼내 마셨다. 1L 날진 통에 든 얼음은 꺼내지 않아도 될 분위기고. 힘겹게 앞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자, 삼거리다. 그것도 자전거 도로 삼거리. 이정표 옆 지도에 의하면 일림산까지는 2.7km, 20분 만에 1.7km를 왔다. 이 속도를 유할 수 있다면 목표 시간 내에 도착할 수도 있다.
삼거리를 떠나며 숲 사이로 보이는 정상이 붉은 산이 일림산이다. 일림산 방향에서 오는 등산객에게 교차하던 부부 등산객이 뒤에 아주 좋은 철쭉밭이 있다고 알려주자, 그들끼리 했던 말이 '일림산 한 자락이 여기에 떨어져 나왔나 보네?'였다. 그 말을 들은 그 부부와 나 또한 일림산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그런데, 1.5km가량 떨어진 빨간 봉우리 정상을 보자, 그들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속도를 유지하며 평지나 다름없는 길을 가자 사거리가 나타났다. 골치 아픈 고개라 "골치재"라 부른다는 골치재다! 인솔 대장이 마감 시각을 맞추지 못할 거 같은 사람은 포기하고 내려오라고 했던 사거리다. 여기서부터 등산로는 길이 넓지는 않으나 거의 임도 수준이라, 앞으로 맞이하게 될 일림산 깔딱에서의 지체를 상쇄할 수 있었다.
3시 32분에 다시 원두막형 쉼터가 나타났는데, 평지가 끝나고 깔딱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 쉼터로부터 헉헉대며, 8분가량 올라가자 제암산을 올라갈 때 봤던 안내문이 나타났다. 빠른 길과 편한 길 갈림길 안내! 아주 당연히 빠른 길로 편한 길 속도로 올라갔다. 올라가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일림산 정상에 4시까지 도착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 갈림길에서 6분 정도 올라가자 ‘골치산 작은봉’이다. 정상에는 아래 깔딱 시작 지점과 같이 원두막형 쉼터가 있었다. 정상 갈림길 이정표에 의하면 일림산까지 남은 거리는 1km, 현재 시각 3시 46분. 고로 목표한 4시까지 일림산에 도착하려면 14분 이내에 1km를 가야 한다. 해서 이것저것 볼 거 없이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조금 더 가자 앞에 봉우리가 보였다. 작은봉에서 1km를 오지는 않았으나, 이정표 오류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라, 당연히 일림산이라 생각하고 정상 도착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동영상을 찍으며 올라갔다. 그런데 아니었다. 일림산이 아니라 ‘골치산 큰봉우리’다. 작은봉이 있으니 큰봉도 있는 게 당연한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림산 정상까지는 600m 남았고, 4시까지는 9분 남았다. 9분 만에 600m는 달성할 수 있는 거리다.
어렵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에 보이는 붉은 정상을 향해 갔다. 아무리 목표가 중요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깐 서서 사진 찍는 걸 잊지 않았다. 키를 넘는 철쭉 터널에 들어서서 동영상을 찍으며 정상을 향해 가는데, 그 터널내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삼거리가 있었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100m, 현재 시각 3시 59분, 평지도 100m를 1분만에 가는 게 힘든데, 산 정상 깔딱은 불가능이라, 4시까지 오르는 목표는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최대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서둘러 올라가 목표보다 3분 늦은 4시 3분에 일림산 정상에 도착했다. 물론 올라가는 중에도 뒤로 돌아서서 제암과 일림산 철쭉밭을 사진으로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조금 춥기까지 한 정상에는 등산객, 관광객 등 꽤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정상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펼쳐진 넓은 철쭉밭에 다 흩어져 있어 번잡하거나, 시끄럽지는 않았다. 정상석 앞에는 부부가 서로의 인증을 찍어 주고 있어, 먼저 아래로 보이는 바다를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정상석으로 돌아오자, 그 부부가 사진을 부탁했다. 바라던 바라, 바로 사진을 찍어 주고, 나도 부탁해서 인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에서 주변 사진을 몇 장 찍고 하산하려고 보니, 길이 너무 많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주변의 등산객에게 길을 물어도 다 통한다는 얘기만 할 뿐이다. 해서 일단 호남정맥인 한치재로 가는 길은 버리고, 용추계곡 방향 중 오른쪽으로 보이는 능선으로 내려가기 위해 그 방향으로 10여 미터를 가서 바닥에서 의외의 표지를 발견했다. 금요일 심야에 출발한 다른 산악회의 무박 팀이 놓은 방향 지시다. 그걸 보자 구세주를 발견한 기분이다. 이후 산행이 끝날 때까지 갈림길마다 그 표지의 도움을 받았다.
능선으로 하산하는 길의 철쭉은 입이 쩍 벌어지게 했다. 감탄을 연발하며 5시까지 가든으로 가야 한다는 목표도 망각한 채 서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대한민국의 철쭉이 유명하다는 산은 거의 다 가봤으나, 일림산보다 좋은 산이 없었다. 철쭉밭을 통과해 건너편 봉우리에 올라 다시 일림산 정상 방향을 바라보고 감탄을 연발했다. 물론 사진도 찍고 그사이에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관광객의 그걸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고 내게도 찍으라는 걸 바빠서 정중히 거절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기념사진 한 장 남기는 것도 괜찮아 다시 부탁해서 인증을 남겼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내려가며 절터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개로 절터 방향은 계곡으로 바로 내려가고, 발원지 방향은 능선으로 가는 거로 생각됐다. 물론 절터가 짧고. 그런데 절터로 가는 길을 찾으며 갔으나 보이지 않는다.
저 앞 데크에 야영하는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한번 바라보고 지나치려는데 그 야영장으로 가는 길목에 지도가 서 있었다. 혹시 거기를 통과해 절터로 내려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그 방향으로 들어가 지도를 자세히 확인했다. 데크가 있는 '현위지'에는 어떠한 갈림길도 없다. 절터로 내려가는 길은 '일림산정상'인 ③과 '봉수대삼거리'인 ④ 사이에 있다. 말인즉 지나쳐 왔다. 분명 정상 부근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지 살폈을 때 못 봤는데. 다시 돌아가는 건 시간을 허비하는 거라 발원지 방향으로 빠르게 가는 길을 선택해, 4시 20분에 용추계곡에서 2.2km 떨어진 '발원지 사거리'에 도착했다. 남은 시간 40분, 남은 거리 2.2km, 하산길이라 내리막, 5시까지 용추폭포가든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역시 그 사거리에도 발원지 방향으로 바닥에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었다. 사거리에서 200m를 내려가자 발원지가 나왔다. 처음 이정표에서 발원지라는 글을 보고 식수원이라 생각했는데, 발원지 앞에 서 있는 소개 글을 보니, 아니었다.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보성강의 발원지다. 이산 저산 가리지 않고 다니다 보니 웬만큼 유명한 강의 발원지는 다 가봤는데, 거기에 보성강 추가다. 발원지에 왔으면 그냥 갈 수 없는 게 당연해 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평소 매달고 다니는 소주잔을 꺼내 졸졸 흐르는 물을 퍼마셨다. 그리고 두 번째 퍼마시는 과정에 흰 파이프를 발견했다. 바로 코앞에 두고도 빠른 속도로 내려오느라 숨이 가빠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3잔의 보성강 물을 마시고 발원지를 떠나 계곡을 따라 난 등산로로 하산했다. 발원지 방향의 등산로는 능선 길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그렇게 길을 내려가자 저 아래로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 사거리로 어디로 가든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대부분 등산객은 임도를 선택해 내려갔다. 등산을 와서 임도로 내려간다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아 계곡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물론 그 길이 임도보다 짧다. 그러나 임도보다 빠르지는 않을 거다.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하며 등산로를 따라가자 그렇게 찾아 헤맸던 절터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났다.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자 모든 계곡이 그렇듯이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 가서 보니 폭포라고 부르기에는 작았으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게 시원해 동영상으로 남겼다. 그리고 계속 내려가자 다리가 보이고 그 조금 위 계곡에서는 씻고 있는 등산객이 보였다.
오랜만에 계곡에서 세수와 세족을 하고 싶은데, 현재 시각 4시 53분으로 용추폭포가든까지의 거리를 알 수가 없어 일단 그냥 가기로 하고 다리를 건너려고 하는데,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용추계곡 주차장 100m! 볼 것도 없이 다시 돌아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등산화와 양말, 웃통을 벗고 물로 들어가 먼저 세수를 하고 발을 씻었다. 얼마 만에 계곡에서 하는 세족인지 기억도 없다. 백두대간을 달리다 보니, 계곡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해서 산행기를 검색해보니 2021년 8월 8일 천고지 산행으로 청태산, 대미산 연계 산행[산행기] 이후 처음이다. 빠르게 세수와 세족을 마치고 다시 복장을 갖춘 후 다리를 건넌, 시각이 5시 정각이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주차장이 나타났고, 주차장 끝의 대형지도가 호남정맥을 보여 주고 있어 그걸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왼쪽으로 식당이 보였고, 등산객 10여 명이 하산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시각이 5시 10분경으로 목표보다 10분 늦은 시각이자, 전남 보성, 장흥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연계 종주 산행이 끝난 시각이다.
3
산행 전 지도로 파악하고, 산악회 버스에서 인솔 대장이 언급한 식당에 도착했다는 것에 대단히 만족해 숨을 헐떡이며 들어섰는데, 식당 분위기가 자리 잡기 애매해 잠깐 혼란스러웠다. 눈비를 막아주는 지붕 아래 메인 테이블에는 한쪽에서는 프라이팬에 굽고 다른 쪽에서는 파전 등의 안주로 신나게 하산주를 마시고 있는 10여 명의 팀과 그들과는 떨어진 주방 바로 앞 같은 야외지만, 눈비를 막을 게 아무것도 없는 4인 테이블에 혼자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는 등산객이 있었다. 일단 급한 게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무언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방 입구에 간단히 적힌 차림표를 봤는데, 적당한 게 없었다. 그나마 어디나 통하는 도토리묵 무침도 보이지 않아, 약간 당황하고 있는데, 젊은 남성이 나와 인원수와 뭘 주문할 거냐고 묻는다. 몇 명이야, 손가락 하나로 해결했는데, 뭘 먹을 거냐는 답이 없어 고민하다가, 혼술하는 등산객을 바라보자, 그 젊은 친구(주인장의 사위)가 바로 알아채고 "똑같이 할까요?" 한다. 당연히, "네"하고 나서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며 아무리 둘러봐도 적당한 자리가 없어 혼술하는 등산객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몇 분 있다가 주문한 막걸리와 파전이 나와 일단 막걸리 한잔하고, 나보다 먼저 도착해 메인 팀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술하고 있던 등산객과 대화를 나눴다. 현재 이 술집에 있는 모든 등산객은 같이 와서 같이 갈 일행이 맞고, 본인을 포함 그 모두는 일림산까지 가지 않고 골치재에서 하산했다고. 그리고 내가 일림산에서 이 시간에 내려왔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뭐 그렇게 시작된 대화의 물꼬는 일산에서 출발하는 인연이 쉽지 않은데, 저들과 떨어져서 혼자 마시는 이유에 대한 거까지 이어졌다. 메인 테이블에 있는 멤버는 일산 출발 백두대간 종주 팀으로 상호 간에 끈끈한 정이 있으나, 본인은 딱 한 번 따라가 보고 그 이후에는 대간 산행을 하지 않아 낄 수 없다는 거다. 그 얘기를 듣자 백석역에서 떠날 때부터 궁금했던 모든 게 해결됐다. 해서 각자 파전 한 장, 막걸리 한 병을 차지하고 철쭉 산행에 대해 각 산의 특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일림산 정상에서도 한기를 느꼈지만, 야외 술자리는 한기 정도가 아니라 오한이 일 정도였다. 해서 배낭에 들어있던 온갖 옷가지를 꺼내 걸쳐야 했다. 나만 그런가, 주위를 둘러보니, 일산 출발 대간 팀도 마찬가지라 무언가를 꺼내 입기 바빴다. 역시 일기예보를 보며, 추울 거 같다는 예상이 적중했다. 와중에 그나마 대화를 나누던 산꾼이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버스로 가는 바람에 혼자가 된 상태에 술이 부족해 막걸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런데, 파전에 막걸리 두 병은 내가 먹을 양이 아니다. 해서 파전 1/3 정도와 막걸리도 비슷한 양을 남기고 6시 5분경 자리를 정리했다. 역시 배부른 술은 나와 안 맞는다. 인솔 대장을 포함한 대간 팀도 정리하고 있어 먼저 일어섰다. 역시 나는 배부른 술은 안 맞는다.
가든을 나와 버스가 기다리는 대형차량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폐가가 된 건물이 있어 과거 용도가 무언지를 보니, 모텔 겸 단란주점이다. 2000년대 초반 아무리 룸살롱과 단란주점으로 흥청망청했기로 오지나 다름없는 여기에 모텔 겸 단란주점을 지을 생각을 한 그 건물주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며, 200여 미터를 내려가자 저 아래로 주차해 있는 빨간 버스가 보인다. 그 시각이 6시 9분으로 대장이 공지한 마감보다 11분 빠르게 도착했다. 내려올 때와 같이 배낭을 짐칸에 싣고 보조 배터리와 핸드폰, 카메라만 들고 버스에 타,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슬리퍼고 갈아 신고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런데 막상 서울로 출발한 시각은 약간의 해프닝이 발생해 공지보다 5분가량 늦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버스 실내등이 들어와 깨어보니, 버스는 휴게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휴식에 주어진 시간은 15분. 해장이 필요해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보니, 대천이다. 초면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해장이 중요해 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매의 눈으로 가장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메뉴인 떡라면을 주문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볼일을 보고 왔으나, 아직 내 차례가 아니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버스 출발 7분 전에 주문한 떡라면이 나왔다. 시간은 없는데 라면이 뜨거워 내 인생 처음으로 작은 접시에 담긴 김치를 라면에 부어버리고 그 접시에 라면을 덜어 식혀 먹었다. 물론 시계를 계속 주시하며. 와중에 내 옆자리에 버스 기사가 나와 같은 라면을 먹고 있는 걸 확인하고, 그 이후로는 시계가 아니라 기사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그가 음식을 정리하는 순간 나도 같이 정리하고 그가 식당을 나가자 나도 따라 나가 버스로 갔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나서 초면의 휴게소와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 지도로 확인해 보니,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니 내려올 때는 경부, 호남이었는데, 올라갈 때는 왜 서해안인지 궁금했지만, 어쨌든 호남, 경부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그래봐야 백석역 도착 시각이 11시 가까울 시각이라 집으로 돌아갈 교통수단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해서 교통 앱으로 확인해보니, 백석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200여 미터 거리의 중앙버스정류장에서 집 방향으로 가는 좌석 버스가 늦게까지 있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어는 순간 익숙한 도로를 달려 한강을 건너 백석역에 10시 50분경 도착했다.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 둘러메고, 정신없이 200여 미터 아래에 있는 중앙버스 정류장으로 가 9701 좌석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몇 시에 도착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모름!
안내산악회 계획 A 코스인 '제암산휴양림 주차장 → 곰재 갈림길 → 휴양림 삼거리(빠른 길) → 휴양림 삼거리(호남정맥 사치재) → 묘봉 → 촛대바위 → 제암산 → 돌탑산 → 철쭉평원이정표 → 곰재산 → 사자산 → 골치산 → 삼비산(일림산) → 일림산 → 발원지 사거리 → 용추계곡 → 용추폭포 주차장 → 용추폭포가든'의 16.88km(트랭글), 5시간 25분 철쭉 산행을 즐겼다. 그동안 문제없던 등산 앱을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바보로 만들어 놓아 정확한 데이터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당연히 이미지에 있는 거리와 코스, 전체 소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다. 그보다는 스마트 워치의 데이터가 더 믿을 만하다. 와중에 트랙을 동영상으로
비록 시간에 쫓겨, 날을 넘기기 전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초조한 산행이었지만, 남도에서 또 다른 명산을 발견한 아주 즐거운 산행이었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지금까지 다녀본 철쭉 산행의 최고봉은 단연코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코스다.
체력적인 걸 포함 다양한 이유로 그 구간을 다 갈 수 없다면, 산행의 재미와 철쭉이라면 제암산을, 순수하게 철쭉이라면 일림산을 권한다.
첫댓글 당일치기 장거리 산행에다가 산에서 시속 3km 정도로 달린 거리도 엄청나고, 빠듯한 시간에 하산주도 배불리 마시고, 그 와중에 찍은 사진도 많고, 끝나고 정리한 산행기도 무지 길구만.
너 아니면 못할 산행이었겠다.
왜 무박 산행을 하는지 깨달은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