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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봉 공원에서 내려다 본 순천 시가지 일원
'동국여지승람'에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이라 일컬어졌다던 순천은 16개동, 1개읍, 10개면을 관할하는 큰 도시다. 익산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전라선 철도와 송정리에서 부산의 삼랑진에 이르는 경전선 철도, 전주에서 여수에 이르는 경전선 철도의 교차지역이며, 17번 국도와 2번 국도의 교차점이기도 하다. 또한 순천만을 통한 해상교통도 편리한 곳이다.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해 북은 산지가 남은 해안을 접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인간의 생활이 용이한 곳이었다. 죽내리, 월평 등의 구석기 유적부터 내륙에서 처음 확인된 대곡리나 대치리 등지의 신석기 유적이 있으며 주암댐을 만들면서 행해진 발굴을 통해 많은 수의 청동기 유적인 고인돌과 집자리 등은 이 일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큰 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그 흔적은 고인돌공원에) 삼한시대엔 마한의 54국 중 하나인 분차군(보성 벌교와 승주 낙안일대) 지역에 한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순천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이름은 '모래드리'로 생각된다. 이것이 '사평'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순천이 행정구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백제의 무진주에 속해 삽평군(여천, 광양일대), 분차군, 둔지현(주암면일대)으로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전대와 별 차이 없이 명칭만 바뀌어져 삽평군은 승평군으로, 분차군은 분령군으로, 둔지현은 곡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별 변화가 없었던 것 이 지역이 신라 하대 견훤의 사위 박영규와 장수 김총의 등장으로 왕건 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승평군은 승주로 격상되었다.
고려 성종2년(983)에 승주목으로 승격, 이후 해양도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뒤 다시 승평군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2년 순천부가 되었으며 조선 개국과 함께 순천도호부가 되었다. 이때 순천도호부의 범위는 현재 순천은 물론 인근의 여수, 여천을 모두 포함한다. 즉 호남 3대 거읍이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전남 동부지역을 모두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한말 지방제도가 크게 고쳐지면서 순천도호부가 군으로 바뀌고, 인근의 도서가 돌산군으로 분리되었다. 얼마 뒤 여수, 여천이 여수군으로 독립하였다.
일제시대에 순천시 지역에 순천읍이 설치되고 낙안군이 폐지되었고, 1949년 8월 14일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읍을 제외한 순천관내가 승주군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하여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됨으로써 현재는 순천시가 되었다.
순천의 아픔 = 반공국가의 아픔
발발 61년이 됐지만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아픈 역사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종해 반란을 일으킨 이 사건은 오랫동안 ‘남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북한과 연계된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서술돼 왔다.
역사적 진실은국군 14연대가 일으킨 이 사건은 아무리 국가의 명령이라도 동족을 학살할 수는 없다며, 제주도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정의롭게 거부한 사건이었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연구사는 최근 출간한 ‘빨갱이의 탄생’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이같은 냉전 반공주의식 해석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이후 국민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국가폭력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라면서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억압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 빨갱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키고, 반공 체제를 형성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였다. ▲ 경찰과 우익 민간인 무장대원이 운동장에 반란 용의자들을 모아놓고 신문중이다.
실제 지난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여순사건 때 전남 순천지역에서 민간인 439명이 국군과 경찰에 불법적으로 집단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경고문을 발표해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진압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면서 국가에 사과와 위령사업을 권고했다.
▲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 <LIFE>, 촬영일 : 1948.11.1,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김 연구사에 따르면 일제 시기와 해방 직후까지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급속히 유포된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좌익 세력에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의 이미지를 덧씌워 극단적인 적대의식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김 연구사는 빨갱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일에 군대, 경찰 같은 국가 기구뿐만 아니라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도 가세했다고 지적했다.
▲ 반란에 가담했던 14연대 장병들이 체포 결박당하여 학교로 수송되어지고 있다.
김 연구사는 이어 이승만 정부가 여순 지역을 진압한 후 남한 사회 전체를 반공체제로 재편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군대는 대대적인 숙군을 통해 반공군대로 무장했고, 다수의 우익청년단은 대한청년단으로 재편됐으며, 교육계에선 좌익 혐의를 받은 교사와 학생들이 축출됐다.
1949년 계엄법과 국가보안법 제정은 반공 체제를 확고히 하는 법적인 토대가 됐다.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는 반공체제를 유지시키는 주요 원천이었다. 김 연구사는 “보수 진영이 그동안 억압된 여순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일부 진보진영이 여순사건의 진실에 대해 보이는 불편함과 침묵 역시 이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순사건에서 나타났던 국가폭력의 문제, 국민 형성의 논리, 반공주의 문제는 지금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여순사건이 남긴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더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암매장 되어있는 ‘여순사건’을 화해와 평화라는 큰 이름으로 꺼내려 합니다. 여순사건 문제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인간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며 국가의 도덕성과 사회의 건강성을 되찾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창립선언문
“오늘 여순사건 해결의 서막이 올라 기쁘고 또 기쁘다. 여순사건 당시 우리 지역에서는 1만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소위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초법적인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휘둘리며 학살당했다. 이제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의 배경과 진상을 명확히 밝힐 수 있는 방법은 통합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 1998년부터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투쟁해오고 있는 단체의 최근 감회
▲ 1960년대 순천역, 역명 보다도 더 크게 반공, 방첩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옛말에 “여수에서 돈자랑 하지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말라”라는 얘기가 있다. 그 만큼 순천에는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많다는 데서 나온 말일터...... 예부터 순천에는 기방과 같은 향락시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노라하는 기생들이며, 잘생긴 한량들이 모여들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접한 여수에서 번 돈이 순천에서 소비되었다 하니 이 말이 과연 속설만은 아닌듯하다.
순천은 남해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를 통하여 서울 부산은 물론이고, 여수와 광주, 광양, 남원 등 전라도 각지를 잇는 국도들까지 사통팔달로 뚫여있어 진작부터 전라도, 동남부권의 교통의 요지로 군림해왔다. 물론 철도라고 예외는 아니다. 경남 남부를 횡단하는 경전선과 전라도 동부지역을 종단하는 전라선이 합류하고 분기하는 지역이어서 일찍이부터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아왔다. 뿐만아니라 경전선-호남선을 경유해 광주나 나주, 목포등 호남지역의 주요도시들까지 이어주어 호남지방에서 순천역이 점하는 위치는 상당하다.
27만여명이 모여사는 순천은 전남에서 여수에 이은 제 2의 도시이다. 별다른 산업의 발달없이 오늘날의 순천이 도내에서 이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교통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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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여수에서 돈자랑 하지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말라”라는 얘기가 있다. 그 만큼 순천에는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많다는 데서 나온 말일터...... 예부터 순천에는 기방과 같은 향락시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노라하는 기생들이며, 잘생긴 한량들이 모여들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접한 여수에서 번 돈이 순천에서 소비되었다 하니 이 말이 과연 속설만은 아닌듯하다.
순천은 남해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를 통하여 서울 부산은 물론이고, 여수와 광주, 광양, 남원 등 전라도 각지를 잇는 국도들까지 사통팔달로 뚫여있어 진작부터 전라도, 동남부권의 교통의 요지로 군림해왔다. 물론 철도라고 예외는 아니다. 경남 남부를 횡단하는 경전선과 전라도 동부지역을 종단하는 전라선이 합류하고 분기하는 지역이어서 일찍이부터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아왔다. 뿐만아니라 경전선-호남선을 경유해 광주나 나주, 목포등 호남지역의 주요도시들까지 이어주어 호남지방에서 순천역이 점하는 위치는 상당하다.
27만여명이 모여사는 순천은 전남에서 여수에 이은 제 2의 도시이다. 별다른 산업의 발달없이 오늘날의 순천이 도내에서 이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교통의 힘이었다.
[후원참여단체]
박성훈 교수(순천대 환경공학과 교수) 박병섭(순천여고 역사교사 역사학자) 정병철(순천유족회대표) 최경필(전남대 국문학과 시인, 광남일보 사회부 차장) 김순(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광주전남연대회의 집행위원장) 장경자(여순유족회 유족) 이성계(철도노조호남지방본부장) 이은호(철도노조호남지방조사국장) 최성문(순천대 여순연구소 연구원) 서정분(전남혁신교육시민모임회장) 강병택(정의당, 고흥지역 보도연맹 유족) 임승관(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장) 이행섭(민주노총공공운수노조) 김효승(순천환경운동연합) 장채열(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장) 박병찬(순천유족회 사무국장) 최현주(순천대 여순연구소장) 이성계(철도노조 호남지방본부장) 이윤호(철도노조 호남지방 조사국장) 최성문(순천대 여순연구소 연구원) 서정분(전남혁신교육시민모임회장) 강감정(순천시민) 서정열(개헌촉구 천만인 서명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첫댓글 민족정기를 확립하기위해 올바른 역사의기록이 바탕이되어야합니다.수많은 민중을 학살한 이승만정권은 4.19혁명에의해심판울받았습니다.그러나 군부독재가 정권을장악하고 역사의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습니다.그라고 그군부독재권력은 대를 아어 승계되었지만 촛불항쟁으로 몰락되었습니다.차디찬 감방에서 지난날의 영화를 생각하고있겠지요.수많은 민중들이희생다한댓가를 치루어야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