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은 연기군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금강은 금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또 금강을 따라 선사유적이 분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곳이다.
월산리의 고인돌과 진의리 상모골의 청동기 유적은 선사시대 중 청동기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54개국 중 하나였으며 천안지역의 목지국(目支國)과 공주지역의 불운국(不雲國)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백제 때에는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에 연기(燕岐)로 고쳐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에 속했으며 고려 현종9년(1018)에는 청주에 속했으며 명종2년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4년에 전의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연기현으로 환원하였다.
조선말기인 고종32년 1895년에 연기현이 연기군으로 바뀌어 연기군청을 연기현에서 관아로 쓰던 건물에 연기군청을 만들고 업무를 보다가 1911년 연기군청을 조치원으로 옮기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의군과 합하여 연기군(燕岐郡)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이곳은 연기군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남면(南面)이라 불렀으며 관아로 쓰던 건물은 연남초등학교의 전신인 배달학교가 되었다. 지금은 남면의 연기리가 과거 연기현의 중심도시로 연기향교가 있으며, 관아 흔적은 연남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는 초석들이다.
남면 양화리에 가면 부안임씨(扶安林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600여년 동안 그 터전을 지켜온 것은 입향조 임난수(林蘭秀)가 이곳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트린 것이다. 임난수는 고려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 아래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면서 모든 벼슬을 버리고 금강변에 은거하였는데 이곳에 정착하게 된 동기가 전월산을 바라보니 산이 마치 수풀림(林)자와 같아 자신의 성과 비슷하므로 이곳에 터를 잡는다. 그리고 매일 전월산에 올라 고려의 서울인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묵상에 잠겼는데 그곳을 상려암(想麗岩)이라 부르고 그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마을 가운데에 있다.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숭모각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임난수가 살던 곳으로 그가 죽자 그의 손자인 임중이 이곳에 사당을 지은 것이 오늘날 숭모각으로 변하고 임난수의 사당은 독락정으로 옮겼다.
5강 8정 중 강이름이 다섯인데 오강(吳江-동진 하류), 초강(楚江-부강 하류), 금강, 백강(백마강), 청강(백마강 하류)이며, 8정은 8개의 정자로 합강정(合江亭), 독락정(獨樂亭), 한림정(翰林亭), 탁금정(濯錦亭), 금벽정(錦壁亭), 사송정(四松亭), 청풍정(淸風亭), 수북정(水北亭) 이다. 옛날에는 논산과 강경의 상선들이 이들 8정을 지날 때에는 나루세를 물어야 했다고 한다.
진의리, 양화리, 방축리, 갈운리 뒷산에 원수산(元帥山)이 있다. 산 모양이 붓의 끝과 같이 뾰족하여 문필봉이라고도 불렀고 봉우리가 큰 것 작은 것 두 개라 형제봉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원수산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연기대첩에서 제1차 전투는 서면 쌍전리에서 공주금강까지 30여리간 시체가 즐비하도록 승리를 거두었고 이때 살아난 합단군이 다시 정비하여 원수산에 진을 치고있던 고려 군사와 싸워 승리를 거두어 이곳을 2차 전투지로 부른다. 이때 높은 장수가 지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원수산”이며 산의 동쪽 중턱에는 수백년 동안 지내오고 있는 원수산제가 해마다 십일월 초하루 자시(子時)를 기하여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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