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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논문은 신학논단 74호 (2013)에 실린 글입니다.
이세종의 생애와 영성사상에 관한 연구
유은호 (서강대학교 박사과정수료, 영성신학)
I. 들어가는 말
개신교회가 영성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개신교회는 1970년대 초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 교회협의회에서부터 영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84년 프랑스의 앙드시에서 개신교, 정교회, 로마 가톨릭, 오순절 교회들이 함께 모이면서 에큐메니칼적인 차원에서 영성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세종(李世鍾, 1877-1942)의 영성사상에 대한 연구도 에큐메니칼 영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세종의 영성사상이 기독교 종교전통을 모두 포함하는 통전적 에큐메니칼 영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세종은 100여 년 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등광(燈光)리의 작은 산골마을에 살았던 농부 출신의 이름 없는 개신교회 평신도였다. 그러나 비록 그가 산골 농부였지만 개신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리던 최흥종 목사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 다석 유영모 선생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세종은 화순지역의 가톨릭 교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에 에큐메니칼 영성과 한국적 토착 영성의 관점에서 이세종의 영성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1937년 당시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이세종을 찾아가 만난 후에 그를 가리켜 서방교회의 성인 못지않은 훌륭한 영성가라고 평가한 바가 있다. 실제로 이세종은 어느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오직 성경만을 독학함으로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났던 영성이 나타났으며, 종교개혁의 영성과 한국적 토착영성이 통전적으로 나타났던 인물이다.
본 논문은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자료를 참고 했다. 첫째는 이세종의 1차 자료로 “이세종의 설교집”과 이세종의 “어록”을 참고 했다. 둘째로 이세종의 2차 자료인 1947년 이세종의 직제자인 이현필이 가르치고 제자들이 받아 쓴 “우리의 거울”을 참고 했다. 이 노트는 이세종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셋째는 1987년 엄두섭이 이세종의 제자들이 남긴 자료들과 제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쓴 이세종의 전기『호세아를 닮은 성자』를 참고 했다.
이세종 사후 50년이 지나면서부터 이세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윤남하는 이세종을 가리켜 “성성(成聖)의 경지에 도달한 분”이라고 말했으며, 최흥욱은 이세종을 가르켜 한국교회 영성사의 큰 맥을 이루어 놓은 분이며, 한국 개신교회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전해 준 ‘한국적 토착 영성인’이라고 말했다. 엄두섭은 이세종을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인물이라고 평가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세종의 영성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언급했지만 실제로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없는 형편이다. 특히 에큐메니칼 영성의 관점에서 동방과 서방과 개신교회의 영성의 관점에서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논한 것은 없다. 이 논문은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동방과 서방 그리고 개신교회의 에큐메니칼 영성적 관점에서 비교 연구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이를 위해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과의 외형적 유사점을 근거로 이세종의 신앙유형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II장에서 이세종의 생애에 대한 객관적 사료들을 통하여 이세종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사실관계를 재 규명 할 것이다. III장에서는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에큐메니칼 영성적 관점에서 살펴 볼 것이다. IV장에서는 이러한 연구의 결론으로 이세종의 영성사상이 동방과 서방 그리고 개신교회가 에큐메니칼 영성으로 상호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로 제시 해 볼 것이다.
II. 이세종의 생애에 대한 관심
1. 이세종의 탄생과 사망 년도에 대한 재 규명
이세종은 1880년에 전남 화순군 등광리 187번지에서 아버지 이정백씨와 어머니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세종의 탄생 년도에 대해서는 이세종의 전기 작가들 간에도 일치하고 있지 않다. 이세종의 직제자 이현필은 “우리의 거울”에서 이세종은 1880년에 태어나 1942년 봄에 사망했다고 말했다. 엄두섭은 이세종은 1879년에 태어나 1942년 음력 2월 63세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엄두섭은 이세종이 30세에 자기보다 16살 어린 부인과 결혼했다고 했다. 이세종의 부인 문재임은 1971년 2월 17일에 77세로 사망했다. 이세종의 부인이 1894년생이라면 이세종의 탄생은 1878년생이 된다. 또한 엄두섭은 이세종의 족보를 통해 탄생은 1879년 7월 1일생이며, 사망은 1944년 3월 15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엄두섭은 자신의 책에서 이세종의 탄생과 사망 년도가 일치하고 있지 않다. 윤남하는 탄생은 1879년, 사망은 1942년 음력 2월이라고 했다. 차종순은 탄생을 1883년 경으로 보기도 했다.
이상을 통해 보면 이세종의 탄생을 이현필은 1880년, 엄두섭은 1878년 혹은 1879년, 윤남하는 1879년, 차종순은 188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가 이세종의 제적 등본을 통해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이세종은 1877년 7월 1일에 태어나 1942년 6월 4일 오후 9시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세종 전기 작가들의 추정보다는 공식적인 문서에 나온 이세종의 탄생과 사망 년도가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2. 이세종의 회심과 교회생활
1936년 당시 59세의 이세종을 직접 만난 윤남하는 이세종의 모습을 기록하기를 “키는 170cm가 되어 보였고 체중은 50kg쯤 되어 보이는 깡마른 분인데 한복을 진한 회색으로 물들여 입었고 검정 고무신을 맨발에 신고 있었다”고 했다. 이세종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님 댁에 살면서 가난을 면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이세종은 지게가 닳아지도록 열심히 일하여 1920년경에는 등광리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세종은 나이 30세에 열 네 살의 시골 처녀 문재임과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이세종은 무당의 말대로 개천산(開天山) 기슭에 산당을 지어 놓고 아들을 얻기 위해 치성을 쏟았다. 그래도 아들이 없자 병들어 눕게 되었고, 무당마저 죽게 되었다. 이 일이 이세종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40세쯤 이세종은 성경을 구해 읽는 중에 예수를 믿고 회심하게 된다. 그리고 등광리에서 노라복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을 때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등 여러 교파를 알아 본 후에 장로교가 가장 낫다고 여겨 장로교를 택한다. 아마도 말씀을 읽고 회심한 이세종에게 말씀을 강조하는 장로교가 가장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
정경옥에 의하면 이세종은 “때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 한다... 주일이 되면 혹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혹은 전도나 구제하러 나가기도 하고 혹은 혼자 산에 올라 명상하기도 한다.”고 했다. 정경옥의 말대로 이세종은 사경회가 있을 때는 광주교회에 갔으며, 자주 나주 다도면에 있는 방산교회에 나갔다. 그 곳에서 제자 이현필을 만나기도 했다. 이세종은 광주 중앙교회 최흥종의 소개로 저녁 예배 강사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세종은 주로 자신이 세우다시피 한 동산교회에 다녔다. 엄두섭에 의하면 이세종은 이 동산교회에서 3년이나 설교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세종은 등광리의 자신의 산당에서 주로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당시 등광리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산당에서 홀로 혹은 제자들과 함께 가정예배 형식의 예배를 드렸다. 이세종이 활동하던 당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은 화순 지방의 안학수와 한국의 젊은 평신도 지도자들, 특히 김교신을 비롯한 여러 무교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세종은 이들과 같이 평신도로서 성경을 가르치며 독자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지만,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했다는 점은 그 당시 다른 평신도 무교회지도자들과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이세종은 당시 기성교회가 행락주의로 흐르고, 환난당하면 안 모이고 평안하면 갈아치우는 것과 행위 없음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비록 그가 당시의 무교회주의자들과 비교해서는 교회를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는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 것 같다.
3. 이세종의 기부의 삶
이세종은 기성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장로교 전남노회에 재산을 기부하는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다. 정경옥은 이세종이 10여 년 동안 40여 두락의 재산을 모았다고 했다. 최흥욱은 이세종의 재산이 논 100마지기(약 15,000평)가 있었다고 했다. 이세종은 적게는 40두락 많게는 100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종은 40세에 예수 믿고 약 17년이 지난 1934년 당시 57세의 나이에 그 동안 모아 두었던 재산의 절반인 땅 약 3,000여 평을 전남노회에 기부했다. 그리고 화순군 도암면 면사무소에도 논 두 마지기(약 400여평)를 기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재산은 직접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겨우 연명할 것만 남겨 두었다고 한다. 이세종은 이러한 기부 외에도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구제를 했다. 이외에도 이세종이 빚 문서를 불사른 것까지 하면 이세종의 기부 재산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기 3년 전에 신사참배로 핍박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산속으로 떠나면서는 그나마 있던 집과 전답도 다 나눠 주었다. 이세종은 자발적 가난을 언급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난하셨은즉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가난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이 자신의 재산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것은 이냐시오가『영신수련』에서 말하는 세 번째 종류의 사람과 유사하다. 이 사람은 재물을 자신이 관리하여 사용하든지, 아니면 재물을 포기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따를 뿐이며,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는 쪽을 선택할 뿐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자 하는 갈망만이 재물을 사용하거나 포기하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세종은 수도사가 아니었음에도 일반적으로 수도사들에게 요구되었던 자발적 가난까지 실천했다. 이세종이 재산을 포기한 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였다. 예수 믿고 재산을 포기하는 것은 이집트의 초기 사막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났던 전형적인 헌신 방법이었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를 대표하는 성 안토니는 농부 출신으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이집트 사막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 이세종 역시 농부 출신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눠 주고 개천산 산당터에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다. 그런 차원에서 이세종과 성 안토니의 헌신 유형이 유사하다.
III. 이세종의 영성사상
1. 수도사의 금욕적 영성
이세종에게 동방의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 같은 금욕적인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은 예수님도 고운 옷을 안 입으셨다고 말하면서 평소에 홋바지 저고리로 지냈으며, 더운 때나 추운 때나 같은 옷을 입었고, 언제나 걸인과 같이 떨어진 베옷을 기워 입고 구멍뚫인 모자를 쓰고 다녔다. 옷만 다른 사람보다 좋게 입어도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게 된다고 일부러 낡은 검정색 무명옷만 입고 다녔다. 이세종이 한번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아 갔는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우스운 모자를 쓰고 거지 옷을 입고 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설교보다도 그 꼴이 신기해서 거지가 설교를 한다고 모여 들기도 했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하루 한 끼만 식사했으며, 육식도 금했다. 성 안토니도 수도를 시작한 후에 주로 해 진 후에 하루에 한 끼, 이틀에 한번 혹은 나흘에 한번 음식을 먹었다. 성 안토니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동방의 수도사들은 수도를 하면서 주로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육식을 금했다. 이세종의 생활유형이 이들과 유사 하다. 이세종은 음식 먹을 때는 상에 차려 먹지 않고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혹시 누가 밥상을 차려와도 마음이 높아진다고 싫어하고, 자기는 죄인이라면서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이세종은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서 가져온 명절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의 주식은 보통 사람들은 역겨워서 도저히 먹기 어려운 쓱 범벅이었다. 이세종은 자신의 설교에서 “인간은 식욕이 폐하면 자연히 색욕이 패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상은 요한 클리마쿠스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배불리 먹은 배는 간음을 일으키지만 억제하는 위는 순결로 인도한다.”고 말했다. 이세종이 음식을 절제한 것은 정욕을 이기고 성결하여 궁극적으로는 순결을 통해 성경의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세종은 마치 수도사들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세종은 “바울선생은 시집가는 것이 죄는 아니나 안 가는 것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 7장이다. 과부가 시집가는 것이 좋으나 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셨다. 예수 믿는 것이 더 좋은 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복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은 히브리서 13장 4절의 “결혼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권면이 있지만 그의 수도사적인 영성의 관점 때문에 고린도전서 7장을 선택하고 있다. 물론 이세종은 결혼을 죄로 보지는 않았다. 자식을 낳는 것도 죄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세종은 회심한 뒤에 순결하게 살기위해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야 한다면서 동거하지 않고 다른 방에 거처했다. 부인이 잠든 사이에 몰래 들어오면 어느새 알고 내쫓았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날 무렵, 얼마 동안 아내는 남편 시중을 들려고 한 방에 있었지만, 그것도 밤에 쉴 때는 중간에 칸을 막고 이웃 방에 거처했다. 이같이 이세종이 예수 믿고 부인과 부부관계를 단절한 해혼(解婚) 사상은 이집트의 동방 사막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니트리아의 아모운은 삼촌이 억지로 결혼을 시켜서 했지만 수도를 하면서 18년동안 부부가 한 집에 살면서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 해혼 생활을 했다. 그 후에 니트리아 산속으로 가서 그 곳에 수실 두 개를 짓고 22년 동안 각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모운은 매년 두 번 정도 부인을 만났다. 이집트의 수도사 유키리투스와 그의 아내 메리는 결혼하여 한 집에 살았지만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주위에 해혼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아모운 부부는 처음 18년은 같이 살면서 해혼을 하였고, 나머지 22년은 따로 떨어져 해혼 생활을 했다. 유키리투스 부부는 처음부터 같이 살면서 해혼 생활을 했다. 이들 수도사들의 해혼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해혼을 비밀로 하고 살았다는 점이다. 다른 제자들에게 강요 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이세종의 해혼 생활은 공개적이었으며, 제자들에게 해혼을 강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세종의 ‘해혼 사상’은 그 당시 기성교회로부터 신학적 공격을 받는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세종이 해혼 생활을 제자들에게 강요한 것처럼 보인 점은 지나친 금욕주의 형태로 보인다.
이세종이 제자 선택을 할 때도 동방의 수도사가 제자를 받을 때같이 절대적 순종을 요구했다. 박복만이 이세종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을 때 이세종은 자기가 먹던 밥을 먹으라고 밀어 놓으면서 자기가 먹던 숟가락을 새까맣게 때가 묻은 자기 버선 바닥에 닦아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박복만은 본래 병원에서 일을 했던 사람이라 위생 관념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걸 받아먹고 제자가 되었다. 성 안토니는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폴의 순종을 시험해 보기위해 사흘 동안 문밖에 세워 두었지만 폴은 떠나지 않았다. 안토니는 다시 야자수 잎으로 15미터짜리 밧줄을 꼬도록 했다가 다시 풀고 꼬도록 했다. 그래도 폴은 불평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순종했다. 성 안토니는 그제 서야 폴의 순종을 보고 제자로 받아주었다. 제자의 자격으로 순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세종의 제자 선택과 성 안토니의 제자 선택 방법에 유사점이 보인다.
이세종은 어록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유케 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가난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번은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이세종은 “얻어먹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복희는 추운 겨울날 탁발을 실행 했다. 이세종도 거의 거지같이 생활을 했다. 이세종의 탁발 강조는 도미니코의 탁발 강조와 프란치스꼬가 가난을 자신의 신부라고 말한 것과도 유사하다. 이세종도 가난을 이상적 삶으로 생각했다.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정신을 여제자 글라라가 계승했다면, 이세종의 가난의 정신은 여제자 오복희가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세종은 죽기 전 마지막 3년은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한새골에서 지냈다. 3년간 산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전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았다. 얼굴과 손에는 때가 너무 끼어서 까맣게 되었는데, 그래도 음식 먹을 때에 쓰는 손가락 끝만은 짐승 발톱마냥 하얗게 드러냈다. 이세종의 이런 금욕적인 모습은 니트리아의 수도사 이시도르와 유사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머리끈 외에는 좋은 내의를 입지 않았고, 목욕을 하지 않았으며, 고기도 먹지 않았다. 이세종이 임종하면서 남긴 유산은 바가지 세 개 뿐이었다. 이세종은 평생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오직 성경만 읽고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났던 금욕적 요소가 나타났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실천했던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처럼 이세종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실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자연 사랑과 생태적 영성
이세종에게 자연을 사랑하며, 보존하는 생태적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은 평소에 우거진 산천을 바라보며 한량없이 기뻐했다. “만물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라며 큰 소리로 찬양했다. 길을 가다가 이름 모를 초목들이 멋대로 우거진 것을 보면 손으로 풀포기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풀잎을 잡고 춤추듯 흔들면서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이 “인간들의 비정함 같아서는 너는 벌써 잘렸으련만 하나님의 자비가 너를 지켜주셔서 사람이 너를 베지 않게 했으니, 너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춤추고 감사하라.”고 했다. 그는 칡넝쿨이 가는 길을 막아도 밟지 않았고 일일이 치우며 다녔다. 길가에 잡초도 안전한 곳에 옮겨 심었다. 쓰러진 풀들은 걷어 세워 주었다. 산길을 가로질러 뻗어간 칡넝쿨이 지나 다니는 사람의 발에 밟혀 줄기와 마디가 다 터지고 우유 빛 진액이 피같이 흘러내리는 것을 볼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서, “아이쿠, 뉘게 짓밟혀 이렇게 물이 뚝뚝 흐르는 구나.”하고 울상이 되어 어찌 할 줄 몰라 했다. 때로 자신의 발에 새싹이 꺾여 지면, “비켜 가지, 이 귀한 목을 깨뜨렸구나!”하고 안타까워했다. 때로 자기 발밑에 개미 한 마리라도 밟혀 버둥거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를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 마땅한 놈인데 네가 내 발에 밟혀 죽다니.“하면서 울었다. 이세종은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았다. 이세종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자연 사랑과 생태적 영성의 관점에서 자연을 아끼고 사랑했다.
어느 날엔 부엌에서 풍덩하는 소리가 났다. 구정물을 담아 둔 통속에서 무엇이 덤벙덤벙 헤엄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구정물 통 속에 쥐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세종은 부엌 구석에서 막대기를 주어다가 쥐가 기어오르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빨리 도망치지 못하는 쥐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이세종은 모든 동물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동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도 잡아서 죽이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파리도 죽이지 않고 두 손으로 휘휘 저으면서 밖으로 내쫓기만 했다. 어느 날 부엌에 나가보니 독사가 있었다. 이세종은 독사를 때려잡지 않고 막대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몰아내 산으로 가게 했다. 그러면서 쫓겨 가는 독사를 보고, “다른 사람이 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서 네 몸을 간직해라.”하며 사람에게 말하듯 했다. 어느 해 가물어 논에 물이 마를 때, 이세종이 길을 가다가 웅덩이를 보니 그 속에는 송사리, 미꾸라지, 올챙이들이 한데 어울려 죽어가며 파득거리고 있었다. 이세종은 입고 가던 옷에다 그것들을 주워 담아 냇가로 가서 물에 풀어 주었다. 말라 죽은 올챙이도 주워 담으면서 “이것들이 이렇게 물 없이 죽듯이, 인간들도 그렇게 되는 시기가 올지 모른다.”고 했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부인에게 유언하기를, “언덕으로 벗 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라.”고 했다. 자연으로 돌아가 대자연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세종은 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도 되신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 여성 영성가 노리지의 줄리안에게도 나타난다. 그녀는 “우리 어머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유익을 얻고 자라며, 긍휼 안에서 회복시킨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세종이 자연과 동물을 돌보고 아끼는 것은 예수님을 돌보는 어머니로 이해하는 생태 영성적 사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란치스꼬는 그의 유명한 ‘태양의 노래’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초대하고 있다. 태양, 달, 별, 바람, 물, 불, 땅 등을 불러 주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우주 전체가 한 형제애 안에서 가족을 이루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했다. 이세종 역시 프란치스꼬와 같이 자연을 사랑하며, 보존하는 생태적 영성을 가지고 있다.
3. 성령의 체험적 영성
이세종에게 성령의 체험적 영성이 나타난다. 어느 해 이세종은 이상한 열병을 앓는다. 노라복 선교사가 찾아와 광주 제중병원으로 가자고 했지만 워낙 약을 쓰지 않는 것이 이세종의 주장이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추운 밤에 말없이 누워 있던 이세종의 몸이 화끈 거리기 시작했다.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더니 꽁꽁 얼어붙은 연못가의 물을 퍼서 자기 몸에 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자나무 아래에서 신비스러운 빛 속에서 예수의 얼굴 반면(半面)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열병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완쾌되었다. 이 체험이 있은 후 이세종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육신으로는 예수의 형상을 볼 수 없다. 다만 성령의 조명하시는 빛이 내 안에 비칠 때에만 예수를 보아내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세도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았다가는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므로 다만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고 성경에 말했다.”고 했다. 이세종은 성령의 불을 받고 신적인 빛을 경험했다. 이 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모든 것과는 매우 다른 불변하는 빛이며, 동방 수도사 신신학자 시메온이 말하는 신적인 빛과 유사하다. 시메온은 이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과 하나님 안에서 진실한 사랑과 희망을 가진 자가 볼 수 있다고 했다. 동방의 영성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세종이 이러한 신적인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향한 강한 갈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세종은 “성신 못 받으면 시끄럽고 비방거리 뿐이다.”고 했다. 제자들에게도 “믿고 성령 받는 것이 목적이다. 성령을 못 받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기차 타는 사람이 차표가 있어야 하듯, 성령을 받아야 천국을 간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만 되면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욕을 끊어야 성령을 받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이 마음을 방으로 표현한 것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영혼을 궁방으로 묘사한 것과 유사하다. 또한 이세종이 정욕을 끊어야 성령을 받는다는 주장은 동방의 이집트 사막의 성령론의 대가인 대 마카리우스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마카리우스는 그의 설교에서 ”마침내 성령의 완전함에 다다른 사람은 모든 정욕에서 완전히 정화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교통 속에서 보혜사 성령에 의해 침투를 당하며 연합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세종은 성령의 역사를 세 가지 단계로 말했다. 첫째,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인데 이것은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불신자와 살인자도 감동을 받는다. 성령의 감동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쉽다고 했다. 둘째는 성령을 보통 받는 것인데, 이는 회개해야 받는다. 사람이 햇빛을 받으려면 방에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함과 같다. 보통 받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엔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고 보았다. 셋째는 성령을 충만히 받는 일이다. 이것이 성령을 완전하게 받는 일이다. 완전하게 받으면 그 때는 다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세종은 성령 충만하면 “먹는 문제”를 초월하고, ”입는 문제“를 초월하고 ”아는 문제“ 지식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이세종은 성령 충만을 가장 높은 단계로 두고 있다. 이세종의 성령론은 주로 오순절적 성령체험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인격적 성령 이해에 대해서는 부족함을 보인다.
4. 성경의 문자적 영성
이세종에게 성경의 문자적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은 신학적인 공부나, 교회에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문자 그대로 믿은 사람이었다. 정경옥에 의하면 이세종은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는 동안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절이 바뀌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때를 좇아 음식 먹는 것을 잊었다.”라고 할 만큼 성경연구에 집중했다. 윤남하에 의하면 이세종은 어디를 가든지, 꼭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으며, 무엇을 묻던지 성경 어디 몇 장, 몇 절을 읽으시오 하고 성경으로 대답했으며, 말 한마디를 해도 성경이오 하루종일 이야기를 해도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말했다고 한다. 이세종의 어록에는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추 파면 너 죽는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 밖에 나는 것이 없다. 나무뿌리도 생명의 물줄기 찾아서 깊이 파고들어야 사는 것이다.”라며 성경말씀을 깊이 파라고 강조했다. 이세종은 성경을 거의 통달할 정도였다. 낮이면 종일 성경을 읽고, 밤에는 암송을 했다. 성경 요절을 밤을 세워가며 암송하고 요지를 표해 놓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 필기하고 읽고 하기를 해 넘어가기까지 계속했다. 제자들 앞에서 자기의 손가락을 펴들고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는 정도다.”라면서 “단지 본문을 통독하는 정도를 가지고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며 암송했다.“고 한다.
이세종은 제자들이 사경회에 가서 성경을 배우는 것을 권했다. 한 가지 이야기만 듣고서는 참과 거짓을 알 수 없는 법이니 둘을 놓고 서로 비교하여 보라고 했다.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고한 것은 이세종파를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이세종에게 배운 바를 어디에서 가르칠 때“ 이 말씀을 이공께 들은 것이 아니라 개천산 돌 틈에서 들었다하라.”고 말했다. 한번은 이세종의 제자 중에 송동근이 이세종의 가르침을 책으로 내면 어떻겠는가 하자 이세종은 그러면 성경이 파묻힌다고 반대를 했다. 이세종은 자신의 성경공부만이 절대적이라는 폐쇄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기의 가르침은 없어지고 성경만 나타나는 겸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오직 성경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이세종은 성경을 최고의 약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약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위생이다. 겉으로 정결해도 죽고 병난다. 그러나 신령한 말씀을 따라가면 부활이요 영생이니 얼마나 좋은 위생이냐. 이 약은 의심 없다. 세상 약 쓰는 것은 꼭 나을지 모르니까 미신이다.”라고 말했다. “약을 풀 잎사귀로 알고 먹어도 좋지만, 하나님 은혜로 병이 나았는데 약으로 나은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니, 신자는 약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경을 ‘신약과 구약’이라고 부르듯 우리에겐 말씀의 약이 있으니 세상 약을 먹으려 하지 말고 말씀을 먹어라.”라고 가르쳤다. 심지어는 신자가 약을 먹는 것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라고 까지 극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상은 이세종의 성경에 대한 문자적 영해로 인한 그의 독특한 영성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의 문자적 해석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이세종은 성경 읽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음란을 멀리하고 양심이 맑아야 성경을 읽어도 모든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 것도 바로 이해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나 아무렇게 읽어도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을 바로 읽으려면 먼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까루투시오 수도원의 귀고 2세는 보다 깊은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 안에서 악한 생각들이 정화되고, 마음이 순결을 갈망할 때 비로소 깊은 묵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세종이 음란을 버리고 순결해야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다는 사상은 귀고 2세의 사상과 유사하다. 이세종의 성경관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신학에 가까운 영성을 보이고 있다.
5. 실천적 영성
이세종에게 성경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실천적 영성이 나타난다. 이세종을 따라다니면서 이세종의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현필은 1961년 3월 1일 일기에서 “주님 닮은 북동 안(安)신부님! 주님 똑같았던 이세종(李世鍾)님!.”이라고 쓰고 있다. 이현필은 이세종이 예수같이 실천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은 후에 어렸을 때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 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주었다. 이세종은 동네 어려운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으면 자기 두 식구의 식량에서 떠다가 갔다 주고 그대신 자기들은 호박죽으로 연명하며 살았다. 이세종은 산에나 들에 나가서 일꾼들이 흔히 하는 대로 남의 콩 한 포기라도 뽑아먹었던 기억이 있으면 그 임자에게 찾아가 자복하고 다 갚았다. 곡식은 모아두었다가 노인과 어린이가 있는 가난한 집에 나눠 주었다. 대신 자신은 콩 잎사귀 하나도 아까워 맘대로 못 먹으면서 그렇게 했다. 창고 문을 열어 그 동안 쌓아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동리마다 전곡을 나눠주고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모두 대접해 보냈다. 어느 날 누가 찰밥을 해왔는데 찰밥을 붙들고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먹지 못했다. 결국 그는 눈밭을 누비며 가난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그 찰밥을 다 나눠주었다. 흉년에는 한 밤중에 몰래 동리의 가난한 집을 돌면서, 식구들을 헤아려 매주와 소금을 알맞게 나눠 주었다. 걸인이 이세종의 집을 찾아오면 자기는 땅에 앉아서 먹고 걸인에게는 좋은 상을 차려서 대접했다. 한번은 광주지방 대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양식(9일분)을 짊어지고 80여리를 걸어 광주에 가던 중 가난한자를 보고 양식을 모두 나눠주고 자신은 9일간 금식하며 집회를 참석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송기득은 이세종의 나눔의 실천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바로 그의 호(號)인 ‘이공’(李空)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공의 “비움의 철학”은 그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나타났지만, 특히 그의 ‘나눔살이’에서 제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애써 번 돈과 재산을 송두리째 내놓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다 나눠 주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비움’(空)의 행동실천(行動實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세종은 어록에서 “전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입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오늘날에는 행동으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세종은 실천을 통한 전도를 몸으로 보인 사람이다. 구제도 전도를 위한 그의 실천의 하나의 방법이었다. 어느 날,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나이 어린 불쌍한 거지 하나를 만나 돈 얼마를 주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생각하니 그 거지의 남루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눈에 떠올라 양심이 괴로웠다. 하루 종일 거지를 찾아 다니다가 해질 무렵에야 그 거지를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달려가 거지를 붙잡고는 “당신께 좋은 일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라고 말하면서 거지가 입고 있던 다 떨어진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의 옷은 거지를 주었더니, 이세종의 큰 몸집에 거지의 옷은 너무 작아 남 보기에 우스운 꼴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프란치스꼬가 성 베드로의 무덤을 순례 했을 때 교회 앞에 모여 있는 거지 무리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옷을 주고 그 거지의 누더기 옷을 바꿔 입고 기쁨이 가득차서 모인 군중들 가운데서 하루 종일 보낸 모습과 유사하다. 이세종은 성경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려는 실천적 영성을 보여주었다.
IV. 나가는 말
정경옥은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이세종에게 서양 수도사들에 뒤질 것이 없는 성자라는 칭호를 붙여준 바 있다.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살펴보면 실제로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났던 영성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동방 수도사 성 안토니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니트리아의 아모운, 성 안토니의 제자 폴, 니트리아의 수도사 이시도르. 스케티스의 대 마카리우스, 신신학자 시메온 등의 영성사상과 외형적으로 유사점이 나타나며, 서방 수도사로는 아우구스티누스, 귀고 2세, 아빌라의 데레사, 도미니코, 프란치스꼬, 노리지의 줄리안의 영성사상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이세종은 비교적 서방보다는 금욕적인 영성을 강조했던 초기 이집트 사막의 동방 수도사의 영성이 더 짙게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독수도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의 영성사상과 외형적으로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이세종의 개천산은 마치 이집트의 성 안토니의 콜줌산과 같은 묵상과 기도터이다. 성 안토니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말씀과 기도로 은둔하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같이 이세종도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개천산 기슭에서 말씀과 기도로 평생을 은둔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성 안토니가 주로 기도와 관상에 집중했다면, 이세종은 말씀 묵상 후에 전도하며 구제하는 활동을 동시에 강조 했다. 이처럼 이세종은 기도와 묵상과 활동이 조화를 이루는 영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영성사에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관상과 활동이 이세종안에서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와 활동을 강조하는 이세종의 영성사상은 종교개혁가들 특히 루터의 영성사상과 유사점을 보인다. 이세종의 영성사상은 루터의 신학적 방법론인 기도(Oratio)-묵상(Meditatio)-시련(Tentatio)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이세종은 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성령의 내적조명과 구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영성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이세종의 영성사상은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적인 영성과 종교개혁가의 영성, 오순절의 영성, 그리고 개혁주의 영성 등,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통전적 에큐메니칼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전적 에큐메니칼 영성은 예수의 영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세종의 영성사상을 동방과 서방 그리고 개신교회가 영성으로 상호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로 제시 해 본다.
주제어 Keywords
영성, 영성사상, 에큐메니칼, 통전적, 동방교회, 서방교회, 개신교회
(Spiritual, Spiritual Thoughts, Ecumenical, Integral, The Orthodox Church, Roman Catholic Church, Protestan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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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Life of Lee Se-Jong and His Spiritual Thoughts
Eun-Ho You, Th.D.
Candidate, Graduate School of Theology
Sogang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the life of Lee Se-jong(李世鍾, 1877-1942) and His Spiritual Thoughts. The thesis is particularly aimed to suggest the possibility to exchange an ecumenical spirituality in academic between Eastern Orthodox Church, Western Catholic Church, and Protestant Church on the basis of Se-Jong Lee's spirituality. It is worth noticing that, recently, Lee Se-Jong's spirituality is being given much attention from the perspective of ecumenical spirituality and Korean indigenous spirituality. Actually, Lee Se-Jong was able to show spirituality that was apparent among Eastern and Western monks without having learnt any other doctrine from other people, but only by studying bible on his own. However, even though many scholars have already demonstrated the importance of Lee Se-Jong's spirituality, not a single academic thesis on his spirituality has been found yet. Besides, previously researched data on Lee's life is historically contentious.
To do this, it critically analyses the writings related with Lee Se-Jong. It conducts research mainly on Lee Se-Jong's sermon collections, the biography of Lee Hyun-Phil and one of Um Do-Sup as well. And also, interview data have been provided to supplement any limited sources. With regard to the life of Lee Se-Jong, the thesis attempts to have an insight into his birth and conversion, church life and sharing of his life consecutively. In relation to Lee Se-Jong's spiritual thoughts, it also deals with the spiritual monasticism of Eastern and Western monks, the ecological spirituality loving nature, the spirituality experienced by Holy Spirit, the spirituality of the Bible translation in literal, and finally the practical spirituality in reality.
By providing objective historical records throughout chapter II, the thesis will probe Lee Se-Jong's life based on historical objectivity. In chapter III, Lee Se-Jong's spiritual thoughts will be analysed academically. In chapter IV, characteristics of Lee Se-jong's spiritual thoughts will be clarified as a result of this thesis. Based upon the spiritual thoughts of Lee Se-jong, this thesis will make it clear that his spiritual thoughts are the integrally ecumenical spirituality including Eastern and Western churches, church reformers, specially protestants. In conclusion, It shows that Lee Se-Jong's spiritual thoughts could be a spiritual means through which Eastern, Western and Protestant churches may commun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