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 / 양선례
톡이 왔다. 92세 된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장이었다. 그런데 너무 늦었다. 이미 열흘 전에 돌아가셔서 아버지 곁에 잘 묻어 드렸다며 알고나 있으란다. 화가 났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도리와 인사를 아는 것. 작년에 연거푸 초상을 치른 내게 친구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서 꽤 오래 머물다 갔다. 세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동행도 없이 혼자서 운전해 와 놓고는 내게는 엄마 가시는 길 배웅도 못하게 한다. 행여 부의금이라도 보낼까 봐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한다.
그녀는 공주시 유구읍에서도 15분을 더 들어가는 작은 마을에서 목회자로 산다. 원래는 수도권의 큰 교회에서 부목사까지 했으나,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열다섯 가구밖에 되지 않는 시골에 정착하고 가정집 한쪽에 교회를 만들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번쩍이는 십자가, 여기가 교회라고 알리는 커다란 현판, 꽃이나 화분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등 교회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식이 아무것도 없는 참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십여 명 들어서면 꽉 차는 예배당, 주 신자는 남편과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몸이 아픈 언니, 전도사인 딸 등 가족이 반이다. 작년부터는 평균 연령 80세가 넘는 이 마을의 부녀회장 일까지 맡고 있다. 목사님이 부녀회장이라니 ‘인간극장’에 나올 일이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라 어르신 챙겨 병원 모시고 다니랴, 아픈 두 어머니 삼시 세끼 챙기랴, 마을 행사에 쫓아다니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런데도 항상 웃으며 그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해낸다.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고 낮은 곳의 신도를 위로하고 보살피며 ‘목회자를 가르치는 목사’가 되었다.
꼭 가야 하는데도 미루고 싶은 곳 중에 치과가 있다. 별거 아닌 치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발걸음이 무겁고 두렵다. 의자에 눕기만 하면 저절로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지지직 기계 돌아가고 이 세척하는 소리로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정신을 차려 보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러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자기 최면을 건다.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고 생각을 몰아간다.
21살의 나는 동명동 농장다리 밑 자취방에 있다.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을 지나면 집이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다. 진황토색 페인트에 반짝이는 니스를 바른 마루가 있고 그 너머에 방이 두 개 있는 안채가 있다. 우리 방은 오른쪽 상하방이다. 방과 방 사이에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이 있으나 우리 셋은 그 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부엌에는 싱크대도 없다. 쪼그리고 앉아서 밥하고 간단한 요리를 했다. 나와 학교가 달랐던 두 친구는 학교 버스로 통학하고, 나는 철길을 따라 20분쯤 걸으면 학교 교문이 보였다.
집에서 학교 반대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금남로를 지나 충장로에 닿을 수 있었다. 찻집의 성냥을 모으는 게 취미였던 우리는 매번 다른 찻집을 찾아다녔다. 커피 한 잔 시켜 두고 음악 들으며 집에서 해도 좋을 이야기를 깔깔대다 오는 게 전부였다. 가게에서 빌려온 황미나, 이현세, 박봉성 만화를 배 깔고 엎드려서 밤새 보는 재미도 좋았다. 머리가 긴 조각처럼 잘 생긴 테리우스를 보며 첫사랑 왕자를 기다렸다. 달달한 황미나 작품의 문장을 베껴서 벽에 붙여두고 수시로 읽었다.
어느 추운 겨울에는 동네 슈퍼에는 있지도 않은 천 원짜리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세 통 사 와서 누가 빨리 먹나 내기했다. 또 다른 날에는 누가 가장 오래 잠잘 수 있나 시합했다. 나는 첫 번째 내기에서 일등, 두 번째에서는 이등을 했다. 그러고도 심심한 밤이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주인집에 폐가 갈까 봐 소리를 줄였다. '나 어떡해'나 '민들레 홀씨 되어' 등의 노래는 지금도 초고속으로 농장다리로 데려다 준다. 우리끼리 놀이를 만들어 가며 놀았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졌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 친구와 자취했다. 친구라기보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도 없는 동창일 뿐이었는데 같은 교대를 간 사람이 단 둘뿐이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동거였다. 키 크고 섹시한 데다 얼굴까지 이뻤던 그 친구는 거의 매일 약속이 있었고, 나는 혼자 집을 지켰다. 아무 연고가 없는 지역이라 갈 데가 없었다. 학보사 문을 두드려 그곳을 아지트 삼고 나서야 대학에 적응할 수 있었다.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았던 그 친구와는 자취방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헤어졌다.
2학년이 되었으나 마땅히 묵을 곳이 없던 내 사정을 알고 두 친구가 같이 살자고 했다. 둘은 고향의 앞뒷집에 나란히 살기에 집안끼리도 잘 안다. 서로 의지하라고 양가 부모들이 같은 학교를 보냈고, 자취방도 얻어 줬다. 둘 다 집안의 막내여서 철따라 언니들이 새 옷을 사서 보내 주었다. 등치가 나와 비슷한 친구의 옷은 바로 내 옷이 되었다. 친구가 가져온 쌀로 밥을 했고, 받은 용돈으로 반찬을 만들었다. 내 몫의 군것질과 찻값, 심지어는 버스비까지 다 내주었다. 그러면서도 행여 내가 마음 다칠까 봐 눈치를 봤다.
그중 한 친구는 지금 내가 사는 바로 옆 아파트에 산다. 이십 년 가까이 붙어 다닌다. 종종 남편과 함께 외식도 한다. 밤에 만나 운동하고 일요일이면 산악회를 따라 산에도 다녔다. 공주나 전주로 친구들과 여행갈 때면 그녀의 발이 되어 준다. 그런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다. 그저 뭔가를 더 해 주고 싶다. 궁핍하고 외로워서 인생이 허방 같았던 그때 기꺼이 손 내밀어 준 고마움이 사무쳐서다. 그때가 언제인데 여즉 그러느냐고 친구는 타박한다. 뿌린 씨앗이 열매 맺은 것이니 투자 잘 한 네 복이라고 대답한다.
또 한 친구는 오래 못 봤다. 사는 곳이 너무 다른 데다 결혼 이후 뒤늦게 신학대학 다니느라 친구가 바빴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에 자리잡고 나서야 연락이 이어졌으니 십 년이 조금 넘었다. 그녀 곁에는 불치암에 걸렸으나 돌봐 줄 가족이 없는 언니와, 두 분의 어머니가 함께였다. 남편 혼자 벌어서 아들딸까지 일곱 식구가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생각날 때마다 생선을 한 박스씩 보냈다. 우리가 그 작은 교회를 방문했을 때 친구가 해 준 음식은 아귀찜이었다. 시장에 따라가서 보니 고등어와 조기 외에는 쓸 만한 생선이 보이지 않았다. 남해 바다의 신선한 해산물이 식탁에 오르면 두 어머니 참 좋아하시겠지. 마음 한 자락만 내면 되었다. 조기나 민어, 병어, 서대, 양태 등 대중없었다. 낙지가 맛있을 때는 낙지,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이야기가 바람결에 들리면 전복을 보냈다. 그래 봤자 일 년에 두서너 번이었다. 특별한 생선, 귀한 생선이 왔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두 어머니였다. 염치없다고, 고맙다고 말하기도 지쳤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친구는 말했다. 헌금 받는 셈 치라고 눙쳤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친구는 예민했다. 잠자다가 옆에 스치기만 해도 잠이 깨 버리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옷이나 신발을 공유했으니 나는 얼마나 눈치없는 아이였던가. 베풀기는 잘하지만 받는 건 그러지 못했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정말 싫어했다. 목회자가 되어 본분에 충실하다 보니 더 그랬을 것이다. 돌아가신 한참 후에 연락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원망해 봤자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예상이 된다. 암 투병 중인 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오래 같이 살던 엄마를 보냈다. 큰며느리가 아닌 데도 건강이 좋지 못한 시어머니와 함께인 내 친구의 어깨는 언제쯤 가벼워질까. ‘새은혜 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좁은 길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귀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교회 주보에 실린 문구대로 살아가는 내 친구는 선물이자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