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잡록-김굉필
◈ 본관은 서흥, 자는 대유이며, 호는 한훤당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점필재를 종사하여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문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갑인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고, 다시 형조좌랑으로 발탁되었다. 연산조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의 문인이라 하여 희천에 유배되고, 다시 순천으로 옮겼으며, 갑자년에 죄를 더하였다. 중종 초에 도승지를 예증하고, 13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더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선생이 희천에 귀양갔을 때 조정암(조광조)이 따라 가서 노닐면서 학문하는 큰 법칙을 배웠다. 오래 있다 돌아올 제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우리 도가 동쪽으로 간다.”
하였다. 〈비서〉
◈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장을 업으로 삼고 성리학에 잠심하여 염락관민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은 선생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무오사적》
◈ 선생은 성리학에 연원이 있어 몸가짐을 삼가고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영희 신덕우에게 이르기를,
“그대와 교분을 끊으려 했으나 정리상 차마 그러지 못한다.”
하기에, 물으니, 말하기를, “백공(남효온)과 백원(무풍정)은 모두 진나라 선비의 풍도를 지니고 있다. 진나라는 청담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 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들이 뒤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사우명행록》
◈ 선생은 특출한 행실이 비길 데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인정(밤에 통행을 금하기 위하여 종을 치던 일)이 지난 뒤에야 잠을 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났다. -동상
◈ 선생은 늘 초립을 쓰고 연자 갓끈을 드리웠다. 만년에는 단칸방에 고요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여 책을 보고 밤이 깊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다만 연자 갓끈이 책상에 닿아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나,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유선록》
◈ 선생의 학문하는 방법이 꾸준히 힘써 정밀하게 쌓았으므로 확실하면서도 정체하지 않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범속에 흐르지 않았으며, 평소 서당에 나아가서는 마치 소상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 〈행장〉
◈ 선생은 닭이 울 때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을 닦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안사람들도 일찍이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 선생의 《가범》에 〈거가의〉가 있는데, 안팎이 첫닭이 울면 모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관을 쓰고 띠를 띠고 나서,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되 남자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본집
◈
1. 사춘이라 하는데 가례를 맡고
2. 사하라 하는데 집안의 재화를 맡고
3, 사추라 하여 집안의 형벌을 맡아 보고
4. 사동이라 하여 집안의 음식 범절을 맡아본다.
또 상형사생(상벌 규정 같은 것)이란 것이 있다. -동상
◈ 계집종은 안 일을 맡아보는데, 1.은 주포라 하여 음식 잘 만드는 자에게 맡기고 남자로서 또한 그러한 자는 전포라 부른다. 사내종으로서 음식 범절을 맡아 보는 자를 사동이라 하였다. 선생이 내칙을 본떠서 《가범》을 짓고 의절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되 훈계하는 방법은 인륜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으로 직책을 분별하여 모두 명칭이 있었으니, 안의 일은 계집으로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을 도주ㆍ주적)ㆍ주사ㆍ주포라 하였으며, 바깥일은 사내종으로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은 도전ㆍ전사ㆍ전시라고 하였다.
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되 절하고 꿇어앉고 작업하는 것에 모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한 번 승급하고 한 번 내리는데 상벌의 제도가 있었으며, 길흉에 대비하는 저축도 빈부에 따라 더하고 덜하였다. 매양 초하루 보름마다 친히 독서의 예를 제정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고 화가 일어났다. 〈경현록〉
◈ 선생은 점필재에게 《소학》을 배웠다. 〈독소학〉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책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를 평하기를,
“이말은 곧 성인이 되는 기초이다.”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일두(정여창)와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특별히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서로 만날 적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동상
◈ 일두가 안음현의 원으로 있을 때 한훤(김굉필)이 찾아갔더니 일두가 금잔 하나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한훤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뒷날 반드시 이것으로써 사람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그 뒤에 고을원이 과연 이 일로써 장물죄를 지었다고 하였다. -동상
◈ 선생은 화가 적소에 미치매, 명을 듣고 목욕하고 관대를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벗겨진 한쪽 신을 도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이내 죽음을 받았다. -동상
◈ 일찍이 옛말을 인용하여 자제들을 훈계하기를,
“남의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은 마치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는 것 같으니 먼저 제 입을 더럽히는 것이다.”
하였다. -동상
◈ 일찍이 딸들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훗날 너희들의 집에 가서 동서들을 만나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언행을 삼가야 하며, 형제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저버릴까 두려워하라.”
하였다. -동상
◈ 전하지 않는 새로운 학설을 얻어서 의연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학자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비록 그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지 못하였으나 사숙하여 착하게 된 이가 또한 많았다. -동상
◈ 어린아이 두서넛을 데리고 성남 별장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성광자(주계군) 심원)과 남추강(남효온)이 함께 찾아갔더니, 시를 지어 주기를,
세상길은 갈래도 많은데
후진들이 서로 가기를 다투네
번거로운 말이 다시 요란스럽고
이설이 분분하게 시끄럽구나
용문의 여운이 끊어지니
내 마음 누가 씻어 줄꼬
그대 진실로 스스로 즐거워하며
요금을 숭상하도다
석달 동안 맛을 잊어버릴 줄 알아
향기를 혼자 상상하는구나
하였다. -동상
◈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먼데 가까운데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도들이 집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동상
◈ 선생이 벗들과 같이 거처할 제 첫닭이 울면 일어나 함께 앉아 호흡을 세는데 남들은 겨우 밥 지을 동안도 못 되어 다 잊어버렸으나 홀로 선생만은 또렷이 세어서 밝을 때까지 잊어버리지를 않았다. -동상
◈ 《소학》을 점필재에게서 배울 때에 점필재가 말하기를,
“광풍제월이라는 것도 결국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명심하고 지켜서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동상
◈ 선생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는 먼저 가묘에 참배하였다. 무오년의 옥사를 만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내 순천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때 화가 어떻게 번질지 그 형세를 헤아릴 수가 없었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처하여 몸가짐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동상
◈ 선생은 조상의 산소가 오래되어 헐었으므로 여러 친족들에게 말하기를,
“조상의 산소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손들이 마땅히 보호하고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명절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 지내고 또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기꺼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그것이 길이길이 고정된 격식이 되었다. -동상
◈ 선생은 한창려의 글을 즐겨 읽었는데, 매양 〈장중승전〉 후서의 장순이 남제운을 부르며 말하기를,
“남팔아, 남아는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해서는 안 된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세 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동상
◈ 현풍현에 세상 사람들이 태리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는데, 선생이 이 산 밑에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선생 때문에 대니라고 불렀다. 그가 성인의 도를 높이 받듬이 마치 머리에 이는 것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동상
◈ 선생의 처음 호는 사옹이었는데 비록 큰 비를 만나 겉은 젖어도 속은 젖지 않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고치면서 이름이 너무 드러난 것 같아 혼연히 처세하는 도가 아니라고 하여 마침내 고쳤다. -동상
◈ 선생은 순천에 귀양갔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는데, 순천 고을 사람이 경현당을 세워 제사 지냈고 이구암이 《경현록》을 지었다. -본집
◈ 가야산 서쪽에 말곡촌이 있는데 말곡향이라고도 한다. 선생이 일찍이 거기에 서재를 짓고 학문을 닦았다. 김모재(김안국)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제 이 골짜기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는데,
듣건대, 김 공이 거처하는 곳이 있다하니
가야산이 곧 무이산이로다
하였다. -동상
◈ 함께 귀양 살고 같이 승평으로 이배되었다. 〈제매계문〉 무오년에 희천으로 귀양 갔을 때에 매계(조위)는 의주로 귀양 갔으며 경신년에 같이 승평부로 이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김대유는 《소학》으로 자신의 몸을 닦아, 옛 성현으로 법도를 삼아 후학을 불러다가 성심껏 쇄소의 예를 가르쳤으므로 육예의 학문을 닦은 이가 전후에 가득하여 비방하는 의론이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선생이 지은 〈노방송〉이라는 시가 있는데,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으며
오가는 길손 영송하느라 수고롭구나
겨울철에 너와 마음 같이하는 이를
지나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하였다. 《경현록》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