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갑(愼後甲)
[문과]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2위(32/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0D6C4AC11U9999X0
본인본관 거창(居昌)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丁23]
전력 직장(直長)
품계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문과시제 책문(策問):왕정손익(王政損益)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기(愼幾)[文]
[조부(祖父)]
성명 : 신이충(愼以衷)[麗進]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인도(愼仁導)
[외조부(外祖父)]
성명 : 홍사원(洪師瑗)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구양(具揚)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신기(愼幾)
[문과] 태종(太宗) 11년(14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5위(15/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2E0AE30FFFFU9999X0
본인본관 거창(居昌)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품계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감사(監司)
관직 이조좌랑(吏曹佐郞)
문과시제 책문(策問):치도본말(治道本末)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이충(愼以衷)[麗進]
[조부(祖父)]
성명 : 신인도(愼仁導)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사경(愼思敬)
[외조부(外祖父)]
성명 : 설회(薛懷)
본관 : 순창(淳昌)【補】
[처부(妻父)]
성명 : 홍사원(洪師瑗)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신전(愼詮)[文]
[가족과거]
자(子) : 신후갑(愼後甲)[文]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신유충(愼由衷)
[고려사마] 우왕(禑王) 3년(1377) 정사(丁巳) 진사시(進士試) 십운시(十韻詩) 3등(三等) 22위(36/42)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0C774CDA9U9999X0
개명(改名) 신이충(愼以衷)
시호(諡號) 양렬(襄烈)【補】(주1)
본인본관 거창(居昌)【補】(주2)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초명은 신유충(愼由衷).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愼修)의 후손으로, 부친은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이다.
1377년(우왕 3) 연방시(蓮榜試)에 급제하였으며, 신돈(辛旽)의 횡포에 항의하여 연맹(聯盟) 상소를 올렸다.
조선 개국 후 1397년(태조 6) 황해도감찰(黃海道監察)이 되었으나, 1410년(태종 10)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아전을 때려 죽인 일과 아버지 상중(喪中)에 종과 양민을 때려 죽인 일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세종조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관직생활 동안 양녕대군 등 종친의 비위를 고발하는 상소를 자주 올려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단종 조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아들로 문과 신기(愼幾)‧신언(愼言)‧문과 신전(愼詮)을 두었다.
[참고문헌]대한마이산묘지 거창신씨문헌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태조실록 태종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이력사항]
선발인원 42명
전력 성균학생(成均學生)
관직 판현사(判縣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인도(愼仁道)
품계 : 봉선대부(奉善大夫)
관직 : 전내부부령(前內府副令)
[처부(妻父)]
성명 : 설회(薛懷)【補】(주3)
본관 : 순창(淳昌)【補】
[주 1]시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2]본관 : 『씨족원류(氏族源流)』 [거창신씨]편(621쪽)과 『거창신씨세보(居昌愼氏世譜)』(2009)를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
[주 3]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거창신씨]편(621쪽)과 『거창신씨세보(居昌愼氏世譜)』(2009)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선광7년정사3월일문생진[사시방목](宣光七年丁巳三月日門生進[士試榜目])』(『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23책(거창 초계정씨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신인도(愼仁道)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2E0C778B3C4U9999X0
호(號) 도은(道隱)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고려후기
본관 거창(居昌)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신인도(愼仁道)
생졸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호는 도은(道隱).
음사(蔭仕)로 관직에 진출하여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안동판관(安東判官)‧수원부사(水原府使)‧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정헌대부(正獻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그가 안성현령(安城縣令)으로 있을 때 홍건적이 대거 침입하여 양광도(楊廣道) 일원이 거의 다 항복하였는데, 안성지역만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잔치를 베풀고 홍건적 군사들을 술에 취하게 한 후에 적군을 섬멸하였다.
이로 인하여 홍건적은 더 이상 남하를 못하고 고려는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안성은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오른 신기(愼幾)의 조부이다.
[참고문헌]高麗史 世宗實錄 安城郡誌 居昌愼氏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