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 <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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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어 어느덧 가을 속을 걷고 있습니다. 무더위에 지쳐 허덕이다가 이제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습니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치고 지날 때면 폐부까지 그 시원한 기운이 와 닿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바람 맞는 일이 소소한 기쁨이 되었습니다. 대개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헛걸음한 것을 두고 바람 맞았다고 하지만, 요즘 같으면 그런 상황이라도 넉넉히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바람을 맞고 싶습니다.
사실 요 근래 무기력감이 저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영적 안테나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책도 손에 안 잡히고, 주어진 일들을 계속 하고는 있지만 뭔가 기계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저로서는 참 난감해집니다.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주어야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배를 위해 설교단 앞에 설 때는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고민이 거듭 쌓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사람입니다. 여전히 흔들리며, 고민하며, 넘어지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무기력감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빈번히 마주하기도 합니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가 치밀고, 욕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 요나가 되기도 하고, 탕자 또는 탕자의 형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울처럼 번민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다윗처럼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솔로몬처럼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뜰에서 방황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리도 허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다가도 아차 싶은 때가 오고, 그러면 다시 처벅처벅 그리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곤 하지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길벗이 있다는 건 그래서 중요한 일입니다.
헛헛한 마음이 저를 사로잡고 있던 중 지난 주 소백산 달밭골 나눔터에 올랐습니다. 그곳엔 수원 갈릴리교회 교우들이 전교인 수련회를 하고 있었지요. 북산을 걷는 사람들(북걷사)의 길벗인 이종철 목사님께서 저를 초대해주셔서 갈릴리교회 교우들과 함께 노래를 나누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 시간이 저에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노래를 배우는 교우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소백산을 타고 불어오는 서늘한 밤바람 속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의 선율 속에서 주님은 저를 한껏 위로해주셨습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것이겠지요? 저마다의 삶의 짐을 이고 힘겹게 외롭게 뚜벅뚜벅 걷다가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비틀비틀 걷는 길벗들을 만나고, 같은 처지를 이해하며 함께 노래도 부르고,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함께 맞으며 걷다보면 걸을 만한 인생이구나 싶은 위로가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2024.8.31.>
첫댓글 💌 넘을 수 없는 벽은 세상에 없습니다. 한 잎 담쟁이가 절망의 끝을 향해 희망의 발길을 내디디면 수천 잎 담쟁이가 그 뒤를 따릅니다. 베를린 장벽인들 버틸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무너진 벽에 창이 생깁니다. 세상의 담장도 마침내는 그렇게 무너져 대문으로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