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온 듯한 날씨다. 거리의 젊은 옷차림을 보아도 그렇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뒤 나른한 기분으로 나는 비누도 잘 풀어지지 않는 찝찔한 센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땀을 씻어 내던 코코비치의 작은 별장을 떠올린다. 그곳 생각만 하면 숨겨 놓은 곶감을 몰래 빼먹는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머릿 속이 간질거린다.
마닐라 남쪽 울퉁불퉁한 고속도로로 2시간쯤 온 몸을 흔들며 바탕가스 (Batangas)까지 달린 뒤, 다시 배로 시간 반쯤 가면 닿는 코코비치. 7천 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육,해,공의 교통 수단이 모두 동원되기 일쑤다. 그나마 마닐라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는 코코비치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속한다.
가는 길도 즐길 줄 아는 진정한 여유로움
진정으로 여행의 맛을 아는 이는 최종 목적지에만 기대를 걸진 않는다. 가는 길을 즐길 줄도 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 그네들의 옹색한 살림집, 울타리를 따라 골이 패인 이끼 낀 수챗길, 집집마다 마당에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빨래들, 길 한가운데 태연히 드러누워 자동차의 진로를 방해하곤 하던 동네 개들.... 잠시 반짝,하고 떠오르는 한 생각으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들의 삶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순결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결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결하다고 말하는 입처럼 불결한 게 또 있을까. 편리는 게으름과, 호사는 열등감과 아무래도 상관 있어 보인다.
코코비치로 가는 배 안에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던 나는 눈 앞에 검은 물체가 무리 지어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돌고래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검게 그을린 깡마른 선장이 "좋은 징조"라며 내게 윙크하더니 얼굴이 부서지는 웃음을 웃는다. 그 환한 얼굴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진다.
문명으로부터의 완벽한 자유를 만끽하며
대도시의 딜럭스급 호텔에 익숙하거나, 혹은 그런 것을 좇는 여행객이라면 코코비치에 올 필요가 없다. 이 리조트의 객실엔 TV도, 냉장고도, 전화도, 신문도 없다. 당연히 나쁜 뉴스도 없다. 그저 코코넛 나무가 가득한 섬에 나무로 지은 별장이 20여 채 들어서 있고, 눈부신 작은 해변이 오롯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뭐 볼 게 있어서 이런 델 오냐고?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의 몫이 아닌가.
1986년, 필리핀을 사랑하게 된 한 덴마크인이 이곳 해변 코코넛 언덕에 작은 집들을 짓고 휴양지로 개발된 코코비치는, 민도로(Mindoro)섬 일대에선 가장 훌륭한 리조트로 꼽힌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호주인, 그리고 멀지만 자연 그대로를 즐기려는 유럽인이 많이 찾는다. 이들은 선진 문명이 주는 세련되고 편리한 일상을 잠시나마 미련 없이 포기하고, 불편하지만 자연에 가까운 이곳 생활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문명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다.
종업원들의 원시적인, 그러나 정감어린 서비스
대나무와 야자수 잎, 현지에서 마련한 목재로만 지은 2층의 별장은 층마다 객실이 두 개씩 있는데 이런 별장이 20여 채 있으니 방이 모두 80실 정도 된다. 천장엔 커다란 날개의 선풍기가 선선히 돌아 가고, 침대 위에 새하얀 방충망을 매단 실내는 퍽이나 정갈하다. 창문 문양이 우리의 격자무늬 그것과 꼭 닮아, 가까이 가서 보니 창호지가 조개 껍질이다. 창호지가 아닌 창호패라니!
작은 가방을 들어 준 룸 보이는 맨발에 차림새도 꾀죄죄하다. 그러나 눈빛 만큼은 거리낌없이 순수하다. 열 살쯤 되었을까? 아이에게 1달러의 팁을 주니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더니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복도의 줄을 당기란다.
복도에는 몇 가닥의 줄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 별장을 관리하는 아랫채의 살림집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 사는 사람이 바로 아이의 가족으로, 그들은 방 청소나 정원 관리, 룸 서비스, 세탁, 모닝 콜(전화가 없으니 깨워 달라는 시간에 방문을 두드린다) 등의 수발을 든다.
덴마크인이 조성한 유럽식 휴양지
꼭 줄을 당겨야 하는 건 아니다.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부르면 이 집 식구 누구라도 나와서 "뭘 도와 드릴까요?"하며 올려다본다. 이들은 물론 일류 호텔 종업원처럼 서비스 교육을 정식으로 받진 않았지만, 천성적으로 친절하고 순박하여 방문객들의 호감을 산다. 이런 살림집이 리조트 안에 몇 채 더 있다. 나는 벌써 이곳이 마음에 든다.
코코비치 중앙에 자리한 메인 하우스는 손님을 맞는 곳이자 안내 데스크 겸 식당이어서, 끼니 때마다 이곳에 오면 투숙객들을 두루 볼 수 있다. 마침 관광객이 썰물처럼 밀려 간 뒤라, 식당은 붐비지 않다.
덴마크와 독일, 호주, 포르투갈, 네덜란드에서 온 관광객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담소하지만 하룻밤만 지나면 모두 한 가족처럼 눈만 마주쳐도 "하이!"하고 인사한다.
식사 때면 투숙객들이 한 식구처럼 둘러 앉아
어느 날 아침, 독일에서 온 올리버라는 청년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홍콩, 싱가폴, 말레이지아를 거쳐 필리핀에 온지 달포 된다는 그는, 필리핀 여행에서 매력적인 필리핀 여성을 만나 동행하는 중이다. 여자는 통역 겸 가이드 역할도 하는 모양인데, 둘은 한방을 쓰고 있다. 언제 집에 돌아가느냐고 묻자, 올리버가 "이달 말쯤"이라 하니, 여자는 살짝 눈을 흘기고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남자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아니, 다음달 말쯤"으로 수정한다. 그새 정이 든 모양이다. 여자의 투정섞인 대답에 남자는 미안한지 빙긋 웃기만 한다. 어느새 여자의 마음이 된 나는, 그녀가 겪을 이별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 온다.
바닷가 땡볕에서 소리지르고 뛰놀며 태양을 즐기는 건 이곳 아이들 뿐이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흰 모래에 누워 조용히 독서를 즐긴다. 나도 모래 위에서 뒹굴뒹굴, 책 보다가 잠 들다가 하기를 하루종일 하고 있는 중이다.
바다 가까이 나즈막한 야자나무에 까만 아이가 오르기 시작한다. 원숭이처럼 두 발을 나무에 착, 달라 붙이고 손으로는 열심히 야자 열매가 달려 있는 나뭇가지의 목을 비튼다. 툭! 제 머리통만한 푸른 야자 열매가 모래 위로 떨어진다. 아이는 열매 하나로 만족하지 않는지, 그 나무에 매달린 코코넛을 죄다 떨어낼 기세다. 그만 멈출 상황도 아닌 것 같다. 나무 밑에는 졸개인 듯 싶은 예닐곱의 아이들이 연신 소리지르며 나무 위의 아이를 부추긴다.
맑은 밤하늘엔 별이 지천으로 깔려
한낮에는 태양의 위세에 눌려 소리도 못 내던 온갖 미물들이, 밤이면 다투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수많은 벌레들의 코러스, 여기에 낮에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끼룩끼룩 목을 꺾는다. 밤에 누워 있자니 너무 가깝게 들려, 잠결에 일어나 방안을 둘러 본다. 아무 것도 없다. 이때 방 뒤 쪽에서 둔탁한 무엇이 내려치고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떼구르르르... 농익은 야자열매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저 혼자 떨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잠은 올 것 같지 않다. 아예 해변을 산책하기로 한다.
맑은 밤이 카랑하게 깊다. 야자수 밑 해먹에 몸을 누인다. 참 이상도 하지. 오로지, 혼자서, 밤 하늘 아래, 이런 인적 없는 밤의 세계가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 방에서 나와 여기까지 와서 드러눕기 전까지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사실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일단 나와 있으니 불안이 가시고 진정으로 편안한 마음이 된다. 검은 하늘엔 별이 지천으로 깔렸다. 그 중에 유난히 깜박이는 별이 하나 있다. 마치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여, 나는 오래도록 그 별을 바라본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를 노래로 흥얼거리고 있는데 "넌 정말 혼자 있는 걸 좋아 하는구나(You really like being alone)"하며 누군가 말을 건넨다. 코코비치에서 근처 어디로든 가려면 배를 타야만 하는데, 역시 이곳에 살면서 일하는 뱃사공 가운데 한 사람이다.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나는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더럭 겁이 난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잠깐 있어 봐"하곤 어둠 속으로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이 밤에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내민다. 예순이 다 된, 파뿌리처럼 늙은 그가. 노인의 맑은 눈을 보자 조금 전 겁을 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돌아가면 이곳이 그리워 질 것이라는 말로 고마움을 대신한다.
이 말은 진심이다. 눈 닿는 곳마다 코코넛 나무가 빼곡한 평화스러운 곳. 허름한 입성들이지만 죄없는 눈망울로 수줍게 알은 체 하는 사람들이 사는 코코비치... 나는 벌써 그 곳이 그립다.
< 여행정보 >
Coco Beach Island Resort
주소 : Puerto Galera, Oriental Mindoro, Philippine
예약 : 마닐라 예약사무소
전화 : 국가번호 63-2-521-5958 / 63-2-536-1322
팩스 : 63-2-521-5260
홈페이지 : http://www.cocobea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