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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慧明華
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5.6.PM2시)
현수품(賢首品)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하다
화엄경 현수품(賢首品)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일곱 광명이 사무량심을 나타내다’ 그랬다.
광명, 화엄경에 광명같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왜인고 하니 화엄경의 설법이 거의가 광명설법이다. 부처님이 광명을 놓아서 설법하고, 사자좌가 광명을 놓아서 설법하고, 보리수가 광명을 놓아서 설법하고, 그 광명속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부처님의 과거 인행시에 별별 많은 난행고행을 닦았는데 그러한 내용들도 광명이 자세히 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 광명이다.
앞에서 6바라밀 광명을 이야기 했고, 여기서는 사무량심 광명을 이야기 한다.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도 다 광명이다.
광명은 무엇인가?
어두운 데 그 어둠을 밝혀서 사람들이 모든 사물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광명의 역할이다.
그와 같이 반야심경 한 편도 좋은 광명이다.
반야심경의 이치를 우리가 제대로 터득한다면 어두운 인생살이에서 환하게 제대로 살 수가 있다.
모든 이치를 거기서 깨닫고 바르게 살 수가 있고, 가고자 하는 길을 정확하게 갈 수가 있다.
금강경 한편이 광명이요, 화엄경 구절구절이 모두가 광명이고, 품마다 품마다 모두가 광명 아닌 것이 없다. 우리 인생에는 광명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이해하셔야 된다. 사실 그런 뜻이다.
이 화엄경에서 광명이라고 하는 말은 모두가 예를 들어서 6바라밀을 광명이다 라고 했을 때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그 하나하나의 가르침이 전부 우리 삶에 광명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빛이 없다면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할 것이다. 그 빛이 태양빛이면 더욱 좋고, 전기불빛도 괜찮고 등불도 좋고 촛불도 좋고 미미한 앞길을 겨우 분별할 수 있는 정도의 빛이라도 좋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꼼짝을 못한다. 자동차가 굴러가는 것도 그렇고 자전거가
굴러가는 것도 그렇고, 우리 사람이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렇다. 아무리 미미한 빛이라도 빛이 없으면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모든 진리의 가르침을 ‘광명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부처님의 설법은 하나하나가 우리 어두운 인생길을 비춰주는 정말 밝은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화엄경이야말로 무삼하리오.’
정말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가운데 하나하나 분석해서 말씀드린다 하더라도,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6바라밀, 불자로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실천 수행해야 할 여섯가지 덕목 그런다. 또 거기에서 네 가지를 더한다면 오늘은 여기 사무량심이 나왔지만, 사섭법이라는 것이 있다.
사섭법, 사무량심, 삼십칠조도품 등등 하나하나가 우리 어리석은 중생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광명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화엄경 설법이 전부 광명설법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나 생각해 본다.
부디 우리 삶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빛과 같은 역할을 우리 불교가 해야 되고, 불자가 해야 되고, 부처님 법을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있고, 귀로 듣고 마음 속에 간직한 불자라면 그래도 세상사람들에게 그나마 그 정도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광명역할을 당연히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다.
부디 우리가 작은 빛이라도 빛이 되어서 사셔야 할 줄 믿는다.
오늘 경문은
ㅅ. 일곱 광명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나타내다
일곱 광명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나타내다, 그랬다.
[자(慈)의 광명]
처음에 자무량심, 사무량심은 자비희사다. 앞에서는 6바라밀을 이야기했다.
우방광명명불혜(又放光明名佛慧)니 차광각오제함식(此光覺悟諸含識)하야
영견무량무변불(令見無量無邊佛)이 각각좌보연화상(各各坐寶蓮華上)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불혜(佛慧)’라
이 광명이 모든 중생[含識]을 깨우쳐서
한량없고 끝없는 부처님께서
각각 보배연꽃 위에 앉아 계심을 보게 하나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불혜(佛慧)’라
부처 불(佛)자 지혜 혜(慧)자 불혜(佛慧) 부처님의 지혜라, 깨달음의 지혜라.
이 광명이 모든 중생[含識]을 깨우쳐서
한량없고 끝없는 부처님께서
각각 보배연꽃 위에 앉아 계심을 보게 하나니라
한량없는 부처님이 보배 연꽃 위에 앉아계심을 보게 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안목이 없으면, 깨달음의 지혜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계다.
깨달음의 지혜가 있으면 바로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부처님이 보배 연꽃 위에 앉아계심을 본다.
처처불상(處處佛像)이요, 사사불공(事事佛供)이다 라고 하는 조사스님들의 말씀 그대로다.
처처가 부처님이고 하는 일마다 전부가 부처님 일이다. 전부가 불사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고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내고, 가정에서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거두고 하는 일들, 그런 소소한 일까지도 모두가 불사다. 부처님 일이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전부가 불공이다. 불공이요, 불사다.
찬불위덕급해탈(讚佛威德及解脫)하고 설불자재무유량(說佛自在無有量)하야
현시불력급신통(顯示佛力及神通)일새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부처님의 위덕과 해탈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자재하심이 한량없음을 말하며
부처님의 힘과 신통을 나타내 보일새
이런 까닭에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불혜(佛慧)라고 하는 광명을 얻은 까닭을 밝히는 게송이다.
부처님의 위덕과 해탈을 찬탄하고
‘부처님 참 훌륭하십니다’ 우리가 불교를 알아야 부처님이 훌륭하시다는 것을 안다. 요는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저절로 ‘이 세상에 부처님 같은 성인이 없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위덕을 찬탄하게 되고 해탈을 찬탄하게 된다.
부처님의 자재하심이 한량없음을 말하며
‘부처님은 참 자유자재하시다’ 그 한량없는 능력을 말하게 되고
부처님의 힘과 신통을 나타내 보일새
이런 까닭에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그러한 인연으로, 그러한 수행으로 불혜(佛慧)라고 하는 광명을 얻어서 부처님이 곳곳에서 연화좌에 앉아계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런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다.
[비(悲)의 광명]
슬플 비(悲)자 비의 광명
우방광명명무외(又放光明名無畏)니 차광조촉공포자(此光照觸恐怖者)하야
비인소지제독해(非人所持諸毒害)를 일체개령질제멸(一切皆令疾除滅)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무외(無畏)’라
이 광명이 두려워하는 사람을 비추어
사람이 아닌 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독해
일체를 모두 빨리 제하여 소멸하게 하나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무외(無畏)’라
두려움이 없다 하는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무외(無畏)라.
이 광명이 두려워하는 사람을 비추어
사람이 아닌 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독해
일체를 모두 빨리 제하여 소멸하게 하나니라
자비할 때의 비(悲)자는 어여삐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광명을 비추어서 두려워 하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광명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워라, 그러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외로울 때, 또는 두려운 생각이 생겼을 때 그때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워라’ 라고 일러주면 그보다 더 훌륭한 광명이 없다. 두려운 사람에게는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게 하는 것, 그로 인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광명이 아닌가?
제가 어릴 때 이 범어사에, 그때는 참으로 어릴 때다. 저기 팔송에서, 부산 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어떻게 늦게 차를 타서 팔송에 내리니까 어둑어둑해졌다.
그때는 범어사에 올라다니는 찻길도 없고 차도 없던 때인데 걸어오는 길은 있었다.
걸어 올라오는데 정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한참 올라오니까 또 어떤 보살님이 혼자 올라가는 분이 있었다. 그분도 상당히 두려워했던 것 같다. 무서웠던 것 같다. 캄캄한 밤에 또 사람이 무섭지 않은가?
그래서 어디에 가느냐고 하니까 계명암에 간다고 했다. 계명암은 큰 절에서도 한 참 더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아유 스님 무서워서 어떻게 가면 좋겠습니까?”
그 보살이 말했다.
“관세음보살님을 열심히 부르면서 올라가면 절대 두렵지 않고 관세음보살님이 다 지켜줄 겁니다.”
관세음보살이 있지 않느냐고 저도 그렇게 왔고 그 보살님에게도 그렇게 일러 주었다.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데 틈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불러라’ 그랬다.
그것이 중요하다. 틈이 생기면 두려운 마음이 침범하기 때문이다. 심극마침(心隙魔侵)이라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두려움의 마(魔)가, 마구니가 침범하지 않는가. 심극마침(心隙魔侵) 마음에 틈이 생길 때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틈이 생기지 않도록 불러라.
‘기도를 어떻게 하면 잘하냐’ 할 때 ‘틈이 생기지 않을 만치 부지런히 불러라’ 그렇게 해야 된다.
틈이 생기지 않으면 기도가 성취됐느니, 성취되지 않았으니 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틈이 없는데 오로지 관세음보살로 내 의식세계를 꽉 채우고 있는데 무슨 기도의 성취다, 성취하지 못했다 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틈이 없어야 된다. 그것이 열쇠다.
틈이 안나도록 불러라.
겨울에 문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가? 소바람이 들어온다, 그런 말을 한다.
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쓸 데 없는 생각이 침범한다.
기도가 됐든 화두가 됐든 경전을 공부하는 일이 됐든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해야 된다. 그러고 나면 그 이상 달리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생각이 떠오른다면 틈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체를 모두 빨리 제하여 소멸하게 하나니라
어떤 독해도 어떤 두려움도 다 소멸하게 한다.
능어중생시무외(能於衆生施無畏)하야 우유뇌해개권지(遇有惱害皆勸止)하야
증제액난고궁자(拯濟厄難孤窮者)일새 이시득성차광명(以是得成此光明)이니라
능히 중생에게 두려움 없음을 보시하여
고뇌와 독해가 있으면 모두 권하여 그치게 하며
액난 있고 고독하고 궁한 자를 구제할새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이 광명을 얻게 된 까닭이다.
중생에게 두려움 없음을 보시하여
무외시(無畏施) 보통 보시 이야기를 할 때 법보시 재보시 무외시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지 않는가.
법으로써 보시하고 재물로써 보시한다.
재물보시가 법보시로 전환되는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것을 전환을 시킬 줄만 알면 복이 열 배로 불어날텐데, 열 배 이상 불어난다. 그런 길도 있다. 그다음에 무외시.
재보시 법보시 무외시 사람을 두려움이 없도록 해준다고 하는 것, 그 보살님이 계명암을 올라갈 때, 캄캄한 밤에
‘내가 그렇게 했듯이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세요. 틈이 안나도록 열심히 부르면, 소리 내도 좋고, 내지 않고 속으로 해도 좋고, 그러면 전혀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가면, 틈이 안생기니까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침범할 까닭이 없다.
고뇌와 독해가 있으면 모두 권하여 그치게 하며
액난 있고 고독하고 궁한 자를 구제할새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자를 구제할새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또 한가지 이야기가 났으니까, 제가 걸망지고 한참 선방으로 다닐 때 어떤 스님이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딴 사람에게 전해지는 편지를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만나면 전해줄거라고, 그런데 거기에는 군대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했는데 순경을 경찰을 욕을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전역에서 마침 한참 조사가 심할 땐데 걸망을 뒤지더니 이것저것 다 조사해서 그 편지를 찾아냈다. 편지를 읽더니 거기다 경찰을 욕하는 내용을 써놓은 게 있고, 그 편지가 내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것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어딜 가자고 했다. 무슨 무슨 공사에 가는데 말하자면 말이 공사지 거기가 취재하는 곳이고 거기서 고문도 하는 곳이라. 덜컥 겁이 나서 무조건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웠다.
거기 무슨 공사에 갔는데, 모두 군인들이고 한 그곳에 갔더니 자기보다 상관에게다가 소개를 떡 했다.
그래도 상관인지 하관인지 나는 알 바가 없고 무조건 관세음보살만 외웠다.
그랬더니 그 상관이 스님이 떡 잡혀 온 것을 보고는 불교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편지를 보더니 아주 시시하게 생각하고 ‘이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애들이 이렇게 스님을 잡아왔다’고 그런 투였다. 그리고는 나한테 불교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것을 묻고 그건 하나도 문제삼지 않고 그래서 한참 불교 이야기만 실컷 하고는 ‘스님 그냥 편안히 가십시오’ 하고 그렇게 해서 나온 적이 있다.
그것이 대전역이다. 지금도 거기가 환하게 기억이 날 정도로, 어떻게나 내가 겁을 먹고 떨었는지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경우도 사람이 살다보면 얼마든지 있다.
그럴 때 대처하는 방법, 불교인은 무기가 많지 않은가.
좋은 무기가 많은데 평소에 그 좋은 무기를 잘 장착하고 있으면 그런 일에 잘 대처할 수가 있다.
범어사에 여기 밤에 올라올 때 그다음에 대전에서 경찰인지 형사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어떤 관계자들인지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서 그야말로 무외(無畏) 두려움이 없는 일을 물리쳤다 그런 내용이다.
우방광명안은(又放光明名安隱)이니 차광능조질병자(此光能照疾病者)하야
영제일체제고통(令除一切諸苦痛)하야 실득정정삼매락(悉得正定三昧樂)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안은(安隱)’이라
이 광명이 능히 병든 자를 비추어
일체 모든 고통을 제하여
바르고 안정된 삼매의 즐거움을 얻게 하나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안은(安隱)’이라
안은(安隱) 편안할 안(安)자 편안할 은(隱)자다. 편안함이라.
이 광명이 능히 병든 자를 비추어
병든 자를 비추어
일체 모든 고통을 제하여
바르고 안정된 삼매의 즐거움을 얻게 하나니라
편안하다고 하는 광명.
시이양약구중환(施以良藥救衆患)하며 묘보연명향도체(妙寶延命香塗體)하며
소유유밀충음식(酥油乳蜜充飮食)일새 이시득성차광명(以是得成此光明)이니라
좋은 약을 보시하여 중생의 병을 구제하고
묘한 보배로 생명을 연장하고 몸에 향을 바르며
연유와 기름과 우유와 꿀로 음식을 보충할새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편안함이라고 하는 광명은 결국은 능히 병든 자를 비추어 일체 모든 고통을 제하는 광명인데 이 광명은
좋은 약을 보시하여 중생의 병을 구제하고
묘한 보배로 생명을 연장하고 몸에 향을 바르며
그것도 병을 구완하는 방법이다.
연유와 기름과 우유와 꿀로 음식을 보충할새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여기에 소개된 이런 음식물이라든지 이런 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것이다.
연유 기름 우유 꿀 이런 것은 요즘은 그렇게 귀한 것은 아닌데 어떤 경우는 유류제품들은 먹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지금은 사료들이 전부 약을 치고 좋지 아니한 것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소가 먹고 거기서 우유를 짜내고 거기서 치즈도 나오고 연유도 나오고 하니까 그 연유라든지 우유라든지 치즈라든지 이것이 순수하지가 않다. 절대 순수하지가 못하다. 그런데 옛날에 부처님 당시 때 이런 것은 그야말로 소들이 깨끗한 풀만 뜯어먹고 거기에서 나온 연유고 우유고 벌들은 그런 데서 나온 꿀이고 그러니까 정말 보약이다. 그때 그것은 참으로 보약이다.
무슨 화학적인 것이 조금이라도 들어갈 겨를이 없다.
지금은 소를 키운다든지 닭을 키운다든지 돼지를 키운다든지 그때 들어가는 사료가 문제다.
우유가 문제가 아니라 사료가 문제니까 그런 문제있는 사료를 먹고 배출한 우유고 연유고 기름이고 그러니까 인체에 그렇게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해한 것들이라고 하는 판명이 많이 내려져 있다.
낙농업자들이 학자들에게 그런 것이 사람 몸에 좋다라고하는 논문을 쓰라고 돈을 대어서 그런 논문을 발표하게 하고 그런 논문이 세상에 퍼지면 학자들이 쓴 논문이니까 이거는 정말 그런 양으로 일반사람들은 다 그렇게 안다.
그 사람들은 그런 논문을 발표하고 낙농업자들에게 돈을 받고, 낙농업자들은 또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아서 돈을 벌고, 전부가 이런 구조다.
지금 세상이라는 것이 전부 이런 구조이니까 참 곤란한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순수하지가 못하다.
그러나 이 경전에 이것이 2600년 전의 이야기니까
좋은 약을 보시하여 중생의 병을 구제하고
묘한 보배로 생명을 연장하고 몸에 향을 바르며
연유와 기름과 우유와 꿀로 음식을 보충했다
그때는 참 순수하고 먹으면 보약이 되는 것들이다. 곡물만 먹다가 이런 것을 조금만 먹으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지금은 이런 것을 함부로 권할 것도 아니고, 함부로 사갈 일도 아니다. 우리가 화엄경 공부하면서 이런 식품문제도 이야기가 났으니까 제가 아는 상식대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우방광명견불(又放光明名見佛)이니 차광각오장몰자(此光覺悟將歿者)하야
영수억념견여래(令隨憶念見如來)하야 명종득생기정국(命終得生其淨國)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견불(見佛)’이라
이 광명이 장차 죽을 자를 깨우쳐서
기억하고 생각함을 따라서 여래를 친견하고
목숨을 마치면서 정토(淨土)에 태어나게 하느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견불(見佛)’이라
볼 견(見)자 부처 불(佛)자 견불(見佛)이라. 부처님을 친견하는 광명이다.
이 광명이 장차 죽을 자를 깨우쳐서
기억하고 생각함을 따라서 여래를 친견하고
여래를 친견한다.
돌아가실 무렵에 아미타불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간다. 그 정도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기억하고 생각함을 따라서 여래를 친견한다는 내용이다.
목숨을 마치면서 정토(淨土)에 태어나게 하느니라
명종득생기정국(命終得生其淨國)이라, 그런 내용이다. 그래서 제가 글을 하나 인용을 했다. 우리가 사람이 열반에 들면 으레 해주는 염불이 있다.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
원컨대 내가 목숨이 마칠 때,
일체 모든 장애를 다 제거하고
저 아미타 부처님을 직접 친견하여
곧 바로 안락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지이다.
라고 하는 내용이다.
견유임종권염불(見有臨終勸念佛)하고 우시존상영첨경(又示尊像令瞻敬)하야
비어불소심귀앙(俾於佛所深歸仰)일새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임종(臨終)을 보면 염불을 권하고
또 불상을 우러러 공경케 하며
부처님 계신 곳에 깊이 귀의하여 앙모하게 할새
이런 까닭에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사람이 임종할 무렵에 염불을 할 힘이 있으면, 그런 정신력이 있어서 염불을 하게 하면, 본인이 염불을 하면 백 배 천 배 남이 하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염불을 권하게 하라.
임종(臨終)을 보면 염불을 권하고
또 불상을 우러러 공경케 하며
또 부처님을 그림이든지 아니면 불상이든지 그 병자의 옆에 볼 수 있는 위치에 그림이나 불상을 모셔놓고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 좋은 것이다. 아주 좋은 것이다.
불상을 보고, 아주 잘 생긴 석굴암 부처님 같은 부처님 상호를 벽에다 걸어놓고 돌아가실 상황에 그것을 쳐다보고 있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보이는 것이 부처님이요 귀에 들리는 것이 염불이다, 그래 되어야 한다. 우리 불자들은 최소한도 부모라든지 가까운 친지가 열반에 들 상황이 되면 이렇게 조치해야 한다.
요즘은 유튜브에 좋은 염불이 너무 많이 올라있다.
저도 항상 염불을, 화엄성중을 듣는다.
요즘은 금강스님이라고 남원에 비구니스님의 염불선생님인데 그 스님이 어떻게나 금강경을 잘 독송했는지 그 금강경 독송을 열심히 듣고, 화엄성중도 듣고 약찬게도 듣는다. 화엄성중도 듣고 잠자면서도 듣고 깨어나서도 듣고 그렇게 한다. 그것은 저의 경우니까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부모님이 열반에 들 무렵이 됐다 하면 당연히 염불을 권해야 되고, 염불을 들려드려야 되고, 부처님 상호를 우러러 볼 수 있게 하고 또
부처님 계신 곳에 깊이 귀의하여 앙모하게 한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 부처님’ 하면서 눈을 감고 숨을 거두도록 그렇게 가르쳐 줘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 동참하신 분들께 참 귀중한 말씀을 드렸다.
이런 이야기가 할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제가 좀 안하는 편인데, 근래에 우리 염화실하고 관계되는 분들의 모친이 여러 분 열반에 들었다.
금요법회에 나오는 이들 그 외 스님들도, 스님 한 분이 또 가까이 열반에 들었고, 그래서 어떻게 요즘 마음이 좀 쓰리고 아픈지, 이런 것을 상식적으로 우리 불자들은 알고 믿어야 된다.
이런 것을 알아도, 또 불자라 해도, 크게 긴가민가 하고 안 믿고 하니까, 딴 사람들 눈치 본다고 자기 마음에 그런 것이 있는데, 다른 형제 자매들이 그런 것을 꺼려하는 입장도 있고 하니까 그렇게 마음놓고 편히 못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렇더라도 돌아가시는 순간에 무슨 일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세상에 부모가 눈을 감는데 그 순간에 부처님과 친견하게 하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자기 소신이 확실하다면 형제자매 아니라 누구라도 설득을 시켜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염불을 적당히 틀어놓고 염불 소리 들으면서 눈을 감게 하고, 또 눈으로써 어떤 현상을 의식할 수 있게 되면 불상을 쳐다보면서 ‘관세음보살’ 창도 좋고 부처님 모습도 좋고, 제가 법문 할 때마다 부처님을 이렇게 모셔놓고 하지 않는가.
제 얼굴만 쳐다보고 듣는 것이 뭐 그렇게 바람직한가?
부처님 한 번이라도 쳐다보라고 하는 것이다.
불상 한 번 쳐다보는 그 공덕이 우리 불자들은 흔한 일이라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별거 아닌 것이 아니다.
세세생생 평생을 우리나라와 같은 불교국가에 살면서도 부처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고 사는 사람들이 없다.
염불 한마디 제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불과 몇이 안된다.
이 좋은 인연을 우리가 소홀히 생각해서 그러는데 제발 부모님들이 열반에 드는 경우라면 여기에 화엄경에서 이렇게 소개한 이러한 내용을 꼭 깊이 간직하셔서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야할 줄 믿는다. 다시 한 번 읽겠다.
임종(臨終)을 보면 염불을 권하고
또 불상을 우러러 공경케 하며
부처님 계신 곳에 깊이 귀의하여 앙모하게 할새
이런 까닭에 이 광명을 얻었느니라
이것을 권하면 당연히 권해야 되고 우리 불자들은 또 이것을 권하면 견불(見佛) 부처님을 친견하다 하는 광명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광명 아니겠는가.
부처님을 보면서 눈을 감고, 부처님 소리 들으면서 눈을 감는다는 이 사실은 그야말로 광명 속에서 목숨을 거두는 일이다. 부처님의 광명 속에서 목숨을 거두는 일인 것이다.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
원컨대 내가 목숨이 마칠 때,
일체 모든 장애를 다 제거하고
저 아미타 부처님을 직접 친견하여
곧 바로 안락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지이다.
이것을 우리 스님들은 염불로 들려드리는데 우리 일반 불자들, 물론 평소에 어떻게 사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그래도 후손들은 자녀들로서 그 임종의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이냐, 돌아가신 뒤에 49재를 지내느니 안지내느니 그것도 물론 소홀히 여길 일은 아니지만, 그분을 위해서 또 저승의 노자가 되도록, 노자돈이 되도록 복을 대신 지어 드리는 일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당사자가 눈을 감기 전에 부처님을 보고 눈을 감도록 하고, 염불소리를 들으면서 임종을 하게 하는 자녀가 가장 신심 깊은 자녀고 효성이 깊은 자녀라고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겠다.
돌아가신 뒤에 묘를 잘 쓴다,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보다 그분이 살아있을 때, 의식이 살아있을 때 부처님과의 인연을 깊이 맺어주고 그러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이러한 이야기도 이렇게 화엄경에는 있다.
그다음에 희(喜)라고 하는 광명인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하겠다.
부디 이 시간 이 내용을 들으신 분은 꼭 남의 눈치, 왜 남의 눈치 보는가? 남의 눈치가 극락세계에 보내주는가?
어머니를 또는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드리는가? 남의 눈치로 열반에 드시는 부모님을 편안하게 보내 드리는 길은 없다. 그저 어떻게 하더라도 그동안 듣고 본 것을 통해서 부처님을 보여드리고 염불소리를 들려드리고 그렇게 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열반에 들 수 있으니까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최고가는 효도다.
꼭 그렇게 믿으시고 그렇게 하시기 바란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한 번 더 듣고 싶으면 이것이 전부 입력이 다 되어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으니까 또 들으시면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중요한 경전은 최소한도 불자라면 집에 한 벌씩 다 준비하고 책을 뒤져서 찾아보고 확인하고 그러셔야 한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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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