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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쌓는 보물
마 6:19-3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19-34 /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눅12:33-34] 이 땅위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땅에서는 좀이 먹어 없어지거나 도둑을 맞기 쉽다. 20) 그러므로 그것들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서는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갈 염려도 없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눅11:34-36]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깨끗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고 23) 네 눈이 악한 생각과 욕망으로 흐려져 있다면 너는 심한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그 어둠을 어찌 이루 다 말하랴! 24)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눅16:13] 아무도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며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극진히 위하며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눅12:22-34] 그러므로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6장 전반부는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종교적 위선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6:1-8). 후반부인 본 단락은 재물의 가치관과 천국 시민이 지닐 가치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19-24)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땅은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신의 삶에 최고의 가치를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으면 그 마음이 세상에 있게 되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그 마음이 하늘에 있게 됩니다. 눈을 마음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으면 온몸이 건강하게 되어 하늘에 보물을 쌓게 되지만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하늘의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여 세상에 보물을 쌓게 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일반적 진리를 통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24).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25-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목숨과 몸이 음식과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이어서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저장하지도 않는 공중의 새를 예로 들며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또한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며 어찌 의복을 염려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데 자기 백성을 돌보지 않겠느냐며 믿음이 적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2-34)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처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형편과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앞당겨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어떤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 잘 쌓고 있는지를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믿는 대로 행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믿음과 염려가 함께 공존합니다. 이 두 마음 사이에서 당신은 늘 갈팡질팡합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당신의 능력은 부족하고, 당신 삶 또한 너무 고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부족한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을지 알려 주셨습니다. 당신이 감당할 힘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 설 교 >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 6:19-24 / 김영규 목사
보물을 보관하는 문제
6장의 구제, 기도, 금식에 관한 교훈에 이어, 재물에 대한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는 재물이 축복의 증표입니다. 신약성경은 보다 영적인 축복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재물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본문은 재물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첫째는 재물의 보관 문제입니다. 둘째는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재물의 보관 문제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절)
“보물”(qhsaurov")이란 말과, “쌓아 두다”(qhsaurivzw)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온 말입니다. 그 의미는 비축하고 쌓아 둔다는 뜻입니다. 보물이란 가치를 보존하는 수단입니다. 예수님 당시 보물은 무엇이었을까요? 금은보석일 수도 있고, 금속 화폐나, 혹은 고급 천이나 의복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보물을 보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문제는 좀과 동록의 문제입니다. 좀(shv")은 “나방이”를 가리키는 말로, 종이나 천을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동록(brw'si")이란 단어 역시 먹는다(eat)는 뜻으로, 금속을 부식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좀과 동록이란 자연적인 가치 상실, 요즘 말로 하면 감가상각(減價償却)입니다. 재물을 그냥 놔두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요즘은 돈을 은행에 맡깁니다.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가 나옵니다. 그러나 은행 이자는 논리적으로 화폐 가치 하락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지금 고덕 아파트 평당 가격은 대략 2천 만 원이 넘습니다. 제가 고덕에 처음 왔을 때, 아파트 평당 가격이 대략 100 만 원 정도였습니다. 30년 동안 집값이 20 배가 올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집 가치가 올라간 겁니까, 아니면 돈 가치가 떨어진 겁니까? 집은 오히려 낡았으니 돈 가치가 떨어진 것이겠지요? 경제가 발전하는데도 돈 가치는 계속 떨어집니다. 경제가 비정상으로 돌아갈 때는 화폐의 가치는 터무니없이 떨어집니다. 과거 독일의 경제 공황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돈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고기 한 근을 사려면 돈을 손수레로 가득 싣고 가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이 물건을 사려고 돈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서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강도는 부인의 손에서 양동이를 빼앗아 돈을 쏟아버리고 양동이를 들고 도망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의 가치 하락을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둘째로, 도둑의 문제입니다. 재물을 보관하는 데 좀이나 동록보다 더 큰 문제는 도둑입니다. 자연적인 가치 하락보다도 인위적인 가치 약탈이 더 큰 문제란 뜻입니다. 로마 시대에 도둑들은 벽에 구멍을 뚫고 보물을 훔쳐갔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 국민이 약탈당합니다. 요즘 같은 평화로운 때에도 강도, 사기꾼, 도둑들에게 엄청난 재산이 약탈당합니다. 2010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영국에서 발생한 모든 사기 피해의 총액은 약 300억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51조 원이나 됩니다. 신용 좋기로 이름 난 일본에서도 서점, 수퍼에서 좀도둑질 한 금액만 연간 67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7천 억 원이나 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집니다. 연간 피싱 사기가 우리 돈으로 약 2천 2백 억 원, 온라인 사기가 연간 5천 5백 억 원이나 됩니다. 꽤 발전 된 선진국이 그 정도이니, 후진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치가 하락되고, 사람이 뺏어가고, 이 세상에서 재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재물의 보관이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세상에 보관하려 하지 말고 하늘에 보관하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0절)
하늘에 보관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돈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까? 부동산이나 재물을 가지고 천국에 가야 합니까? 그러면 일찍 죽어야 하겠네요? 하늘에 보관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조금 고상한 말로 하면 가치의 교환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곧, 불변하는 가치로 교환하고, 영원한 가치로 교환하는 일입니다. 불변하는 가치, 영원한 가치가 뭡니까?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입니다. 천국, 영생,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교환입니다. 세상 모든 재물을 하나님과 교환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첫째로는 재물은 세상에서 다 써야 합니다. 재물은 보관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용도에 써야 합니다. 돈은 버는 데서 빛이 나지 않고, 쓰는 데서 빛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용하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 사주면 펄쩍 뛰면서 좋아합니다. 가정주부는 남편이 작은 선물이라도 하면 감격합니다.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얻고,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얻고 친구를 얻는 수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 19:4)
이 세상에서는 재물을 사용할수록 삶이 윤택해집니다. 돈이 없는 사람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한층 많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적절하게 쓸 때에 그렇게 됩니다.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억만금이 있어도 삶은 풍요롭지 못합니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유명한 구두쇠가 있습니다. 1835년에 태어나 1916년에 죽은 헤티 호올랜드 그린이라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81년을 사는 동안 은행에 3천 14만 달러를 저축했습니다. 총 재산을 헤아려 보니 9천 5백만 달러나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억 원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평생 찬 음식만 먹었습니다. 음식 데우는 것이 아까워서 찬 오트밀만 먹었습니다. 아파도 병원비가 아까워서 그냥 누워서 앓았습니다. 한 번은 자기의 귀한 아들이 다리뼈에 이상이 생겨서 앓아누웠는데, 돈 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무료 진료소만 찾아다니다가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 여자는 평생 재산만 지키다가 쓰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남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재물은 적절히 써야만 복이 됩니다.
둘째로는 재물을 쓰되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합니다. 본문은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어디에 어떻게 쓰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을 위해 쓰는 첫 번째 방법은 헌금입니다. 헌금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무엇을 세웁니까? 국가를 세웁니다. 기업체를 세웁니다. 가문을 세웁니다. 공동체를 세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상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에 드리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바로 그런 용도로 쓰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의 용도는 기본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 즉, 성직자의 생활에 사용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비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4)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은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물이란 드리는 자를 대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자신을 바치고, 내 몸을 바쳐야 되는데, 그 대신 바치는 것이 바로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제물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8) 예배 때에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을 드립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첫 번째 제물입니다. 예배 때의 헌금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내 자신, 내가 가진 소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 때에 드리는 헌금을 빈민 구제금으로 오해합니다. 헌금은 구제금이 아닙니다. 제물입니다. 내 몸을 대신하여, 혹은 내 몸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십일조, 감사, 건축, 선교, 구제 등등, 어떤 명목의 헌금이든지 기본 개념은 헌신이요 제물입니다. 당연히 모든 헌금은 하늘에 쌓아 두고, 하나님께 보관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는 두 번째 방법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구제를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잠19:17) 모세의 율법에는 매 삼 년마다 드리는 특별한 십일조가 있는데, 이 십일조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쓰도록 했습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7-8,10)
헌금으로 드리든지, 구제를 하든지, 다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적게는 십분의 일에서 많게는 십 분의 삼까지 십일조를 하고 구제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노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땅과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많이 쓰세요. 그것이 하늘에 쌓아두고, 하나님께 맡기는 길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재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마음이 가는 곳에 재물도 따라갑니다. 반대로 재물이 가는 곳에 마음도 따라갑니다. 마음과 재물이 따로 놀지는 않습니다. 항상 함께 합니다. 이것은 재물과 마음의 아주 중요한 상관관계이며, 오늘 우리에게 물질생활의 지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음 있는 곳에 돈을 쓴다! 돈 쓰는 곳에 마음도 간다!
돈을 쓰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돈을 씁니다. 재물이 부동산에 있으면 마음도 부동산에 가 있습니다. 재물이 주식에 있으면 마음도 주식에 가 있습니다. 재물을 쓰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재물을 쓰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면 가족에게 마음이 갑니다. 도박에 돈을 쓰면 도박으로 마음이 끌립니다. 집 짓는 일에 돈을 쓰면 마음이 집 짓는 데로 향합니다. 취미 생활에 돈을 쓰면 취미 생활로 마음이 향합니다. 어디에 돈을 쓰든지 돈 쓰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이 원리로 사람들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신앙의 중요한 바로미터입니다. 말보다는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는 굉장히 신앙적인 소리를 합니다. “천국이 제일이지, 세상에 뭐 별 볼 일이 있나?” “나는 천국만 바라고 살아요.” “나는 하나님이 제일 좋아요.” 그런데 실제로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에 씁니다. 유흥, 향락, 도박, 세상 친구 등등. 그 사람의 신앙은 가짜입니다. 오늘 내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보세요. 그러면 내 신앙이 얼마나 되는지 평가가 나옵니다.
물질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신앙에 응용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을 위해 쓰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싶으세요? 그러면 돈을 하나님을 위해 쓰세요. 그래서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따르고 싶다면 네 재산을 내 명령대로 써라! 재산 전부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 부자 청년은 결코 주님 명령대로 돈을 쓰지 못했습니다. 돈이 주님을 향하지 못함으로, 마음도 주님을 향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마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네 돈 주머니가 회개하기 전에는 너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 요즘도 많은 신자들이 헌금 문제로 시험에 듭니다. 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결코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보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세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세요. 그러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고, 천국을 향할 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세 번째 주제는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재물을 소유한 사람에게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재물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재물은 소유자에게 주인 노릇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신자들 중에 누구도 돈이 주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이 재물의 부하가 되고, 신하가 되고,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재물의 지배를 더 강하게 받습니다. 보세요! 재산이 없을 때는 돈 문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돈보다는 인간적 도리가 먼저다! 돈보다는 의리, 돈보다는 우정, 돈보다는 정의! 뭐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많아지면 사람보다 돈, 인간의 도리보다 돈입니다. 의리보다, 우정보다, 사랑보다, 정의보다, 진리보다, 그 모든 것보다 돈이 우선입니다. 고등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10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 가겠는가? 절반 가까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봅시다. 주일 한 번만 빼먹으면 1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빼먹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거짓말 한 번만 하면 큰돈이 들어온다면? 대답은 상상에 맡깁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명령보다 돈의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돈은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주인으로 대접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돈은 인격체도 아닙니다.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돈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돈에게 아첨하고, 돈의 명령을 따릅니다. 자발적 귀속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돈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스스로 돈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자발적으로 돈의 신하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신하가 되어라!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입니다. 돈이 중요하다면 돈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중요하다면 하나님을 선택하세요.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선택입니다. 금은보석보다, 부동산보다, 돈보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하나님이 최고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바로 그런 비유가 나옵니다. 진주 장사가 좋은 진주를 찾다가 최상의 진주를 발견합니다. 얼마나 좋았든지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마13:45-46) 어떤 사람은 우연히 보화가 묻혀있는 밭을 발견하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 밭을 샀습니다.(마13:44)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최고의 가치에 삶의 전부를 투자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둘을 한꺼번에 택하지는 못합니다. 본문에 보세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24절)
본질적으로 돈이나 재물은 미움과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경중의 대상도 아닙니다. 재물은 감정도 도덕성도 없는 물질일 뿐입니다. 미워할 대상도 아니고, 경중을 따질 대상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소비재일 뿐입니다. 인격체도 아니고, 지위도 없습니다. 그러한 재물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본문 24절에 “재물”이란 단어는 “mammwna'"”(마모나스)입니다. 재물을 의인화한 신의 이름입니다. 재물의 신, 돈의 신! 돈을 신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오늘 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오늘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재물입니까? 나는 누구의 명령대로 움직입니까? 만일, 돈이 나를 지배한다면 돈을 포기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오늘 내 재산에게 선포하세요. “재산아! 너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눈은 온 몸의 등불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눈입니다. 주님은 재물 얘기를 하시는 중에 갑자기 눈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왜 주님은 보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 얘기를 꺼내셨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눈은 사물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첫 번째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23절)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습니다. “성하면”(aJplou'")이란 말은 본래 single, 혹은 simple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일하고 단순하고 깨끗한 눈! 사람의 눈은 두 개입니다. 그러나 관점은 하나여야 합니다. 관점이 여럿인 눈은 성한 눈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눈, 오직 주님의 관점에서만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바로 성한 눈입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 온 몸이 밝아집니다. “밝다”는 단어는 “fwteinov"”(포테이노스)입니다. “fw'"”(포스), “빛”이란 어원에서 온 단어입니다. 온 몸이 빛으로 충만하다! 무슨 뜻일까요? 내 눈이 좋으면 사물을 다 보기 때문에,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잘못 된 대상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즉, 영의 눈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주님을 알아봅니다. 결코 재물을 주인으로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재물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양은 모든 것이 약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능력만 있으면 평생 웰 빙 합니다. 그 단 한 가지가 뭡니까? 바로 내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눈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구별할 줄 아는 눈!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아보는 눈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4-5,9)
재물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정리해 봅시다. 첫째로, 재물은 이 세상에서 보관할 방법이 없습니다. 부식됩니다. 가치가 떨어집니다. 도둑이 훔쳐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다 써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써야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재물이 하나님을 향하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합니다. 재물을 신앙의 도구로 쓰세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쓴다면 내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셋째로, 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재물은 소유자를 종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 중에 단호하게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결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는 못합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이 결단이 곧 신앙의 결단입니다.
넷째로, 재물을 보는 안목입니다. 재물은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보는 눈이 있어야, 인생이 밝아집니다. 바른 안목으로 평생 복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염려를 돌파하라
마 6:19-34 / 노경모 목사
우리는 항상 '내가 왜 사는가?'에 질문을 던져야만 내 삶의 질이 높아질 수가 있고, 삶에 대한 보람을 얻을 수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열심히 공부하냐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왜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좋은 직장에 취업위해서라고 대답을 합니다. 왜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결혼을 잘 하기 위해서 혹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왜 돈을 벌기를 원하느냐, 왜 결혼을 잘 하기를 원하느냐, 왜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를 원하느냐고 계속 질문을 던져나간다면 나중에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답변으로 끝을 내거나, 답변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특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식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자, 돈이 많다고 생각해 봅시다. 돈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 삼성그룹의 총수 이건희 회장을 꼽을 수가 있겠지요. 과연 그분은 염려 없는 삶을 누리고 있을까요? 그럴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요. 그러나 6년 전에 26살의 막내 딸이 미국에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물질적으로 어려움 없이 잘 사는 분들 가운데 자녀들 문제 때문에 눈물짓는 부모님들이 참 많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그는 돈과 명예를 비롯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향년 56세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최고의 병원에서 최고의 의료진에 의해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자녀들이 잘되고 아무리 가정이 평안하고 사업체가 잘 된다할지라도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염려 속에 빠지게 됩니다.
미국 가서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따고 결혼을 잘 해서 자녀들을 낳고.. 대학 교수로 명성까지 얻고 있는 교수가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울증.. 미국 가서 공부하고 그 어려운 박사 학위를 따고.. 이제 자기의 비전을 성취했고 지식적으로 높은 고지를 정복했다고 해서 그에게 염려가 없었을까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인생의 목적 설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느냐에 대한 정답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자아 성취, 인류와 사회에 공헌, 국가 발전에 이바지, 어려운 사람을 도움 등을 내 세우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세상적이요, 물질적이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잘못되면 살아가는 동안 염려가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까지도 이런 부분에서 명확한 삶의 목적을 정립하지 못하면 안타까운 결과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지구에서 달에 우주선을 발사할 때 는 조금이라도 방향이 틀어지게 되면 나중 가서는 엄청나게 빗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돈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수님도 돈이 삶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 20절, 21절에는 ‘보물’, 24절에는 ‘재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물론 보물이나 재물은 다이아몬드도 되겠고 귀한 골동품도 되겠고 값비싼 미술품도 되겠고 부동산도 되겠지만 쉽게 한 마디로 말하면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이런 것들을 다 살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은 엄청난 가격으로 팔립니다. 엄청난 돈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얼만 전에 이랜드에서 사업상의 이유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애용했던 33.19케럿 짜리 다이아몬드를 경매에서 100억을 주고 구입한 일이 있습니다. 100억짜리가 아니라 천 억짜리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돈이 있으면 구입할 수가 있지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의식주의 문제도 다 돈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의 문제, 의식주의 문제, 돈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입는 것, 먹는 것에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얼마나 잘 잡수셨는지 주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잘 잡수시는 것을 보시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군사들과 함께 너무나 배가 고파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성막 안에 있는 진설병 즉 떡을 먹은 것에 대해서 주님은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배고프면 먹어야지요.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볼 때 주님이 거주하는 곳 즉 주거에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거나 전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썼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를 보시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자상하고도 섬세하게 말씀하신 교훈을 살펴 보면서 금년 한해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살아 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너희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70년 초반을 풍미했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가수 이장희, ‘그건 너’ 라는 노래로 유명해 졌지요. 이제 그의 나의 60 중반, 미국으로 건너가서 고생했습니다. 이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들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그는 집에서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죽음의 사막’이라는 뜻의 ‘데쓰밸리’사막으로 나갑니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그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합니다.‘나는 누구인가?’하면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는 힘들게 사막에 가서 철학적으로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중한 존재요,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목숨이 의복보다 중요하고 몸이 음식보다 중하고 너희들은 공중의 새보다도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당연히 생명이 무엇 보다고 가장 귀하지요. 단순히 객관적으로 비교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비교입니다.
너희들은 음식보다 귀하고 옷보다 귀하고 집보다 귀하고 보물보다 귀하고 재물보다 귀하고 그 어떤 것 보다도 귀하고 소중하디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있어서요? 하나님의 아버지에게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런 우리들 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주 놀라운 성경 구절을 알려 드릴까요?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확신하게 되면 그 어떠한 염려거리가 우리의 앞에 놓여 있더라도 능히 돌파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세상적인 문제에 올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올인(all in)’ 이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부터 올인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인이라는 말은 카드 게임 포커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한판에 전부 거는 것을 말합니다. 한 판에 끝내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하면 끝이지요. 실패하고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의식주의 문제를 비롯한 그 어떠한 것에도 올인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오늘의 본문에사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의식주의 문제를 비롯해서 삶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올인하게 되었을 때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19절에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은 보물에 올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물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보물에 올인하는 사람은 그 보물이 없어지는 날에 그 사람의 인생도 끝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재물에 올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먹을 것, 입을 것에 올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것들에 올인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이런 것들에 올인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 뜻대로 안 이루어질 때 그의 인생이 파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 올인하는 자는 그것 때문에 염려가 그 사람을 사로 잡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염려가 그 사람을 장악하게 되고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삶의 문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올인하지는 마십시오. 올인한 것이 안 이루어지는 날,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돈에 올인한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파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릅니다. 드리어 그의 그이 인생을 비참하게 마칩니다.
오늘 날 목사님들 가운데 교회 짓는 일에 올인을 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교회 짓는 일이 귀하고 보람있고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올인하게 되면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 지지 않게 되면 엄청난 문제 속에서 종지부를 찍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나옵니다. 그들은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 나라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방백까지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방백이라면 오늘날의 시장이나 도지사 급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지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금신상을 만듭니다. 이 금신상에게 누구든지 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안하면 죽는 것입니다.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우상에게 절할 수가 없습니다. 절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느브갓네살 왕이 노발대발합니다. 그들은 불러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줍니다. 다니엘서 3장 15절 말씀입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왕의 이 말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대답하는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다니엘 3:16-17 말씀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에 올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풀무불에서 구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만 그들을 풀무불에서 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죽고 순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죽음의 순간에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죽음에서 구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그들의 모든 것을 걸지 않았습니다. 올인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신앙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건지실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곧 이어서 그들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3:18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가 풀무불 가운데서 죽는 한이 있더라고 우리는 하나님 만을 경배하지 우상을 경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즉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께만 올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에 올인하고 기도의 응답에만 올인하고 문제 해결에만 올인하고 복받고 형통하는 것에만 올인한다면, 만일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뜻대로 안된다면 엄청난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유명한 신앙고백을 알지요. 무화과 나무가 무성해지는 것에,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것에,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히 생기는 것에, 밭에 먹을 것이 많이 나는 것에만 올인을 한다면 그것이 그렇게 안 되었을 때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뭐고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비록 그렇지 않을 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올인한다는 말입니다.
‘ 너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만을 섬겨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올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올인하게 되면 그 어떤 염려거리로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염려를 능히 돌파하고 남음이 있게 됩니다.
셋째, 주님은 염려를 돌파할 수 있는 놀라운 비결을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말고 돈 때문에 보물 때문에 재물 때문에 세상 적인 그 어떤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다음의 것을 내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염려를 멋지게 돌파하는 비결입니다.
운동시합에서 이기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수비를 잘해서 상대방에게 득점을 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른 방법은 공격을 잘해서 점수를 내는 방법입니다. 내가 점수를 먹는다 할찌라도 공격을 잘해서 더 많은 점수를 얻게 되면 이기게 됩니다.
우리가 염려를 이기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더 멋진 공격적이요, 믿음의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과연이 이것이 염려를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나 하고 의아심을 갖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요,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하고 모든 면에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먼저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염려거리를 해결해 주실 뿐만아니라 거기에다 더 좋은 것을 더하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이것이 염려를 돌파하는 멋진 성경적인 방법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참 멋진 염려 돌파의 비결이지요. 이런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잠연 16장 3절 말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자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렵게 생각하면 적용하기가 어럽습니다. 다음의 세가지를 생각하면서 그대로 해드립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돌파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더하실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에,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난 후가 아니라, 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가 아니라, 내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난 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마음으로 말로 행함으로 삶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반드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 나가는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데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의 작은 부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자세로 살아가면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후에 아버지에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했지요.
마태복음 26장 39절에 예수님의 이 기도가 나오지요.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7:21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나의 위치와 처지와 환경에 상관 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뜻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서운해 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염려거리를 돌파해 주시면 더 좋은 것을 더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요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고 본문 33절은 참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요, 염려 돌파의 최고의 승부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신 놀라운 정답이요 해답입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새해에는 염려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염려 속에 빠지기 않기를 바랍니다. 염려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주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인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시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멋지게 염려를 돌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 6:19-21 / 김태환 목사 / 캠브리지한인교회
Where Is Your Treasure?
마태복음 6:19-21
오늘 읽은 말씀 뒤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든지, 한쪽을 귀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이 말씀이 NKJV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You cannot serve God and mammon.” “Mammon”은 “부, 재물 (riches)”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 (Aramic) māmōnā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흔히 대문자로 “Mammon”이라고 쓸 때는 부와 재물을 인격화 (personification)해서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악한 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사람은 절대로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리는 돈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갖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똑 같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작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덤불 위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마음 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국 열매를 맺지 맺을 수 없다.” (마태복음 13:2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seed that fell among the thorns represents those who hear God's word, but all too quickly the message is crowded out by the worries of this life and the lure of wealth, so no fruit is produced.” "by the worries of this life and the lure of wealth"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청지기 주일입니다. 청지기를 영어로 “스튜어드(steward)” 라고 하는데, 좀 생소한 말입니다. 그러나, “스튜어디스 (stewardess)”라는 말은 귀에 익숙합니다. 비행기나 배에서 손님들을 돌보는 여승무원들을 스튜어디스라고 합니다. 스튜어드는 남자 승무원들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스튜어드는 남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관리인(one employed in a large household)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집사(執事)혹은 총무(總務)라는 말에 해당합니다.
우리 말 성경 (개역성경) 전체에 총무라는 말이 창세기 39:4에 한번 나옵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저는 매번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느낌이 새롭습니다. 기구한 운명으로 애굽에 팔려 온 요셉은 주인 보디발(Potiphar)의 신임을 얻어 그 집의 총무가 됩니다. 보디발은 바로의 수비대장으로 애굽의 막강한 실력자였습니다. 그 집의 엄청난 재산과 가정의 일들을 요셉이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 말씀도 놀랍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더 놀랍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집안 일과 보디발이 가진 모든 것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보디발이 가진 모든 것, 집에 있는 것이나 들에 있는 모든 것에 복을 주셨습니다.” (5절) 요셉이 그 집을 관리하면서부터 그 집의 모든 일들이 별 탈 없이 잘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관리하는 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곡식이나 가축들이 불어났습니다. 보디발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요셉은 이 모든 일을 잘 해 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The Lord began to bless Potiphar for Joseph's sake)”는 말씀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임한 모든 축복은 한 사람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그 집에 신실한 사람 하나가 들어 오니까 그 집 전체가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그 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버지 집에 있었을 때는 들에 나가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아버지 사랑만 받았습니다. 그 때 요셉이 17살이었다고 합니다(창세기 37:2). 애굽에 와서 보디발의 집에 팔려 오고, 그 집에서 주인의 신임을 얻을 때까지 6-7 년 정도 걸렸다고 해도, 25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대충 대학교 졸업할 나인데, (우리교회에서는 청년 2부에 속하는 때입니다.) 그 나이에 무슨 사회 경험이나 실무 경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요셉 개인의 능력이나 수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의 뒤를 봐 주신 것입니다.
청지기직 (Stewardship)이라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일로 알고 신실하게 관리해야 하는 마음과 정신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을 관리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신실하게 관리했습니다. 보디발은 이집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셉은 보디발 집의 일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관리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직입니다. 청지기직은 교회 일만 그렇게 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종들은 두렵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참마음으로 순종하기 바랍니다. 주인이 볼 때만 잘하는 척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기쁜 마음으로 주인을 위해 일하십시오. 여러분이 종의 신분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주님께서는 선을 행한 것에 대해 보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 나오는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에베소서 6:5-8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 한 구절 읽어 드릴까요? “여러분은 모든 말과 행동을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리기 바랍니다...... 종들은 언제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주인이 볼 때만 열심히 일하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주인을 섬기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상으로 주실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일꾼들입니다.” 골로새서 3:17, 22-2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Do it as a representative of the Lord Jesus (주님을 대표해서 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하십시오).” “Serve them sincerely because of your reverent fear of the Lord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신실하게 섬기십시오).” “Work willingly at whatever you do, as though you were working for the Lord rather than for people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Remember that the Lord will give you an inheritance as your reward, and that the Master you are serving is Christ (그런 사람에게 주님이 상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 당신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성경 말씀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은 교회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일에는 죽도록 충성하면서 사회에 나가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청지기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보디발 집의 일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지기 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과 세속의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대충 대충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하고, 교회에 와서는 신실하게 맡은 일을 하고......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위선자들 (hypocrites)”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청지기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다양해 지고 전문화 되고, 세분화 되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세상에 나가서 청지기직을 실천해야 할 분야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청지기직을 가지고 성실하게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청지기직의 핵심은 돈입니다. 돈은 이 사람이 청지기직을 올바로 이해하고 신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 (touchstone)입니다. 청지기직을 말하면서 돈 문제를 말하지 않으면 핵심(核心)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의 본문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오늘 말씀에 보물(treasures)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뒤에는 재물(money or Mamm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물은 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문제가 제자들의 믿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잘 들어야 합니다. 첫째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21절)”고 하셨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네요. “Wherever your treasure is, there the desires of your heart will also be.” 직역하면, “당신의 보물이 어디 있든지 간에, 바로 거기에 당신의 마음의 소원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곳에 돈을 씁니다. 여행하는 데 가치를 둔 사람은 몇 천 불씩 아깝지 않게 돈을 씁니다. 어디서 그런 글을 읽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옷은 안 사 입어도 오페라는 봐야 한답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예술적인 삶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헌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생활에서 헌금생활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24절)”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섬깁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돈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노예도 되고, 돈의 노예도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돈, 둘 중에 누구를 당신의 주인으로 섬길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돈을 어디에다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좀(moths)이 먹거나 녹(rust)이 스는 곳에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아무 가치 없는 일, 헛된 일에 돈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to store up treasures on earth)”입니다. 반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은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영리한 것 같지만 자기 보물을 땅에다 쌓아 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entertainment를 위해서, 쓰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일을 위해서 돈을 씁니다.
images354232_billgates2.jpg많은 사람들이 빌 게이츠 (Bill Gates)의 마이크로 소프트 (Microsoft)를 싫어했습니다. 그가 교묘한 방법으로 독점을 함으로써 공정거래 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가 그런 식으로 시장을 독점하기 때문에 다른 컴퓨터 회사들이 살아 남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빌 게이트는 항상 세계 최고 갑부로 이름이 오르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빌 게이트의 마이크로 소프트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빌 게이츠 재단 (The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이 하고 있는 일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정말 돈을 벌어서 저런 일들을 한다면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빌 게이츠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래 전에 본 다큐멘터리여서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빌 게이츠 재단에서 아프리카에 모기장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에서 그러데요. “단순히 아이들이 밤에 잠을 잘 때 모기장 안에만 자면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30초에 한 명 꼴로 아프리카 아이들이 말라리아 (malaria)로 죽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빌게이츠 재단에서 하는 일은 미국의 초등학교 교사들의 질을 높이는 일에 투자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질을 높이는 것이 미국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2009년에 이미 3억 8,000만 달러를 지원했고, 앞으로 5-6년 간 35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합니다.
청지기직의 핵심은 돈을 어떻게 벌고, 무슨 일에,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여러분의 보물을 사용하십시오. 신실하게 헌금생활 하십시오. 저는 새해에 가치 있는 일을 찾아서 여러분의 헌금을 요청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선명회를 통하여 아프리카 아이들 입양하신 분들,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나요? 신실하게 여러분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청지기직을 실천하시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6:19-21 / 스테반황목사
이사야 39장을 보면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낫게 되었는데, 이를 축하하기 위해 바벨론 왕 모로닥발라단의 사절단이 선물과 친서를 들고 히스기야를 방문했습니다.히스기야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서 기분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제국의 제왕이 선물과 친서로 들려 사절단을 보내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신이 난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난 후에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아왔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중심을 보고 실망하셨기 때문에 그 실망을 알리기 위함이셨습니다.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히스기야가 대답합니다. “그들은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이때 히스기야는 그의 진심을 자신도 모르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고백은 이사야39장 4절인데, 개역 개정은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지 않고 개역 성경이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개역).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의 사절단 앞에서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전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표현도 없었습니다. 주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병에서 나은 그의 마음 속에는 단지 죽었다가 살아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있을 뿐,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망각하고 세상적인 축복들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궁전에 있는 것과 나라 전체에서 가장 좋은 보물을 다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무심결에 한 고백입니다. 그는 “내 궁전, 내 창고,내 보물”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즉, “내 궁전, 내 창고,내 보물”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병에서 나은 히스기야에게 가장 소중했던 보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는 건강을 되찾은 몸과 여러 소유와 으리으리한 궁전과 무기들이 그의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죽을 병에서 나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이 베푸신 ‘복’에 그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보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광과 부귀와 무기였습니다.즉, 그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사랑한 것입니다.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마음과 결심을 전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국의 환관이 되리라.”이 뜻은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패망하여 유다 왕족이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때는 히스기야가 자랑하던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 더 집착할 때 그 모든 복을 헛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심판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가 얼마나 세상의 복에 마음이 가 있던지 이러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실망을 듣고도 자기는 여전히 세상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라고 하며 흐뭇해하였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세상의 많은 부귀와 영광과 무기를 소유할 수 있으니 좋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솔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주 앞에 비추어 봅시다. 나는 과연 히스기야의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여 복을 얻은 후,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보다는 도리어 응답 받은 복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직장이 없어서 방황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어느날 하나님은 직장을 주셨습니다.그런데 그 직장에 마음을 다 빼앗겨 하나님을 망각한다면 그것이 오늘 히스기야와 똑같은 경우입니다. 결혼 대상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내를 얻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마음을 다 빼앗겨 하나님을 망각한다면 이 또한 히스기야처럼 되는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기를 하나님께 구하여 대학에 들어간 후 오히려 세상 문화에 빠져 신앙을 잃는다면 이 또한 히스기야처럼 망령된 것입니다. 자녀를 달라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었는데 도리어 그 자녀가 우리의 보물이 되어 그 아이를 사랑하느라 하나님을 소홀하게 하면 그것이 히스기야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는데,결혼하는 이유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조건 때문이라면 이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그 남자와 결혼한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또 다른 남자가 훨씬 돈이 많아서 같이 살자고 하면 당장 보따리를 싸 들고 다른 남자에게 갈 것입니다. 그때 버림 받은 남편이 아내의 본심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깊은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저는 본문의 사건을 보면서 히스기야가 병에 들었다가 15년 더 살지 말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건이 없었으련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차라리 병에 걸렸을 때 15년 연장을 받지 말고 사망했더라면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을 찢는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오래산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오래 살면서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긴다면 도리어 일찍 사망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또 원하는대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종종 기도 응답 받은 복 때문에 하나님을 망각하고 신앙을 잃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히스기야의 자랑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발설한 히스기야의 가장 깊은 보물은 “내 궁전, 내 창고,내 보물”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자랑입니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무심결에 하는 자랑과 의식,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보물입니다. 만일 우리의 보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마음에 큰 실망을 주는 히스기야와 같은 신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롯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그녀의 보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보물은 이 세상의 재물과 영광이었기 때문에 결국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즉, 롯의 아내는 그녀의 보물이 불 탈때 함께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세상을 보물 삼은 자들이 다 멸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우시듯이 이 세상의 모든 보물을 다 태우실 것입니다. 그때 세상을 보물로 삼던 자들은 한없이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5-19). 주 예수님과 상관없는 모든 노력들과 수고들은 헛 것이 될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유지하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수고는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망각하며 누리는 이 세상의 모든 영화와 부귀와 귄세는 한 밤의 꿈처럼 잠깐 반짝이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마다 보물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연인과의 사랑이 보물인 사람이 있습니다.또 어떤 사람은 돈이 보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보물은 명예입니다.또 어떤 사람은 자녀가 보물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의 보물은 가문의 자존심인 사람도 있고 개인적인 자존심인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자존심이 보물인 사람은 학벌과 외모,사회적 지위등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대단히 귀하게 여깁니다.한심한 사람 중에는 쾌락이 보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돈만 생기면 술을 퍼마시며 방탕의 쾌락을 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의 보물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보물 때문에 살아갑니다.보물 때문에 싸우고, 보물 때문에 낙망하며, 보물 때문에 교만하고 우쭐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미움과 살인은 각 사람마다 보물로 여기는 어떤 보물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의 보물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보물로 삼은 자라고 정의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바로 이러한 사람이 복음을 깨달은 자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안개와 같은 쏜살같이 흐르는 이 세상! 무엇을 위하여 삽니까? 혹시 하나님의 율법을 잊고 있습니까? 주의 음성을 듣기를 게을리 합니까? 이 세상 것에 정들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발견하고 이 세상을 단지 도구로 생각하고 항상 그 나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제가 키우는 애완용 강아지의 보물은 뼈다귀와 빛바랜 장난감 공입니다. 이 세상만이 소망인 사람들의 보물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보물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를 통한 참된 신앙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믿음에 의해 가치관이 바뀐 신앙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하기까지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보물로 삼았지만, 회개하여 거듭난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물로 삼고 사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참된 백성은 주의 재림과 함께 이 땅에 임하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이 땅에서의 고난과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얼마든지 의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본으로써 우리는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의 믿음을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야고보 사도는 이 세상의 것들을 보물로 여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세상에 속한 것을 보물로 여길 때 그 마음에 욕심이 잉태하게 되면서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된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나아가 야고보 사도는 세상을 보물로 여기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4-5).
또한 전도서 기자인 솔로몬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의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나 …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라.”(전 2:7-11, 2:22, 3: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보물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일때 우리의 인생은 썩은 인생이 될 것이며 죄악으로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눈을 감을 때 한없는 허무 가운데 그 고통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성경은 이 세상의 것으로 보물 삼은 자들을 탐욕에 속한 자라고 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엡 5:5).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보물로 삼은 자는 탐욕으로 인하여 우상 숭배에 빠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돈이 보물일 때는 만가지의 죄악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 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어리석은 일을 하다가 결국 자신을 망치는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가정과 사회 속에서 모든 악의 뿌리가 될 것이며 돈을 더 많이 얻으려다가 진실한 믿음에서 떠나고 오히려 더 큰 근심과 고통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돈이 보물인 사람은 가족 관계도 깨어지고 진실한 친구들도 다 잃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의 것을 보물로 삼을 때 그에게 남는 것은 평생에 죄악을 범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하셨고 바울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에 대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미래를 위한 든든한 터가 되고 참생명을 누리는 가장 보람된 삶이 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치관이 변화된 믿음이어야만 참된 구원의 믿음이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부귀를 보물로 여기던 마음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인정하시는 보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니라”(골2:3). 예수님 안에 모든 영원한 참된 보화들이 가득차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보배로 삼을 때 이 우주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 인간들은 죄가 많고 연약함이 많고 부족함 투성이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 보배를 마음 속에 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어떠한 능력입니까?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능력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복된 사람이 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배 삼기 원하는 것은 생명없는 재물이나 잠깐 있다 사라지는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물 삼기 원하는 것은 바로 영생 그 자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그분은 죽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무한하게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능력과 자랑을 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벧전 2:6).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삼는 자는 결코 망신이나 좌절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결코 그 인생을 마칠 때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보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삽시다. 이 세상 사람들과 불신앙의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보물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수고하는지 모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보물이 없고 단지 이 썩어질 이 세상의 보물이 전부라서 그런지 얼마나 세상에 집착이 강하고 보물을 위해서는 얼마나 고집이 세고 무섭고 지독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썩을 보물을 붙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보물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배설물처럼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아니할 영원한 보물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된 영원한 보물을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보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최고의 선물은 그분의 보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보배가 되는 이유는 바로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죄사함을 허락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 귀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에게 영생을 포함한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러므로 성도들은 호흡이 있는 동안에, 아니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노래하며 찬송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도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계시록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흰 옷 입은 성도들이 등장합니다.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으로부터 주의 보혈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으니라.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내 보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보혈 때문에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나를 위해 그 보배 피를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감사하고 그분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배로 삼았던 바울의 고백입니다.“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19-23)고 권합니다.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배로 삼는 자들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1:4).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마음 깊은 곳에 새기기 바랍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우리의 보물을 삼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의 보물이 만일 이 세상이면 이 세상이 멸망할 때 우리 역시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일 때는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영원한 기업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수고와 삶은 영원한 영광과 연결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죽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보혈을 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배로 삼아 남은 삶을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놀라운 이유
마태복음 6:19-34 / 노경모 목사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많은 염려를 하는 것 같아요. 건강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인간관계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직장생활에 대한 염려, 공부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등 크고 작은 염려들이 수없이 많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까지 염려는 찾아옵니다.
‘염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는 ‘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걱정’이라는 말이 있지요. ‘걱정’이라는 말은 염려와 뉘앙스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국어사전에는 ‘안심이 되지 않아 속을 태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근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심이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염려’라는 말은 핵심은 ‘앞 일에 대해서, 즉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입니다. 그래서 34절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6번이나 반복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염려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염려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장 7절의 말씀 역시 크리스천에게도 염려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염려가 없다면 주께 맡기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는 빌립보서 4장 6절의 말씀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에는 염려거리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염려거리가 생깁니다. 찾아오는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없지만 그 염려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그 염려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염려를 이길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염려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염려하므로 마음이 상하게 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불안, 초조, 두려움, 불면증, 소화불량 등이 생깁니다. 드디어 영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렇게 염려는 하등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망가뜨리는 손해를 끼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자세하고도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갈 때,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육지를 걷듯이 걷게 해 주셨고, 물을 주셨고, 먹을 것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그들의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의식주(衣食住) 문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모든 것들을 다 책임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임져 주셨고, 하나님은 야곱을 책임져 주셨고,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을 책임져 주셨고, 하나님은 다니엘을 책임져 주셨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책임져 주셨고, 하나님의 바울을 책임져 주셨고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삶의 기본적인 문제라면 의식주의 문제입니다. 의식주의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5절을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기서 ‘염려하지 말하는 말’은 ‘염려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살다보면 먹고 입고 거주하는 것에 대한 염려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의식주의 문제는 삶의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염려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의식주에 대한 염려에 빠져서는 안됩니까? 우리의 목숨 즉 생명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구속을 해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우리의 몸과 생명에 대해서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십시오. 새가 돈을 법니까? 새가 농사를 짓습니까? 그러나 새는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를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들도 내가 먹이고 기르는데 너희는 새들보다 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입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 심지어는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들여다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예쁩니까? 이 식물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되기 위해서 자기들이 옷을 만들었습니까? 이 식물들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이렇게 식물들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너희를 하나님이 입히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말씀입니다. 28-31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에 빠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를 ‘성도’, ‘신자’, ‘크리스천’ 이라고 말합니다. 그 반대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뭐라고 부르지요? 네 ‘불신자’, 또는 ‘넌크리스천’이라고 부르지요. 이 당시에는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삶의 문제로 염려에 빠지는 것은 이방인들의 삶이 자세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염려하는 자들을 가리켜 ‘이방인들’,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이미 하나님의 그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32절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한 중년 부인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식사 기도를 드리는 순간, 그 부인은 이웃 오두막집에 사는 가난한 가정의 식탁이 생각났습니다.
"여보, 잠시만 다녀오겠어요. 빵과 우유만 전해 주고 곧 돌아올게요."
"식사 후에 가지 그래. 아니면 하인을 보내든지."
그 부인은 남편의 말을 뒤로 하고 종종 걸음으로 마을길을 걸어 오두막집으로 갔습니다. 문을 두두리는 순간,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부인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주님, 주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제 아내와 아이들을 보살펴 주소서. 먹을 것이 없어 굶은 지도 이틀이 지났습니다. 주께서 만나의 메추라기로 채워 주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기도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그 부인은 문을 열고 들어가 자기가 가져온 빵과 우유를 식탁에 올려놓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렸나 봐요. 하나님이 저를 이곳으로 보내 주셨지 뭐예요. 먹을 것이 부족하거든 언제든지 저의 집으로 오세요. 하나님이 맡겨 놓으신 것이 많이 있답니다. 필요하시면 오셔서 찾아가세요."
이렇게 하나님의 우리들을 모든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이렇게 준비해놓고 계시는 하나님을 ‘여호와이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은 받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기회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는 시편 119:71의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염려가 나에게 다가 올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병이 걸렸을 때, 성도들은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가를 되돌아보고 회개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 없는가 곰곰이 생각하게 되고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생각해보고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신앙생활 잘못한 사람은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고 신앙생활 잘 하게 되는 전환점(轉換點)이 되니 병에 걸린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 됩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니 병까지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염려가 다가 올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염려가 찾아올 때, 교회도 더 열심히 나옵니다. 바빠도 시간이 없어도 막 나오십시오. 염려가 찾아 올 때, 더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십시오. 염려가 찾아 올 때, 다른 지체들을 더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더 섬기고 더 봉사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냐하면, 그 염려가 해결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좋게 더 멋지게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더 크게 회복되고 넉넉하게 치유됩니다. 33절을 읽어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다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염려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에 대한 어느 유학생의 경험담입니다.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여름 방학이 다가오자 기숙사에선 짐을 싸는 친구들이 한명 두명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인 나로서는 기숙사에서 나와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내가 거처를 정하지 못해 고민하는 동안 기숙사 측에선 어느덧 보름 뒤 문을 닫겠다는 공고문을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석 달여 되는 긴 방학을 위해 일단 하숙방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내게 있는 돈으로는 두 달 정도의 방세밖에 안될 것 같았습니다.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한 친구는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방학 중 자기 집에 와 있어도 좋다고 했지만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석 달 동안이나 신세를 질 수는 없겠기에 정중히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급한대로 우선 있는 돈으로 방부터 정하고 나서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유학생들도 고국으로, 혹은 하숙으로 속속 빠져 나가자 기숙사는 여름인데도 사뭇 썰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방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나도 짐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든 이디오피아 난민을 돕는 데 얼마간의 성금을 내놓기로 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그 돈을 내면 방세는 한 달치 밖에 남지 않는 형편이라 나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과 약속했다는 사실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빵 한 조각 때문에 굶어 죽어간다는 이디오피아 난민 어린아이들의 기운 없는 눈빛도 떠올렸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기로 하고 아프리카 난민 돕기 단체의 은행 구좌에 약속한 돈을 입금시켰습니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와 보니 잘 아는 교수님 한 분한테서 집으로 전화를 해달라는 연락이 와 있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뜻밖에도 내게 여름 방학 동안 자기 집에 와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동양의 몇 곳을 여행할 계획인데 집에 남는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롸 의를 구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성도로서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염려가 있을 때, 이 염려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될 때, 이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염려까지도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되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염려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염려거리는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우리는 이 염려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염려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고 마귀는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아야 할 놀라운 이유를 주신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항상 책임져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좋은 것을 예배해 놓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서 모든 염려에 뛰어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
마 6:19-21 / 홍문수목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에 있어 ‘물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더불어 육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물질 가치의 척도인 ‘돈’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물과 공기에 비유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에 버금가게 중요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야!”
성경에서도 물질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합니다. 신기한 것은 고상하신 예수님도 물질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비유 38개 중에서 16개 이상이 물질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보면, 기도에 관한 언급이 5백번 정도인데 비해 물질에 관한 언급은 2천 번이 넘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해 줍니까? 하나는 그만큼 물질이 인간의 삶에 중요하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물질생활이 신앙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이 좋은 사람?” 하면 어떤 사람을 생각합니까?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 기도 많이 하는 사람? 말씀대로 사는 사람? 전도 많이 하는 사람? 봉사 많이 하는 사람? 맞습니다. 그런데 빠진 게 있습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있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질생활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복된 인생을 살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성경적 물질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 물질생활에서 승리하시고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물질에 관한 말씀 : 나 자신을 위한 말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 말씀 중에서도 엑기스와 같이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본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물질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물’은 물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9절과 20절에서 반복하며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떤 표현입니까?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바로 너희 자신을 위한 축복의 말씀이니 명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물질 이야기를 꺼내시니까 혹시 부담을 느끼십니까? “돈 내라는 이야기 아냐?” 예, 돈 내라는 이야기도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포괄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생활 전반에 관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목사가 헌금 이야기 하면 아주 싫어합니다. 전도해 보면 의외로 헌금 문제로 시험을 받아 교회 안 나간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사이비 교회나 일부 몰지각한 목회자들이 나쁜 의도로 헌금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어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들이 스스로 오해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러다 보니까 목회자들 중에는 가급적 교회에서 헌금 이야기를 안 꺼내는 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어쩌면 저도 그 부류에 속하는 한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홍 목사는, 신반포교회는 헌금 이야기 안 해서 참 좋아~ 교회 건축 할 때도 헌금 강조하지 않아도 잘 됐잖아. 매년 재정도 모자라지 않잖아.” 물론 좋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라 듣기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스스로 헌금하시는 성도들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슴이 뜨끔해 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시는 물질문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직무유기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헌금 이야기가 아니라 물질생활에 관한 종합적인 말씀을 전하는 게 중요한데, 헌금 이야기 안 하려고 물질 문제를 소홀히 한다면 정말 곤란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리스도인의 물질생활에 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점을 양해하시고, “아, 오늘 말씀은 나 자신을 위한 축복의 말씀이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쪼록 저도 여러분도 물질생활에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 칭찬받고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를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2] 성경적 물질관 : 하나님이 주인, 인간은 청지기
본문을 관찰해 보면 짧지만, 중요한 성경적 물질관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정리해 드립니다.
① 물질의 가치 : 중요한 수단
본문에 나오는 ‘보물’이란 말은 ‘물질’ 혹은 ‘돈’을 가리킨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보물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역시 중요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물질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물질 자체를 선하게 혹은 악하게 보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 오해를 합니다.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자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적이 아닙니다. 반대로, 물질을 무조건 선한 것으로 보고, 물질이면 만사 오케이인 것처럼 마치 행복의 마스터키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 역시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물질이 중립적 가치를 지닌 ‘수단’ 혹은 ‘도구’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선악이 결정됩니다.
② 물질의 주인 :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물질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이 창조 원리입니다. 이 원리대로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 되면 선하게 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인이 되려고 하면, 되지도 못하고 악하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창조 당시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지으시고 인간에게 그것을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주인의 뜻을 받들어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겁니다.
‘청지기’(벧전4:10)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오이코스’(집)이란 단어와 ‘메노’(관리하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말하자면 주인을 대신해서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갈 때 물질생활을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경제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Economy인데, 이 단어가 바로 헬라어 ‘오이코노모스’(청지기)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 활동을 잘 하는 방법은 곧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가 3장 보면, 에덴 동산에 침투한 뱀(사단)이 여자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만듭니다. 그때 사단이 유혹한 말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겁니다.(창3:5 참조) 새빨간 거짓말이죠.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이 됩니까?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범죄한 인간은 죄의 종이 되고, 물질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6:23)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요8:34 “ ...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본문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 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고대에는 은행 제도가 없어서 집에 돈을 보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도둑이 허술한 흙벽을 뚫고 들어와 강탈해 갔습니다. 혹은 돈에 좀이 슬거나 녹이 슬어서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은행 제도가 있으니까, 안전합니까? 인간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잠시 소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잠시 빌려 갖고 있을 뿐입니다. 실패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빼앗기거나 손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곧 물질의 가변성, 유한성입니다. 오늘날도 도적과 좀과 동록이 형태는 다르지만 수두룩합니다.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예기치 않은 지출이 생깁니다. 도난이나 사업 실패, 잘못된 투자로 돈을 날리고, 빌려 줬다 떼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하죠. 사람이 술을 마시는데,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삼켜버린다고 합니다. 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돈을 벌고 쓰는 것 같지만, 그 다음에는 돈이 돈을 법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돈이 사람을 삼켜버립니다. 인간이 청지기임을 망각하고 주인 행세를 하면 오히려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맡기기 전까지 결코 물질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은 누누이 증거합니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잠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전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다 보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런 사실을 유의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나 자신의 청지기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3] 청지기의 삶 :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요, 하나님이 진정 축복하는 복된 인생입니다.
① 하나님의 주권 고백 : 십일조 헌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입술을 거쳐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면 물질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헌금입니다. 그 가운데 핵심이 십일조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의 진정성을 확인하시고자 십일조 헌금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정말 내가 너의 주인이냐?” 물으십니다. 그래서 무조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주신 것 중의 10분의 1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어야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이요, 물질생활에서 참 자유와 기쁨, 축복을 얻게 됩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십일조 헌금을 군대의 훈련에 비유해서 설명해 놓은 게 있는데, 적절한 것 같아서 소개해 드립니다. 비행기에서 낙하하는 특수 훈련에서 예비 단계로 모형 타워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이 있습니다. 그 높이가 ‘십일’(11)미터인데, 인간이 가장 크게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닥에 쿠션 장치를 해두고, 또 안전하게 줄을 묶어놓고 하는 훈련이라 괜찮습니다. 하지만 맨 처음에는 겁이 납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면 조교가 뒤에서 밀쳐냅니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떨어지는데,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할만 하거든요. 그 후에 실제 비행기에서 낙하산 하나 메고 뛰어 내려도 여유가 생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처음 하려고 하면 겁이 납니다. 손해 보는 것 같고, 생활이 어려워질 것도 같고 ... 그러나 괜찮습니다. 오히려 여유가 생기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풍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증하십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약속 붙들고 담대하게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생 물질 문제에서 자유함을 얻고 풍성한 복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② 잘 버는 법 : 하나님의 법도대로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내가 일해서 버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도대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라, 훔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정직, 근면, 성실 등의 덕목들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
③ 잘 쓰는 법 : 누리고, 드리는 삶
‘버는 축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쓰는 축복’입니다. 실컷 벌어놓고 쓰지 못하는 경우 많은데, 불쌍한 일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벌되, 번 것 중에서 십일조를 드린 후 나머지를 갖고 잘 써야 합니다. 잘 쓰는 법은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잘 누리는 법, 잘 드리는 법 등입니다.
i) 잘 누리기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갖고 누릴 분복을 갖고 있습니다. 누리는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거나 상처를 주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주변에 가난한 이웃이 있는데도 무관심 한 채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죄악입니다. 이런 사항을 주의하면 얼마든지 누려도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물질을 통해 주시는 기쁨입니다.
벌써 고인이 된 지 오래된 어느 재벌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말년에 속병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흰죽에 간장을 찍어 연명했습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 있으면 뭐 해?”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버는 축복과 더불어 ‘누리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ii) 잘 드리기 : 모든 사람이 그래야 되지만, 특히 그리스도인은 누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6:20~21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 앞에 기억되고 칭찬받을 영원한 가치와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정당하게 누리는 것도 결국은 사라지는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사용하는 것, 즉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영원히 남게 됩니다. 이것은 천국은행에 예금하는 겁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한번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를 했답니다. “여러분! 돈 많이 버십시오!” 그랬더니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그 목사 설교 잘 하네” 하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웨슬리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근검절약해서 많이 저축하십시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 목사 정말 설교 잘 하네” 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많이 드리십시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인상을 쓰면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 목사 잘 하다가 막판에 죽을 쑤네.”
여러분, 버는 것도 축복이고 누리는 것도 축복일 수 있지만, 가장 큰 축복은 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이게 가장 큰 축복일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가 안 그런가 ... ? 여러분, 신앙은 있는데 물질이 없습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앞으로 주실 수도 있고, 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다 살아갈 만큼 주십니다. 하지만 물질은 있는데 신앙이 없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당장은 풍족할지 모르지만 멸망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도 없고 신앙도 없으면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데 신앙도 있고 물질도 있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할 만한 성숙함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겁니까?
아프리카 차드 선교 현지를 둘러보면서 저는 목사라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짐을 느꼈습니다. 쓸 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그럴 때가 종종 있고, 다른 선교지에 가서도 그럴 때가 있지만, 이번에는 더욱 절실했습니다. 선교 현지에서 물질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여러분이 드린 헌금이 사역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다닙니다. 자동차가 되어 복음전도자들은 태우고 다닙니다. 건물이 되어 사람들을 모아 구원하며 그 인생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돈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죽은 돈이 아니라 ‘산 돈’입니다.
여러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고, 남은 위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 은혜, 물질을 주신 은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또한 불쌍한 영혼과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 ” 그리고 저 천국에서 영원한 기업과 영광스런 상급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딤전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물질을 ‘버는 복’도 받으시고 ‘누리는 복’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가난해도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주신 것에 자족하시되 더 주실 것을 기대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가장 큰 복 ‘드리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스팔트를 숭배하는 사람
마 6:19-21 / 채규현목사
할렐루야!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셨습니까?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은 무엇을 목표로 사셨습니까?
각 사람마다, 물론 첫인상이란 게 있지만, 만나면서 보면(한 15분 정도만 같이 이야기하다보면) 그 분이 무엇을 가장 귀히 여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대화법에서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서 그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엄마들에게는 다른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다 소용없고, 사랑스런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엄마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자기 자식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이거든요.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국충정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나누어야만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돈을 벌지를 이야기해야 눈을 반짝거리면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의 유행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요즘에 유행하는 옷에 대해 이야기하고, 요즘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재미있어 한다는 말입니다. 각자 자기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나 보여지는 것이죠.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치있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멋진 옷도 아니고, 이 세상의 돈도 아니고, 이 세상의 값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천국을 이야기할 때 얼굴에 빛이 나야 합니다. 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그 소망으로 인해 마음에 뜨거운 것이 일어나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 중에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크리스챤들이 간혹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19절).” 고 이야기하십니다. 다시 20절에 가면, “너희를 위하여 오직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고 이야기하십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이야기하시는 이 말씀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명령과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이것만이 여러분이 꼭 지켜야될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에 보화를 쌓아두라.” 이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킬 때에 진정한 복이 있고, 지키지 않을 때에 거기에 따라 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때에, 이 땅에 보화를 쌓아두고 이 땅의 그 보화에 여러분의 마음이 집착되어 있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은 너무나 쉽게 실망하고 상심하고 염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보화는 무엇입니까? 꼭, 요즘에 이야기하는 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여기 보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이 현재 재물이 많고 적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재물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물에 대한 자세와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재물에 더욱 마음을 빼앗겨 있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는 가난한 사람일수도 있어요. 인생의 모든 목표와 마음이 오직 돈에만 가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로 D. L. Moody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시카고부터 시작에서 자기가 전에 신발을 팔았던 신발장사의 마케팅 테크닉을 가지고 그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이 무디는 장성한 어른들뿐만 아니고 어린아이들에게 아주 쉽게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이 샌프란시스코에 갔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의 큰 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였습니다. 칠판을 갖다 놓고, 그 칠판을 양분해서 한편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쓰게 했고, 다른 한편에는 천국의 귀한 것들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대필하게 했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결과들을 보니까, 세상에서 귀한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금, 땅, 이 세상의 즐거움, 명예, 사업, 옷, 술…. 이런 것들이 세상의 귀한 것들에 써 있었습니다. 천국의 귀한 것은 예수님, 천사들, 믿는 사람들, 면류관, 생명나무, 생명수, 깨끗함, 새노래…. 이런 것들이 쭉 써졌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이 두 종류를 놓고 어느 것이 정말 귀한지 비교해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은혜받은 것은 물론이요, 칠판에 대필하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바로 그 두가지를 보면서 은혜받고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주일학교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다가 오직 금을 위해서 서부로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마음은 ‘어떻게 하면 금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까?’ 거기에만 마음을 빼앗기던 사람이었는데, 세상의 보화와 천국에 있는 것들을 자기가 직접 쓰면서 거기서 깨닫는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너무 이 세상에 집착해있었구나.’ 를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신 그 높은 인생까지 못 올라갑니다. 독수리 날개침처럼 창공을 차고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 진척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내게 이런 신앙생활의 진전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천국을 소유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천국에 가기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요. 이 세상이 너무나 즐겁고 편안하고 재미있고 그래서 천국은 가물가물, 저 사막 너머의 신기루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 제가 여기서 조금더 살겠습니다. 조금더 조금더….” 이렇게 사는 크리스챤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해서 과연 행복하느냐, 그렇게 산다고 해서 정말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가 있느냐,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인생에는 이 세상에 집착하는 한, 이 세상에서는 염려하고 상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보물을 땅에 쌓아둘 때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한 도적을 걱정해야 되죠, 좀을 걱정해야 되죠, 동록을 걱정해야 되죠. 재물을 가지고 있는 한 편할 날이 없습니다. 재물을 원하는 한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내게 있는 모든 귀한 것, 가치있는 것, 이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차피 이 세상은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에 심판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뒤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 현재 내게 가치있는 것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이죠. 하늘에 쌓아두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그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을 가지고 즐겁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옛날에 한창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민하던 사람들이 많이 배를 타고 가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민자들을 가득 태우고 가던 배가 신대륙을 향해 가다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떠밀려 무인도에 좌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이민자들이 가지고 갔던 식량은 넉넉했습니다. 다들 무인도에 내렸는데, 그 무인도의 환경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거기 내린 모든 이민자들이 ‘어떻게 하면 여기서 오래 버틸까?’ 이것을 생각하는데, 마침 봄이라 ‘그러면 우리가 가져온 식량을 먹으면서 이 땅에 씨를 뿌리자.’ 그래서 씨를 뿌리기로 여러 가지로 계획을 하는데, 마침 옆에서 금광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씨를 뿌리려던 계획은 다 백지화되고, 너도 나도 금광에 가서 금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한달 두달 세월이 지나면서, 금은 넘치도록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노려보고 있게 되는 그 때에 “아차!” 싶은 거죠. 그 때 씨를 뿌리는데 그 씨는 채 싹이 나기도 전에 이미 찬바람을 맞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풍성하게 금은 보화를 캐어놓고 그들은 거기서 굶어죽었습니다. 많은 보물이 있는 가운데 굶어 죽는단 말입니다. 이 세상은 이 무인도 작은 섬과 비슷합니다. 그 망망대해는 마치 영혼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의 씨앗이 있습니다. 가치있고 귀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을 심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게 해야되는데, 그것을 먹으면서 이세상의 금화, 이 세상의 가치있는 것에만 집착하다 보면, 어느새 여러분의 인생의 끝이 보이고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너의 가진 재물을, 너의 가진 보물을, 너의 가진 가장 귀한 것으로 느끼는 것들을 하늘을 위해서 쌓으라, 하늘 나라를 위해서 심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이 말씀이 오늘 본문 6장의 제일 끝에 나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시간, 내가 가진 건강, 내가 가진 재능 이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고,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쓰고, 복음의 확장됨을 위해서 쓰고, 이를 위해서 열심히 투자를 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 이겁니다. 여기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물론 여러분의 삶이 윤택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여유있게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도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가진 귀한 것, 이것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께서 하늘에 쌓아두라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것을 우리가 좀 재미있게, 마음껏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하시지 않고 자꾸 하늘에 쌓아두라고 이야기하실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도 이미 하나님께서 본문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이 보물을 천국에 쌓아두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이미 천국에 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이미 천국의 마음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쩌지 못해요. 만약 여러분이 이중생활을 하려고 작정했다고 칩시다(구원도 받고, 이 세상에서도 모든 것을 다 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것을 이중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에, 미안한 말이지만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해서 살게 되는 한 여러분의 마음속에 천국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의 재물을, 여러분의 귀한 것을, 여러분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것을 드릴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천국의 소망이 더욱 커져간다는 말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예요. 그리고 마음이 천국에 가 있으니까 천국의 속성들이 내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천국에 보물을 쌓을 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20절에 보니까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 마지막 내용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때 내 마음속에 점점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이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여러 가지 특징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특징이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의 마음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도서에서 이야기합니다. 영원에 대한 갈증이 있어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에 대한 갈증이 천국에서는 이미 해소가 되는 것이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니까요. 이 세상에서 제일 못 말리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죽음이 겁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는게 겁나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 뭐가 겁납니까? 요즘에 안타깝게도 이슬람교를 믿는 모슬렘들 중에서 자살폭탄테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어쩔수가 없어요. 단지 그들의 생각, 그렇게 죽으면 자기들은 사후에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놀라운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지 않습니까? 죽음 뒤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 그 천국의 여러 가지 속성이 있죠. 안 죽죠? 그냥 안 죽고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안에 평화가 있고,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고, 사랑이 있고, 누구와도 화평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러한 진정 기쁨의 곳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에 내가 가기 전에 미리 천국에 보화를 쌓아놓기 시작하면, 이미 그 천국의 일부분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죽어서 천국가자” 물론 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앞으로 가게 될 천국을 미리 여기서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천국을 맛보기 시작하면 할수록, 저 천국이 더욱 그립게 됩니다. ‘그렇구나, 내가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진정 내가 살아야 될 삶의 목표이구나.’ 이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해 삽니까? 여러분,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삽니까?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믿는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근심하고 걱정하고 세상에 메여서, 그저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는 대로 그 넓은 길로 같이 가는 것이 제일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천국가는 길을 가지고 그 천국을 마음에 두고 이 세상에서 어떠한 파도가 쳐도, 어떠한 태풍이 불어도 요동치 않는 믿음,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진정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 믿고 천국간다” 그 천국이 뭡니까? 그 천국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천국의 진정한 가치, 그리고 그 천국의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능력을 이 세상에서도 계속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믿는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도 이미 여러분은 천국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의 삶이 여러분에게 시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살라고 주님께서 거듭거듭 이야기하십니다. 어떻게 누립니까?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그 길은 오직 여러분의 보물을 천국에 미리 쌓아두는 것, 그 길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제가 다시 묻지요. 얼마나 쌓아두셨습니까? 여러분, 천국에 보물을 얼마나 쌓아두셨습니까? 얼마나 미리 송금해 놨습니까? 얼마만큼 여러분이 가진 귀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해 보았습니까?
마지막으로 우화 같은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은 금입니다. 세상이 불안할 때,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이 최고입니다. 이 금을 끔찍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만약 하나님께서 천국에 금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금을 가진 사람들이 천국 가서 보았습니다. 금이 어디에 있습니까? 길이 다 금이죠. 황금길 아닙니까? 천국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아스팔트를 가지고 간 것입니다. 금을 천국에 가지고 가 보니까 아스팔트로 쓰더라 이겁니다. 여기서 보석이 귀해서 가지고 갔더니 천국에서는 벽돌입니다. 보석들이 다 벽에 있습니다. 우화지만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귀한 것, 천국에 가면 아스팔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천국인데, 그 천국의 값어치대로 이 세상의 것을 따져보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값어치대로 이 세상의 것을 값을 매기고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부디, 무디가 이야기했듯이 “천국에 있고, 천국에서 귀한 것” 여기에 여러분의 인생을 거십시오. 이 세상의 귀한 것에 여러분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귀한 것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으면, 열심히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투자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에 어느덧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천국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에게 이 천국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여러분이 바르게 이해하셔서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주의 백성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질의 복
마 6:19-21 / 김태복목사
이번 주간에는 설날 연휴가 있습니다. 설날이 되면 서로가 덕담이 담긴 인사를 나누는데 대부분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 복 중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건강의 복, 출세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을 말할 것입니다. 아마, 그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면 대부분 제일 먼저 택하는 것이 물질의 복일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은 물질만능의 시대이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 돈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고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람이 잘나 보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못나고 학벌이 없어도 돈이 많아서 수십 억 자리 호화주택에 살고 최고급의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무슨 동창회 때 일류 호텔의 뷔페에서 한턱을 척척 내면 그렇게 잘나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배우고 인물이 잘 났어도 주머니가 텅텅 비어서 돈을 제대로 못쓰면 무엇인가 초라해 보입니다. 물질만능의 현대에서는 돈이 나고 사람이 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돈이 많으면 왜인지 사람이 잘나 보이니 어찌 할 수가 없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돈 타령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는가 봅니다.
그러다가 무엇이 제대로 안되면 탄식하기를 "왜 똑같이 노력하는 데 아무개는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는가?“라고 탄식하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자,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물질의복을 받을 수 가 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 물질의 특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사람은 돈이 무엇인가를 모른 채 돈을 많이 모으므로 마침내 부자는 되었으나 그 돈 때문에 식구끼리 싸움이 생기어 부부가 깨어지고 자식끼리 싸움질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은 물질의 부요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주시는 물질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물질의 복을 바라기 전에 먼저 돈을 많이 벌기 전에 물질의 특성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에는 세 가지 성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돈은 물질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어느 분은 돈을 너무 죄악 시 하거나 악마 시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 중에는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것을 너무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장사하는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돈을 헤아리고 있으면 "당신은 밤낮 그렇게 돈만 사랑하니 큰 일 났습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성경 한자라도 더 보세요.“라고 합니다.
또는, 사업하는 남편이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세속적인 양 생각하는 것이나, 자기 스스로도 재물에 대한 욕구나 돈을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나는 너무나 더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자책합니다.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시는 동안 먹는 것, 입는 것, 집을 짓는 것,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이므로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처음 30년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면서 가정을 돌보시고 정부의 세금도 내시고 성전에 대한 의무도 감당하셨습니다. 주석가 바클레이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저축도 했었을 것인데 돈을 맡은 갸룟 유다가 이 일을 맡았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젊은 분들은 부자들에 대해서 이상한 분노를 가지고 있어서, 쩍하면 '부자 놈들, 재벌 놈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에 대해서 귀하게 보는 것도 반대하지 않으신 반면, 가난에 대해서 극구 칭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나 예수님이 사귄 자들 중에 부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배를 가지고 몇 명인가 인부를 고용할 정도로 재정형편이 괜찮은 자들이었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최고가의 향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무덤까지 제공할 정도의 부자였고 예수님이 지주 찾아가 쉬시기도 하고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도 부자의 소유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으나 그의 재물을 모두 완전히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온 여성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는 상류계급에 속한 부유한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는 멀리하고 가난한 자에게만 가까이 한 분이 아니라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구원의 대상으로 대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아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에게 물질의 복을 강조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 창고가 차고 넘치리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되고 노력하는 자에게 부가 소유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잠10:4에서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가 재벌들에게 대한 반감을 가지기 쉬우나 사실 정직하게 땀 흘려 부자가 된 자는 그 나름대로 존경 받을 인물들입니다. 오히려 게으르고 낭비하여 빈곤하게 사는 자가 칭찬 받을 일이 없다고 보는 것이 바른 기독교 물질관입니다.
(2)물질의 특성은 재물을 많이 쌓아둘 수록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좀과 동록과 도적이 침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보화는 대략 세 가지로 본문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옷입니다. 그 때는 정말 옷이 귀했습니다. 큰 돈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요즈음은 흔해 빠진 것이 옷이어서 멀쩡한 옷을 쓰레기통에 버려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50년 전,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옷이 없어 구정이나 추석 때에야 옷 한 벌 사 입고는 했습니다. 그러니 수천 년 전인 예수님 당시에 오죽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옷이 보화였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간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금덩어리와 외투 한 벌을 훔치었다가 이스라엘이 큰 책망을 받기도 하고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에게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인 몰래 요구했다가 문둥병에 걸린 것을 봅니다.
이러한 보화에 속하는 옷도 오래 두면 좀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둘째, 당시의 보화는 곡식입니다. 눅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곡식을 많이 쌓아 놓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곡식은 보화지만 땅에 오래 쌓아두면 상하고 맙니다. 요즈음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곡식을 오래 보관 못해서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식이나 과일은 방부제를 엄청나게 쳤기 때문에 큰 위험이 따르게도 되는데 2천년 전에야 오죽 하겠습니까?
세 번째 보화는 돈입니다. 돈도 땅에 쌓아두면 위험합니다. 도적은 용케도 돈 냄새를 잘 맡으므로 돈 많은 사람이나 가정을 잘 알아냅니다. 그 돈을 훔치려고 틈을 탑니다. 이제는 돈만 뺏어 가는 것이 아니고 목숨까지 뺏습니다. 더 나가서는 돈이 많으니까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안 도와준다고 원망을 듣습니다. 자식들도 돈이 많으니까 유산싸움을 함으로 사이가 나빠집니다. 이처럼 돈을 땅에 많이 쌓아 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영국의 중고차 매매업자 죤 니콜슨이 축구경기 복권에 당선되어서 400,400 불(우리나라 돈으로 약 4억8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횡재를 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4년이 지난 후 런던 신문과의 대담에서 그는 그 큰 돈을 탄 후, 불행하게도 그 부인과 이혼했고 1개월 간 감옥생활을 했으며, 은행에 44,800불(우리나라 돈으로 약 5천만 원)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면서 탄식하는 말이 “그 복권을 타기 전에는 참으로 행복했는데, 참으로 그 돈이 원수야, 원수”라고 하더랍니다.
(3)물질의 성질은 돈을 사랑하면 돈의 노예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돈을 좋아하는 것은 자유지만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다 보면 마음을 돈에 빼앗기는 날이 옵니다. 본문 21 절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있다’는 말은 ‘중심이 돈에 가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가서는 마침내 돈이 내 주인이 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사실, 우리가 돈을 종처럼 마음대로 부려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기가 쉽습니다. 오늘 6:24에 나오는 대로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존재가 됩니다. 마치 어느 은행원 아가씨가 어느 남자를 사귀더니 마음이 홀랑 빠집니다. 그 남자 때문에 웃고 우는 존재가 됩니다.
나중에는 그 남자의 노예가 되어 그 남자가 시키는 대로 은행의 돈을 나쁜 방법으로 빼내다가 들통이 나서 불행한 결말이 나고야 맙니다.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면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이 이끄는 대로 욕심에서 욕심으로 치 닫다 보니 결국 끝에 가서는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는 말씀대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 여러분은 물질의 복을 받기 전에 먼저 물질의 특성을 바로 깨달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물질의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은 많든지 적든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에게 잠시 맡긴 줄 알고 잘 관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청지기란 뜻은 ‘주인의 소유를 맡아 쓰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청지기는 내 수중에 있는 돈을 쓸 때도 제 마음대로 자기만 위해서 쓸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써야 합니다.
신8:13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였고 , 17, 18 절에 "또 두렵건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번 돈이라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벌게 해 주셨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청지기들에게 요구하시기를 ‘너희 가진 것은 전부 내 것이니 네가 생활할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다 내게 바치라’고 하시지 않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네가 가진 것의 10분지 1은 내게 바치고 나머지 10분지 9는 네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가져오라고 하셔도 우리는 순종할 수밖에 없음에도 10분지 1만 요구하시니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우리가 청지기임을 신앙 고백하는 자세요,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있는 것은 청지기의 자세를 거절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도 사실은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려는 뜻이 담기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인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시험하여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 창고란 하늘 창고를 의미합니다. 십일조는 그 창고에 쌓았다가 많은 이자를 부쳐서 다시 주시는데 그 이자가 100배로 쳐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은행은 아무리 이자를 쳐 주어도 5% 정도이지만 하늘은행의 이자는 100배입니다. 막10:30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라고 했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에 생명보험회사로 큰 성공을 거둔 윌비 박사는 처음에는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삼상1:20을 읽어 주면서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한 탓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기로 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첫 번째의 약속으로 삼았습니다.
그 후 윌비 박사의 기업은 날로 번창하여 큰 생명보험회사의 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 중에 십일조를 하는 분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러나 물질의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아직도 십일조를 하늘 창고에 쌓지 못하는 분들은 신년도에 결심하고 실행에 옮겨 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대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땀 흘려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축복해 줄줄 믿고 땀 흘리어 열심히 씨를 뿌리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빈둥빈둥 노는 자에게 하늘에서 금덩어리와 돈뭉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심는 자가 거두게 하는 것입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복은 부동산투기를 하여 떼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불로소득의 떼돈은 오히려 가정을 망치고 자식을 망치는 해가되는 물질이지 축복된 물질이 아닙니다. 가장 복된 물질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땀 흘려 수고 하여 거둔 것입니다. 시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3절에서 식구들의 복이 나옵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잠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는 풍족함을 얻으리라"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말3장의 말씀에도 십일조를 한 자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방법이 도깨비 방망이식으로 뚝딱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3:11에 보면 "내가 너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밭에 심을 때 소산을 넘치게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반대로 하나님이 아무리 복을 주시려 할지라도 인간이 땀 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N. 웹스터는 말하기를 "나의 성공은 단순히 근면에 있다. 나는 일생동안 한 조각의 빵도 결코 앉아서 먹은 일이 없다. 쉴 사이 없이 일에 힘썼던 것이다"고 했고 비스마르크는 "청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단 세 마디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물질의 복을 원하십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천국 창고에 들이고 복을 주실 줄 믿고 여러분의 일터에서 땀 흘려 심고 또 심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의 복은 남에게 주는 자에게 부어주신다는 점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쓰도록 주신 10의 9조라도 낭비하고 사치하지 말고 검소 절약하여 아꼈다가 불우한 자에게 주는 자가 될 때에 그것도 하늘 창고에 쌓은 것이 되므로 100배로 쳐서 되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자꾸 돌아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지, 한 군데 오래 있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재물을 많이 주시는 것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지 자기 배만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펌푸처럼 선한 일을 위해 쓰면 하나님도 계속 그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 불우한 자를 돌보는 것은 남에 대한 의무일 뿐 아니라, 곧 하나님께 대한 의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14:31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 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알고 보 면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불우한 자를 도와주고 구제하는 것을 하나님은 전부 자기에게 꾸어준 것으로 인정하시어서 흔들어 넘치도록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딤전6장에서도 보면 부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결코 욕심을 부리거나 교만하지 말며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자에게 반드시 더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게 여유가 있을 때 사치 낭비하지 마시고 고아나 과부, 고학생, 불우한 자들, 내 문 앞에 오는 걸인들이나 신문배달원들, 청소원들을 박대하지 마시고 후하게 대접하거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소자에게 하신 줄 알고 대신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황해도 은률에 이찬영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큰 부자로 일년 농사를 지으면서 특별히 마련한 십일조를 창고에 넣어 두고 교회 살림을 하면서 또 학교를 도와주는 등 많은 선행을 한 분입니다. 집안에 잔치 날이면 먼저 큰 잔치를 벌려 황해도의 거지들을 초청하여 먼저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은 자녀들에게 “가난한 장사꾼들의 물건값을 절대로 깎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공산치하가 되면서 토지개혁이 되면서 모든 땅과 아끼던 과수원도 다 넘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과수원이 공산당에게 넘어가게 되는 전날도 하루 종일 과수원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지나가는 사람이 ‘내일이면 남의 과수원이 될 터인데 무엇 하러 그렇게 수고하십니까?'라고 물으니까 장로님은 "누구인들 이 과실을 먹을 게 아니요? 나는 오늘 이 과수들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6.25 동란이 터져서 공산당에게 재산을 다 빼앗기고 오갈 데가 없어졌을 때에 수많은 거지들이 와서 장로님 가정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다 복을 받았는데 광림교회에는 그분의 손녀 되는 이해성 집사님이 출석하는데 남편 되시는 분이 일본에 갔을 때 뉴저팬 호텔에 투숙했는데 대화재가 나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생길 때라도 기적 가운데 살아났습니다.
그때에 고백하기를 ‘부모가 뿌린 선한 복의 열매를 우리가 먹고 산다’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결코 인색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머니를 풀고 열심히 어려운 자를 돕는 자가 되어 보십시오. 교회도 자기 교회 비대만 위해 물질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선한 사업을 많이 할 때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한 것으로 인정하시어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물질
마 6:19-21 / 이중표목사
태어날 때부터 우리 생명을 지탱해주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본능 가운데 가장 큰 본능은 먹고 싶은 본능, 되고 싶은 본능, 소유하고 싶은 본능입니다.
먹고 싶은 본능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으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먹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죽을 때까지 먹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욕구는 줄게 됩니다.
되고 싶은 본능은 성공하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성공하려고 공부도 하고, 경쟁도 하고, 자기 인격을 높은 수준으로 올리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명예욕에 근거한 것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본능은 부자가 되려는 욕망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유화의 욕심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 때문에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모든 욕망이 쇠해집니다. 식욕도 쇠하고, 명예욕도 쇠합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쇠하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소유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물질에 대한 집착과 소유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지만 물질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진짜 선한 사람입니다. 거의 대부분은 물질에 손해가 날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누구든지 잘못을 범했을 때 회개하면 용서를 받았습니다. 살인자도 용서를 받았고, 간음한 자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탐욕을 가진 자는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지 못했습니다. 물질의 탐욕에서 자유함을 얻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당시에는 유대 땅이 농경사회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겼던 세 가지가 의복, 곡식, 금은보화였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이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난을 갈 때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세 가지를 항아리에 담아서 땅에 묻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 항아리를 열었을 때 의복은 좀이 먹어 해어졌고, 곡식은 벌레들이 먹어서 상했고, 금은보화는 녹슬고 도둑이 훔쳐가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은 옷을 상하게 하는 벌레입니다. 동록은 ‘녹이 슨다’는 말이지만 다른말로 말하면 먹는다는 말입니다. 벌레들이 곡식을 먹어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은보화는 도둑이 훔쳐갑니다.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뭐니 뭐니 해도 money가 최고다.”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돈에 눈이 달려서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가고, 공부 잘하는 유학생에게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돈은 눈이 없기 때문에 아무데나 갑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고 그럽니다.
돈 때문에 도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때문에 남편 버리는 아내도 있고, 돈 때문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도 있고,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하는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양심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숭고한 명예를 더럽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 돌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돈은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도 돌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몰라보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주인이 하나님이 되든지 물질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지 하나님도 좋고 물질도 좋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목 위와 목 아래입니다. 목 아래는 땅을 먹고 삽니다. 목 위는 하늘을 먹고 삽니다. 목이 잘라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그래서 머리와 몸은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머리와 몸이 연결되어 있을 때 반드시 주인은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물질을 다스리면 충복한 종이 되지만 물질이 주인이 되면 혹독한 주인을 만나게 된다.” 물질을 섬기면 물질이 혹독한 주인이 되지만 물질을 잘 다스리면 충직한 종이 되어서 주인을 유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20절).
어떻게 물질을 하늘에 쌓습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물질은 땅에 쌓는 것이지 하늘에 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실까요? 이 말은 곧 예수님에게 물질을 맡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공중에 있는 대기권이 하늘이 아니라 하늘을 안고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늘입니다. 물질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르게 섬기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예수님에게 물질을 맡기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물질을 맡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못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다가도 물질만 주면 예수를 잘 못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물질을 맡길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못 맡깁니다. 형제에게도 못 맡깁니다. 자식에게도 못 맡깁니다. 누구를 믿고 물질을 맡기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교회 집사님 가운데 인색한 집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얼마나 인색한지 자기 집에서는 절대 구역예배도 안드립니다. 다른 집에서 드릴 때는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자기 집 차례가 오면 안드립니다. 과일 사고, 과자 사는데 돈 드니까요. 그리고 주일날 헌금할 때도 천원짜리 넣기가 아까우니까 백원짜리로 바꾸어서 넣는데 그냥 넣으면 ‘땡그렁’ 소리 날까봐 손을 깊숙이 넣었다가 뺍니다. 이렇게 인색한 집사님이지만 미장원에 가서 머리할 때는 미용사에게 5천원짜리 팁을 스스럼없이 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인색한 집사님 집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도둑이 집에 있는 귀중품을 다 훔쳐갔습니다. 구역장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구역장님, 어젯밤에 도둑이 들어와서 큰 시험이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목사님에게 하니까 목사님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었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역장이 놀래가지고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뜻대로 되었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러 가셔야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잘 되었다고 전해주시오.” 구역장이 목사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도둑 맞았으니까 안되었다고 기도하고 위로해 주어야 되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되었다’고 얘기하니까 집사님이 교회 안다닌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안다닌다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말씀대로 되었으니 기뻐하라고 전해주시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 19절을 읽어보라고 하세요.”
땅에 쌓은 것은 반드시 잃어버릴 때가 옵니다. 마지막 인생이 끝날 때 다 내게서 떠납니다. “땅에 보물을 많이 쌓는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주님과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물을 다 잃어버리게 될 때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결국은 주님과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번개 다음에 천둥이 따라오듯 모든 물질이 주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한 사람이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집에 불이 나서 온 집안이 다 타버렸습니다.” 잠잠히 있던 웨슬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은 불난 일이 없소. 다만 주님의 집이 불탔을 뿐이오. 그래서 조금 부담이 됩니다.” 웨슬레는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침례교 신자가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 것을 깜빡하고 침례를 받으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 속에 지갑이 들어있는데 지갑을 빼고 침례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물질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이 말은 곧 ‘너는 물질을 예수님에게 드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물질을 예수님에게 드리지 않고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예수님이 그의 마음 가운데 와 계십니다. 날마다 자신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십니다. 보화를 가지고 주께로 나아가는 사람은 엄청난 하늘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모두 나그네, 이 지구는 여관방, 전세 기한동안 빌려 살다가 주께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나그네가 호텔에 잠깐 투숙한다고 해서 자기 돈을 투자하지는 않습니다. 호텔 벽을 금으로 바르고 가구를 사 넣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집에 가구를 사고 금은보화를 두는 것입니다.
30개월 된 우리 손자가 자기 집을 알았습니다. 우리집에 놀러왔는데 냉장고를 열고 수박을 보더니 “수박 있네” 하면서 수박을 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은준네 집으로 은준네 집으로” 하면서 수박을 끌고 문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어쩌면 어린 것이 벌써 제 소유를 알아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것도 제 집에 갖다 놓으려고 수박을 가지고 가요. “그래 가져 가라. 네가 하늘나라로 많이 가져가야 한다.’
집은 사는 곳이요, 보물을 쌓아두는 곳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은 하늘에 보물을 쌓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로 보화를 가져갈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사랑하는 것을 뭘로 표현하겠습니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내 물질이 가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물질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셔서 내 물질이 오기를 원하십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20)
아브라함이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왕에게 포로로 잡혀가 고통을 당할 때 318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롯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이 돌아올 때 멜기세덱이 나타나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1-3)
멜기세덱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예수님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왜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십일조는 예수님을 만나는 입장권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면회의 확증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비밀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닙니다.
혹시 십일조를 안바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부터 마음을 바꾸십시오. 처음 나온 사람들은 괜찮습니다. 세례 안받은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고도 십일조를 안바치는 사람은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입으로 예수를 말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마음 없는 예배, 마음 없는 찬송, 마음 없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례 받고도 십일조 안바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택함받은 확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됩니다.
세계적인 부자 록 펠러가 이천년 교회사에서 최고의 복을 받은 비밀이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죽기 전에 록 펠러에게 세 가지 유언을 했습니다. 첫째 “언제나 교회에 가면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목사님 말씀에는 절대 순종해라”, 셋째 “십일조를 꼭 바쳐라” 그 신앙의 유언을 따라 그는 어려서부터 십일조를 바쳤고 그로 인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큰 축복을 받은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번은 창세기 11장 3절을 읽는데 이런 말이 씌여 있었습니다.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바벨론에 역청이 얼마나 많은지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역청은 헬라어로 ‘카파르’인데 영어성경에는 ‘아스팔트’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스팔트는 원 재료가 석유입니다. 폭 펠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영감이 벌개처럼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역청이 많았으면 역청으로 벽돌을 만들었을까 역청이 많다면 지하에는 석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즉시 스탠다드라는 석유 회사에 연락을 해서 이라크, 중동, 바벨론 일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조사 결과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십일조를 잘 바치는 사람은 성경을 읽는 눈이 다릅니다. 십일조를 안바치는 사람은 눈이 어두워서 이런 것이 안보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성경이 제대로 안보입니다. 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부모를 봐도 부모로 안보입니다. 사람을 봐도 사람으로 안보입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리는 물질
예수님의 물질로 예수님의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번성케 하신 것은 내 생활수준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헌금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업의 복을 주시는 것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물질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더 쓸 수 있는가를 시험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하고 있다가 다 잃어버린 후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바칠걸’ 하면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 하나님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1888년 노벨은 스웨덴 화학자로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의 형 루드빗히가 프랑스에서 사망했습니다. 신문 편집자는 그의 형과 노벨을 구별하지 못하고 신문에 이런 기사를 냈습니다.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드디어 죽다.” 신문 기자는 노벨이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된 것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노벨은 그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유산을 인류의 선한 일과 평화를 위해 일한 사람과 역사를 살리는데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을 수여하도록 전부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이 상은 ‘노벨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명예로운 상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마 6:19-21 / 박상훈목사
고아원에서 살던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좋은 가정에 입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님은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버릇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이는 먹을 것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만이 아는 곳에 몰래 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때에 따라서는 음식물을 숨겨놓고 자기가 숨겨놓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방청소를 하든지 또는 빨랫감을 찾기 위해서 구석구석 뒤지다가 숨겨놓은 음식물을 발견하고는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음식물에 곰팡이가 슬어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고아원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그렇게 음식물을 감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 밑에서 그렇게 하는 일은 전연 쓸데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사랑으로 잘 돌보아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음식물을 계속해서 숨긴다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섭섭하게 만드는 불신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견지에서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주고 계신데, 마치 우리가 아직도 영적인 고아들인 것처럼 자꾸만 우리의 육신을 위해 이 땅에서 무엇인가 쌓아두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리는 일이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결코 아닙니다.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곳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곧 영원한 하늘 나라가 우리의 본향입니다.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또 가는 도중에도 크고 작은 성읍들을 정복해야만 되었습니다. 헬라의 군병들은 그 모든 성읍들을 차례로 하나씩 하나씩 정벌해 나아갔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원정길에 오르기 앞서서 신하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지침을 내렸습니다.
"바사제국에 이르기까지는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어떠한 전리품에든지 손을 대지 말아라. 나의 명령을 어길 시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수많은 금은보화들이 땅바닥에 널려있는데, 그 모든 전리품들을 내버리고 가야한다니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얼마 안 가서 알렉산더의 뜻이 옳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바사제국이었습니다. 중간에 있는 작은 도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가는 도중에 금은보화로 인해서, 자기들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더라면 그들은 바사제국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쳐서 다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가볍게 했기 때문에, 거뜬히 바사제국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목표대로 바사제국을 손쉽게 정복하고,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지금도 우리를 돌보아주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목적지는 하늘나라입니다. 이 땅은 그저 우리가 잠시 거쳐갈 곳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마치 영적인 고아인 것처럼 우리 육신을 위해서 이 땅에 무엇인가 쌓아두기를 힘썼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마음의 방향을 바꾸십시다.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기를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땅에 쌓은 보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9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보물이라고 하면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진 보석이나, 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골동품을 머리 속에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보물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보물로 간주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 당시에는 옷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요새는 옷이 흔하니까 아무런 보물이 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옷이 매우 귀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옷이 보물처럼 진귀하게 간주되었던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45:22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형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서 요셉에게 왔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고 난 뒤 요셉은 자기의 신분을 형들에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요셉은 형들을 가나안 땅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오도록 수레를 딸려 보냈습니다. 길을 가면서 먹을 수 있는 양식도 주었습니다. 아울러 요셉은 형들 각자에게 옷을 한 벌씩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친동생 베냐민에게는 옷을 다섯 벌이나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옷이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수7:2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입니다. 그때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서 전리품을 감추었습니다. 그가 감춘 전리품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이 거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옷이 귀한 보물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삿14:12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청년들 30명이 잔칫집에 모였습니다. 그때 삼손은 블레셋 청년 30명에게 수수께끼를 내면서 만일 그들이 잔치하는 7일 동안 수수께끼를 알아맞히면 그들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수수께끼를 알아맞히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이 삼손에게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도록 약속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옷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왕하5:22에 보면 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에게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깨끗하게 고쳐주었습니다. 나아만은 너무나도 감사해서 선물을 주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엘리사의 사환이었던 게하시가 마음 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나아만을 몰래 따라가서 엘리사 대신에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선물 가운데 하나가 역시 옷 두 벌이었습니다. 그만큼 옷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양털로 만든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금실까지 달아서, 자기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그 당시에는 곡식이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든 때였겠습니까? 그래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곡물은 부의 상징으로 생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밭에 곡식의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는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리라."
먹고 살기가 어려운 때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부의 상징이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 그 당시에는 금과 같은 보화가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사람들이 보화를 주로 어디에 감추었습니까? 마13:44에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낮에 나가서 밭의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 가서 밭을 깊이 파고 그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는 이 세 가지, 곧 옷과 곡식과 보화가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에 쌓은 보물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옷은 입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입고 있지 않을 때는 거기에 좀이 쏠아서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곡식을 창고에 쌓아놓으면 무엇이 생기기 마련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동록이라고 말을 했습니다만 헬라어 본뜻은 "eating," 곧 "먹는 것"을 뜻합니다. 곡식을 먹어치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쥐나 해충과 같은 벌레가 곡식을 갉아먹게 됩니다. 또 밭에 감추인 보화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도적이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주인이 없는 사이를 틈타 땅을 파고 보화를 도적질해 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땅에 쌓은 보물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경우에 따라서 좀 더 오래 보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게 되면 결국은 우리의 손을 다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물을 안전하지 못한 땅에 쌓아놓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늘에 쌓은 보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0절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이 땅과는 달리 하늘은 안전합니다. 그곳은 좀이나 동록도 또 도적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가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의 욕심에 따라 이기적인 목적으로 쌓아둔다든지, 또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보물을 땅에 쌓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뿐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간, 재능, 건강, 노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제할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과시한다면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면 그것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곧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슬픈 기색을 내면서 또 얼굴을 흉하게 하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은, 아무리 귀한 금식을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보물을 땅에 쌓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서 또 얼굴을 씻으면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보이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막10:29∼30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요즘 우리가 은행에 저축을 하면 이율이 얼마나 됩니까? 한 4∼5%나 됩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원금조차도 보장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또 이율이 어느 정도 된다 하더라도 물가상승률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경우는 이율은 백 배라고 했습니다. 10,000%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수지 맞는 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하늘나라 은행은 안전합니다. 결코 부도가 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될 경우에 만기가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세에는 백 배나 받고, 내세에는 영생까지 겸해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확실한 투자입니까?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영락 교회를 설립하신 故 한경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영락 교회를 건축할 당시에 교인들의 수가 대략 150명 가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서 성전기공예배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은 그 당시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의 물질을 바쳐야 합니다. 십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서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 기공예배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뒤에 기공예배를 드리는 날 150명의 교인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십일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 뒤 30년이 흘렀습니다. 교회설립 30주년이 되었을 때 목사님이 한 번 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십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다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십일 동안 먹고 난 뒤 그 뒤에는 다 굶어죽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53명이 하나같이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금세에는 100배, 내세에는 영생까지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늘 하늘에 쌓아두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1절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해바라기는 늘 태양을 바라보면서 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보물이 있는 곳으로 쏠리기 마련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는 구역예배를 드릴 때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하도록 되어있다고 합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사회를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소위 말하는 복부인이었습니다. 그저 이 아파트 저 아파트를 계속해서 정신 없이 쫓아다니다가 그날 구역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찬송가를 펴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같이 찬송가 101동을 찾으십시다. 그리고 101동을 함께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아파트 동 수만 가득 차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남자 집사님 두 분이 함께 차를 타고서 기도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차가 그만 미끄러져서 실개천에 기우뚱하게 기울어졌습니다. 밤중이라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그들은 그냥 차를 두고 걸어서 기도원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밤새도록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기도의 내용이 서로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차 주인인 한 사람은 앉자마자 계속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차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꼭 좀 지켜주시옵소서."
반면에 같이 간 다른 집사님은 탄광을 운영하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탄광에 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물질이 있는 곳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이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땅에 보물을 쌓아두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가게 되겠습니까? 땅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될 경우에는 자연히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3:2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예컨대 이방인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보물을 땅에 쌓아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언제나 영원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가 시 한 수를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끝맺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류시인이었던 김소엽권사님의 시입니다. 하루는 그가 책상에 앉아서 밤 깊은 시간에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한 구절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눅12:20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용히 창 너머에 있는 밤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시골의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 속에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별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흘리시는 눈물이구나! 하나님의 눈물이 저렇게 별로 변해서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구나!"
곧바로 그는 종이를 꺼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제목은 "별"입니다.
"별"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나는 모릅니다.
오늘 밤이라도
"영혼아!"하고 부르시면
"네"하고 두말 없이 가야 되어요.
가기 싫어도 가야 하고
가고 싶어도 못 가요.
그분이 부르시기 전에는
그날이 언제일는지
당신도 몰라요
나도 몰라요.
모르면서도 모르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어요.
매일 밤
그분이 울고 계셔요.
이제 조금밖에 안 남았는데
하늘 곳간은 텅 비어 있고
입이 터지도록 먹고 마셔도
정작 가진 것
이 세상에 남긴 것
하나도 없어
저 불쌍한 자식을 어쩌나 울고 계셔요.
그분이 흘린 눈물
방울마다
빛나는
별
별이 되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의 하늘창고에는 보물이 얼마나 쌓여있겠습니까? 행여 우리의 하늘 곳간은 텅 비워둔 채, 그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는 일에만 급급해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제는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기를 힘쓰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내세에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금세에도 100배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
마 6:19-24 / 박종순 목사
마태복음 6장은 5가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을 구제할 때 어떤 자세로 할 것인가(6:1-4). 둘째,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6:5-15). 셋째, 올바른 금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6:16-18). 넷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6:19-24). 다섯째, 염려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라(6:25-34).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속에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보물이 무엇입니까? 귀한 것, 값비싼 것, 흔치 않은 것, 소장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물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돈, 보석, 신지식, 신기술 따위를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9-21절은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교훈합니다.
19절과 20절 첫머리를 보면 "너희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석도, 재물도, 하늘과 땅도, 그리고 사람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보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석 수집가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 인 것입니다. 왜 나를 위해 하늘에 쌓아둬야 합니까?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절을 보면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했고, 20절을 보면 하늘에 쌓아 두면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은행마다 대여금고라는 게 있습니다. 매월 일정액의 사용료를 내면 중요한 문서, 보석, 유언장, 통장 따위를 보관하는 `개인용` 금고를 빌려줍니다. 금고가 있는 영역은 도적이 접근할 수도 없고, 화재가 나도 타지 않는 첨단 시설을 했다는 것이 은행 쪽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뉴욕 무역센타 안에는 여러 개의 은행들이 들어 있었고, 귀금속 상점들이 있었습니다. 자살 공격으로 그 건물이 무너지고 난 후, 금고 안에서 통장을 찾았다든지, 다이아몬드 반지를 고스란히 찾아냈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땅에 쌓아두었던 보물들은 고스란히 불타고, 파묻히고, 재가 되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람 시체도 찾을 수 없는 참혹한 현장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7을 보면 하늘과 땅은 마지막 심판날 불사르기 위해 간수하시고 보존해 두신다고 했습니다. 즉 심판날 까지만 남겨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10을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불에 타 녹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현상을 지진이나 화산폭발현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1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했습니다. 땅은 불탑니다. 땅은 녹아 없어집니다. 그래서 온갖 값진 것들을 영원히 보관할 창고도, 은행도 못됩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 두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21절이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사랑에 깊이 빠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믿는 여자를 3년간 짝사랑하며 프로포즈 한 끝에 그녀와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직장에 가도, 밥을 먹을 때에도, 출장을 가도 그녀 생각만 합니다. 퇴근 후 만나서 저녁 먹고 데이트 하다가 헤어졌는데 그리움이 사무쳐 밤새도록 전화를 합니다.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울 때는 그녀의 집이 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잠을 잡니다. 한마디로 "그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인 것입니다.
돈이나 보석은 내가 지니고 있으면 불안하고 생명의 위협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행에 맡기면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고 편합니다. 보물뿐이겠습니까? 나의 보화, 귀한 것, 물질, 건강,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면 나는 편하고, 안전하게 인생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은행 금고는 값비싼 것, 귀한 것, 소중한 것만 맡아줍니다. 쓰레기나 오물이나 폐지를 맡아 주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물을 맡아 주시고 염려, 고통, 아픔, 한숨, 질병, 절망, 좌절 따위 등 온갖 인생의 쓰레기들까지 맡아주십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재산이 축나고 보물이 줄어드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3:10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고에 맡기면 불타지 않고, 녹슬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보관해 주실 뿐 아니라 쌓을 곳이 없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맡기느냐, 어떻게 하늘에 쌓느냐 입니다. 우편으로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택배로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성한 눈으로 바라보라
22-23절을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눈이 맑으면 마음도 맑다"는 말이 있고 "마음이 맑으면 눈도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눈빛도, 말도, 행동도 달라집니다. 부드럽고 착한 마음을 품으면 눈빛도 선해지고 말도 부드러워 집니다. 그러나 악하고 독한 마음을 품으면 눈에 독기가 오르고 말이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5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고 조정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라면 이럴 경우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떻게 말씀하실까? 어떻게 행동하실까?"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그런 말을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그런 일을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2000년 10월 현재 전국 소방본부에 접수된 장난 전화 건수는 1,218만 1,807건이었는데 그중 허위나 장난 전화가 485만 7,890건으로 40%이상이 넘었다고 합니다. 돈으로 따지면 수백억원이 된다는것입니다. 쓸데없는 장난 전화로 전화 회선이 막히는가 하면 돈이 낭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폭력 전화, 협박 전화, 성희롱 전화, 장난 전화가 건전한 전화 문화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럴 경우 "예수님이라면 이 전화를 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눈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눈이 성해야 온몸이 성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고운 마음, 성한 마음을 위해 예수님의 마음을 내 속에 품읍시다.
한 주인만을 섬기라
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녀, 친구, 형제, 이웃은 여러 명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나 남편은 여러 병이면 복잡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드라마 `여인천하`의 경우 왕비가 많습니다. 중전, 경빈, 희빈, 창빈, 기타.등등 그들 사이의 반목, 갈등, 질투, 증오가 나라를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다 여걸 난정까지 끼어 들어 조정이 흔들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도 두 교회, 세 교회 교인노릇 하면 안됩니다. 두 교회를 왕래하며 섬기면 신앙의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헌금도 내가 은혜 받고 섬기는 교회에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남을 돕는 것도 예수 이름과 교회 이름으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입니다. 은혜는 여기서 받고, 감사는 다른 곳에 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고, 돌보고, 이끄는 담임 목사도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담임 목사가 수십 명이면 교회가 흔들리고, 영적 삶이 헷갈리고 흔들리게 됩니다. 수십 명의 부목사는 담임목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담임목사를 보좌하고 돕는 헬퍼들인 것입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른 교회를 출석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안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좋지만 그러나 교회가 다르면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두 교회 찬양대를 지휘한다든지, 두 교회 반주를 한다든지 두 교회 찬양대로 봉사하는 경우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한 곳에 마음을 정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권력, 하나님과 명예,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세상,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물이나 권력, 명예나 사람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대통령이 새벽제단을 쌓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 권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돈 많은 재벌이 10의 5조를 하나님께 바치고 주일을 성수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탤런트나 가수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복음 전하는데 폭발적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돈이나 명예나 권력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사람이나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소홀히 대하면 주님이 나를 소홀히 대하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높이면 주님이 나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하면 주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주님만을 섬깁시다.
주님만을 높이고 찬양하십시다.
주님만을 따르고 바라봅시다.
시편 145:1-2에서 시인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왕이신 주를 찬양합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 6:19-24 / 김성광목사
A.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에 대하여
1. 재물, 물질, 헌금
여러분, 지난 한 해를 생각하면 연초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으로 유행을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부자가 된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만장자 신드롬’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10대, 20대의 네티즌들은 이른바 ‘대박’을 노리고 인터넷 복권 구매에 열을 올리고, 30대, 40대의 직장인들은 직장을 버리고 창업전선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 성공하여 부자가 되려면 그 사람의 능력, 실력이 갖추어지는 것은 물론 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여러 가지 다단계 판매에 뛰어들거나, 사업을 시작했다가 어려움을 당해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시키고, 서점에서는 부자와 관련된 여러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경제중심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경제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나라가 어려워지고, 개인의 행복과 건강도 빼앗기게 됩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새해에도 여전히 경제에 관한 것은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정치권도 경제에 따라 움직이고, 후보를 선정하는 과정도 경제에 대한 공약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중심은 경제가 될 것입니다. 북한에 비해 우리가 13배 더 잘 산다고 합니다. 결국 남·북 문제도 경제가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부실기업입니다. 기업들이 바르게 돈을 벌고, 또한 바르게 써서 사회가 발전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에 기여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고 노사분쟁에 휩싸이기만 한다면 한국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재물, 재산, 재능을 하나님 중심으로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불행해지고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 아주 통쾌한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보셨을 것입니다. ‘믿음의 기업 이랜드, 13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라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패션유통업체인 이랜드 회장 박성수씨는 1980년 기업은 정직하게 이윤을 내서 그 이윤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한 해 동안 8개의 계열사에서 단기 순이익을 1300억 원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중의 십분의 일인 13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정말 박수를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재벌이 되어야 나라가 잘 되는 것입니다.
올해에도 70억 원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이 130억 원을 가지고 북한어린이 돕기, 긴급재난구호활동, 사회복지활동, 선교활동을 하는 데에 쓰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희망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은 영어로 ‘머니(money)’라고 하는데, 이것은 라틴어 ‘모네타(monet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모네타는 ‘신께 의뢰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돈과 하나님을 별개로 생각합니다. 재물은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부도가 나고 병이 듭니까? 우리가 교만과 탐욕에 빠져 경제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죄악과 질병과 불행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보내고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너희를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 말씀이 ‘내가 지금까지 재물로, 보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했구나, 이제는 하나님께 내 재물과 재산으로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고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게 할 것입니다. 이제 다가오는 새해에는 여러분의 재산과 재물이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2002년의 마지막 주일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는데 막상 설교를 하고 보니 설교 제목을 잘 택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믿음이 생기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물에 대한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축복을 주신다고 가르쳤고 유대민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물을 쌓아 부자가 될 것인가?’ 하는 욕심과 탐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데에도 인색하고 이웃을 도와주는 것에도 인색했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는 축복받은 것만큼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과 도둑이 도둑질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으라는 것은 재물이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이 재물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쓸 때 바로 그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002년 한 해를 모두 보내고 2003년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했습니까?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습니까? 도둑질이나 사기를 당했습니까?
왜 이러한 일들이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축복을 이 땅에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이 와서 해를 끼치고 동록으로 인해 부패되며 도둑이 와서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하나님께로 온 것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고 ‘내 인생, 내 가치관, 삶의 목적,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는 신앙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B.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 재물을 하늘에 쌓음, 헌금 / 좀, 동록을 막아주심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보물’은 무엇입니까? 귀하고 값진 재산입니다. 그리고 뛰어난 재능도 이에 속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땅을 위해서 쓰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그들에게 귀한 재산, 보물을 주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한 밤중에 땅을 파서 깊이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땅 속에 묻힌 재산은 문제가 생깁니다. 비싼 옷이라고 입지도 않고 쌓아놓아 봤자 결국은 옷을 갉아먹는 해충인 좀이 생겨 입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금과 은을 잔뜩 쌓아 놓아도 금속을 녹슬게 만드는 동록이 생겨 쓰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아니면 도둑이 들어 모두 훔쳐가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한 것입니다.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산을 보호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신다는 뜻도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재물을 통해서 감사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재물과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늘에 쌓았던가?’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39편 6절 말씀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사고가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위험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재산을 다 쓰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16~21절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들어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도 못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에도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세, 마지막 시대에 재물을 쌓은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물이 들어온 것만큼 나가지 않고 자꾸 쌓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습니까? 서점에는 『현대에 미국은 과연 로마제국인가?』라고 하는 책도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 강한 로마제국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음주요, 셋째는 방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탐욕에 빠지면 아무리 강한 나라도 멸망을 당합니다. 술을 마시고, 방탕하는 것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 ; 1828~1910)는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축적되어 있을 때는 악취를 풍기고 뿌려졌을 때는 흙을 기름지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이는 것만큼 나눠주어야지 쌓이기만 하면 그것은 해가 될 뿐 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풀러(Thomas Fuller ; 1608~1661)는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두려워하는 자는 재물을 가지기에 적합하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재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재물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왜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집니까?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 자격도 없고, 쓸 줄도 모르고, 탐욕과 욕심에만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재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재물을 모아 금고에 보관하거나 은행에 보관하면 그 재물이 잘 보존되는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난 해 뉴욕에 있는 무역센터, 그 큰 건물이 테러로 인해 무너졌을 때, 그 속에는 은행도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보석, 돈 등 귀중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빌딩이 내려앉았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은 재물이든 사람이든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으며, 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있을 때 올바른 가치를 가지고 써야지 이것을 쓰지 않고 감춰두었다가 결국 쓰지도 못하고 사라지게 되면 후회와 탄식만 남게 됩니다.
미국에서 1600만 달러(약 200억 원)의 복권이 당첨되었다가 극빈자로 전락한 한 사나이의 인생이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63세의 윌리엄 포스트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인데 그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그 돈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친동생은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해서 그를 죽이려다 미수에 그쳐 구속이 되었고, 그에게 돈을 내 놓으라며 여기저기서 소송이 걸려왔습니다. 도박을 하다 돈을 잃게 되고, 투자에 실패하고, 결국 돈을 다 탕진하고 국가에서 매달 60만 원의 보조금을 타서 살아야 하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돈을 가질 줄은 알아도 쓸 줄을 몰라 더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앤드루 잭 휘태커라는 사람은 세계 복권사상 최고액인 3억 1490만 달러(약 3780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는 복권을 타자마다 세금을 내고 남은 1억 1170만 달러의 10%를 십일조로 바쳤습니다. 그는 십일조를 드리며 ‘나의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어려워서 해고했던 직원들 25명을 복직시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축복해 주시고,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 더 존경받고, 칭찬받고, 착한 일을 하려면 여러분의 보물을 이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마음의 중심을 드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1~23)
여러분, 그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격, 취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물질을 쓰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똑바로 사물을 직시하고 빛 가운데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곳에 탐욕과 욕심과 교만이 자리 잡고 있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좋은 일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 1~2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드리지 말고,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7절 말씀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와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 드리는 신앙과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 말씀에도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소망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여, 소원이 성취되기를 원해서,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축복하시고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겁고 감사하게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릴 때, 그것을 통해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해 주십니다.
김달식 성도님은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버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젊음과 정열을 다 바쳐 소규모의 제약회사를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20년 동안 회사는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아내가 구역질을 하고 토하기도 하기에 위궤양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위암 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암이 췌장까지 퍼진 상태라 3개월을 살기도 힘들고, 수술을 해도 일년도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20년 동안 고생해서 키워온 사업을 확장하다가 마무리를 하지도 못하고 부도를 내고 말았습니다.
평소에는 그의 형이 전도를 해도 ‘바빠서 하나님 믿을 시간도 없고, 하나님이 무슨 회사를 도와주겠냐?’라고 했었는데, 회사가 부도가 나고 아내가 병들어 죽게 되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찬송을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어 뒤늦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온 몸이 뜨거워지고 방언기도를 하게 되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암으로 죽어가던 아내가 원기를 되찾아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으니 의사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위암 말기 환자가 불과 한달만에 초기증세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빨리 수술을 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부는 어차피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것이니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수술비와 약, 건강식품에 들어갈 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며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암의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부부는 암에서 고침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셔서 영덕에서 시작한 육류가공업이 잘 되어 재물의 축복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하나님, 이제는 나의 남은 인생, 가정도, 회사도, 재물도 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열심히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섬기지 못하느니라
- 탐심, 우상숭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재물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둘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택하면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택하면 하나님께서 재물도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재물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늘에서 온 재물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우상으로 삼은 사람, 돈이 인생의 최고인 것으로 아는 사람, 돈을 인생의 가치관, 목표로 삼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5절 말씀에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데는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려도 없어지는 것은 불과 몇 달에서 며칠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큰소리치던 재벌들도 부도가 나서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재물은 결코 우리의 인생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없어질 것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해체될 것은 해체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지 재물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욕심을 갖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결국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말씀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보다도 하나님을 더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돈과 재물은 나에게 축복이 되고,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이 없는 돈은 우리에게 고통과 해만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필딩(Henry Fielding ; 1707~1754)은 “돈을 그대의 신으로 삼으면 결국 그 돈이 그대를 악마처럼 괴롭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돈에 대한 애착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빠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돈은 독이 됩니다. 돈으로 착한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만, 돈 때문에 불신앙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독인 것입니다.
로마 격언에 “돈은 짠 물과 같아서 갈증을 더 해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계속 벌어도 더 욕심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재물과 돈을 가지고 올바른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미국 격언에는 “백만장자 가운데서 웃는 얼굴을 본 일이 있느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을 적당히 가지고 있으면 얼굴에 웃음을 짓지만 돈이 너무 많으면 인상을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없을수록 잘 웃고 많을수록 잘 웃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탐욕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거부 휴스(Howard Hughes ; 1905~1976)는 멕시코의 쓸쓸한 호텔방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스의 거부 오나시스(Aristotle Socrates Onassis ; 1906~1975)도 프랑스의 한 병실에서 혼자 외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에 욕심을 부린 사람은 마지막 인생을 비참하고 처량하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 1835~1919)는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돈과 재물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과 재물을 우리가 부리고 써야지 이것이 우상이 되면 결국 그 돈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인생관이 달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으로 다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영철 성도님은 신발가게를 차리면서 목사님께 개업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장사가 잘 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무당을 데리고 와서 고사까지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되어 가게를 확장하게 되고 부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도가 나서 은행이자도 갚지 못하고 가게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커다란 강을 건어야 하는데 마침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가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께서 오시더니 건져주셨습니다. 그는 그 꿈을 꾼 이후로, 무당에게 받은 것을 모두 없애버리고 회개하며 ‘하나님, 이제는 내가 세상을 의지 않게 하시고, 돈만 따라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만 따라가며 충성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원에 올라가서 5일 금식기도를 하는 중에 “너는 나를 버려도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마음이 기쁘고 방언을 받고 성령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한번 일으켜 주시면 이제는 정말 목숨 바쳐서 하나님께 충성하겠다고 소원기도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온 후, 건강보조식품의 총판을 받고 식수정수시스템과 보일러 열효율을 높이는 열차단기 보급권을 획득하여 회사가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보상해 주시고, 재물이 필요할 때 재물을 주시고, 건강이 필요할 때 건강을 주시고, 큰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C.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서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갈 때, 몸과 마음과 물질과 재능, 재주, 재산,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축복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마 6:19-24 / 마경훈 목사
목사가 가장 하기 힘든 설교가 무슨 설교라고 생각합니까? 영적 지도자를 잘 섬기고 순종하라는 설교를 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설교도 하기 힘듭니다.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를 따지기는 힘들지만 둘 다 만만치 않은 설교입니다. 그런 설교를 하기 힘든 이유는 성도들이 시험에 들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사람보다 시험 들어서 신앙이 흔들거리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는 성도들이 표정만 바꿔도 목사는 불안해 집니다.
하지만 그런 설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돈에 대한 설교를 할 텐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돈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봐야 합니다. 하기 힘들고 어려운 설교라도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설교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성경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할 이유와 땅에 쌓아서는 안될 이유를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에게 유익입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그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설교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돈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돈이 죄악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돈에 시험든 사람은 혹독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딤전6:10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돈 사랑하는 한 가지 때문에 일만 악을 행할 수 있고,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되며, 돈에 대한 근심이 자신을 찔러 자신을 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등불인 것처럼 영혼은 온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어두우면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하면 영혼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돈을 사랑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면 심판을 받지만 돈을 잘 사용하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신자가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잘 들으시고 유익을 얻기를 바랍니다.
물질 사용에서 핵심은 물질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 정도로 섬기게 되고 신앙도 복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목적이 되면 소유에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소유가 많으면 행복하고 소유가 적으면 불행합니다. 심지어 모든 관계를 돈으로 보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관계도 부부관계도 심지어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돈을 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럼 어떤 수단인가요?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1.생활의 수단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유지되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옷도 사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생활의 공간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본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고 말씀하는데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있는 바를 족한 줄 모르고 더 욕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모범을 보인 사람이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웨슬레입니다. 그 분이 옥스퍼드대 교수로 일하고 있을 때 30파운드의 월급을 받았는데 이것은 혼자 살기에 충분한 돈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30파운드의 넉넉한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몇 점 사다가 집에 걸어 놓았는데, 자기 하녀가 겨울에도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하녀를 도와주고 싶어서 호주머니를 뒤졌는데, 남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 때 웨슬레는 자신이 돈 쓰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30파운드 받은 것 중에 2파운드를 선한 일에 내고 28파운드만 자신을 위해 썼습니다. 이듬해 월급이 60파운드로 올랐을 때 32파운드를 선한 일에 사용하고 역시 28파운드만 자신을 위해 썼습니다. 그리고 월급이 90파운드로 올랐을 때는 62파운드를 선한 일에 사용하고 28파운드만 자신을 위해 썼습니다. 또 월급이 120파운드로 올랐을 때도 92파운드를 선한 일에 내고 28파운드만 자신을 위해 썼습니다. 월급이 1400파운드로 올랐을 때에도 1372파운드를 선한 일에 사용하고 28파운드만 자신을 위해 썼습니다. 그가 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돈을 벌 수 있는 데까지 벌어라. 할 수 있는 데까지 모아라. 그리고 쓸 수 있는 데까지 하나님을 위해 써라 "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남대문시장이나 할인점은 매출이 떨어지고 있는데 백화점 명품관은 더 잘 된다고 합니다. 커피 잔 하나에 몇 십 만원, 침대 하나에 기백만원, 기천만원 하는 것들이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갑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뭔가 잘못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카드 남발로 수입보다 지출이 더 커져서 개인 파산자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돈은 생활의 수단이지 부의 상징이나 허세의 도구가 되서는 안됩니다. 꼭 필요한 것은 써야 하고 불필요 한 지출은 줄여야 합니다.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모으고 생활에 필요한 부분에 사용하고 남은 것은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2. 신앙표현의 수단입니다.
주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물질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으며, 심지어 신앙의 상태까지 파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십일조가 그렇습니다. 말라기 3장에서 하나님은 십일조가 신자의 의무라고 말씀하셨으며, 심지어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기분 나쁠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도둑이라고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을 주시지 않으면 돈을 벌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내가 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느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일한다고 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만 이상하게 자구 일이 꼬여서 소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자는 십일조로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고, 주일성수를 통해서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 있을 때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도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 일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이며 그 감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더 풍성한 감사의 조건들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3.자신을 변화시키는 수단입니다.
돈을 잘 사용하면 얻게 되는 유익 중에 큰 유익이 자신의 변화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이었는데 지금은 은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의 변화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변하니 하나님이 내게 다르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지옥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천국 갈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불신앙인에서 신앙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나 자신의 변화가 참 중요합니다.
나를 바꾸는데 하나님께서는 돈을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돈을 풍성히 주시면 풍성한 생활이지만 돈을 거둬 가시면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훈련하신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통해서 훈련하셨습니다. 돈을 통해서 훈련하셨다고 돈을 많이 주신 것이 아니라 돈을 거둬 가시므로 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목사로 만드시기까지 상당히 강훈련을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훈련 중에 있지만 말입니다. 여러 가지 훈련이 있었는데 그 중에 물질의 훈련이 컸습니다. 훈련을 받을 때는 상당히 괴로웠는데 그 훈련을 받고 나니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전 보다 신앙의 그릇도 커졌습니다.
4. 복을 받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심는 것입니다. 잠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꾸어드렸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칙은 최소 30배이며 많게는 100배까지도 갚아주십니다. 잠11:24에서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헌금이 하나님 앞에 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돌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보양하는 것입니다. 심는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를 주십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를 지을 때 150명 가량의 교인이 있었답니다. 한 목사님은 10일 먹을 것만 남기고 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사람만 기공예배에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53명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열흘 먹을 것만 남겨놓고 다 바쳐 버렸습니다. 그후 30년 가량이 흘렀습니다. 그 53명이 다 한국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물질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5. 사랑 실천의 수단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로 하는사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말 한 마디 잘하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의 장래를 바꿔놓는 일도 있습니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20세기가 낳은 세계적 부흥사입니다. 그도 어려서 동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골칫덩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 아이는 커서 뭐가 되겠는가”하고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할머니만은 달랐습니다. 개구쟁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말을 잘하고 사람 끄는 재주가 있어. 개성만 살리면 크게 될거야" 그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세계적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또 맥아더 장군도 어려서 말할 수 없는 개구쟁이였다고 합니다. 말썽을 피우고 사고를 치고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의 장래를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너는 군인의 기질을 타고났어"라고 말했고 그 말 한마디에 맥아더는 눈이 확 뜨였다고 후에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위대한 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로 하는 사랑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말로만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입을 옷이 없어 추운 사람에게 "더웁게 하라", 돈이 없어 먹을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배불리 하라"고 말만하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뿐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말보다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말보다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의 부담감을 가지고 그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선교를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교우들도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미자립교회, 장애자 기관을 돌아보는 것, 해외결연아동을 후원하는 일 그리고 지역 복지를 통한 선교 등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실천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사랑 실천의 수단으로 사용해 보십시오.
6. 상급의 수단입니다.
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에서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
천국에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행한 일에 대한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의의 열매가 나옵니다. 의의 열매는 이 땅에서 여러 배로 받는 것만 아니라 하늘의 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의의 열매가 열리는 방법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고(빌1:11), 둘째는 화평케 함으로 열리게 됩니다(약3:18), 셋째는 물질을 바르게 심을 때 열리게 됩니다(고후9:10).
천국에 들어간다고 다 같은 천국생활은 아닙니다. 그가 받는 상급이 다르기 때문에 천국에서 누리는 것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받게될 상급은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천국의 상을 쌓게 하시기 위해 주신도구가 돈입니다.
7. 하나님의 일의 수단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돈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해봐도 교회가 세워지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건물임대료, 관리비, 목회자 생활비 등 모든 것이 돈을 수단으로 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금은 패물을 받아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금은 패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화려하게 꾸미기 위함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인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만드는데 엄청난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사역하실 때에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여인들 가운데 돈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행비용을 충당했습니다.
신자가 왜 돈을 벌어야 합니까? 좀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재산을 쌓아두기 위해서도, 더 많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돈을 주시지 않습니다. 혹 주신다 해도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돈이 모이는 만큼 책임은 크고, 잘못 사용한 만큼 심판도 클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기도하며 정당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보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농부가 믿음이 좋다고 소출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아름답게 돈을 써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단으로 돈을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풍성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
마 6:19-24 / 김명혁목사
오늘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한 없이 크고 많았는데 비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그 보다도 훨씬 더 크고 많았습니다. 우리를 아직까지 살려두시고 아직까지 강변교회의 성도들로 남겨 두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았고 사랑보다는 미움이 많았고 진실보다는 거짓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들을 살려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마지막 주일 "복 있는 사람"이란 주제로 18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주일에 아주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만간 우리의 인생을 정리하고 주님 앞에 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가 여러분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들의 후회를 덜어드리기 위한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현신애 권사님이 어느날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현신애 권사님은 기도와 신유의 은사를 받은 귀한 권사님이셨습니다. 꿈 속에서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자기가 있을 집을 보여주는데 자기의 집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왜 자기 집이 이렇게 초라하냐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기를 현권사님이 세상에 있을 때 하늘로 올려보낸 것이 너무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현 권사님은 너무 놀라서 자기 이름으로 가지고 있던 기도원과 재산을 팔아서 북한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관련된 설교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19:21).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0,21).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16:9).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10:23,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3,44).
그리고 오늘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여기 보물이란 말 즉 treasures 는 우선적으로 돈과 재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재물이란 말 즉 money 또는 mammon 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보물이란 말은 돈과 재물뿐 아니라 시간과 건강과 재능 같은 모든 귀한 것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보물이란 말 대신 보화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조금 더 넓은 의미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 보화를 땅에 쌓아두면 조만간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화를 땅에 쌓아둔다는 말은 보화를 자기를 위해서 은행이나 금고에 넣어둔다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축척을 의미하고 자기를 위해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물질만능의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태도로 자기를 위해서 땅에 쌓아둔 보화는 오래 가지 못하고 조만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재물이건 사업이건 건강이건 재능이건 미모이건 자기를 위해서 땅에 쌓아둔 보화는 조만간 사라지고 맙니다. 경제적 불항이나 정치적 몰락이나 재난이나 질병이나 죽음이 땅에 쌓아둔 보화를 순식간에 빼앗아가고 맙니다. 재물은 날개가 있어서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만다고 했습니다. "재물은 날개를 내어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23:5). 예수님은 한 부자가 쌓아놓은 재물이 순식간에 그를 떠나고 만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여기 내가 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자기를 위해서 창고에 쌓아둔 소출이 순식간에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땅에 쌓아둔 보화는 조만간 내 손에서 떠나 사라지고 맙니다. 또한 많은 재물을 나를 위하여 사용해 보았자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면 그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둔다는 말은 보화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종류의 보화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면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게 됩니다. 그것이 돈이든 재물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너그럽게 사용하면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이 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덕질도 못하느니라." 욥바에 살던 여 제자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고 가난한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은 욥바 사람들의 기억과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 백부장 고넬료는 유대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는데 그것은 유대 백성들과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 되었습니다. "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4). 장기려 박사는 자기의 재능과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그가 사용한 그의 재능과 재산은 그의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 되었습니다. 영화 쉰들러즈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많은 재물을 들여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출했는데 그가 사용한 재물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어야 하는 첫째 이유는 그것이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2 둘째 보화를 땅에 쌓아두면 우리들의 마음이 하늘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물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떠나면 거기에는 사랑도 기쁨도 행복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면 그것은 가장 큰 불행입니다. 우리에게도 불행이고 하나님에게도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화를 땅에 쌓아두면 우리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점점 땅에 가까워집니다. 롯의 처가 재물을 사랑하다가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고 데마가 재물을 사랑하다가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6).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시25:1).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늘로 향하게 됩니까? 우리가 보화를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화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려면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3 셋째 보화를 땅에 쌓아두면 우리들의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땅에 보화를 쌓아두면 눈이 어두워져서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사물을 바로 볼 수도 없고 바로 판단도 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눈이 어두우면 하나님도 볼 수 없고 자기 자신도 볼 수 없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사람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멸시하고 학대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합니다. 사물에 대한 가치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보화를 땅에 계속해서 쌓으면 눈에 있던 빛도 어두워져서 아주 캄캄하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세계의 대 부호였던 Howard Hugh 라는 사람은 땅에 너무나 많은 보화를 쌓았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말로는 미치광이 짓을 하며 살다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밝은 눈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눈이 밝으면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밝으면 사물을 바로 볼 수도 있고 바로 판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이 그 눈이 밝아진다고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보화를 하늘에 쌓았던 대구 서현교회의 정규만 장로님은 자녀들과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면서 세상을 떠났는데 운명하기 바로 전에 "지금 천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보화를 하늘에 쌓은 사람은 그 눈이 밝아서 하늘을 보고 천사를 봅니다. 스데반도 생에 대한 애착과 물질에 대한 애착을 다 버렸을 때 하늘이 보였고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저희 아들 철원이도 때때로 "아빠 하늘이 보여, 아빠 예수님이 오셨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들의 눈이 밝아지려면 세상과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을 소유할 수는 있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재물을 사랑하거나 섬기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소유할 수는 있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재물을 자기와 자기의 가족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호화사치하며 사용하면 안 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너그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고 하늘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조만간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하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가난하고 초라한 집에서 살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칭찬을 들으며 하늘의 상을 받으며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가지고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보화를 하늘에 쌓는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인 동시에 오늘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삶입니다. 보화를 하늘에 쌓을 때 오늘을 행복하고 여유 있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나그네 의식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면 됩니다. 나그네 의식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
마 6:19-24 / 이정선 목사
우리는 세상적이라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상적인 눈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말해서 세상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세상적이란 말이겠지요.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세상적일 수가 없는 것일까요? 세상적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경건하다, 희생적이다, 또는 거룩하다 등과 같은 말이 있겠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고 기대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우 세상적인 삶을 사는 수가 많습니다. 종교적 행위 속에서도 세상적인 모습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도 아주 세상적으로 하는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책망하신 내용이 바로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고 그래서 칭찬받으려고 하는 선행과 종교적 행위들, 이것이야말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래서 도무지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형태가 바로 위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대단히 경건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매우 세상적인 동기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경건에 이르지 못한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많은 헌금을 하고 종교적 열정도 누구보다 뛰어나고 선행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아주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요.
세상적이냐 세상적이 아니냐를 아주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세상으로부터 보상을 얻으려고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을 기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 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최상의 목표로 삼고,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고, 세상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려는 것은 세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칭찬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려 애쓰고,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은 세상적이 아니라 하늘나라적이라고 해야겠군요. 이처럼 우리가 세상적인가 하늘나라적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는 것이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적으로 했던 것이라면, 세상 일을 하면서도 세상적이지 않고 하늘나라적일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바로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마땅히 세상적이지 않고 하늘나라의 가치관과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돈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돈 얘기가 나오면 긴장부터 하게 돼요. 왜냐하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돈이 없으면 당장 굶어죽게 되잖아요? 또 돈이 많으면 좋은 점이 많거든요.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돈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문제가 이 돈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에 이 돈이 미치는 나쁜 영향이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까지 했을까요? 그러니까 돈을 옹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물은 재물, 즉 돈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땅에 쌓는 것은 세상적이고 하늘에 쌓는 것은 하늘나라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보물을 땅에 쌓는다는 것은 돈을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예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 아닙니까? 더 편안하게 살고, 더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더 좋은 옷 입고, 더 좋은 집에 살고... 이런 모든 것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돈을 은행에 비축해 놓았을 때 안심이 되고 자신만만하게 됩니다. 투자한 주식의 값이 오르고 물려받은 땅값이 치솟을 때 우리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높아져가는 재산의 가치가 우리의 기쁨과 소망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이 기쁨과 소망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한 것입니까? 주식에 투자한 것이 실패해서 자살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20대 주부가 은행강도를 하다 잡혔더군요. 빚을 내서 주식에 투자했는데 그게 완전히 실패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해서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키우는 것처럼 우쭐대다가 갑작스러운 기업환경의 변화에 의해 하루아침에 망해서 길거리에 내몰리는 수도 있습니다. 금고에 돈다발을 잔뜩 감춰놨다고 마음이 든든할까요? 요즘에는 고관이나 부자집만 골라 터는 전문도둑들이 설치는데, 많은 돈이나 귀중품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렸다는 소리를 못한다더군요. 돈으로 기쁨과 소망을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입니까?
이처럼 이 세상은 우리의 보물을 쌓아 놓을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는 곳입니다.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도 못합니다. 잠시 누리는 기쁨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삶을 예비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만 살고 말 것이라면 사는 동안 돈 가지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바르고 살다가 죽으면 정말 잘 살았다고, 의미있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이 세상은 잠시 사는 곳일 뿐입니다. 그 잠시 사는 삶을 위해서 영원한 삶을 희생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돈 가지고 영원한 삶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돈을 불에 태워서 함께 장사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승에 돈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져간 돈 써먹을 수나 있을까요? 저승에 가면서 그렇게 돈을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 살면서 지금부터 하늘에 저축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만일 우리가 하늘에 저축을 많이 해 놓으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잘 살 수가 있겠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늘에다 저축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구좌번호 가르쳐달라고 해서 온라인으로 송금해야 할까요? 교회에 갖다 바치는 돈은 모두 하늘에 저축이 될까요? 필요 이상으로 헌금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어떤 교회들에서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하늘에 쌓는 보물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감사함으로 기쁘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하늘에 쌓이는 보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헌금 강요하기 위해서 이 귀하신 주님의 말씀을 갖다가 붙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헌금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당연히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많지는 않겠지만 헌금에 짓눌려 사는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억지로 헌금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믿음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헌금을 많이 할 수도 없고, 믿음 좋다고 하면서 헌금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많은 헌금 시킨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 억지로 강요하는 헌금의 경우, 사실은 믿음의 문제와 상관없이 정당성을 결여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음을 잃게 만들고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돈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우리 인생인데, 그리고 이 돈이래야 언젠가는 다 없어져 한줌의 재로 변할 것인데, 이것 가지고 우리의 영원을 예비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금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어찌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이 썩어 없어질 돈을 하늘의 보물로 쌓아 우리의 영원을 예비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많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실까요? 이것은 우리가 이 순간 잠깐 고민하다가 잊어버려도 될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가지고 씨름해야 할 문제입니다.
돈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많은 돈을 투자했을수록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떠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은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삽니다.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상급을 소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매우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고 모르는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때가 많아요. 왜 그렇습니까? 눈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 가져다주는 쾌락과 기쁨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돈이 약속해주는 화려한 삶의 유혹에 속아서 그야말로 어두캄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저희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빌 3:19)라고 했습니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신의 자리를 차지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돈은 우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믿습니다. 돈의 힘을 믿고 돈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래서 돈에 의지하고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처럼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돈에 관심 끊고 살라는 말입니까? 예수 믿는다고 돈 없이 살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모두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예수 믿으면서도 돈 많이 벌어서 잘사는 것이 잘못은 아니잖아요? 헌금도 하고 가난한 이웃도 돕고 선교사 후원도 하려면 악착같이 돈 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돈을 섬기는지 하나님을 섬기는지 쉽게 판가름이 날 테니까요.
한번은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아와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젊은이는 영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원을 사모했어요.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이 젊은이를 기특하게 보시면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와서 나를 좇으라.” 그런데 이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젊은이의 주인은 무엇입니까? 과연 이 젊은이가 돈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그렇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었나요? 그 젊은이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영생을 얻는 일에 훨씬 쉽게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돈은 영생을 향한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가 돌아간 후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 19:16-24)
물론 우리가 모두 재산을 다 포기해야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땀흘려 일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식으로 그 돈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최소한 우리가 돈에 관해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거기에 따라 돈을 쓸 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