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에게 정치는 전쟁의 끝나지 않는 마지막 모습이고, “평화는 소리없이 전쟁을 치른다”
아내와 푸코를 위한 일본여행이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푸코의 책 한권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하였다.
오사카를 거쳐 교또와 시즈오카를 들러 드디어 동경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살았던 학교 앞 4조 반의 다다미 일본식 집은 이미 헐어버리고 없었다. 대신 학교 안의 우람한 은행나무와 우에노 공원과 우에노 아메요꼬 시장을 둘러보면서 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은 무너지고 있었다. 30년전의 흥청거림은 간 곳이 없었다. 빠찡코의 시끄러웠던 소리와 공중전화 박스에 붙어있던 성매매 전단지는 내가 다녔던 학교 안의 가을의 은행나무 잎 만큼 많이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제, 그것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패전 후, 미국에 매달려 살아오던 일본이 마지막으로 잡아야 할 지푸라기는 역시 미국 뿐이었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중국과의 분쟁은 무너지는 제국의 보수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TPP, 아시아 태평양의 다자간 무역 협정을, 미국과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중국의 위협에 대해 미국의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 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역시, 미국은 일본의 러브콜에 응해주었다. 일본 여행 중에 뉴스에서 미국과 일본은 다시 한번 군사 동맹을 결의하고 있었다. 아마, 끝나지 않은 동아시아의 625전쟁은 센카쿠 열도에서 재발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20세기 후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러시아는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해왔고, 지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어디선가는 전쟁 중이다. 당연하지 않지만 언제나 있어 왔던 전쟁은 뉴스의 글과 영상을 통해,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경우 전쟁 수행측의 승리 홍보의 글로 전파되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대중이 텍스트를 소비한 이래 전쟁을 접하는 이 경험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황을 접하고, 전쟁의 여파를 따지고, 전쟁이 벌어진 영토의 역사를 보고, 전쟁을 수행하는 최고 권력자들을 논하고, 지역의 패권을 주시하는 등등 마치 20세기 초의 신문을 보는 듯한 서사가 재현된다.
전쟁을 해도 국경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2차세계대전 이후의 표면적인 근대국가의 세계질서는 사라졌고, 국경의 안정은 일시적인 조건 속에서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렸다.
권력과 영토가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와 같은 무대에 등장했다.
지난 한 세기 인문 사회 과학의 지식들,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이 쌓았던 권력에 대한 지식은 어디로 갔을까?
국제사법체계, 국제기구, 경제관련 국가간회의, 군사조약 등 수많은 국제관계의 조직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토전쟁이라는 복고의 권력행위가 전면에 등장한 이 전쟁을 한 세기 전과 똑같은 레파토리로 전달하는 이 상황은, 정치지리학의 사유가 그동안 멈춰왔음을, 적어도 새롭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사유가 빈곤함을 말한다. 그동안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전쟁’을 생각하는 방식을 잃어버린 듯하다.
‘권력’,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제3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권력이라고 한다.
정치지리학의 핵심 개념이기도 한 이 ‘권력(pouvoir)’을 푸코는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라고 정의한다.
누군가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관계에 누군가 위치한다. 이는 우리가 ‘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용법과는 사뭇 다르고, 영미권,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낯선 말이다.
‘나의 권력’, ‘대통령의 권력’ 등 소유하는 ‘권력’이란 일반 명사는 여러 언어에서 널리 쓰인다. 불어에서도 pouvoir는 명사로도 늘상 쓰이며, 대문자 Pouvoir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등, 푸코의 ‘권력-관계’는 생활 속 언어 습관을 껄끄럽게 한다. 푸코 본인의 말에도 권력 명사는 있다.
분명 ‘권력’이란 말을 기존의 방식과는 낯설고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신선함이 있었고,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세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범용 언어를 개발하기 위해 푸코가 권력-관계를 말한 것은 아니다. 푸코는 1968년 이후 사회 곳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탈권위, 자유, 소비의 사회를 해석하기 위해, 통치의 계보학을 만들며 현재를 만든 사건표를 뒤졌고, 당시 마오주의와 이란 혁명 등의 시대상과 함께하며 생각을 발전시켰다. 물리적인 경찰 폭력이 68 이후로 잦아들었지만 계속되는 이 통치방식은 무엇인가?
왜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억압은 멈추지 않는가?
스탈린과 마오주의를, 정치경제학과 자본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
‘권력’을 국가의 소유물로 해석할 때는 풀릴 수 없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지식-권력’(savoir-pouvoir) 또한 많은 언어권에서 ‘지식의 권력화’로 오해하던 말이다.
이 말은 나치의 전쟁은, 타자(유태인)를 죽이는 ‘살인 국가’이자 자신의 인구마저도 죽이는 ‘자살하는 국가’인 근대국가, 이 국가와 지식이 결합한 생명정치의 만남이었다.
국민이 권력의 원천이라고, 권력은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국민을 적과 함께 죽이는 이 전쟁기계를 해석할 수 없다.
국민은 ‘권력하기’ 뒤에 위치하고 그 앞의 어떤 지식과 실천이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드러날 뿐이다.
푸코의 권력개념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정치지리학은 권력의 역동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연구한다. 반면 기존의 지리정치학(지정학)은 지리와 얽힌 정치, 정치가 지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고자 한다.
정치와 지리를 바라보는 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인식론적인 이 둘의 차이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권력은 소유하는 실체이고, 하나의 영토 단위에 하나의 주권을 일대일로 연결하여 근대국가가 성립된다.
예를 들어 크림반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동시에 통치하는 땅이 아니며, 하나의 영토에 하나의 권력집단이 있을 뿐이다. 영토에 존재하는 복수의 권력은 주권이란 대문자 권력으로, 신을 대신해 탄생한 국가로 수렴되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분쟁지역’으로 비정상화시킨다.
지난 수년간 전염병, 기후 위기, 재해 등의 사건으로 우리가 사는 땅의 권력관계는 요동쳐왔다.
국제 경제, 정치, 의료 등 권력의 앞에 등장했던 지식체계 또한 변했다.
얼마 전까지 권력 앞에 위치하며 통치 장치로 기능했던 것들이 현재 그 힘을 잃어 사라지기도 했고,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정치행위도 권력이 되어 새로운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지만, 점점 더 권력은 없던 새로운 방식을 만들기도 하고, 이미 오래전 작동을 멈추며 폐기된 방식들을 부활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나 보던 영토전쟁의 부활을 보기도 하고, 규칙과 상식과 숫자로 조용한 전쟁을 해야 했던 평화로운 시대가 아닌 물리적인 힘과 법 조항으로 억압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일반경제학, 권력은 결국 값싼 방식을 따라 움직이고, 권력 장치의 방식에 따라 수세기전의 백년전쟁이 펼쳐지기도 한다.
낯설지만 익숙한 이 권력을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하고 사유할 수밖에 없는가?
저 멀리 있는 전쟁의 결과에 따라 패권이 달라진다고 웅성거리고, 그 땅의 자원 중 일부를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등, 마치 게임 중계 같은 소식들 속에서 새로운 직관을 끌어낼 수는 없다.
또한 전쟁이 발발한 땅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며 영토의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지식들에 감춰진 채, ‘전쟁’과 ‘평화’가 언제나 동시에 존재했던 역사를, 국경의 내부와 외부에서 벌어지는 방식이 다를 뿐 똑같은 억압이 자행되는 ‘전쟁’의 질서를 파악할 수 없다. 정치지리학의 측면에서 우리가 가늠해야 할 ‘권력’은 권력 앞에 붙은 장치들의 흥망성쇠, 예전의 통치기제의 작동 중지와 새로운 기제의 탄생을 추적하는 일이고, 근대국가의 통치성이란 ‘국민 죽이기’의 양상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