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첫 언약 곧 옛 언약인 구약 시대에도 염소와 황소의 피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 하건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야 두 말해 무엇하리요?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을 믿습니다.
첫 언약도 피 곧 짐승의 피로 언약을 세웠다면 새 언약은 짐승의 피가 아닌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이는 참 것의 그림자였던 장막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오직 개혁할 때까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 분의 대속은 죄로 부정하고 얼룩진 나를 깨끗하게 하고 생명 주시기 위한 죽음이온데 나는 어찌하여 그 죄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헤매며 사는지요?
이런 나는 그저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심판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나는 날마다 죽을 자임을 고백하며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나를 아주 죽이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하루도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십자가의 보혈에 능력이 있습니다.
짐승의 피로도 부정함을 씻었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가히 그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지요?
나의 이 무익함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이 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날이 바로 주님과 함께 행하는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3:1-10
제목 :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에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 나의 묵상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들이 남유다에 속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하는 것이 못내 마음이 걸렸다.
이는 혹여 그곳에 제사하러 간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까 염려함 때문이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 하면서 자기 백성들의 불편함과 제사하는 것에 대한 번거로움을 해결해 주었다.
이뿐 아니라 절기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산당에서 제사하는 제사장들을 레위 지파가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일반 지파 사람들로 임명하였다.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요 온전한 신앙 행위가 아닌 유사 신앙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편 여로보암은 자기가 벧엘에 세운 산당의 제단에서 분향을 하였다.
물론 이 분향 자체도 하나님께 행하는 분향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향한 분향이었다.
이 때 유다로부터 벧엘에 온 하나님의 사람이 그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쳤다.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윗의 집안에 요시야라는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는 이 제단 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그 위에 제물로 바칠 것이며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증거로 지금 이 제단이 갈라질 것이고 그 위의 재는 땅에 쏟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제단에서 손을 펴면서 ‘이 놈을 잡아라’ 하고 외쳤다.
그러자 그의 폈던 손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대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거기서 쏟아졌다.
여로보암은 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정하면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마비된 손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구하였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자 그의 마비된 손이 다시 여상(如常)하게 되었다.
그의 손이 회복되자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고자 자기 집으로 함께 가서 쉬고 예물도 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집 절반을 줄지라도 왕과 함께 가지 않을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기서는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유다에서 벧엘로 온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갔다.
여로보암은 왕족이 아니다.
그는 솔로몬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으로 세운 자이다.
솔로몬의 때가 아니라 그의 아들의 때에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시고 한 지파만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주시마고 하셨다(왕상 11:35-36).
대신에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면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하셨다(11:38).
그러나 그는 따 놓은 당상을 발로 걷어차 버린 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르호보암이 통치할 이스라엘의 2/12를 받았다.
이스라엘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규모 때문이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아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가 잘 나서 된 줄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려울 때는 겸손해지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선 후에는 다 자기가 잘 해서 된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야 했다.
그러면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눈으로 보고 누리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생각은 아예 눈곱만큼도 없었고 오직 자기 의를 위한 열심뿐이었다.
그가 행한 열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한 열심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잘 어루만져서 그 마음이 자기에게로 향할 수 있게 하였다.
마치 다윗 시대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갔던 것처럼 말이다.
(삼하 15: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을 자기 맘대로 빼앗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의 임무이자 마땅히 행할 일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그 백성들이 자기 백성들인 양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고 그들의 마음을 훔쳤다.
그것은 멀리 있는 자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알고 이를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산당을 만들었으며 일반 사람들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워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며, 이제 더 이상 멀리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서 제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허가증을 내어 준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 왕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진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좀 힘들고 번거로울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행해야 한다.
가는 길이 멀어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가야만 한다.
거기에 주님의 은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로보암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고 대언자로 온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가 선언한 주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증거까지 보였음에도 여로보암은 오히려 손을 들어 그를 죽이라고 패악질까지 보였다.
그 순간 자기의 편 팔이 마비가 되어 접히질 않는다.
그러면 그 일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알고 바로 엎드려 회개하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청탁을 한다.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우습기 그지없다.
(6절)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란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그를 어여삐 보시고 왕으로 세우셨는데 그는 전혀 엉뚱한 호칭을 부르고 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다.
그런데 마치 오늘날도 목사가 무슨 무속인들처럼 중재자 곧 샤먼을 세워놓고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물론 목사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를 범한 여로보암은 죄인 중에 죄인이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천하에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에 빠지지 않았던가?
욥은 끝까지 자기의 義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역사를 말씀하시면서 “네가 너의 공의를 자랑하려고 내 의를 부인하느냐?” 하고 꾸짖으셨다(욥 40:8).
이에 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하고 티끌과 재가운데서 그에게 임한 모든 재앙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는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행한 일들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는 은혜를 얻는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 한다.
믿음의 조상이라 함은 그의 믿음이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좋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는 믿음이 조상이라 부를 만한 아무런 건덕지가 없다.
그는 자기 아내 사라를 두 번씩이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었다.
애굽 왕 바로에게 한 번, 블레셋의 그랄 왕에게 한 번.
그리고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그 왕들이 선물을 줄 때 그것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이 주는 선물을 좋다고 다 받아서 부자가 된다.
이렇게 마누라를 팔아먹은 죄인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런 사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것은 그의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이다.
나는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보다 그의 하나님 혹은 그들의 하나님으로 알았던 자이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두려워하며 나보다 더 가까워보이는 목사나 은사가 출중한 어떤 이들이 하나님과 더 친해 보일 때,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나는 제2 제3의 여로보암이었음을 고백한다.
내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먼저 생각나는 이들이 바로 기도에 응답을 많이 받은 어떤 이들이다.
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면 무언가 잘 풀리며 해결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가서 나의 기도제목을 나누며 기도 청탁을 하였다.
물론 이렇게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님은 가장 어린 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의 기도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었던 나의 믿음 없음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만물 안, 곧 이 땅에서 나에게 닥친 곤고함과 고난은 나에게 가장 필요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여 내가 주님과 더 가까이 연합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를 알기까지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복음을 알고 이제 목사를 샤먼이 아니라 객체로 알고 나 자신이 먼저 주님 앞에 선 자로 살기 원한다.
거기에 주의 영광의 빛이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기독교 신앙은 결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켜 행해야 했지만, 이제 예수께서 그 모든 답을 가지고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가 되시어 나를 대속하셨습니다.
이 시간 그 은혜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하면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패악을 행하는 것임을 압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 가까이 친밀함으로 서게 하소서.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믿음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