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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를 위해
하느님의 지속적인 은총과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쫙~’ 깔고 시작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경한 어조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흔일곱은 ‘완전 중의 완전’을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할 때 적당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열 번 스무 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끝도 없이 용서하라, 틈만 나면 용서하라, 용서를 습관화, 생활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군요. 삼시새끼 밥 먹듯이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호흡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내 삶의 모토처럼 여기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매일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평생 씻지 못할 모욕,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소중한 인생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친 그, 그러나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습관처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서에 앞선 마음의 정리가 요구됩니다. 때로 합당한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 습관적인 용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결국 참된 용서를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어렵던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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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에제 12,1-12
복음 마태 18,21 ― 19,1
오늘 드디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 땅에 오십니다. 아시아 청년대회와 시복식을 위해 오시는 교황님,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환영을 하고 더불어 교황님의 영육간 건강을 위해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분이시기에 많은 이들이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어제 많은 언론매체에서 교구청으로 연락이 많이 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언론사의 기자가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이러한 황당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124위의 시복 미사를 광화문에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124명의 좌석은 어디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시복식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조금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인데, 전혀 알아보지 않고 연락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저렇게 전혀 알아보지 않고서 연락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조금의 성의도 없는 것이고,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 기자의 황당한 질문을 들으면서 문득 우리 역시 이 세상의 삶을 성의 없이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 담겨진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이유 등을 너무나도 자주 내세우는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각종 이유들이 당연히 주님의 뜻 역시도 알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당연히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성의 없는 삶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통해서 사랑의 실천 역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용서’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용서를 대충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힘들면 용서할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닌, 온 마음을 다하여 용서할 수 있는 우리가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인 용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시며 계속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상으로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을까요? 또한 주님의 뜻을 얼마나 잘 알려고 노력했나요? 주님을 몰라서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장 넓은 것 속에 들어 있는 작고도 귀한 것. 가장 아픈 것 속에 들어 있는 황홀한 것. 가장 슬픈 것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것. 삶은 그 이중주에 맞춰 걷는 행진이다(김미라).
지휘자의 소신(‘좋은생각’ 중에서)
오자와 세이지는 빈 필하모닉과 보스턴 심포니, 비엔나 국립 극장 음악 감독 등을 지낸 세계적인 지휘자다. 그가 유럽에서 열린 국제 지휘자 대회 결선에 참가했을 때다. 당시에는 심사 위원회가 지정한 악보를 지휘하게 했다. 그 역시 지정 악보를 보고 지휘했는데, 무너가 조화롭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다. 오케스트라의 실수라 생각했던 그는 연주를 중단하고 나서 다시 시작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현장에 있던 작곡가와 심사 위원들이 말했다.
“오자와 씨, 악보는 정확합니다. 당신이 음을 착각한 거예요.”
음악의 대가들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오자와는 이내 큰 소리로 반박했다.
“아니오. 틀림없이 악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사 위원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실 그 악보는 세심하게 짜 놓은 함정이었다. 심사 위원들이 악보의 문제점을 부인했을 때 지휘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시험해 본 것이다. 앞서 참가했던 후보자들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권위에 밀려 자신의 의견을 포기했던 것이다. 오자와 세이지는 그들과 달리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국제 지휘자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물론 자신의 소신을 굽혀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신을 권위에 밀려서 굽혀서는 안 됩니다. 단, 사랑을 위해서 굽혀야 한다면 그 소신은 더 큰 의미로 확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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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14. 목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1894-1941) 기념일 ,
에제12,1-12 마태18,21-19,1
회개의 표징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 하느님 자비의 표징들입니다.
얼핏 방안의 물품들을 보는 순간 '내것'은 하나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받은 선물들입니다.
언뜻 눈에 보이는 '사랑밖에 길이 없었네'라는 책 제목이 진리임을 증언합니다.
이런 선물들은 자비의 표징이자 동시에 나의 무딘 마음을 일깨우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어제 나에게 점심을 대접한 형제 역시 회개의 표징이자 자비의 표징임을 깨닫습니다.
"신부님, 내일 점심식사 시간을 좀 길게 할수 있나요? 두시간 반 정도요.“
문자 메시지를 봤을 때 혹시 면담성사를 보려나 생각해서 승낙했습니다.
평소 내 매일 강론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참 성실한 형제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나와 맞이했고 참 좋은 분위기에서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저를 통해 예수님을 환대한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 산티야고 순례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고
이 또한 나에겐 그대로 사랑의 마음, 기도의 마음으로 전달됐습니다.
이 착하고 성실한 부부 역시 나에겐 회개의 표징이자 하느님 자비의 표징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 콜베 성인은 물론 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회개의 표징입니다.
서두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 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눈이 열려 제대로 보고 귀가 열려 제대로 듣는 것이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사랑이 답입니다.
이런 회개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고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매정한 종의 비유'역시 회개의 표징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 때 이렇게 매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적인게 하느님 자비의 체험입니다.
자비의 체험은 곧장 회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무조건적 명령입니다.
이런 무한한 용서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할 때 이런 무한한 용서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만 탈렌트 빚진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처사가 무자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 탈렌트 빚진 자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다시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십니다.
주님의 너그러우심과 자비로움을 체험할수록 무한한 자비와 용서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비상한 자비도 용서도 아닌 그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어 당신의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사실 미사보다 더 좋은 회개의 표징, 자비의 표징도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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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목요일>(2014. 8. 14. 목)(마태 18,21-19,1)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용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은
"무한정 용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용서'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용서하는 입장에서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한정 용서하시는 분인데,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죄를 인정해야 하고, 고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보속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마태 18,35).
그러나 그런 일들은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은총이고, 은총은 조건이나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에게 주신 기적의 빵 같은 무상급식입니다.
누구든지 그 빵을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자기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면서 그 빵을 거절한다면,
또는 그 빵 말고 다른 음식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또는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 싫다고 한다면, 못 먹게 될 것입니다.
안 주셔서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먹어서 못 먹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보속하지 않는다면
이미 받은 용서의 은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것은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피해 국가들이 용서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신이 안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정 용서하시니까
우리도 이웃을 그렇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은총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상대방보다 내가 더 힘이 있을 때,
또는 최소한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힘이 있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그 가해자가 회개하기는커녕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을 때,
단지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죄와 악을 더 키우는 일이 됩니다.
지금 이 말은, 그런 경우에는 용서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독재자가 국민을 탄압할 때,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가 회개한 다음에 할 일이고,
우선 먼저 할 일은 그를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어떤 범죄자가 악행을 저지를 때, 우선 먼저 그 범죄부터 막아야 하고,
(혼자 힘으로 안 된다면 여럿이 함께, 아니면 사법제도를 통해서...)
그 다음에 그가 회개하거나 회개할 가능성이 있을 때 용서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그가 더 큰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고,
궁극적으로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용서란 '악을 막기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만일에 용서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더 악해진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준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해자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피해자는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할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다면서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는 억울함과 죄의식 속에서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예수님께서 바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어떻든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 원칙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복수하지는 말고...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로마 12,19).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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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표징(예표)이 되는 길 >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고 밤에 작은 성당에서 혼자 기도하던 중 손과 발에 죽을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살펴보니 손과 발이 뚫리고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옆구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고 그 찢어진 곳으로 피가 너무 흘러 ‘이젠 죽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의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눌러주셨습니다. 비오 신부님에 의하면 그때 예수님께서 손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막아주시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비오 신부님은 오상(예수님의 다섯 상처)을 받은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성당과 복도에 흥건하게 묻어있는 피 때문에 이 사실을 감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 지역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와 유럽으로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신부님을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후원자들 덕분으로 ‘고통을 덜어주는 집’이라는 엄청나게 큰 병원도 짓게 됩니다.
그분의 상처는 50년 동안 아물지 않고 계속 피가 흘러내렸는데, 그 상처보다 더 신부님을 아프게 한 것은 그분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이들의 모함이었습니다. 그 모함꾼들은 비오 신부님이 사람들을 속여 선동하고 있다고 교황청으로 거짓 투서를 보냈습니다. 교황청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어 1923년 6월 17일에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이 철회되기도 하였으나 계속 몇 차례 반복되었고, 끊임없는 투서 때문에 1931년 6월 9일에 또 한 번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어 복사 한 명하고만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습니다.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고 1935년 3월 25일부터는 고해성사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10년이 넘게 성무집행이 정지 되었다가 풀렸다가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할 수 없다는 것, 또 같은 형제들에게 시기와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에는 사기꾼으로 낙인찍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런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의심과 싸워나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회가 믿어주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순명’은 기적을 분별하는데 ‘예표(Sign: 표징)’가 되었습니다. 나주 등에서 교회가 금지 명령을 내렸으나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며 지금도 사람들을 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표지는 참으로 하느님에게서 기적을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도 순명할 줄 안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허락도 없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별적인 신앙 행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이 증명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분별하기 위한 예표가 되는 표징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표징들은 다 ‘순명’에서 비롯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표징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평범한 가르침들은 보고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독특하고 특별한’ 표징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리만큼 특별한 행위와 말을 하게 만드십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여겨질 정도의 것들까지 시키십니다. 에제키엘에게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는 것처럼 짐을 내어놓았다가 저녁 때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말라고도 명령하십니다.
에제키엘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고, 그제야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제키엘이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실제로 마지막 왕 시드키야는 그렇게 도망가다가 잡혀서 그가 보는 앞에서 아들이 사형을 당하고 자신은 눈이 뽑혀 바빌론으로 노예처럼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얼굴이 가려지고 땅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예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첫 표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모님의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는 말에 봉사자들이 순명하였기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표징은 순명할 때에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순명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기에 또한 ‘십자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만큼 커다란 표지는 없습니다. 바로 죄의 값이 어떻게 치러질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순명을 통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음 또한 보여주는 예표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비오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모두가 나에게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만 하지 십자가를 지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고통의 의미를 인류가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좋아하는 것만 찾지 않고 고통만을 찾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또한 당신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를 통해 세상에 전해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순명하는 사람들이 부족하기에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께로 눈을 돌릴 기회를 잃게 됩니다.
순명을 하는 사람은 저절로 자기 자신이 표징이 되고 하느님께 귀한 것이 되어 당신 나라에 데리고 가십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세상의 표징이 되지 않는다면 구원 또한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 그것의 결과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계시가 되고 또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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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기억하라
오늘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은 ‘무관심’이라는 시대적 유행병을 안타까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으로 치달아가던 1941년 아우슈비츠 감방에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애원하며 매달리는 한 죄수를 위해 “저 사람을 위해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하고 굶겨 죽이는‘아사 형벌’을 자처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한 감방에서 “증오는 파괴를 낳을 뿐이며 사랑은 창조를 낳는다.”고 사형수들을 위로하며 성가를 부르고 주님을 찬미하며 당신이 선택하신 길을 평화롭게 가셨습니다. 감방의 간수들에게도 큰 감동과 존경을 주었다고 하니 구약의 요셉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셨기에 그 어느 것도 그를 억압할 수 없었고 자유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차지하였습니다. 형제애를 몸소 실행하신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서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하고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 받고 싶은 마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용서를 먼저 청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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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명에 따른 에제키엘 예언자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예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통해 스스로 표징이 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만납니다. 성인들의 삶과 운명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모습과 죽음의 방식, 결단의 순간은 영웅적인 성덕을 보여 주는 개인적인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아픔과 악을 드러내는 시금석이자 인간의 희망과 하느님 섭리의 표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삶과 죽음은, 한 성인이 끌어안은 ‘개인적 운명’이 때로는 ‘그 시대의 역운’ 전체에 대한 살아 있는 표징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상징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악의 한복판에 던져졌습니다.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이라는 죽음의 방식은 세기 내내 수많은 비참함과 모욕과 고통의 대표적인 표징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야만 속에서도 인간의 길이 결코 비참함과 부조리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죽어 가는 이들이 서로의 존엄을 지켜 주는 기적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창궐하는 악의 한복판에서도 꺼질 수 없는 인간다움의 희망이 콜베 사제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악과 고통의 현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가 참으로 존재함을 믿고 희망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섭리는, 콜베 신부처럼 한 사람의 운명이라는 작은 창을 통하여 찰나의 순간에 번개같이 우리를 스쳐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득 교회는 체제가 아니라 성인들이 지켜 나가는 것이라는, 그 옛날 신학교에서 배운 원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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