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아에 굳건히 서십시요.
그래야만 우리는 진실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높이, 더 높이 오르십시오.
우리의 우주적 본성을 알면
세상의 모든 파노라마를
완전한 평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은 먼저,
육체라는 거친 덮개를 입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마음, 지성, 자아(에고)라는
보다 섬세한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것들 너머에 인간의 참자아가 존재합니다.
인간의 거친 육체가 지닌 그 모든 자질과 능력은
마음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섬세한 몸인 마음은
그 너머에 있는 영혼으로부터 능력과 빛을 얻습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가 신성하며 존재 자체가 바로 신임을 믿습니다.
모든 영혼은 무지라는 구름에 가린 태양과 같습니다.
개개 영혼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구름의 두께 차이일 뿐입니다.
인간은 무의식도 모르고 초의식도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의식만을 알 뿐입니다.
어떤 이가 일어서서 “나는 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에 대해 가장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 부분만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자기 존재의 일부분에만 그친 까닭입니다.
우리는 진정 영원한 존재인 정신을 보지 않고
육체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내 몸이 바로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타고난 우상숭배자입니다.
우리는 정신입니다.
정신은 모양도 형태도 없습니다.
정신은 무한합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개체성을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돼지가 신이 될 수 있다면 돼지라는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련한 돼지는 돼지로 사는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의 ‘나 됨’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어린시절 방바닥에 누워 손을 빨고 있는 존재일까요?
그것이 바로 내가 잃어버리기 아쉬워하는 개체성이란 말입니까?
앞으로 오십 년쯤 지난 후에는 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지금의 상태를 회상하며 웃음 지을 것입니다.
내가 간직해야 할 그 개체성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머니, 아버지, 자녀, 배우자, 육체, 재산 등-이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참자아는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참자아 안에서 자족하십시오.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 참자아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참자아가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나 됨’입니다.
참자아는 완전합니다.
나의 영혼은 우주적 자아
유한한 것으로 가득 찬 이 현상계 안에서
무한을 보고 발견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무한은 오직 무한한 것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직 하나, 무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영혼입니다.
몸도 마음도, 우리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이 세상도
무한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속해 있는 ‘보는 자’,
인간의 내면 속에 깨어 있는 참자아, 오직 그것만이 무한합니다.
그러니 우주의 궁극적인 근원을 찾으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한한 참자아 속에서만 무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참자아는 결코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결코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자아는 시작이 없습니다.
시작도 없기에 끝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으며,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동일한 어떤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때로는 나쁠 수도 있습니다.
단지 각 단계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뿐입니다.
오늘 즐겁다고 말한 것을 내일 보다 나은 환경에서
고통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이 우리를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불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자아는 순결하고 완전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 본성에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살인자 안에도 순수한 참자아가 존재합니다.
순수한 참자아는 죽지 않습니다.
살인은 그의 실수였습니다.
그의 참자아가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의 참자아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살해당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참자아는 죽지 않습니다.
참자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다가옵니다.
그 간격은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더 진보한 사람일수록
기쁨 혹은 슬픔 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닙니다.
행복이나 괴로움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금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둘 다 사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둘의 배후에는 아트만(영원한 자아)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행복도 알지 못하며 괴로움도 알지 못합니다.
기쁨과 괴로움은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현상이란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참자아의 본성은 지복,평화, 불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순물을 걷어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참자아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참자아에 굳건히 서십시요.
그래야만 우리는 진실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높이, 더 높이 오르십시오. 우리의 우주적 본성을 알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파노라마를
완전한 평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완전하고 뚜렷하고 맑게 보듯이,
진리는 인간의 영혼을 거울 삼아 그 모습을 비춥니다.
하늘 위의 하늘은 우리 자신의 영혼 속에 깃들여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사원은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온 우주는 하나입니다.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자아, 하나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 하나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과 인과를 스치며
저마다 다른 이름, 지성, 섬세한 물질, 거친 물질 등
모든 정신적 물리적 형태를 얻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그 하나가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전체인 하나의 작은 부분이
시간과 공간과 인과의 그물망에 들어오게 될 때
형상을 부여 받게 됩니다.
그 그물망을 벗어나면 모두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불이론(不二論)의 가르침에서 전체 우주는,
브라흐만이라 부르는 우주적 자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우주적 자아가 우주의 배후에 나타날 때는 신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육체라는 이 작은 우주에 나타날 때는 영혼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인간 안에 깃들인 우주적 자아인 것입니다.
우주의 영혼(아트만, 영원한 자아)은
깊은 괴로움과 타락의 한 가운데로 한 줄기 빛을 보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깨어나 자신의 본 모습,
결코 상실할 수 없는 참자아를 발견합니다.
아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누가 자신의 존재를 잃을 수 있습니까?
누가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할 수 있습니까?
내가 만일 선하다면, 먼저 내가 존재해야하고,
그 다음에 선이라는 질료로 채색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악하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가 가장 먼저이며 언제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으며 영원히 현존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영원히 타락할 수 없습니다.
삶이라는 놀이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하나의 놀이터일 뿐입니다.
우리는 얻어맞을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자아는 그곳에 있으면서 결코 상처 입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무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