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燕山君 때의 性理學者. 字는 伯勗, 號는 一蠹, 本貫은 河東, 慶南 咸陽 출신. 咸吉道 兵馬虞侯 鄭六乙의 아들이요 佔畢齋 金宗直의 門人이다. 寒暄堂 金宏弼·濯纓 金馹孫 등과 交遊하였다. 지리산에서 3年間 五經과 性理學을 연구하고 成均館 儒生이 되었다. 1490年(성종 21) 천거로 昭格署 參奉이 되었으며 이해 科擧에 及第, 檢閱·世子侍講院 說書·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年(연산군 4) 戊午士禍로 鍾城에 유배되었다. 流配된 지 7年만인 燕山君 10年에 謫所에서 죽은 뒤 그해 겨울 甲子士禍가 일어나자 剖棺斬屍되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 圃隱 鄭夢周·江湖 金淑滋·佔畢齋 金宗直으로 이어지는 道統을 계승하였다. 그의 著書는 戊午士禍 때 소각되어 寒岡 鄭逑가 엮은 「文獻公實記」 속에 그 遺集이 전할 뿐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理氣說」·「立志論」·「善惡天理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氣 없는 理가 없고 이 없는 氣가 없기 때문에 이기가 구별이 없는 것 같지만, 理는 총괄적으로 말하여 至善하고 營爲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氣는 淸濁의 구별이 있으므로 이기가 구별된다는 二元論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기의 善惡에 있어서 程子와 周濂溪의 입장에 반대하고 性 또한 선으로 악이 생기는 것은 氣의 淸濁이 있기 때문이라며 天理가 人欲으로 덮여 악이 된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적은 聖人이 되는 것이라 하여, 學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志란 그 학문을 완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면 뜻을 굳게 세우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므로 物欲에 이끌리고 功利를 추구하여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굳건히 뜻을 세우는 일(立志)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사화에 희생되었으나 품행과 학문으로 士林의 사표가 되었으며 도통을 계승·전달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中宗 2年에 都承旨에 復爵 추증되었고 12年에 靜庵 趙光祖의 筵啓로 右議政에 贈職되었다. 光海 2年에 文廟에 配享되고 領議政에 또다시 贈職되었다. 羅州의 景賢書院, 咸陽의 藍溪書院, 尙州의 道南書院, 陝川의 伊淵書院, 居昌의 道山書院, 鍾城의 鍾山書院 등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