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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2강-1 (2012.06.29)
10-2 生死에 젖지 않는다
10-3 無事人(무사인)
저희들이 이번의 임제록공부는 전체 임제록 중에서 한 5분의 1정도 공부하게 될까? 量으로 따지면 아마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여기서 제가 금강경 핵심 강좌를 한번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임제록핵심 강좌” ←이렇게 또 제목을 붙이면 제일 아주 근사할 것 같습니다. “임제록핵심 강좌” 그렇게 명칭을 정해놓고 보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다 보니까 일일이 다 하지 못하고, 핵심적인 것들만 추려서 짚어나가는 그런 강의가 되겠습니다. 이제 시대가 그렇다보니까 스님들이나ㆍ우리 일반신도들이나 모두가 불교에 대해서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는 經ㆍ律ㆍ論, 三藏.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중국과 한국 일본 쪽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禪藏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더 첨가가 됩니다. 선불교가 달마스님으로부터 크게 발전하기 시작 하면서 三藏에 더하여 禪藏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생깁니다. 經ㆍ律ㆍ論, 三藏의 경이 함 못지않게 선장도 상당한 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四藏이됩니다.
지금은 이런 三藏이 아니라 四藏이라고 해야 좋을 정도로 선장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근래에는 선불교가 대세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四藏을 두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경에서는 제일 으뜸가는 경이 무엇일까? 이런 것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뭐 부처님경전을 두고 무엇이 으뜸이고, 무엇은 그보다 못하다. 이런 것들을 나누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중생의 마음에서 경중에 제일가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것은 법화경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경중에 왕은 법화경”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禪藏. 다시 말해서 조사스님들의 語錄. 조사스님들께서 부처님 못지않은 그런 깨달음을 다 성취하셨거든요. 정말 그 깨달음에는, 깨닫고 나면 누구나 다 같습니다. 같은 경지라고 봐야 됩니다. 그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하신 조사스님들이 많고, 그 조사스님들께서 또 당신 나름대로 법을 설하신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禪藏이라고도 하지만 흔히 語錄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조사어록” 이렇게 말하지요? 그럼 語錄가운데 왕은 당연히 임제록입니다.
우리가 그것 하나만 이해해알아도 소득이지요. “어록의 왕은 임제록” 임제록과 같은 이런 어록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소위 禪藏에 해당되는 가르침들이 정말 엄청나게 많아요. 달마스님 사행론이라든지ㆍ영가 증도가라든지ㆍ신심명이라든지ㆍ육조단경이라든지ㆍ전심법요ㆍ완능록 등등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조사스님들의 깨달으심을 정리해놓은 어록 가운데 왕이 이 임제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중의 왕은 법화경이다.” 그것은 법화경 안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화엄경이 뛰어난 경전임에는 틀림없지만, 화엄경은 너무 차원이 높고ㆍ양이 많고ㆍ어렵다 보니까 감히 쉽게 언급을 못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화엄경은 제쳐놓고 하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경중의 왕은 법화경이요ㆍ어록중의 왕은 임제록이다.”
그래 임제록공부 잘하고 법화경공부 잘하면 불교공부 마스터하는 겁니다.
끝내는 겁니다. 그것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든ㆍ참선을 하든ㆍ주력을 외우든 사실 이 두 가지 경전. 그 가운데 보조로 금강경까지 곁들여서 공부하면 그것 최고지요. 그것은 우리가 불자로써 꼭 알고 넘어가야할 그런 “경전과 어록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제는 임제스님의 공부해온 수행이력, 行錄이라고 하는 것 일부를 공부했고, 그러면서 또 上堂法語, 선사스님들이 당신의 법을 참으로 드날릴 때, 근기에 맞추지 않고 그냥 자기 법을 한껏 드날리는 그런 법으로써의 上堂法의 일부를 살펴봤고, 오늘은 示衆에 들어가겠는데, 시중도 제가 유의해서 좀 볼만한 것만 체크를 해놨습니다. 그것만 짚어가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22쪽 넘겨주십시오. 이, 示衆은 어제도 간단히 말씀 드렸지만, 법상에 오르지 않고 이렇게 강의 하듯이, 경전을 펼쳐놓고 강의 하듯이 이렇게 하는 법문을 示衆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소참법문” 이렇게 말합니다. 선불교가 한국을 휩쓸고 있으니까 선불교에 대한 그런 용어라든지ㆍ상식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10-2 生死에 젖지 않는다
師乃云 今時學佛法者는 且要求眞正見解니 若得眞正見解하면
生死不染하고 去住自由하야 不要求殊勝하야도 殊勝自至니라.
道流야 祗如自古先德은 皆有出人底路니라
如山僧指示人處는 祗要儞不受人惑이니 要用便用하야
更莫遲疑하라 如今學者不得은 病在甚處오
病在不自信處니 儞若自信不及하면 卽便忙忙地하야
徇一切境轉하야 被他萬境回換하야 不得自由니라.
生死에 젖지 않는다. 라고 하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師乃云(사내운), 여기서 師 하면 임제스님입니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시되,
今時學佛法者(금시학불법자)는, 요즘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
우리 모두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 있어서
且要求眞正見解(차요구진정견해)니, 제일 중요한 것. 무엇보다도 요긴하고ㆍ중요하고ㆍ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니 眞正見解를 구하는 것이다.
眞正見解. 꼭 줄그으세요. 참 眞자ㆍ바를 正자. 참되고 바른 견해.
참되고 바른 소견을 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이것 임제스님 법문에 여러 번 나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불교공부 하는데, 불교를 믿는데 있어서 바른 信心, 바른 믿음ㆍ바른 이해ㆍ바른 실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바른 이해ㆍ바른 믿음ㆍ바른 실천. 참~ 중요한 것이지요. 일찍이 이렇게 임제스님부터 있어왔던 이야기입니다. 임제스님 때부터 眞正見解. 우리가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람 살아가는 데도 사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합니다. 소견이 잘 들어야 됩니다. 특히 우리가 불교 안 믿어도 되는데, 이왕 불교를 믿을 바에는 불교에 대한 소견이 발라야 됩니다. 소견 잘못 들면요? 불교 믿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 사실 주의해야 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불교를 접해야 됩니다. 불교 만나가지고 소견 잘못 들어서 불교를 만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경우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불교뿐 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그렇지요.
다른 종교에도 그런 예가 많습니다.
若得眞正見解(약득진정견해)하면, 만약 眞正見解.
참되고 바른 소견ㆍ바른 견해ㆍ바른 지혜, 이것만을 얻게 된다면
生死不染(생사불염)하고, 生死에 젖지 않는다. 생사에 물들지 않는다.
죽든 살든, 죽음과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去住自由(거주자유)하야, 가고 오는데 있어서, ‘내가 생활 하는데’ 이런 말입니다. 생활 하는데 아주 자유자재하다. 생사에 물들지 않는데ㆍ생사에 끄달리지 않는데ㆍ생사에 빠지지 않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뭐가 부자유스럽겠습니까? 아무 것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심지어 정말 아무리 고통스러운 병고라 하더라도 그것 두려워하고ㆍ고치려고하고ㆍ하~ 아파하고ㆍ괴로워하고 하는 것은 뭡니까? 죽음이 두려워서 그래요. 죽음이 두려워서... 그 죽음을 초탈했다면 그까짓 것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명예니 재산이니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래 去住自由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유스럽다. 그러면
不要求殊勝(불요구수승)하야도 殊勝自至(수승자지)니라. 그랬습니다.
殊勝이 뭡니까? 아주 훌륭한 인생ㆍ성공적인 삶ㆍ정말 내가 살고 싶은 그 삶ㆍ내가 이르고자 하는 그 경지. 뭐 그것이 부처의 자리가 됐든지, 무슨 하나님자리가 됐든지, 보살의 지위가 됐든지, 대통령자리가 됐든지, 무슨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아니면 그룹회장자리가 됐든지, 이 殊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요. 절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평생 부전 살이 하는 스님은 조그마한 절이라도 주지 한번 하는 것이 그렇게 소원입니다. 그것이 殊勝한 삶입니다. 사람마다 꿈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정말 眞正한 見解. 바른 소견만 들었다면 내가 바라는 바 어떤 꿈. 그것은 설사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이르러 온다. 殊勝自至라. 성공적인 인생은 저절로 나한테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다른 단계를 밟아가면서 내가 이번에는, 예를 들어서 억을 벌고, 2억을 벌고, 10억을 벌고, 100억을 벌고, 이런 식으로 하나ㆍ하나, 꿈을 이뤄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한 번에 완전히 끝내는 겁니다. 한 방에 끝내는 겁니다.
眞正見解. 인생에 대한 바른 소견만 갖춰진다면 생사문제도 상관없고,
그 다음에 내가 바라는 바 성공적인 삶ㆍ정말 행복한 삶ㆍ평화로운 삶, 그것이 늘 우리의 꿈이었는데, 그것도 저절로 오게 되어 있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眞正見解라는 것이 뭐냐?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합니다. 임제스님께서는 제일 자주 하시는 말씀이 요컨대 眞正見解가 중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되고 바른 소견이 중요하다.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고 하잖아요. 인생을 사는데 견해가 중요한 겁니다. 소견이 중요합니다. 소견만 제대로 들어놓으면요? 장사를 해도 잘할 수가 있고, 집안 살림을 살아도 잘살 수가 있고, 대인 관계도 잘하고, 공부를 해도 잘하고, 요는 소견입니다. 눈의 문제입니다. 눈. 안목 그러잖아요. 소견을 일명 “안목” 이러잖습니까?
道流(도류)야, 도 닦는 벗들이여, 이랬습니다.
여기는, 육조스님께서는요? 모두, 오늘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도 “선지식아” 이랬습니다. 참 아주 멋진 표현을 했지요. “선지식아”
임제스님은 道流야, 그랬습니다. 道流야, 도 닦는 벗들이여, 그 말입니다.
도 닦는 벗들이여, 우리 모두 임제스님의 이 법문 회상에 동참했으면 우리 모두가 道流입니다. 스님이다. 신도다. 없어요. 그냥 道流입니다.
아무 분별이 없어요. 그냥 이말 알아듣는 사람은 전부 우리 모두 道流입니다. 이제 앞으로 전부 도류라고 불러야 돼요. 道流야, 참 좋은 표현이지요. 道流야,
祗如自古先德(지여자고선덕)은, 다만 저 옛날 선덕들은,
先德하면 도를 많이 닦은 덕이 높은 그런 분들은
皆有出人底路(개유출인저로)니라. 다 출세의 길이 있다.
出人 = 남보다 뛰어난 그런 길이 있다. 옛날에 훌륭한 스님들, 훌륭한 도인들은 모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그런 삶을 살았다. 물론 그래요. 그렇지만
如山僧指示人處(여산승지시인처)는, 나는 다르다 이 말입니다.
山僧指示人處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임제스님 자신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다른 어떤 큰스님들은, 다른 모든 과거 도인들은 다 모두 남보다 뛰어난 길이 있어, 그 나름대로 다 주장이 있고, 사상이 있고, 그리고 그 나름대로 어떤 인생관이 다 있어, 물어보면 다 자기 인생관이 다 있어요. 그런데
山僧指示人處. 山僧이, 내가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내가 사람들에게 주장하고 가르치는 그 곳은 뭔가 하니, 이것 줄 그어야 됩니다.
祗要儞不受人惑(지요이불수인혹)이니, 넉자 不受人惑.
야~ 좋은 말입니다. 이것도 다른 선사들은 말 안합니다. 임제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不受人惑. 아니 不ㆍ받을 受ㆍ사람 人ㆍ미혹 할 惑.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안 속는다. 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안 속는다.
사람들을 뭘 가르치는가?
“제발 딴 사람에게 속지 말라.” 그것만 가르친다. 이겁니다.
딴 사람이란 뭡니까? 부처ㆍ조사ㆍ선지식ㆍ선생ㆍ화엄경ㆍ법화경ㆍ임제록ㆍ이 세상에 이렇다 하는 주의 주장,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 이래요.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이것 중요합니다. 임제스님은 자신이 가르치면서도 “나한테 속지 말라.” 그럽니다. 이것이 딴 사람하고 다른 것이 아니다. 딴 사람들 다 달리 가르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임제스님이 하시는 말씀은 “나는 不受人惑이야. 딴 사람한테 제발 속지 말라. 안 속고만 살면 인생 잘 사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요. 지금 여러분 전부 속아서 여기 왔습니다. 그것 아셔야 됩니다. 전부 속아서 왔어요.
그런데 제대로 안속은 사람은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온 사람은 “속았다ㆍ이것 큰일 났다.” 싶지만, 와도 온 것이 아닌 상황이 되면 가도 괜찮고, 안 와도 괜찮고, 또 와도 괜찮아요. 그런 길이 있습니다. 임제스님은 그 가르침이 아주 독특하지요? 그 다음에
要用便用(요용변용)하야, 쓰고 싶으면, 작용하고 싶으면, 작용을 요하거든 곧 작용하라ㆍ작용을 요하거든 곧 작용하라. 목마르면 가서 물 마시세요.
또 화장실 급한 분은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보세요. 눕고 싶은 분 어디 가서 누우세요. 일어서고 싶은 사람은 일어서세요. 이겁니다. 要用便用. 필요한 작용이 있으면 곧 필요한 대로 작용하시라 이 말입니다. 볼일 있으면 보고ㆍ들을일 있으면 듣고ㆍ메모할일 있으면 메모하고, 이겁니다. 要用便用. 임제록에서 참 중요한 말입니다.
更莫遲疑(갱막지의)하라. 머뭇거리지 말라.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라.
뭐 머뭇거릴 것이 있느냐? 듣게 되면 듣고ㆍ보고 싶으면 보고ㆍ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사실 또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要用便用.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경전하고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어록하고도 전혀 달라요.
다른 조사스님들의 어록하고 이 임제록하고는 또 다릅니다. 그래 어록 중에 왕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기회에 임제스님을 만난 것은 참...
“불법만난 것 중에 아주 특별한 다행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要用便用 更莫遲疑.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라.
마음 내키는 대로 살라. 이겁니다.
如今學者不得(여금학자부득)은 病在甚處(병재삼처)오?
요즘에 보건데 학자들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要用便用하지 못하는 것은 病在甚處오? 병이 어느 곳에 있는가? 왜 그런가? 말입니다. 뭣 때문에 잘못 돼서 그런가?
病在不自信處(병재부자신처)니,
병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믿지 못하는데 있다. 자기 자신이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안 믿어요. 아무리 여러 번 이야기하고 경전이나 어록에서 말씀을 했어도 도대체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법화경에서 귀의 불ㆍ나무 불 이런 한 마디 염불로써 皆已成佛道라.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라고 하는 말이 무수히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말 한 마디 할 줄 아는 이 사실입니다. 말 한 마디 듣는 이 사실입니다. 要用便用. 쓰고 싶으면 쓰고ㆍ보고 싶으면 보고ㆍ일어서고 싶으면 일어서고ㆍ앉아 있고 싶으면 앉는 이 작용. 바로 그 작용ㆍ그 사실ㆍ그 진실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믿지를 않아요. 실컷 하루 종일 들어도 뭐가 그렇게 작용을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되돌아볼 줄 몰라요. 반조 할 줄 몰라요. 돌이켜볼 줄 몰라요. 하루 종일 차에 태워가지고 온갖 곳을 다 구경시켰는데, 그 차가 누구 차인지, 누가 운전했는지 모르는 것하고 똑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남의 차 탔으면 차 내리는데 기사한테 인사하고, 기분 나쁘지 않도록 비위 맞추고 물도 갖다 주고, 운전 잘못하면 큰일 나니까요. 그리고
또 내려서는 아주 칙사 대접 하잖아요. 점심 다 사주고 어디 불편한데 없냐하고... 그런데 나를 태우고 다니는, 기계로 만든 차 운전 수에게는 그러는데. 나를 태우고 다니는 그 운전 수에게는 한 번도 인사를 안 하네요. 아니 누가 운전하는지도 도대체 알려고도 안 해요. 인사는 고사하고 나를 태우고 다니는 진짜 운전사는 누군지도 알려고도 안 해요. 알려고 않으니까 인사할 턱이 없지요. 물 한 그릇 떠먹일 리도 없고요. 이것 큰 문제 아닙니까? 그 진정한 내 운전 수에 대한 믿음이 없다. 病在不自信處라. 병의 문제가 바로 스스로를 믿지 않는 곳에 있다.
儞若自信不及(이약자신불급)하면,
그대가 만약 스스로 믿지를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뭐라고요?
卽便忙忙地(즉변망망지)하야,
곧 부산하게 바빠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徇一切境轉(순일체경전)하야, 온갖 경계를 따라서 굴러다녀요. 여기 가서 이 이야기하면 거기에 넘어가고, 저기서 저 말 들으면 거기에 또 넘어가고, 또 누가 어디 왔단다 하면 또 거기에 혹해가지고 거기에 또 넘어가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볼 일 다 보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被他萬境回換(피타만경회환)하야 不得自由(부득자유)니라.
온갖 경계, 만 가지 경계에 끄달려 다니느라고 回換. 내가 그냥 내가 아니고 경계가 돼 버려요. 어디 가버리고 없지. 이미 나는, 내 주인공을 놓쳐버리고 그만 경계에, 대상에 그만 이끌려가지고 멍하니 정신 잃고 그냥, 정신 하나도 차리지 못한 상태로 그래가지고 자유가 없어요. 그 사람 하는 대로 하는 겁니다. 완전히 그냥 꼭두각시가 돼버렸어요. 우리사람들이 그런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임제록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정신을 잃고 있는 무리들에게, 특히 현대인들에게 어떤 자주성을 일깨워 주는 자기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 뭐라고요? 隨處作主. 그랬잖아요. 우리가 어느 상황에 가든지ㆍ어디에 가든지 주인 노릇을 하라. 주인이 되라ㆍ주인이 되라. 우리가 여기서 아무리 임제록이 뛰어나고 훌륭한 처음 듣는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임제록 쫓아가면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냥 여벌로 재미삼아 들어야 됩니다.
참고로 들어야지 진짜는 내 자신이거든요. 내 자신이 진짜 공부입니다.
임제록이 뭐겠습니까? 그까짓 것, 종이고 먹이고 기껏해야 어떤 법사가 와서 하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지요. 진짜 자신은 “나” 라고요. 그까짓 것 임제록은 별것 아닙니다. 임제록이 좋다고 임제록에 푹 빠져버리면 그것 또한 임제록이 주인이 돼버리고 내가 나그네가 돼버립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잖아요. 어디가도 내가 주인인데ㆍ어디가도 내가 주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임제록인데 오히려 반대로 산다면 그것은 말이 아니잖아요. 임제록불교는 이렇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던 불교하고는 전혀 다르지요. 그래서 이런 것들도 한번 씩 톡 쏘는, 불교의 아주 부드럽고 입에 잘 넘어가고 맛있고 하던 그런 불교만 자꾸 우리가 습관적으로 많이 섭취를 해왔는데, 이것은 소화가 될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입에 넣으니까 톡 쏘아요. 뭐가 그저 콱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데는 가슴이 시원하고 가슴이 풍 뚫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창자가 확 비워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것이 소화가 될지 안 될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새로운 음식입니다. 아주 독특한 새로운 음식을 지금 먹는 겁니다. 간혹 이런 음식을 자셔본 분이 있겠지요. 그런 분들은 아주 쏙쏙, 가뭄에 비라도 내린 것과 같이 쑥쑥 잘 스며들 겁니다. 그래 마음 놓고 그냥 섭취하십시오.
소화 안 될 일은 없습니다. 괜찮아요. 그 다음에 無事人이라고 그랬습니다.
無事人.
10-3 無事人(무사인)
儞若能歇得念念馳求心하면 便與祖佛不別이니라
儞欲得識祖佛麽아 祗儞面前廳法底是니 ←2강-1
↓2강-2
學人信不及하고 便向外馳求하며 設求得者라도 皆是文字勝相이요
終不得他活祖意니라 莫錯하라
諸禪德아 此時不遇하면 萬劫千生을 輪廻三界하야
徇好境掇去하야 驢牛肚裏生이로다
道流야 約山僧見處인댄 與釋迦不別이라
今日多般用處가 欠少什麽오 六道神光이 未曾間歇이니
若能如是見得하면 祗是一生無事人이니라
無事人. 일 없는 사람. 우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儞若能歇得念念馳求心(이약능헐득염념치구심)하면,
그대가 만약 능히 念念馳求心을 쉬어버리면,
歇得念念馳求心. 순간순간에 말이 내닫고 있습니다. 말이 제일 빨리 달리잖아요. 말이 내닫듯이 우리는 막 뭘 구하려고 쫓아다닙니다. 우리 정신이 그래요. 아~~ 막 부단히, 현대인들이 얼마나 할 일이 많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쏟아집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그 정보 낱낱이 이 메일 열어서 봐야지요. 무슨 소식 올랐는가 신문 봐야지요. 뉴스 들어야지요. 등등 그런 상황을 쫓아서 다니는 그런 마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만 쉬어버리면” 그 말입니다. 그 마음만... 구하려고 부단히 쫓아다니는 그 마음만 쉬어버리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곧 곧바로 조사와 부처와 더불어 하나도 다르지 않다. 똑 같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사람들 별것 아니다. 쉬어버린 사람이다. 쉰 사람이다.
우린 전부 구하려고 부단히 쫓아다니는데, 푹~ 쉬어가지고 쉰 자리에서 뭐가 이루어 져야지요. 그래서 여기서 그런 말입니다. 조사와 부처가 다르지 않다. 馳求心만 소멸 한다면, 쉬어버린다면 조사와 부처가 다르지 않다.
儞欲得識祖佛麽(이욕득식조불마)아?
그대는 조사나 부처를 알고 싶은가?
알고자 하는가? 잘 들으십시오. 우리, 부처님 알고 싶지요? 부처님 되고 싶지요? 부처님께 귀의하고 싶지요? 그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祗儞面前廳法底是(지이면전청법저시)다. 그랬습니다.
지금 다만 우리들 면전에서 廳法底가 是다. 법문 듣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사요 부처다. 지금 여러분 말씀 듣고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사실ㆍ그 당체ㆍ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조사이고 부처다. 그 사람 외에 무슨 조사가 있고ㆍ무슨 부처가 따로 있겠습니까? 있다고 하면 전부 가짜지요. 전부 방편이지요.
석굴암부처님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게 잘생긴 부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돌로 깎아놓은 불상입니다. 그 석굴암 불상 100명하고 여러분 한사람하고 바꿀 사람 있습니까? 아니 100은 너무 적습니다. 석굴암 불상 한 10000개하고 여러분 한사람하고 바꿀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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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