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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쌓는 보물
마 6:19-3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19-34 /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눅12:33-34] 이 땅위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땅에서는 좀이 먹어 없어지거나 도둑을 맞기 쉽다. 20) 그러므로 그것들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서는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갈 염려도 없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눅11:34-36]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깨끗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고 23) 네 눈이 악한 생각과 욕망으로 흐려져 있다면 너는 심한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그 어둠을 어찌 이루 다 말하랴! 24)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눅16:13] 아무도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며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극진히 위하며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눅12:22-34] 그러므로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 설 교 >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마 6:19-24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에서 제가 제목을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그랬습니다.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멘. 사람이 제일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냐 하면, 결정하지 못할 때, 갈등할 때가 제일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떤 확고한 신념이 생겨지지 않고 어떤 방향이 확고히 결정되지 못해서, 이럴까 저럴까 할 때가 제일 고통스럽고 제일 어렵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을 당했던 때가 언제냐 하면, '이 신을 섬길까! 저 신을 섬길까!' 할 때가 제일 그 이스라엘에 흑암 시대요, 고통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저주와 고통이 나라에 임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 엘리야 시대 아합 왕 때에, 갈멜산에서 아합왕 때에 그 바알 선지자들을 불러 놓고 엘리야 혼자 여호와 신의 선지자로 대결했던 그런 때에 엘리야가 왜 첫번 외침이 바로 이 부분을 잘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바알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기고, 그러니 이 섬긴다는 이 사실 자체보다도 '두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냐!' 그 말입니다. 머뭇머뭇하느냐? 이때가 이스라엘 백성에 가장 많은 재난과 재앙과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이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성도가 세상 신과 하나님의 신을 같이 섬기는 일들, 이런 자리에 빠지게 될 때에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단순합니다. 오직 한 분, 한 주인, 주 여호와 다른 것이 개입이 되지 않는 것! 그래서 여러분 그 예수 그리스도만 그럴 때에 행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될 때에 갈등이 나오고 고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게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이미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서, 교회 다니면서 두 주인을 섬긴다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주로 보면 종교에 빠지거나 율법에 빠지거나 이럴 때에 저절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다고 작정한다고 그래도 그렇게 빠져 버립니다. 그러면 바로 그때에 그 엄청난 저주와 고통이 따라오는 것이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그래서 보면 지금 그 우리 나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어려운 국가들이 어느 국가들이냐 하면, 종교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들이 가장 어려운 국가들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 태국에 갖다온 산업선교 행정담당 이상배 목사님이 산업선교 때에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태국에 가니까, 산업선교 결성 때문에 갔는데, 안 믿는 사업가인데 어떻게 만나 가지고 아주 크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래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참, 이 나라에서 그 사업하기가 어렵다!' 공장을 하고 그런가 봐요. 그런데 이제 그 직원들을 채용을 해 놓으니까, 주로 이제 그 이슬람에 있는 직원들인데, 그러니까 알라신을 섬기는, 그런데 뭐냐하면 일단은 그 사람들은 시간만 딱되면 하루에 5번 기도합니다. 철저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일하다가도 기도하는 시간 되면 다 놓고 나갑니다. 그러니 뭐 일이 안 되는 것이죠. 너무 어렵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게 알라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데 어떤 경우냐 하면, 그 섬기는 그 사람들의 배경이, 그 빠진 사람들이 심각한 3가지 병이 들어 있다고 그래요. 안 믿는 사람인데, 그 산업선교 하면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하면, 첫 번째 배경이 마약에 빠져 있습니다. 마약에 빠져있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 이건 뭐 너무나 문란하게 Sex에 빠져 있습니다. 성에 빠져있고, 세 번째가 뭐냐하면 도박에 빠져있다! 그랬습니다. 이병이 심각하다는 겁니다. 이병이 병으로 아니고 '완전히 생활화되어있다!' 할 정도로 빠져있다 그럽니다.
여러분 그 태국 들어가면 그렇게 못삽니다. 완전 우상국가! 그 다음에 이슬람에도 마찬가지고 여러분 태국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만은, 거리에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여자들인데, 그 여자들은 전부 창녀들입니다. 그러니까 뭐 아예, 뭐 어릴 때부터 이 사람들은 오히려 창녀들은 대우를 받는 이런 실정이니까! 왜, 너무 성적으로 문란하니까! 그러니까 그 나라가 우리가 상상을 해볼 수 있죠.
어느 정도로 어려우냐! 똑같이 여러분 보세요. 남미 참 어렵습니다. 제가 남미에 가서 보면서 느낀 것이 똑같이 신대륙으로 찾아갔는데, 북아메리카는 복음 때문에 신대륙에 모두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북아메리카는 미국 아닙니까! 번성을 했습니다. 축복을 엄청나게 받았죠. 그 남아메리카는 뭐냐하면 주로 물질중심, 어떤 그 금광이나 이런 것을 중심으로 해서 남아메리카로 내려갔습니다. 훨씬 자원도 풍부하고 환경도 좋습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는 천주교가 지배국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아메리카는 발전이 안 돼요.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듣고 있다 시피 모든 이상한 신학은, 해방신학을 비롯해 가지고 남아메리카에서 나왔다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런데 이 종교가 나라를 잡고 있을 때는 영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와 있다는 사실이 지금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잘 알다시피 필리핀은 천주교 국가입니다.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여러분 6.25때만 해도 우리나라 보다 훨씬 앞섰던 나라가 필리핀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합니다. 엄청난 영적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 지금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나 그 다음에 천주교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서서히 무너지더라 구요. 모든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영적 문제가 심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똑같이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 그런데 이 기독교가 종교화되어서 지배하고 있으면 똑같은 영적 문제가 옵니다. 기독교가 지배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복음으로 바꾸어지지 아니하면 똑같은 영적 문제가 교회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어려운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오직 참된 복음이 안되면 여러분 우리가 가장 축복 받은 장소에 섰다하면서도 똑같은 저주와 재난과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너무 어려운 시대거든요. 보세요. 우리나라에도 지금 닥치는 바람들 한번보세요. 뭐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어렵습니다. 우상은 급증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급속도로 깨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어려운 이런 문제들이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뭐냐하면, 결혼을 하면 일본보다도 오히려 이혼비율이 앞설 정도로 우리나라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러분 잘 아셔야합니다. 기독교가 없습니까! 종교가 없습니까! 어떤 면에서 문명이 뒤떨어졌습니까!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복음이 바로 안 되면 영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불어닥치면서 가정이 깨어집니다. 사회가 깨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정과 사회가 깨어진다는 배경에서 먼저 아셔야 될 것이 개인이 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이 깨어지면 가정은 물론 말할 것도 없죠. 그 다음에 개인이 응답 못 받고 개인이 참 복음에 서지 못하면 그 다음에 따라오는 모든 문제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실 것은 교회 생활도 내 개인이 응답 받고 개인이 기뻐야 교회가 '우리 기도합시다!' 그러면 같이 기도할 마음도 생기고, '찬송합시다!' 그러면 같이 찬송할 마음도 생기고 교회가 '이렇게 합시다!' 그러면 막 기쁘게 그렇게 할 마음도 생기지, 자기가 죽을 지경인데, '찬송합시다!' 그러면 속으로 '너나해라, 죽을 지경이다!' 교회가 뭐 '이렇게 합시다!' 그러면 내가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하느냐? 이게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아무리 내 가정이 막 겉으로는 좋을 집, 돈이 '있다, 없다!' 상관없이, 그렇다 할지라도 내 개인이 죽어있으면, 개인이 어려우면, 가정 부인이 아무리 좋으면 뭐하고 부인이 인물이 좋으면 뭐합니까? 내가 죽어 가는데, 자식이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개인이 복음이 안되면 서서히 깨져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들이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회복되어질 수 있는 길이 딱 하나뿐입니다. 그게 뭡니까? 참 주인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왜, 두 주인 가운데 머뭇거리면 점점 더 큰 갈등과 고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몸에 건강이 이상이 오니까, 자연적 무슨 일이 생기던지 뭐 머뭇거리게 됩니다. 뭐 이렇게 가야 되는데 또 갈 힘이 없다 싶고 그러면 늘 뭔가 마음에 갈등이 오고 뭔가 행복하다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어떤 것으로 기울어지느냐 하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인데 뭐 가다가 죽든지, 하다가 죽든지 뭐 죽어버리면 되는 것이지 그 뭐 걱정할게 뭐 있느냐!' 이런 마음으로 딱 한길로 확정만 지어도 변하더라 구요. 이게 변하더라 구요. 여러분 죽으면 죽어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한길을 확실하게 마음에 결정 내어 버려도 결정하는 그 날로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둘 사이에 끼어 있으면 일단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죽음은 더 큰 축복의 문입니다. 겁낼 것 없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죽으면 죽지' 뭐 이렇게만 되어도 편안하더라 구요. 한번 받아합시다. "죽어버리면 죽어버리지!" 이렇게만 되어도 편안해요. 여러분 확실한, 참된 주인 붙잡고 '주여 원하신다면 죽겠습니다!' 이렇게만 되어도 정신문제 해결됩니다. 이러면 치유가 나와요. 그게 안 될 때에 뭐냐? 갈등이 나오고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일먼저 뭐가 이루어 져야 되느냐 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영접하는 순간 그때부터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은 끝납니다. 이게 바로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우리는 '참 복음!'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나는 참 복음이 안 되어 있느냐? 이상하게도 그렇게 못하도록 다른 주인이 계속해서 방해를 놓습니다. 다른 주인이, 성경은 세상 신이라! 그러고 세상 지배자라! 그러고 이걸 사단이라! 그러고 마귀라! 그러고 언제부터? 창세기 3장부터 이것이 개인을 자꾸 갈등시키게 하고 개인을 깨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나도 모르게 가정에 문제가 오고 사회에 문제가 오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계속 방해를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떠나느냐? 확실하게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는 순간 구원이 임하고, 그때에 참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이때부터 모든 문제가 영육 간에 문제가 열려지게 됩니다. 이게 다 해결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뭐 막말로 해 가지고 '병이 낫는다! 뭐 정신이 편안하다! 마음이 편안하다! 모든 문제 해결된다!'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단순간에 고통스러운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는 문제가 있고, 차근차근 강도에 따라서 진전이 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은 사람의 성격이나 환경에 따라서 달리 표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확실히 여러분 붙잡아야될 것이 정말 참 복음을 붙잡고 그것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때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동시에 그때부터 모든 문제 해결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일과 사건 속에 성취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말씀의 성취라 그럽니다. 그때부터 뭐가 여러분 나타나는 것이 뭐냐하면,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러 와 가지고 말씀이 안 들어온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어요. 일단은 교회 와서 여러분 기도할 때에 말씀이 잘 안 들어오거든 좀 일찍 오세요. 그래가지고는 뭘 기도하느냐? 집중해서 말씀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말씀이 깨달아 질 수 있도록,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을 때에 한 주간 기도의 제목이 나올 수 있도록, 이 기도가 집중되면 하나님 앞에 여러분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 이 예배를, 말씀을 바로 듣기 위해서 여러분 예배 위해서 잠이 많은 사람들은 잠을 미리 좀 자 두시고, 교회 와서 이 시간에 자려고 하지 마시고 미리 좀 자두시고, 그 다음에 일도 미리 좀 해 놓고 그렇게 하시면 돼요.
또 오늘 뭔가 이게 주일을 잘 지킨다고 토요일 날 12시, 1시까지 빨래하고 있지 말고 미리 그것은 놔두고 아무리 빨래 감이 뭐 모아졌다고 해도 하루, 이틀, 삼일... 썩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해서 주일날 참 말씀 속에 집중될 수 있도록 준비하시면 누가 역사 합니까? 그 다음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역사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고 이 은혜도 '내가 하는 것이고,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합니까? 하나님께서 하신다! 모든 문제에 해결의 초점이 이 문제가 바로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의 지금 현재 왜 안 되느냐? 다른 것 살필 것이 없어요.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한마디로 임마누엘이 되어야 된다 그러는데 문제는 여러분 영접이 확실하게 되어야 됩니다. 영접이 바로 되어버리면 어떤 문제도 생명이 들어가는 그 날부터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갈등이 계속되고 그러느냐? 여기서 오늘부터 '이미 영접하고 이미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확실히 믿고 있다면 뭘 바꾸어야 되느냐? 오늘부터 좀 생각을 바꾸어야합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생각 바꾸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데도 생각은 마귀의 자녀의 생각을 갖고 그대로 가는 겁니다. 여기서 갈등이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한국에 사는데 한국에 법에 적용을 받아야 되는데, 다른 나라의 법에 적용을 자꾸 하고 있다면 그런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안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뭐 많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아, 이제는 내 생각만 바꾸면 되는구나!' 이걸 가지고 우리는 치유라 안 그럽니까! 말씀들을 때에 치유가 되면 좋습니다. 조금 조금씩 치유가 되어도, 치유가 되기 시작하면 금방 평안과 안식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을 바꾸는 일에 제일 먼저 뭘 해야 되느냐? 늘 말씀을 드리죠. 예수께서 나의 구주 되심이 믿어지게 되고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는 동시에 여러분과 제가 어디로 간다 구요?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들어간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신학적인 문제가 되어 가지고 뭔가 실감이 안 나는가 봐요.
그 다음에 누가 우리를 다스립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인이십니다. 아마 한번도 하나님이 내 주인이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이 안 바꾸어 가지고 항상 사단을 내 주인으로 알고, 그게 뭐냐하면 사단이 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배경이 뭐냐하면, 내가 내 주인으로 알고 있는 것이 사단이 나의 주인입니다. 그 속이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자신이 절대 주인이 아닙니다. 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단에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분명히 어디 속하도록 되어 있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을 수가 없는 본질적인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뭐로 속이느냐? '내가 주인이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놓고 사단이 조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오늘이라도 여러분 '내가 주인이다!' 이러면 '아, 아직도 나는 사단을 섬기고 있구나! 두 주인을 섬기고 있구나!' 교회 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두 주인을 섬기고 있구나! 그렇게 이해하면 돼요. 그래서 완전히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생각을 바로 바꾸어야 됩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는 주권이 어떻다 뭐 어떻다 너무 이제 딱딱한 말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받아합시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좋다!" 믿습니까! 그런데 왜 자기 마음대로 합니까! 이 말로만 하지 입에 발린 말이에요.
또 하나합시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더 많이 좋다!" 여러분 이것이 이 생각으로 바꾸어 버려야 됩니다. 전에는 내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내 생각이 좋구나! 내가 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왔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내가 자꾸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의 배경이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보다 좋다!'는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 오늘 뭔가 이런 문제가 생기고 이렇게 될 때에, '이게 좋겠다!' 싶어도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 하신 이것은 아무리 좀 힘든다 싶어도 하나님의 생각이, 하나님의 일이 훨씬 좋습니다.
혹시 내기 이 사람 진작 만났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하나님의 생각이 좋습니다. 진작 만났으면 진작 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좋습니다. 이게 본질적으로 모든 배경이 여기 다 나와야 됩니다. 내 생각은 좁고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5분 후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엄청나게 좋다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이 사실이 내 생각 속에 조금만 들어와 버리면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들어왔다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정말 이 생각을 마음에 담아 버려야 돼요. 그러면 이때부터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이걸 가지고 치유에서는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게 안 되면 치유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혹시 여러분이 생활과 사건과 일에 감사가 안 나오면 이게 안 되어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남편 이상한 남편 만났다. 그렇게 생각하고 갈등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안 되면 그런 게 생각이 와요. 여러분 남자친구 이상하지 않는 남자 있습니까! 다 이상한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이 되어져 있을 때는 그렇게 되어요. 그러나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낫구나! 진짜 나한테 딱 맞는 남편을 주셨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모든 것이 감사가 나와요. 여자친구 이상하지 않는 여자 어디 있습니까! 살아보면 그런데요. 그래도 이 여자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잘 아시고 내게 맡겨주셔서 더 이상 좋은 분이 없다! 나한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한테 좋은 분이 없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문제가 거기서 다 해결됩니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감사가 나와요. 이상한 짓 해도 감사가 나오고, 이것이 안 되면 범사에 불평입니다. 또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어떻다 구요? 훨씬 낫다! 오늘 이 마음을 딱 여러분 붙잡아야 됩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느냐?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가족을 구원하시고, 나의 가문을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3장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이 땅에 친히 오셔 가지고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흑암의 세력을 사단의 권세를 꺾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예수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 해결하시고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여기에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되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의 뭐가 되었습니까? 주인이 되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시기도가 나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되어야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 이것 해야 됩니까? 이것 말아야 됩니까?' 나오게 되어 있잖아요. 내가 주인이 되어 있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 문제 가지고 우리도 뭐 갈등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뭔가 나하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목사로 알고 있다면 적어도 여러분들이 뭐라 그럽니까? '목사님 뭘 하시겠습니까!' 안 묻겠어요? 어느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내가 설렁탕을 좋아하니까, 설렁탕 주십시오. 이럴 사람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자기 혼자 갔는데, 나한테 전화를 걸어 가지고 목사님 뭐 할까요?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것은 자기가 주인인데,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 있다 싶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조금만 인식이 되면 언제든지 무시기도가 나와서 나온 게 아닙니다. 사건과 일을 당할 때마다 아버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기도 아닙니까! 기도할 때에 다른 겁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저절로 따라 가게 되고, 그 뜻을 따라가게 되면 내 생각보다 하나님 생각이 훨씬 나은데, 하나님은 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내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그 뜻은 이루어 나가기 때문에 이 역사가 엄청나게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하나님이 자녀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한다 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막 피곤해서 그러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것이 조금만 생각으로만 와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치유라는 사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그럴 때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이 땅에 누구보다도, 수많은 사람보다도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게 또 너무 이기주의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너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자녀인 너도 사랑한다! 이상한 짓 해도 남편을 사랑합니다! 이게 되면 생각이 달라져요. 좀 모자란 것 같은데도 당신도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인식이 나오는 만큼 상대에 대한 이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루어져야 돼요. 여러분 절대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이 이루어지게 되면 내가 어디 가든지, 뭘 하던지, 사랑한다는 배경 속에는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뭐가 이루어집니까? 지금 뭐 '어렵다! 힘들다! 문제 생겼다! 사건 생겼다!' 이것과 상관없이 참된 주인 하나님을 바로 붙잡고 아버지로 바로 모시고 있다고 그럴 때에 내게 닥친 모든 문제가 '나는 싫은데...' 싶을 문제들이 나올 수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진짜입니까? 그러면 왜 걱정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여러분과 제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이 사실들이 마음에, 조금만 마음에 품게 되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 정도가 아닙니다. '축복이구나! 참 감사구나!' 이렇게 저절로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머물지 마시고 큰 우리가 속는 것이 바로 여기입니다. 받아합시다.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벌도 함께 주신다!"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이 말씀을 좀 벌써 드렸습니다 만은,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나는 이웃 일본도 잘 못 갔는데 나를 통해서 세계복음화라는 엄청난 축복을 계획을 세워놓았구요. 그런데 이 세계복음화라는 계획을 세워놓고 이루시려고 그럴 때에 내 그릇은 너무 적거든, 세계복음화는커녕 가정 복음화도 못 시키고 있는 주제에, 세계복음화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세워 놓으니까! 이게 그릇이 안되고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뭐가 됩니까?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있던 좁아터진 이상한 쪼그려든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깨어버려야 될 것 아닙니까! 사이다 뚜껑 아무리 열어놓아 봐야 얼마나 물을 담겠어요? 그 크기를 만들어야 됩니다.
나는 이 사실들을 신앙생활하면서 너무 내게서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생각을 더러 해보느냐 하면, 무슨 그 교회 큰 어떤 계획을 세우고, 교회 어떤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어떤 장로님 그릇을 깨든지 집사님 그릇을 좀 깨든지 그렇게 깨면 좋은데 누구그릇부터 먼저 깨느냐 하면, 항상 박 목사 그릇부터 먼저 깨더라 구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오면 교회에 일 단계 올라가는 시간이더라 구요. 항상 내 그릇이 먼저 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만들어 놓으십니다.
여러분 가정에 저 이상한 남편 그릇부터 먼저 깨어놓으면 좋은데, 항상 누구 그릇부터 먼저 깨느냐? 복음을 알고 있는 자기 그릇부터 먼저 깨어 놓아요. 문제는 뭐냐? 내 그릇만 넓어지면 다 된다! 내 그릇이 바꾸어지면 다 됩니다. 내 자격이 바꾸어지면 다 됩니다. 자기 자신이 회복되면 그 안에 다 담을 수 있습니다. 뭐 남편 그릇이야 적든 좁든 상관없어요. 자기 그릇이 크면 거기 담아 버리면 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잘 안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좋은, 큰 계획을 세워 놓았지만 내가 자격이 안되고 내 그릇이 안되니까, 여기에 갈등이 오고 혹시 오늘 여러분들이 가정과 가족들 사이에 문제 있거나 이러면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그릇 깨어지고 새로이 만들어 놓습니다. 이 과정에서 잠시 잠깐 어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병나고 나면 꼭 꾀가 늘던지, 뭐가 늘든지 그러더라 구요. 꼭 성장하는 과정에 한번 아프고 나면 꼭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한,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오늘 그릇이 깨어지는 것 염려될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큰 축복과 은혜의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 생각만 바꾸어도 상처는 치료가 됩니다. 여러분 정말 교회에 축복 받을 그릇으로 성장하고 싶습니까! 지금 깨어지고 있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더 큰 축복과 은혜의 역사로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바로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면 뭐가 느껴지느냐 하면요. 우리 교회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 같이 뭐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 가는 과정에서, 혹은 이렇게 기관별로 모여서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저 인간 되겠나 싶은 생각들이 들 때가 많더라 구요. 나는 교회 오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저 사람이 인간 되겠나?'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잘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다 율법이다. 바로 밑에 간단합니다. 하나입니다.
'저 인간이 되겠나!' 라는 생각이 바꾸어져서 '생명 들어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지는 시간이 복음입니다. 그러면 갈등이 사라져요. 혹시 보다가 '저 되겠나!' 이게 없어지면서 '복음만 들어가면 돼!' 이것이 자리 잡아 버리면, 그게 복음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사람 보게 되면, '저 인간 되겠나! 아직도 멀었네! 인간 안되겠네!' 이렇게 있는 동안은 자기도 모르게 뭡니까? 두 주인을 섬기는 자리에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늘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사람 볼 때마다 갈등 없어진다!' 단순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되어서 된다 이러면 갈등나올 우유가 없고 그때부터 그 사람 입에서는 뭐냐? 힘이 생깁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 통해서 나온 메시지는 생명이 생깁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 통해서 사실적인 치유역사가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되어져야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참 생명이 들어가는 그 순간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그에게 큰 계획을 세워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돌멩이도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적과 계획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받아합시다. "지금 실패해도 하나님은 계획을 성취하고 계신다!"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걸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이런 생각이 조금만 자리잡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뭐가 오느냐? 치유라는 것이 그때부터 이루어집니다. 저절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오는 것이 여러분 생활과 행동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뭐 이해하라 뭘 하라 상관없어요. 그렇게 되면 이제는 참 생명, 참 복음 여기에 가치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복음 위해서, 복음에 역사 위한다는 복음과 관한 일이라면, 그 다음에 문제는 다 양보라는 것은 저절로 나옵니다. 이게 안되면 양보라는 것은 나올 수 없죠. 이게 안되면 갈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번 받아합시다. "복음 이 외에는 다 양보하자!" 복음 이외에는 다 양보하자! 복음이외에는 전부다 양보해 버립니다. 그러면 왜냐? 복음 속에 다 포함이 되게 때문에 우리가 그걸 가지고 붙들고 설칠 것이 없어요. 그러니 뭐 부부문제나, 부모자식간에 문제나, 혹은 모든 교회 관계 속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게 되면 이때부터 뭐가 필요하냐 하면, 당장 들어오는 것이 자기 자신이 회복이 되면서 사람 사람과의 관계들이 저절로 회복이 됩니다. 혹시 이 문제가 안되어서 막 사람 사는 관계가 어렵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이 문제 회복되면, 저절로 회복 되어버리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지금까지는 쉽게 남편과 아내관계가 잘 되어가다가도 이상한데로 빠지더라 구요. 그러면 반드시 그 속을 쳐다보면 이 문제입니다. 내 자신의 회복인 안 된 겁니다. 그런데 뭡니까? 이 사람과의 관계가,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 그럴 때에 제일 먼저 뭐냐? 부부간의 관계가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저절로 회복되어 집니다. 저절로 회복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때부터 어려움도 뭐가 나오느냐? 감사가 나오구요. 고난도 감사가 나오고, 또 모든 문제도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엄청난 일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 나오니까,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뭐 여러분 입에서 저절로 감사가 나오면 이건 치유 받은 겁니다. 뭐 치유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뭐 치유라는 것이, 뭐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해서 나았다! 그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되면 그때부터 오는 것이 모든 이 치유가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할 것도 없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감사가 나옵니다. 왜? 잃어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배경이 되면 잃으면 잃을수록 더 찾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 그랬습니까? '목숨을 잃고자 하면 찾는 것이고, 내가 목숨을 찾으려고 하면 더 잃어버린다!' 이게 이상한 논리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능력자라고 조금만 생각이 바꾸어지게 되면요. 이게 나와도 상관없습니다. 일이 이루어지고 잃어버릴수록 그 안에 다 포함이 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모든 것이 회복이 되어집니다. 백 번, 천 번 여러분 자존심 가지고 둘이서 다투어 보아야 남는 것은 이것은 더 큰 상실감뿐이지 얻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이 복음의 역사를 딱 붙들고 다 내어놓아 버리면 그 안에 다 들어와 버립니다. 눈 떠버리면 다 들어와요. 상관없어요.
저는 그 부흥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에 하나, 이것 하나만 딱 붙들면 이것은 언약이라 그럴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은, 딱 하나입니다. 부부가 뭐 적극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헤어지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가지고 왔던 것 보물 다 가지고 가라! 이 집에서 이제는 네가 나가라!' 그러니 여자가 할 수 없잖아요. 이제 서로 합의를 했으니까, 보자기를 딱 펴놓고, 그래 놓고는 가만히 서 있어요. '빨리 싸 가지고 나가라!' 그러니까 내가 싸 가지고 갈 것 딱 하나입니다. '그 하나 가지고 가라!' 당신 여기 들어오세요.
딱 한가지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모든 것이, 다른 것 장롱 같은 것이 상관없어요. 뭐 싱크대도 상관없어요. 부엌에 뭐 상관없어요. 하나만 있으면 돼요. 그것만 달랑 싸 짊어지고 나오면 돼요. 나와도 다 따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러면 다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오직 한 분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언약에 하나님만 나의 아버지 되시고, 나의 주인이 되시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이 사실 속에 모든 것이 양보가 비로소 가능합니다.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죠.
이러면 우리가 빌립보서 4장 6절, 7절 말씀처럼, 이러면 모든 환경도, 모든 사건도,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참 평안과 감사와 안식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겁니다. 이 축복된 주인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제물과 하나님을 지금도 겸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 놓치고, 저것을 안 놓치고, 뭔가 이것도 안 되겠고, 저것도 안 되겠고, 이 속에 갈등하다가 여러분 완전히 또 점점 더 저주와 재난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불 신앙 자들보다도 교회 안에 더 많습니다. 차라리 하나면 좋은데, 둘 사이에 머뭇거리다가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 속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못 믿고, 바른 복음 바로 못 붙잡으면, 예수 믿고 훨씬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이러다가 두 사이에 머뭇머뭇하다가! 단순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나의 주인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 언약 통해서 모든 것 이 안에 있습니다. 다 양보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마 6:19-24 / 양인순 목사
어떤 청년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요정이 나타나서 청년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릴까요?” 그러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저는 많은 돈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행복한 결혼을 원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난처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꼭 세 가지를 다 원하시나요?” 청년은 단호한 표정으로 “예~ 저는 돈,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얼마 후 돈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돈 여자와 결혼 안하시고, 돈 인간으로 살지 않으시려면 돈에 대한 바른 생각, 돈에 대한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재물은 끊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나 오욕칠정이 대부분 돈으로 인해서 발생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늘도 돈 때문에 웃고 울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제 라디오 방송을 잠깐 들었습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신혼생활은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가 좀 수상해 보였습니다. 아마 여자 분이 재산이 좀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집은 자기 이름으로 해놓고, 상가는 남편이름으로 명의이전을 했답니다. 그런데 서서히 남편의 태도가 바뀌더니 상가를 몰래 팔려고 한답니다. 벌써 세 번째 팔려고 하다가 들통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을 내 맘대로 못하느냐며 손찌검까지 한답니다. 사랑도 돈 앞에서 변질되는 모습을 봅니다.
쟈끄 엘룰(Jascque Ellul)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아무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구도 돈에서 자유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의 중심은 물질이다’라는 유물론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자본주의 역시 물질을 중시합니다. 존 화이트(John White)의 견해를 빌리면 공산주의는 돈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자본주의는 돈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모두 물질을 중시합니다.
돈이 갖는 위력에 대해서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Karl Max)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못생긴 사람인데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못생긴 사람이 아니다.’ 돈이 많으면 못생긴 사람도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동경하는 모든 것을 돈만 있으면 가질 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돈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은 끝도 없고 한도 없습니다. 칼 막스는 아주 의미있는 한 마디를 했습니다. ‘흐르는 돈은 인간 내면의 저수지에서 결코 넘치는 일이 없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나는 이정도면 만족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 미국의 최고의 부자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어떻게 하면 돈을 조금 더 많이 벌 수 있을까’였습니다. 여러분은 얼만큼의 돈이 통장에 있으면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해서 비참한 삶을 삽니다. 돈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면 돈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보배로운 교훈인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재물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의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땅에 보물(treasures)을 쌓아두지 말고(19절),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20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안될까요?
첫째, 재물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둔다는 말은 보물을 자기를 위해서 은행이나 금고에 넣어둔다는 말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려는 이기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땅에 쌓아둔 재물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IMF(국제통화기금)를 통해서 한 나라의 경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작년 세계경제 위기를 통해 인간이 쌓아 놓은 물질의 바벨탑은 한순간에 쓰나미처럼 휩쓸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국가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경제위기 속에서 무너질 수 있다면 개인은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뜻하지 않는 재난이나 질병이나 죽음이 땅에 쌓아둔 재물을 순식간에 휩쓸어 갑니다. 잠언 3장 24-25절에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재물은 날개가 있어서 독수리처럼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경종을 남긴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23년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의 최고 부자인 일곱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들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25년이 지난 후에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추적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첫 번째 사람 강철회사 사장인 찰스 슈언은 25년 후 한푼 없는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써 카튼 역시 사업이 파산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보석으로 풀려 나와 집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 월스트리트의 회장이었던 J.C. 리버모아는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 국제은행의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기의 삶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사람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거부였던 일곱 명의 비극적인 종말은 1948년 당시 미국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한 부자의 이야기(눅12:16-21)를 들려줍니다. 농사를 잘 지은 부자가 곡식을 쌓아둘 창고가 없다고 걱정합니다.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계속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절).”
여기서 ‘내가’ 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의 주인이 자기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창고에 쌓아둔 소출은 순식간에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무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해 땅에 쌓아둔 재물은 조만간 내 손에서 떠나 사라지고 맙니다.
둘째, 우리들의 마음이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소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말씀합니다.
마음이 떠나면 거기에는 사랑도 기쁨도 행복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면 그것은 가장 큰 불행입니다. 우리에게도 불행이고 하나님에게도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화를 땅에 쌓아두면 우리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점점 땅에 가까워집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재물을 바라보고 소알 뜰을 택했다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당합니다. 롯의 아내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똑똑한 제자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 생각을 불어 넣었을 때에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재물을 마음 중심에 두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살고자 몸부림쳤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6).”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시25:1).”
항상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행복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을 누립니다.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우리들의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땅에 재물을 쌓아두면 눈이 어두워져서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사물을 바로 볼 수 없고, 바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의 눈이 어두우면 하나님도 볼 수 없고 자기 자신도 볼 수 없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멸시하고 학대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합니다. 사물에 대한 가치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돈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 제조 기술을 발명하여 당시 유명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돈을 벌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 실제로는 집안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노벨이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기사 앞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신문을 찢어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노벨상」이 시작된 유래입니다.
지금까지 재물을 땅에 쌓아두면 안되는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립니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둔다는 말은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면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게 됩니다.
20절 말씀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느니라.”
땅에 쌓아둔 재물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진 재물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욥바에 살던 여제자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욥바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 되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유대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행10:4).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부자로는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선용했느냐를 기억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Schindler)는 히틀러의 만행 앞에서 유대인을 구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쉰들러 리스트-자신이 건져내야 할 유대인들의 목록을 만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서 생명을 건집니다.
그의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대인들을 기차에 태워 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가락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칩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금반지를 팔았더라면 한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 통곡합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이 구해내지 못한 유태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내게 돈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한 사람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메시지를 아시지요.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우주를 건진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쉰들러 한 사람의 고귀한 노력이 죽어가는 수천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쉰들러는 유태인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자신의 재물을 다 털었습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좀 더 돈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향해 통곡하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도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 죽어 가는 영혼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쉰들러는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 쉰들러의 사랑의 섬김과 눈물이 수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쉰들러를 본적이 없지만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아멘!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딤전6:10). 반대로 재물을 하늘에 쌓는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인 동시에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재물은 나만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잠시 맡겨두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나만을 위해 땅에 쌓아두면 곧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주신 재물을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만을 위해 쌓아두고 즐기려다가 그 생명을 거두어가면 그것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작은 서점 사업을 하다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위기와 유사한 경제 공황이 닥쳐 파산을 하고 약 10만 불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진지하게 기도하다가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무엇보다 과거에 자신의 헌금 생활에 대한 불성실을 회개하고 자기 집을 팔고 빚 정리를 하고 다시 십일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마당에 무슨 십일조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빚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셨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기도하며 약품 연구를 하면서 약품 제조, 판매, 영업으로 바쁜 새 삶을 살아가며 얻어지는 수입의 십의1조를, 그리고 십의 2조를, 마침내 십의 3조를 드리기 시작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재기한지 3-4년 만에 한 세계적인 제약회사를 일으켜 세우게 됩니다. 그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맨소래담 제약회사였습니다.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A.Hyde)박사의 스토리입니다. 그는 죽을 때 십의 9조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록을 남기는 성도가 됩니다.
무디 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묻게 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벌었는가? 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 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벌어서 모아놓았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았느냐 입니다.
하바드 대학 총장을 지낸 트루엇 박사는 텍사스주에서 석유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부유한 가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 이 주인이 박사에게 자기 자랑을 합니다. “저는 25년 전에 빈손으로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고생과 노력으로 지금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 동쪽에 있는 석유공장도 제 것이고, 서쪽에 있는 유전도 제 것입니다. 남쪽에 있는 집도 제 것이고, 북쪽에 있는 빌딩도 제 것입니다.” 하고 주위를 삥 둘러보며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트루엇 박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동서남북 모두다 회장님 것들인데,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무엇을 얼만큼 쌓아두셨는지요? 이 땅에서 부자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거지처럼 빈손이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요? 지금부터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바라보며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투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복입니다. 더 풍성하게 누리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나를 위해 하늘에 무엇을 쌓고 있느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마 6:19-34 / 이성우 목사
우리 인간의 삶은 모든 것이 관계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관계성의 존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자마자 인간관계로 얽혀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가족관계로부터 시작해서 친구관계, 이웃관계, 직장에서의 동료와 상사와의 관계, 연인관계와 부부관계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아주 다양한 인간관계로 얽혀서 살아가는데, 이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은 그 때부터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이 맺고 살아가는 관계에는 인간관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른 피조물들, 곧 동물이나 식물과는 다르게 하나님과의 신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대신관계 역시 원만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관계가 깨어지고 흐트러진 것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불행을 겪게 되는데, 그 결국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여타의 모든 관계도 잘 맺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대신관계는 더욱이 잘 맺고 살아가야 할 관계입니다.
인간이 맺고 살아가는 관계에는 대물관계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물질적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지수는 이 물질과의 관계가 원만할 때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물질과의 관계를 잘 맺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데, 이 물질과의 관계는 단순히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모습으로 물질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맺고 살아가는 관계에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대아관계도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 외에도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요소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아관계가 건강한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아지게 되며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 대아관계가 건강하지 못하게 되면 우울증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고 결국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불행을 안겨주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대물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관계들보다 대물관계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물관계의 실패는 단순히 대물관계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신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타격을 주며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협하여 훼손시키고 있는 이 대물관계와 관련해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한 대물관계에 대해서 중요한 원칙과 지침을 들려주고 있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경제관을 함께 배우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감리교 창시자로서 우리 신앙의 모델이 되는 존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경제 발전이라든지, 혹은 경제위기 극복과 같은 개념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는 경제 발전과 부의 축적이 세상을 부패시키는 재앙이요, 특히 기독교인들을 부패시키고, 기독교를 몰락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에 웨슬리 목사님의 시대에도 그의 경제관을 그대로 따라 사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심지어는 그를 따르는 감리교도들조차도 지키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특히 1760년 이후로 ‘돈의 사용법’ 이라는 교훈적인 성격의 설교를 통하여 감리교도들에게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대단히 엄격한 돈의 사용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가르치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감리교도들이 그의 경제관을 따르지 못하자, 그 이후로 노년의 웨슬리 목사님은 ‘부의 위험’이라든지, 혹은 ‘부에 관하여’, 그리고 ‘기독교의 무능력의 원인들’ 과 ‘증가하는 부의 위험성’ 과 같은 경고조의 설교들을 통하여 그의 엄격한 경제관을 전혀 변함없는 동일한 논조로, 그리고 갈수록 더욱 격렬한 어조로 설파해 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감리교도들은 그의 경제관을 거의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노년의 웨슬리 목사님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크게 실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거듭나서,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와 새로운 대인관계, 그리고 새로운 자신과의 관계와 새로운 대물관계 안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 감리교도들인데, 그들조차 물질에 대한 새로운 관계에 따라 사는 일에 결국은 실패함으로써 결론적으로 대신관계나 대인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실패하게 되는 것이라고 웨슬리는 판단했던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 을 말하는 것이며, 새로운 대인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대아관계라고 하는 것은 ‘너의 영혼과 몸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며, 새로운 대물관계는 ‘네가 소유한 물질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웨슬리 목사님은 ‘이 문제 때문에 감리교회는 앞으로 이름만 남을 뿐, 그 내용은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성 예언을 하였고, 그 이후에 영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의 감리교도들은 웨슬리 목사님의 이러한 경고를 따르지 못할 경우 그의 암울한 예언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웨슬리 목사님의 경제관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기에 그 당시의 감리교도들조차도 그렇게 따르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을까요? 웨슬리 목사님 자신의 확신에 의하면, 그의 경제관은 성경의 가르침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돈의 사용법’ 이라고 하는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에 나타난 웨슬리 목사님의 경제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 규칙은 “벌 수 있는 모든 것을 벌어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규칙은 지키기 쉬울 것 같지만, 웨슬리 목사님이 의미한 그 내용을 분명하게 안다면, 따라가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로, 나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거나 건강을 해치면서 돈을 버는 것을 그는 금지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위협하는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일이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음식과 잠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어려운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눅12:23)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수입이 줄더라도 우리의 생명이나 건강을 줄이지 않는 일로 바꾸라고 그는 냉담하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 첫 번째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둘째로,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나 국법에, 또는 양심에 저촉되는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하여 어느 정도라도 내 영혼을 해치게 된다면, 당연히 그 일을 버린다는 것이 그의 경제관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셋째로, 이웃을 몸을 해치거나 이웃의 영혼을 해치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술은 약으로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웃의 몸을 해치므로, 술을 팔아서 돈을 벌면 “하나님의 신하들을 대량으로 독살하는 것” 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어떤 직업이든지 그 직업이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것이요, 그 직업은 좋은 것이며, 그 수입은 무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직업들이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이든지, 아니면 죄를 짓게 하는 입구가 되든지 하면, 마지막 심판 날에 너는 슬퍼하며 네 죄를 이실직고 하게 될 것이니 지금부터 조심하라.” 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해치는 돈벌이들이 더욱 많아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웨슬리 목사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우리들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일들을 피하면서 “너의 정직한 일을 통하여 네가 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벌어라. 가능한 한 모든 열심을 다하여 벌어라.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벌어라.”고 웨슬리 목사님은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조언은 결국 돈을 정직하게만 번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경제활동에서 절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을 하나라도 어기지 말 것이며, 다 지키되, 철저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날에 칼날같이 예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하게 돈을 버는 소위 청부 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입이 줄더라도 마지막 심판에 잘 대비하는 요령을 경제활동 및 대물관계의 분야에서도 잘 가르쳐 준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규칙은 “저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하라.” 는 것입니다. 이 규칙도 쉽게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만,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의미를 올바르게 알고 나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두 번째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번 돈을 “단지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낭비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특히 “입맛의 즐거움을 크게 하기 위하여”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없어도 되는 의상, 값비싼 의상, 불필요한 장식품으로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없어도 되는 가구, 값비싼 가구, 비싼 그림, 금도금, 책, 우아한 정원으로 집을 장식하기 위하여”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생의 자랑”,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거나 칭찬을 듣기 위하여,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차량 같은 것에 돈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이생의 자랑을 갖게 하는 돈의 지출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기에 꼭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삶의 편의를 위하여 꼭 필요한 만큼만을 지출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저축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머지 모두를 저축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 쓰기 위하여’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웨슬리 목사님의 이 가르침은 저축에 힘쓰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을 쓸 때 죄를 져서 망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 지출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생활비와 최소한의 편의를 위한 지출이라면 안전하다는 조언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꼭 필요한 생활비만 쓰고, 최소한의 편의를 위해서만 지출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저축하는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몇이나 될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 목사님이 깨달았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에 따라서 돈을 벌었어도 이렇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감리교도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웨슬리 목사님의 경제관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확고했던 것입니다.
셋째 규칙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줄 수 있는 것만을 다 주면 된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웨슬리 목사님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세 번째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로, 나의 영혼과 몸의 주인도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실진대, 하물며 내가 소유한 물질의 실제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그 물질을 잠시 맡아서 주인의 명령을 따라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에 따라서 그 물질을 어떻게 쓰라고 명령하실 권리가 있고, 나는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먼저 그 물질을 나 자신의 의식주와 내 몸의 건강이나 힘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데 쓰고, 내 가족 및 내 집의 일꾼들의 그런 것을 공급하기 위하여 쓰고, 그렇게 하고 남는 것은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그 물질을 그런 용도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하기 위하여 쓰고, 그러고도 남은 것이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대로 선을 베풀기 위하여 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은 것 중에서 줄 수 있을 만큼을 다 주라는 말이 아니라, 남기지 말고 이런 식으로 다 지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이 규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라. 즉,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려라.” 이런 방식으로 지출된 물질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웨슬리 목사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돌보시기 위하여 필요한 물질을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창고에 임시로 보관해 두셨다가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방출하도록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웨슬리 목사님은 이 세 번째 규칙을 약간 완화시켜서 사업을 확대하기 위하여 재투자하는 것 등은 용인되는 것으로 보았지만 나의 소유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모든 물질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다 써야 한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축적된 물질에서 영혼을 부패시키는 경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을 축적함으로써 부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이미 유혹에 빠진 자요, 마귀의 올무에 걸린 자이며,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진 자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는 반대되는 영혼의 상태요, 부패한 영혼의 상태로 보았던 것으로, 이런 영혼은 이미 불신앙과 교만 및 자기 의지와 세상 사랑으로 채워진 부패한 영혼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부패함은 결국 정작 주인으로 섬겨야 할 하나님을 배반하고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엄격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던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고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무엇을 입을 것인지를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비결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내가 하나님 자녀임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 기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신앙고백의 터 위에 굳게 서서 이제까지 내가 주인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삼고 살아가심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시는 행복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마 6:19-34 / 오정호목사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大憲章, Magna Carta)이라고 한다면 산상보훈(山上寶訓, 마태복음5~7장)은 삶의 대헌장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관한 믿음의 문제뿐 아니라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삶의 문제도 다룹니다.
본문은 눈에 보이는 재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염려라는 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해서 주님은 명확하게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여기 저기 끌려다니는 사람(driven people)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부름받은 사람들(called people)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라 말씀과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주도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재물(財物)을 하늘에 쌓는 주님의 백성을 책임지십니다(19~24절).
우리 주위에는 예수를 잘 믿을수록 물질과 시간과 에너지를 손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이요, 세상이 주는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본문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19~20절).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더 주려하고 그들이 반듯하게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를 위하여"란 말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19절). 당시에는 옷 한 벌이 대단히 소중했습니다. 옷 한 벌을 짜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좀이 먹으면 옷에 구멍이 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놓을 때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거나, 도적질당하는 잘못될 일들이 생긴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20절).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의미는 구제하거나, 복음 사업에 물질을 드리거나,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 헌물을 드리는 행위를 포함합니다(6장).
주님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주님이 나의 보물이라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주님께로 향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물질들, 눈에 보이는 재물에만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땅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영적인 이중 국적자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22:21).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삶에 성공할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삶에도 성공해야합니다. 그 판단의 시금석(試金石)은 무엇입니까? 물질, 재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을 위하여,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직설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b). 우리의 왕은 한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주는 예수그리스도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주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삼을지언정 하나님을 빙자하여 재물 얻기를 힘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함께 한다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재물을 안전지대인 하늘에 쌓아 둡시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지혜로운 주의 종들이 다 됩시다.
둘째, 하나님은 염려(念慮)를 믿음으로 다스리는 주님의 백성들을 책임지십니다(25~34절).
재물 때문에 마음이 상한 자가 많듯이 염려 때문에 억눌린 사람도 많습니다. 본문에는 "염려"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25~34절). 염려의 원래의 의미는 분열, 분리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마음이 분리되고 정신이 분열됩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 없는 삶으로 전락합니다. 우리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만 우리는 염려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염려를 다스리는 방법은 세상의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염려를 극복하도록 음식에 관해서는 새로, 의복에 관해서는 백합화로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절). 공중의 새를 보면서 깨달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새는 파종하고 추수하고 창고를 지어 채우지 않아도 살아갑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절). 우기이후에 광야를 수채화처럼 물들이는 백합화는 베를 짜는 일이 없지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위대한 존재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새와 백합화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 "이 모든 것"에는 의식주(衣食住)의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심된 단어는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의에 우리의 마음, 물질, 시간, 에너지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성도는 성도다워야 합니다. 물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성도가 얼마나 성도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환경에서 생기는 여러 염려가 마음을 먹구름처럼 채울 때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염려를 다스리는 그 모습을 보고 믿음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믿음의 사람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참된 향기를 풍기며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개인의 확신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으로 물질과 시간과 기도를 드림으로 우리의 중심과 관심과 삶의 목적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삶을 통해 밝히 증거합시다.
의식주에 관한 염려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나의 앞길을 예비하신다는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염려를 다스립시다. 염려를 믿음으로 다스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의에 우리의 마음, 물질, 시간, 에너지를 드립시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아왔으니 미래도 주님이 열어주실 것이라는 마음의 담대함과 도전하는 믿음을 가지고 한걸음씩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당대 뿐 아니라 우리 자손대대로 복을 주시며 그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성전건축이 주님의 일과 소원에 첫 자리를 두는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사랑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기쁨의 간증이 넘치는 성전건축이 되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살아있는 헌신을 감당합시다.
땅의 사람, 하늘의 사람
의 사람
땅에 쌓는 사람
입기 위해 사는 사람
먹기 위해 사는 사람
하늘의 사람
하늘에 쌓는 사람
사명 이루기 위해 입는 사람
사랑하기 위해 먹는 사람
땅의 사람
땅의 꿈꾸고
하늘의 사람
하나님 나라 꿈꾼다
땅의 사람
공중의 새 볼 때
자유로운 비행 감탄한다
하늘의 사람
공중의 새 볼 때
비상하는 날개주신 주님의 메시지 생각한다
땅의 사람
들의 백합화 볼 때
색깔과 향기에 취한다
하늘의 사람
들의 백합화 볼 때
주님의 사랑에 취한다
나 비록 땅에 두 발 딛고 살지만
늘 하늘 향해 고개 들고 사는
하늘의 사람
주님의 사람이고 싶어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또 한 가지
마 6:19-34 / 김영주 목사
지난주에는 영적 성장의 방해물 중 한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건 생활에서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더 풍성한 영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말씀 마6장19-34절에 나와있는 또 한가지의 방해물을 알아보기 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 성장의 방해물은 '물질적인 풍성함을 통해 안정'을 얻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보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물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물 하면 우선, 금, 은,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부터 생각하는데 이것들이 보물의 한 종류입니다만 모든 보물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들을 전혀 보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했습니다. 그분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 은, 보석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멩이가 보물이 될 수 없죠. 최영 장군 같은 분들은 보석이 아닌 다른 것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금, 은 보석은 보물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물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여 간직하려는 물건'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물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보물 갖지 않은 것을 보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터의 군인에게는 낡은 가족사진 한 장이 최고의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전거 한 대가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낡은 앨범이 보물이 되기도 하고, 오래된 유물이 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신앙 인은 자신의 보물은 성경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정확히 어떤 물건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보물로 여기는 마음'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먼저, 19절 보시겠습니다. 보물에 대한 첫 번째 말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19절을 통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땅에다 보물을 쌓는 것은 좋은 전략이 못된다! 왜냐하면 땅에는 쌓아봐야 결국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헛것입니까?
첫째 이유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좀이 먹을 수 있고, 녹이 낄수도 있고, 아니면 도둑이 와서 도적질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소리 없이 다가와 가져가는 것들입니다. 쌓는 사람이 없어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집니다. 잃어버립니다. 땅에 쌓는다고 쌓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몇 일전 이런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느 은행 여직원이 단말기를 조작해서 애인과 함께 18억이 넘는 은행돈을 빼갔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봅니다.
또 하나 땅에 쌓는 것의 위험이 본문에 나와있는데 땅의 것은 사람이 지키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좀은 해충입니다. 녹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도둑은 사람입니다. 10명이 지켜도 도둑 한 명 못 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 못 막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의 수준에서 해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맞서서 싸운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여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왜요? 20절, 거기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좀도, 동록도, 도둑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뺏기지 않으시고, 잃어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가장 믿을 만하고, 신용 있고, 든든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21절은 이렇게 해야할 세 번 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문제되는 예를 22-2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뜻 22-23절을 읽어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마치 동문서답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왜 갑자기 눈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까? 이것이 보물과 무슨 상관 있습니까? 사람의 눈은 마음을 따라 가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에 돈이 가득한 사람은 돈만 보면 눈이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좋은 차, 새로운 차들을 보면 역시 눈이 돌아갑니다. 옷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역시 좋은 옷 입은 사람 보면 눈이 돌아갑니다. 마음과 눈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땅의 것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됩니다. 땅 적인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보는 자의 시각이 왜곡되어 바로 보지 못합니다. 매사를 오도하게됩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요, 중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런데 땅에 쌓는 사람은 땅에만 마음이 가 땅의 시각으로만 보게됩니다. 그러면 눈이 어두워져서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세상살이가 엉망되고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축구 만해도 그렇습니다. 측면에서 보는 것하고 정면에서 보는 것하고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 옆에서 보면 분명이 골인 같은데 정면에서 보면 노골이란 말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놓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땅의 것에 대한 생각만 가득 차서 모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눈이 어두어 진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살다가 죽을 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살았는가를 알고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원리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눈이 밝아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으니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하늘만 생각하게 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눈이 밝아 제대로 보게됩니다.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서로의 요구가 상충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쌓는 것은 하나님 아닌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구절에서 '재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헬라어에서는 '맘몬'으로, 영어에서도 맘몬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맘몬은 재물의 신입니다. 그러니까 24절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우상--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가? 우상을 섬기는 가는 그가 재물을 어디에 쌓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어느 한가지의 지배만 받게 되어있습니다. 한쪽이 들어오면 다른 한쪽은 나가야 합니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면 우상은 떠나야합니다. 반대로 우상이 들어와 있으면 하나님이 떠나야 합니다.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땅에 보물을 쌓아놓으면 염려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 정신과 상담의 대부분은 염려과 불안의 문제입니다. 가졌다고 해서 결코 염려에서 자유하지 않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염려에서 자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염려가 떠나지 않을까요? 내가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벌었고, 내가 쌓았으니까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염려가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새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수고도 안 했어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도 보면 별로 염려 안 합니다. 갓난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무엇을 못합니다. 전적으로 타인의 공급에 의지해야 합니다. 아무런 능력도 대책도 없는데 염려는 안 합니다. 부모가 책임져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가 장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잠 못 자는 것 봤습니까?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들이 천국에서는 가장 큰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삶을 하늘에 쌓는 연습을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염려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새 한 마리도 전심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일진데 하물며 그분의 자녀들을 돌보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 27절은 또 하나 다른 것을 보물로 삼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본문을 읽어보시면, 염려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키 문제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키하고 염려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백합화 얘기가 나왔습니다. 키하고 백합화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질문을 바꿔보면 도움이 됩니다. 요즘 시대는 외모를 중요시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얼굴이요, 다음은 키입니다. 과거에는 키가 외모의 대표적인 요소였습니다. 사람들은 역시 외모에서 안정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름다운 옷으로, 큰 키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차라리 굶어죽을 지언 정, 외모가 흉한 것만큼은 못 견디겠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를 보물로 삼고 있습니다. 외모를 결정하는 요소는 크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키가 작다고 근심한다고 해서 키가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워지려는 시도는 영원히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의 백합화를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생기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사람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만 속에는 욕심과 거짓과 정욕과 질투가 불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이렇게 외적인 아름다움을 보물로 삼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것들 때문에 믿는 자들이 염려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적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왜 믿는 자들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세 구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6절,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기르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30절,"....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나님이 입히시니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32절,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비록 통장에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신자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을 알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 돌보시니까 자신들이 스스로를 돌봐야 합니다. 그러니 염려가 많죠.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모신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야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십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굶어죽기 딱 맞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먹는 것, 입는 것 다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십니다. 일 시키면서 아무것도주지 않는 사람들은 악덕 기업주입니다. 보통의 경우 일을 불러 시키면 값을 지불합니다. 점심을 사줍니다. 배고파서 일 못하면 안되니까요, 시원한 음료수도 제공합니다. 목말라서 일 못하면 안되니까요. 하나님은 '너는 열심히 일하라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혜택이 없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놀고 있는데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 제쳐두고) 내 일 하고 있는데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려면,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먼저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 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걱정하고 챙기느라고 바쁩니다. 그것 때문에 정작 해야할 하나님의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급들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이 약속을 믿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시간 많은 사람입니까? 시간 남으니까?
--돈 많은 사람입니까?
--모든 일이 잘 풀려 인생살이 걱정할 것 없는 사람입니까?
--힘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장래걱정 없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돈벌고, 배부르고, 시간 많으면 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헌금은 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 이해가 안됩니다.
--나는 시간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돈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진로가 불확실해서, 미래의 준비가 덜 돼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걱정거리가 많아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핑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는지 아십니까? 30절을 반대로 읽어보시면, 믿음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그렇게 멋지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나를 책임지지 않으시랴? 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하나님의 일 합니다.
--내 하나님은 절대 나를 궁핍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믿음 있는 사람!
--내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보다 더, 들의 백합화 보다 더, 하루살이 들 풀보다 더 아름답게 내게 입히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
--내가 주의일 하는 동안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고 믿는 사람--적어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악덕 기업주가 아닙니다. 공짜로 일시키지 않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이런 믿음 없으면 가다 돌아서고 가다 돌아서고 합니다. 앞날이 걱정 돼서 할 수 있어야죠? 이 사실을 믿기에 내일보다 더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남아서, 돈 많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1. 살 맛 나는 인생이 됩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언제 행복을 느끼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름대로 사명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그야말로 사는 맛납니다. 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의미를 찾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해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행복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살 맛 나는 것입니다. 재산을 많이 모아놓은 것은 아니지만 행복합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기쁨이 있습니다.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좋습니다.
2.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합니다.
33절에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고 했기에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풍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적과 놀라운 기도의 응답들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후원자를 한 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보다 더 크겠습니까?
3. 그의 장래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하십니다.
--34절에서 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 말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살기도 복잡한데 뭐 내일 일까지 걱정하느냐?
나중에 닥치면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의 일에 먼저 충성하면 내일이라는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을 충성 되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먼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십시오. 이것이 내일을 위한 최고의 전략입니다. 이것은 오죽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마태복음 6:19-34 / 김필곤목사
이번주 뉴스위크지에 "돈은 죽음보다 강하다? "라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돈은 피보다 진하고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고 합니다. 돈에 대해 이런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권력과 폭력, 즉 모든 정치의 진앙지가 돈이고 전쟁은 늘 돈 때문에 일어나고 언제나 돈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돈은 모든 것이고 돈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교회에서도 돈 이야기하면 긴장합니다. 시사저널을 보니 "핏발 선 한탕 심리 돈 독 오른 정선 카지노, 대박 찾다 쪽박 찬‘환자’들, 지자체, 판돈에 목숨 걸다, 아태재단 계좌 샅샅이 뒤져라." 등의 글이 실려있었습니다. 전국에 한탕주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액 당첨금을 건 복권과 인터넷 도박은 허황된 일확천금 욕망이 춤을 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은 어떻습니까?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들의 처참한 모습이 어느 지면을 보아도 널려있습니다.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 탐욕의 노예가 되면 세상을 더럽게 만들고 자신이 불행해 집니다. 인간 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탐욕은 일반적으로 남에게 속한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정의합니다. 어거스틴은 탐심을 설명하기를 '충족한 것보다 우리가 더욱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충분한 것을 가지고도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탐심은 '타바(tabah)'라는 말로 "악한 소유, 또는 불법적인 욕심"을 의미합니다. 이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서는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십계명을 범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죄가 탐욕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탐욕이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탐욕이 부모를 바로 공경하지 못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고, 간음하게 하고, 도적질하게 하고, 거짓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 탐심은 결국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를 무덤처럼 만들어 버리게 합니다. 자신의 건강과 인격을 파괴해 버립니다. 행복을 빼앗아가게 합니다. 유명한 문호 단테에 의하면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 지적했습니다. 돈에 탐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멸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청교도 에스겔 흡킨스는 이 탐욕이 어떻게 인간을 포로로 만드는가를 4단계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가 우리 안에 형태를 갖추기 전에 악한 생각 또는 죄의 싹이 움트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이러한 악한 생각을 채워줄 대상이 나타날 때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부패한 육욕적인 세력과 죄악으로 눈이 멀고 마지막 단계는 탐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멸망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탐욕의 포로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쌓다, 섬기다, 구하다"라는 문맥을 통하여 세가지 방법을 찾아 보기를 원합니다.
1.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어야 탐욕의 포로에서 해방될 수 있다(19-23).
1)돈을 땅에 쌓는데 초점을 두면 탐욕의 포로가 됩니다.
돈이라는 것이 죄일까요? 부자가 되는 것이 죄일까요?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을 막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돈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사용자에 따라 칼과 같이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 부자였습니다. 그들이 부자라는 한가지 이유로 정죄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한 형태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듯이 다 돈 잘 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탈라트입니다. 잘 개발하여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질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여름에 시원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좋은 차를 탈 수 있습니다. 질병에서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자식들로 부터도 대접을 받습니다. 여행을 다닐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좋은 옷도 입을 수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가 보장될 수 있습니다. 돈이 악입니까? 하나님이 돈이 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라는 말입니다. 탐욕을 가지는 것이 악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것에 집착하고 쌓아 놓는데 있는 것입니다. 땅에 쌓아 놓는 돈이라는 것은
(1) 불안정하고 유동적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둑이 도적질 해 갑니다.(19). 좀이라는 것은 옷에 기생하여 옷감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동록이라는 것은 금속을 부식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제물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람에 의해 빼앗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지극히 유동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금리가 떨어지면 주가가 폭락하면 금방 돈의 가치는 반으로 1/3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부동산 경기가 나빠져 나는 몇 억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금방 몇 천만원이 날라갑니다. 가족들이 여행하다 사고가 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날라가 버립니다.
(2)탐욕은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합니다. 눈을 흐리게 합니다.
돈으로 눈이 흐려지면 고칠 약이 없습니다.(21-23). 돈이 모든 것을 가려버립니다. 사람을 왜곡되게 봅니다. 세상을 흐리게 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2)돈을 하늘에 쌓아 놓는데 초점을 맞출 때 탐욕의 포로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늘에 쌓아 놓아야 합니다. 하늘에 쌓아 놓는 것은 20절에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늘에 쌓아 놓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은 탐욕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 사람을 구제 하기 위해 돈을 쌓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돈을 쌓아 놓는 사람, 교회를 건축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 돈을 쌓아 놓는 사람 결코 탐욕의 노예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돈버는 은사도 받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청부가 되어야 합니다. 왜요 하늘에 쌓아 놓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말입니다. 쌓은 목적이 세금을 많이 내기 위해, 직원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쌓는 것 다 하늘에 쌓아 놓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부자였다는 록펠러도 한 때는 탐욕의 사람이었습니다. 가혹하게 직원들을 부렸습니다. 한 번은 신문기자가 인터뷰하면서 "당신은 참 부자인데 당신이 축적한 이 모든 재물로 당신은 만족하십니까?"라고 했답니다. 그 때 록펠러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록펠러가 대답하기를 "조금만 더."라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쌓기에 급급한 그가 변하였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다 사기 당하고 빚독촉에 시달려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가난의 한 때문에 미국 석유 90%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고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등으로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더 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석유 부자가 되었고 질병에서 치유받아 인생이 변했습니다. 땅에 쌓는 인생인 아니라 하늘에 쌓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한 명문대학입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돈이기 때문에 대학 교회 어디에도 내가 돈을 내어 지은 대학이나 교회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런데 유독 이름을 남긴 교회가 한 곳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에 세워진 록펠러 처치입니다. 아내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아내를 천국에 보내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교회를 세우고 헌당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 경제부 기자가 록펠러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36년 동안 세계 제 일의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때 그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물려 주신 것은 십일조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나이 8살 때 이제 너 혼자 주일학교에 가라고 보내면서 손에 일주일 쓸 용돈 20센트를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좋아하는 아들에게 단호하게 그 중 2센트는 너의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것이야 하나님께 드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는 십일조만 관리하는 직원 40명을 별도로 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 망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에 쌓는 사람 결코 이 땅에서 망하지 않습니다. 성공의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땅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늘 나라도 있습니다. 하늘에 쌓아 놓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 때 돈이 축복이 되고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 후에 까지 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땅에 쌓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탐욕으로 연결되면 그 돈과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돈은 땅에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이상의 돈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데 써야 합니다.
2. 돈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섬겨야 탐욕의 포로에서 해방될 수 있다.(24-
1)돈을 섬기면 탐욕의 포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돈 아니면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자 택일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돈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탐욕이라는 호르몬으로 움직이는 제도요 체제입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물사관입니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공산주의 유물론은 돈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을 하고 한편 자본주의 유물론은 돈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했습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 쟈끄 엘룰(Jascque Ellul)은 '돈은 아무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라고 했습니다. 돈은 절대 군림자입니다. 돈 앞에 사족을 못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는 사람도, 아름다운 여성도 돈 앞에는 굴복하고 섬길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계는 돈의 권세 앞에 줄을 서게 됩니다. 예술도, 공부도 이제 이념보다는 돈 순서로 되어져 가는 경향합니다. 돈지 행복을 보장하고 미래를 보장하고 인생을 보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돈은 경건하게 생각합니다. 부부도 돈 말할 때는 다른 방으로 가서 속삭입니다. 돈의 세력을 무서워합니다. 심지어 돈 앞에서 교회마저 무릎을 꿇는 현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돈이 정신을 지배합니다. 가치관을 마음대로 주무릅니다. 칼 막스는 돈의 위력을 말합니다. '나는 못생긴 사람인데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못생긴 사람이 아니다' 돈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흐르는 돈은 인간 내면의 저수지에서 결코 넘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돈을 보물이라고 하고 맘몬이라고 하여 마치 하나님과 견주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보아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쌓고 기대고 섬기고 싶은 것이 인간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탐욕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재물이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고 편리하게 해줄 것이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돈이 나로 하여금 프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돈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돈의 위력을 보이기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돈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땅에 쌓아 논 돈이 내 평생에 나를 따르니니 내가 호화로운 집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 돈을 섬깁니다. 그러나 재물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것같지만 반드시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돈이 주인이 되어 있으면 돈의 속성상 탐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탐욕의 끝은 파멸이 오게 됩니다.
2)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탐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계서 우리를 주장하시면 우리는 탐욕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분이 누구십니까?(32)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누구십니까?(26)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든 탐욕의 노예는 되지 않습니다. 탐심의 노예가 되면 물질을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우리를 소유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탐심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참으로 부요해 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배부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가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한 시대 부자로 살았던 다윗이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 18:1-3)"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솔로몬은 돈을 쌓아 보았지만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40년 동안 입법 사법 행정을 손위 쥐고 각종 부귀 영화를 누려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 탐욕의 노예로부터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순회 집회를 하는 도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굉장히 부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테레사 수녀에게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테레사 수녀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그분이면 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면 족합니다."
3. 먹을 것 입을 것만 구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탐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31-34)
1)먹을 것 입을 것만 구하면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먹을 것 마시것 입을 것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머리 둘 곳도 없이 나물이나 먹고 물만 마시고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불교가 아닙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잘못된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그릇된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존재보다 소유에 집중된 인생을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소유형의 인간(having mode)과 존재형의 인간(being mode)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소유형의 인간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더 많은 것을 소유(to hav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존재형의 인간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존재(to b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소유보다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먹고 사는 것 문제 해결하려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다. 예수 안믿도 먹고 사는 것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식물들도 동물들도 기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부자되기 위한 목표로 위해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예외없이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지 않고 늘 먹고 마시는 것에만 집착하는 생활태도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불의를 행합니다. 그저 무엇을 하던 잘먹고 잘사면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탐욕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치 않고 스스로 염려와 근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신앙성장을 가로 막습니다. 여러가지 유혹과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아담과 하와의 탐욕, 아간의 탐욕,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탐욕 결국 비참하게 됩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성의 돈 재물의 탐욕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탐심 때문에 스승을 팔고 목 메달아 죽었습니다.
2)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탐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6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다 해결해 주었습니다. 좀더 질 좋은 삶이란 소유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삶은 소유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가 많다고 다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돈으로 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집을 지을 수는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살 수는 있지만 돈으로 식욕까지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돈으로 달콤한 잠까지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훌륭한 정치가였던 세네카는 "돈은 사실 그 누구도 부하게 만든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시면서, "사람의 사는 것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세계를 구합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거룩한 소원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더러운 물을 빼내려면 깨끗한 물을 계속 집어 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우리가 탐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려면 삶의 현장에서 우선 순위 문제가 명확해야 합니다. 돈과 하나님, 의로운 방법과 불의한 방법,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선택해야 할 현장에서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택함으로 설령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이 예견된다하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선택하여 망할 것 같아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는 선하게 살으면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하게 살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세상이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적 방법을 택하면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잘 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이 땅에서 회복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무기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실현될 때 다 같이 부자로 사는 가정 부자로 사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 행복하고 진정 삶의 질이 높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굶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다른 것은 보장해 주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미국 헐리우드(Holywood)에서는 배우들이 모여 조찬을 함께 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은 명사를 초청해서 간단한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한번은 절세 미인 한 사람이 주빈으로 초청됐다고 합니다. 그녀는 미국의 유명 주간지 "라이프(Life)에 의해 그 나라의 10대 미녀의 한 사람으로 뽑힌자로서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자였습니다. 그녀는 마이크 앞에 나아와 인사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습니다 :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나는 드디어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환호성이 오르고 휘파람 소리가 여기 저기서 나고 박수가 터지더니, 한 사람이 묻기를 : "아니, 그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가 누구란 말이요?"라고 하자 그 미모의 여인은 조용히 대답했답니다 : "나는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회중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자기는 헐리우드의 인기 배우직을 버리고, 자기의 나머지 생애를 예수님께 바치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녀는 어는 젊은 목사와 결혼한 후 선교지로 떠났습니다.그녀의 이름은 콜린 타운센드 에반스(Colleen Townsend Evans)였습니다. 한번은 빌리그래함 (Billy Graham) 목사가 런던에서 이들 부부와 조찬을 같이 하면서 물었답니다 : "콜린씨, 당신이 취한 그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 "나는 지금의 위치를 헐리우드의 가장 인기 있는 배우의 자리와도, 영국 여왕의 자리와도, 미합중국 대통령의 자리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은 놀라우시고 희안한 분이시니까요...." 탐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우리 주님 모시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하여 일평생 간구하면 사는 길입니다.
쌓기는 하나님의 나라에,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돈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될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구하는 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조금이나마 탐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물질생활
마 6:19-34 / 박조준목사
우리 인간이 평생을 두고 무시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극복하기도 어려운 가장 현실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물질생활입니다. 여기서 탁월하신 주님의 교룬을 생각흐고 오늘 저녁 기도하려고 합니다. 얼른 이 말씀을 읽어볼 때 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산상보훈을 읽어 내려오면서 깨달은 바이지마는 주님의 교훈 가운데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진 리가 종종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조용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주님의 말 씀이 진리인 것을 새삼 깨닫고 감격해 합니다. 오늘 저녁 읽은 말씀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은혜 가 되는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1 . 19 - 24, 땅의 재물과 하늘의 재물. 19절, 성경에서 말하는 땅이란 것은 신령한 것을 상대하는 현실이고 내세에 대한 현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현세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유로 현세에는 좀이 먹고 녹이 쓸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도둑질 하기 때문입니 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4 : 18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 하였 습니다. 주석자 클라아크는 하늘에 재물을 쌓아둔다는 것은 영영 가치를 멸하지 않는 돈과 바꾸는 것 이며 그렇게 하는 방법은 자선을 행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쌓아둔 물질은 얼마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아야 할 둘째 이유는 21 -23절에 재물이 있는 이 땅에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사물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하고 선악의 취사를 어기어서 실패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머슨이란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땅을 소유하면 그 땅도 그 사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만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사람 의 마음이 현세에 빠지면 물 속에 빠진 배와 같이 되고 맙니다. 배가 물이 없으면 물 밖에서는 배의 역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배가 물 속에 빠져도 역시 배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배가 배 의 구실을 하려면 물 위에 떠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물질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 다고 재물에 빠져도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전신의 기능이 마비됩니다. 그의 하는 모든 일은 결국 바른 길을 떠나 어두움에 헤맬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영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의 철인이었던 필로도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영에 있는 모양은 눈이 몸에 있는 것과 같다 고. 옛날 로마같은 데서는 아들을 가리켜 눈의 빛 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들에게 전 희망 을 두고 있던 사람이 그 아들이 죽으면 삶의 희망을 잃기 때문에 눈도 빛을 잃는다는 것을 말하였다 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은 눈의 빛을 아들에게 두는 사람 혹은 물질에게 두는 사람 혹은 권 력에 두는 사람 혹은 정욕과 향락에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될 때 결국 그의 전 생활은 어두워져서 자기도 아지 못하는 사이에 멸망의 길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고. 외경 토빗(Tobit) 편에는 영의 눈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은 아끼지 않고 구제하는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아야 할 세째 이유는 24절 즉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일 은 그때 노예 제도가 있는 당시에 어떤 인색 한 사람이 죽을 때 자기 노예를 절반만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는 매우 처신이 곤란하였다고 합니다. 가령 여기 나오는 섬긴다 는 동사는 라는 말인데 이것은 노예로서 섬긴 다는 뜻이고 재물 이란 명사 는 Aramic 에서 온 말로서 신뢰하는 자 라는 뜻이 있습니다. 브루스는 이 귀절을 주석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고 부를 가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께 신 실하고 재물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뜻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 해석은 매우 적절한 해석이라 생각합니 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맑은 계시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찾고 나 자신을 찾고 또 물질을 찾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신앙은 정당한 위치를 정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자 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내가 설 자리에 바로 서고 물질을 바른 위치를 놓고 쓸 줄 아는 것을 말합니 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두운 밤중에 길을 걷는 사람이 길을 잃어 버린 것과 같아서 물 질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을 물질시하고 자신을 물질의 노예로 보는 혼란에 빠지고마는 것입니다. 주인이란 일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은 그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의 주 인이 누구냐 하는 것은 묻기도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사실 가만히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생의 주인으로 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성의 타락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모 든 가치관이 변합니다. 전도됩니다. 가령 열왕기하 5 : 22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이 치유 받을 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요구한 것이나, 여호수아 7 : 21에, 아간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2백 세겔 금 덩이 50세겔을 취했다가 아이성 점령의 실패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1) 편견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 (2) 시기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명작 오셀로는 질투에서 빚어지는 비극을 엮은 것입니다. (3) 자만심은 우리의 눈을 이그러지게 합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해 볼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발전을 가져 올 수가 없습니다. 2 . 25 - 34 염려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 예수님의 다른 교훈에서도 발견하는 것처럼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하지 말라 는 소극적인 것과 하라 는 적극적인 교훈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라 는 것은 염려에 대한 것이고 하라 는 것은 신뢰에 대한 것입니다. 즉 염려는 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만도 염려 하지 말라는 말씀이 다섯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 다. 더구나 이 부분을 가리켜서 기독교 교육 학자들은 예수님의 실물교육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 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즉 동물과 식물의 실례로써 염려하지 말아야 할 근거 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흔히 만물의 영장이라 뽑내지만 물질에 대한 생활에 있어서는 동물과 식물이 오히려 사람보 다 훨씬 고상하고 청아한 것을 봅니다. 앞서 우리가 말한 것처럼 땅에 재물을 쌓으려는 데서 오는 염 려를 경계하고 하늘에 재물을 쌓기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먼저 그의 의를 추구하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 라는 뜻은 분열 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갈라 놓기 때 문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음식과 의복에 대한 염려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땅에 속한 욕망의 기본적이 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날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나고 죽을 때는 그 손을 편다. 생명에 들어설 때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그 생을 떠날 때는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만다 고 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염려하지 말라 교훈하시고 그 확증으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 말 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는 음식 문제, 들에 핀 백합화는 의복 문제에 관련된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남 자의 일과 여자의 일을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여하튼 타락하여 고통과 거기서 오는 염려에 잠긴 인간은 동물과 식물을 들어 교훈하시는데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와 꽃의 생활을 절찬하시면서 솔로몬의 영화 이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왕비가 70이 요 궁녀가 3백이라 하였던 솔로몬의 영화는 인간의 욕망의 절정으로서 인간이 주야로 염려하며 욕심 내며 빼앗고자 하여 될 수 있는 최후의 고개가 왕이며 그 왕 가운데도 솔로몬의 영화는 그 절정이었 지만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 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철저하고 아름 다운 교훈입니까? 27절의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구역에는 생명을 일각이나 더 하겠느냐? 하였는데 이 낱말 는 키로도 생명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여간 키를 자라게 하 는 것이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나 인간의 염려로 되는 것은 아니고 새를 먹이시고 꽃을 입히시는 하 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므로 그 하나님께 신뢰할 일이지 왜 너희는 헛되이 염려하느냐? 하는 것입니 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눈여겨 둘 것은 공중에 나는 새 들에 백합화 입니다.즉 나무 가지의 새, 길가에 뽑혀 있는 백합화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인간 편에서 해야 할 노력을 금하신 것이 아 니라 쓸데 없는 염려를 금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 새나 꽃은 염려할 줄 모르지만 공중을 날며 뿌리 를 땅에 박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하 나님이십니다. 제 4계명의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이레되는 날은 너희 하나 님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지니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것은 그리 스도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의 적극성은 하나님 아버지 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여기에 쓰여 진 동사는 깊이 생각하면서 바라보라 는 뜻입니다. 염려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같은 정서의 역활이 지만 내용과 결과에 있어서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전연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으로 유명해졌지만 만일 사람을 두 가지 종류로 말한다면 그 하나는 생각하는 사람 이요 다른 하나는 염려하는 사람 일 것입니다. 생각은 건설적이요 염려는 파괴 적입니다. 생각은 희망에 이끄나 염려는 결국 불행을 초래합니다. 여기 새와 꽃을 보라 하시는 것은 그들 자체의 생활을 풍부와 아름다움만을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새를 먹이시고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작은 보잘것 없는 존재에다 아낌없이 쏟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 람은 이 부분에서 부드러운 신관 (神觀)을 말하기도 합니다. 무서운 뇌성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 낀 구약의 신관과 비교해서 (출애굽기 20 : 18)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사실 부드러운 신관이기도 합니다(30 - 32).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산상보훈 전체의 결정을 이루는 탁월하신 교훈 입니다. 땅에 속한 물질적인 요구 이상을 하지 못하는 이방인을 본받지 말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요 구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앞세워 구하라고 명하시고 그때 모든 물질적 조건까지도 겸하 여 축복하겠다고 보장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교훈의 요점은 먼저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비단 신앙생활 뿐만이 아니고 일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성공의 열쇠를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공 (公)을 먼저 찾을 때 사 (私)의 창성이 따르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원리,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할 때 현세의 축복도 더하여 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의 의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진다면 누구인들 하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하나씩 하나씩 주어집니다. 여기 선택의 순서 가 문제이고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홀연히 희생할 각오가 확립될 때 두 가지가 함께 확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생명르 찾으려면 잃고 잃으려면 찾는 다 는 주님의 역리적인 교훈이 주는 깊은 뜻을 여기서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원을 달성시킬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구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음 이 강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를 구하는 염려는 없어질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최대의 교사 라고 하신 분이 있습니다만 들에 피어있는 한 송이의 백합화, 공중에 나는 새 하나를 통해 주신 교훈은 무진합니다. 이 교훈을 따라서 보고 생각한다면 우리 일상생활에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마 6:19-34 / 한경직목사
오늘 아침 이 시간은 우리 주님의 산상보훈 가운데서 몇 절 봉독(奉讀)했습니다.
제가 여기 六장 二十五-三十절의 이 말씀을 오래 준 학생 시절에 읽을 때에 자연히 팔레스틴의 맑고 푸른 하늘이 연상되고 따뜻한 햇빛 아래서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앉혀 놓고 공중에 날아가는 새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친히 보시면서 말씀해 주신 이 교훈을 생각할 때 이 교훈이 얼마나 시적이고 예술적이고 이상적인 교훈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곧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 같이 가난한 사람이야 어찌 이 교훈대로 살수가 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을 품으면서 읽었던 것입니다. 학생 시절이 지나간지 오래입니다. 어느 덧 청년 시절도 지나갔습니다. 아마 지금 장년기 중에서도 말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그 동안 一九四五년 八월 十五일도 당했고, 三八선을 넘어 보았고 六·二五 사변도 겪어 보았고, 一·四후퇴의 그 비장한 재차 후퇴를 경험해 보았고, 대구와 제주도와 부산으로 떠돌이 생활도 해 보았으며, 지금은 우리가 여기 돌아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서 제가 하나님 앞과 여러분 앞에서 간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성경 말씀을 과거의 체험에 비추어서 다시 읽을 때, 과연 이 말씀이 시적이고 예술적이고 이상적일뿐더러 얼마나 참되시고 사실적인 교훈인가, 내가 어찌해서 二十년 전, 三十년 전부터 이 말씀을 이대로 참되게 믿고, 이대로 꼭 사실대로 믿어오지 않았는가 하고 스스로 한탄하는 생각이 납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당하신 줄 압니다. 이북에서 대대로 좋은 기와집에 살면서 문전옥답을 앞에 두고 좋은 사업을 가지고 살다가 갑자기 공산당이 와서 세 시간 안으로 이 집에서 나가라고 숙청 당한 분도 이 가운데 여러분 계신 줄 압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가여 좋을까 하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한 줄 압니다.
여러분, 三八선을 넘고 또 설상가상으로 六·二五 사변 一·四후퇴 등 모든 어려움을 당한 줄 압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이 과거의 여러분들의 경험이 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어떤 교훈을 가르쳐 줍니까? 저는 여러분이 저와 같이 이야기할 때에 과연 우리가 숙청을 처음 당할 때나 三八선을 처음 넘을 때나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디를 가도 캄캄하여 근심하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두 생각해 보니 공연한 염려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시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우리의 과거 경험을 통하여 주님의 귀한 말씀을 한번 더 생각하여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자, 여기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너무 걱정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꽃까지도 간수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은 우리들이 염려함으로 우리들의 키 한 치를 더 크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염려해서 우리들의 일 한 가지 해결한 적이 있느냐는 뜻입니다.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염려함은 불신자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이제 우리들에게 염려 한하고 근심 안하고 평안히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없애버리고 더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안심하고 풍부해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들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 이 말씀 가운데 중요한 것은「먼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데 필요한 것이 많으니까 구하는 것도 많습니다. 여기에 구한다는 말은 꼭 기도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기도도 하고 노력도 하고 일도 하고 힘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힘쓸 것이 있고 먼저 탐구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공부하는 학생들은 잘 알 것입니다. 우리가 수학을 공부할 때 먼저 공식을 잘 암기하여야 합니다. 기하학을 공부할 때에 먼저 정리(定理)를 잘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학 공부할 때는 문법부터 잘하면 다른 것은 다 따라옵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세상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한 번만 옵니다. 우리 사람의 행로는 한번만 갑니다. 편도의 길이올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살 때에 한 번 와서 한 번만 사는 것입니다. 한번 사는 이 생활을 잃으면 아주 잃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사는 이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먼저 탐구하여야 풍부한 생활을 할 수 잇느냐?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몇 해 전에 히틀러는 여러 청년들과 국민들에게 하는 말이, 독일 사람이 살려고 할 것 같으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독일 민족인 아리안 종족이라고 하며 다른 종족을 다 없애고 자기 종족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을 나치즘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 민족 지상주의를 따르면서 나치스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민족은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자와 부르짖은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집니다. 이태리의 무솔리니는 일찍이 일어나서 이태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옛날 한 번 없어진 로마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가가 지상이라고 하며 이태리 인들은 먼저 국가를 구하자고 외쳤습니다. 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그 부름을 따라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가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 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집니다.
칼 마르크스, 스탈린, 레닌, 이런 사람들이 일어나서 여러 대중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이,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먹는 것 곧 빵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며 떡이 제일 귀하다고 한 마귀의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떡만 먼저 구하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우리는 머지 않아 볼 것입니다. 과학이 귀합니다. 과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먼저 구한다면, 우리에게 혜택을 못 가져옵니다. 지식과 예술도 그러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먼저 구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할 것이 하나 있는데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으나 얼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것 같으면 이론도 많겠으나 평범히 간단하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면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에 나라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정을 온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입니다. 그러나 이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해서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는 완전히 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곳은 하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영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 불완전하게나마 나타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꼭 같을 수는 없으나, 불완전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보이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뜻은 첫째는 이와 같은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다 예배당에 와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왔다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제 말했습니다. 꼭 같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회개의 좁은 문을 들어가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이 가운데 대부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셨기를 바랍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먼저 여러분이 회개하고 거듭 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법률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법을 준행(遵行)하여야 합니다. 미국 사람은 미국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 하나님 나라의 법률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 의를 구하라 함은 그런 뜻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율법입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요, 내가 옳게 보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옳게 보는 천하의 공도(公道)인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우리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면, 하나님의 의대로 개인 생활이나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의를 간구(懇求)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서 그 의대로 살뿐더러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 하나님 나라를 확보하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도하여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개인 생활과 가정 생활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에서도 실행되기 위해 힘써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적 사명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한다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야 하겠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되겠고 하나님 나라를 확보하기 위한 저도 사업과 사회적 사명을 우리가 준행하여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학생이라 한다면 학생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찼을까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론 회개하지 않았으면 회개하여야 할 줄 압니다. 회개한 사람으로 가령 내가 소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를 간다고 하면, 상급 학교에 갈 때 제일 먼저 표준 삼을 것은 어느 학교에 가야 하나님의 의에 맞겠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는 여러 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재주를 주었는데 내가 어떤 과 에 들어가랴 하나님 나라의 확보가 그 의를 구하는 데 제일 필요하겠는가를 결정합니다 그 표준으로 과(科)를 작정하여야 됩니다. 또 졸업한 다음에는 내가 어떤 직장에 가야 될까 를 생각하면서 단순히 내가 돈을 많이 받겠다는 이 표준보다도 내가 어느 곳에 가야 제일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하고 우리 사회에서 의를 행할 수 있는 그런 자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공무원이면 공무원으로서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가 하는 표준아래서 국가의 책임을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내가 사업가라면 사업을 선택하고 사업을 실행하고 사업에서 이익을 얻어서 이익을 배당하는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는 내 시간을 쓸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이 제일 귀한 줄 압니다. 한 구간의 첫 날 주님의 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제일 귀한 줄 압니다. 一년에 한 번씩 하는 사경 회도 놓치지 마십시오, 제일 귀한 알인 줄 압니다. 결혼할 때나 친구를 사귈 때나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약하시기를, 이렇게 우리가 모든 생활 부면(部面)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찾으면, 우리가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는 것은, 비록 가나하다고 하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세워서 그대로 꼭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경제 문제도 무난히 해결될 줄 압니다. 통일도 될 줄 압니다.
우리가 무엇을 찾을 때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찾아야 한다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찾고, 둘째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찾고, 셋째 자신을 생각하라.
그러나 우리가 보통 흔히 이와는 반대로 찾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유익을 찾고 제일 마지막에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일이 바로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점원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사업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그 다음에 다른 순서가 와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너무 유명해서 제가 반복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하지만 너무 적절하니까 말합니다. 전에 있던 일이라고 하는데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한 번은 미국 대사를 만나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이 단신의 소장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도 찾았을 뿐더러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하는 말이 그러나 우리 아르헨티나 경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이 금을 찾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르헨티나 이주해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 교우, 사랑하시는 동포 여러분, 특별히 이북에서 피난 오신 여러 동포들,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의 고향을 내버리고 재산을 다 버리고 三八선을 넘어서 이 곳에 왔습니까? 그러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지금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한다고 하면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모든 다른 축복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눈
마 6:22-23, 눅 10:21-24 / 최종원 목사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2-23)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1-24)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것을 소유한다면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가장 아름다운 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올바른 눈을 가지고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고, 맛본다, 만져본다, 들어본다는 말처럼 보는 것과 연관시켜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은 이 눈만 좋으면 무엇이든지 볼 수 있는 줄로 생각하는데, 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 여러분은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기나 전파 하나도 볼 수 없는 눈을 가지고 하나님까지 보여 달라고 덤비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육안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안 즉 정신적인 눈이 있고 영안 즉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육안(肉眼)으로는 물질세계와 사물을 볼 수 있지만, 지안(智眼)으로는 지적인 세계를 볼 수 있고, 영안(靈眼)으로는 하나님과 영의 세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가장다운 눈이란 어떤 눈입니까?
1. 멀리 보는 눈이어야 합니다.
복된 눈은 멀리 볼 줄 아는 눈입니다. 눈앞의 것만 보고 무슨 일을 결단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9절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멀리 볼 줄 모르는 근시안은 어떤 의미에서 소경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치는 그만큼 우리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원시안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도요죠 히데끼는 멀리 볼 줄 몰랐기 때문에 잠자는 사자 같은 미국까지 침공하면서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멀리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남보다 지혜롭게 성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간은 금 덩어리와 은 덩어리와 시날산의 고급 외투만 보았지 먼 훗날과 죄의 댓가가 얼마나 크게 오는 지를 내다보지 못했기 때들에 자기의 사랑하는 처자식까지 돌에 맞아 죽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에덴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는 근시안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멀리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교회 주변이 좀 불편한 점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주변이 주거지역으로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도시계획도 세워지고 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목사님 교회가 앞으로 좋은 여건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교회가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우리교회도 주변이 좋아지고 그러면 정말 좋은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근시안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긴 안목을 가지고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미래를 향하여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롯이 둘러보니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요단 들녘에는 물이 매우 넉넉하였습니다. 이때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기 때문에 요단 들녘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매우 기름져 보였고 또 애굽 땅과 같이 비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롯은 이러한 요단 들녘에 마음이 끌려 요단 들녘을 차지하기로 하고 동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이렇게 해서 헤어져 살게 되었습니다."(창13:10-11)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그냥 머물러 살았으나 롯은 요단 들녘에 있는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다가 소돔 가까이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서로 헤어져 살게 된 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습니다. '아브람아,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아라. 네가 지금 둘러보고 있는 땅을 내가 모두 너와 너희 후손에게 주겠다. 앞으로 영원토록 이 땅이 너희의 차지가 될 것이다.(창13:14-15)
하나님은 또 내가 네 후손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땅의 티끌만큼이나 많게 할 것이다. 사람이 땅의 티끌을 모두 셀 수 있다면 네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불어나게 하겠다. 그리고 온 땅을 사방으로 왔다갔다 해보아라. 내가 그 땅을 모두 네게 주겠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식솔들을 이끌고 치고 살았던 천막을 거두어 가지고 헤브론에 있는 상수리나무 숲 부근으로 옮겨 자리잡았습니다 그 상수리나무 숲은 마므레라고 부르는 숲이었다. 아브람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하나님을 믿고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 내세를 보는 눈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눈은, 영의 눈이 열려 물질세계와 썩어질 육신만 보지 않고 영적인 실재 즉 하나님과 마귀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오스트렉리아의 어느 잡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는데, 그의 영혼이 금방 육체 밖으로 나오는 체험을 하였답니다. 차 밑에 있는 그의 시체를 교통순경이 끌어내어 차에 싣고 법원으로 가는데, 그의 영혼이 같이 가면서 자기가 여기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더랍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그의 영혼이 다시 자기 육신으로 들어가 살아나게 되어 체험담을 적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부인은 해산하다가 죽었는데,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가 죽었다고 슬퍼하더랍니다 그녀의 영혼이 아무리 위로를 하려고 해도 도무지 모르더랍니다. 그 후 그녀의 영혼은 천사에게 이끌려 하늘나라에 가서 그 찬란한 천국의 아름다움을 구경하다가, 어린 아기 두고 온 것이 너무나 안타까와서 천사에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지만 집에 어린 아기를 두고 왔으니 날 좀 세상에 다시 보내달라"고 애원했더니 보내줘서,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를 놓고 장례식 하려고 준비하던 찰나에 그녀의 영혼이 육체에 들어가 살아난 후 체험담을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계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도, 악령도, 사람의 영혼도 믿지 않습니다. 물질세계만 볼 줄 알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가장 아름다운 눈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눈은 가시적인 현세만 보지 않고 영원한 내세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어린 아기가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태어날 때, 우는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100년 미만 되는 육신의 생명과 물질적인 이 세상만 보고 영원한 내세가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요(재림이 늦어진다면),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어서 죄 사함 받지 못하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게 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내세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물질적인 세계와 썩어질 육신의 쾌락에만 도취되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았지만, 나사로는 비록 몸에 헌데를 앓으며 부잣집 대문간에서 얻어먹고 살았으나 내세를 바라고 천국을 준비하며 살다가 영생 복락을 누린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눅 16:19-31).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나는 어차피 이곳에 왔지만 내 집에 다섯 형제가 있는데 나사로를 우리 집에 보내서 그들에게 증거하여 그들이 나 있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아브라함에게 애원했으나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현세만 보고 내세를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비참한 인생이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내세가 있는 것입니다.
3.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집시다.
① 거듭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육신이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5-6). 영으로 중생한 사람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 같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시 태어난 사람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8).
어떻게 거듭납니까?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한 그 순간부터 구원받으며 차츰차츰 영의 눈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요 1:12, 3:16, 롬 10:10).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 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②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보는 것 같이 영의 세계를 보려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영의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영의 눈도 점점 더 밝아집니다. 그리고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보고, 현세만 아니라 내세까지 보게 되며, 말로 표현은 할 수 없지만 만져본 것 이상으로 깨닫고 알게 됩니다.
③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영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얀 수염이 달리고 백발이 휘날리는 것 같은, 그런 모양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깨끗해지고 높은 수준에 올라갈수록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시고 어떤 것을 미워하시는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단순한 눈'(single eye)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의 목표와 대상(one object)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 다른 것을 믿거나 의지하는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뜻이요, ㉯명확하다(clear) 는 뜻입니다. 곧 목표를 명확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외식과 위선이 없다는 뜻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이중인격자나 위선자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단순하고 깨끗하고 거짓과 위선이 없어야 그만큼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볼 것을 바로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더욱 영의 세계는 직관적(intuitional)이고 영감적(inspirational)이고 묵시적(rove-lational) 이기 때문에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겉만 보고 결단을 내리고 섣불리 일을 하다가는 언제나 마귀에게 속고 실패하기 쉽습니다.
양봉하는 사람은 아카시아나무와 메밀꽃을 볼 때 겉을 보는 동시에 그 속에 꿀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를 봅니다. 이와 같이 보이는 대로 행치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속을 보는 눈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했습니다. 겉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속을 보는 눈을 가집시다.
④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뒤에, 곧이어 이 눈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이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경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릴수록 마음 눈의 비늘이 벗겨지며 밝아집니다.
탐심이 가득한 마음은 볼 것을 바로 볼 수 없으며 가치판단이나 선악의 판단을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땅에 쌓아둔 재물을 향할 때 그 마음은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외경 토빗편 4장 7절에 "영의 눈을 건전히 하는 법은 후하게 구제하는 것이라"란 말도 있습니다. 탐심이 생길 때 사기꾼에게 속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쪼록 당장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영계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과 눈
마 6:22-24 / 김홍도목사
본문 말씀에 의해서 "인생의 눈"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보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없든지 귀가 없든지 둘 중의 하나 를 택하라고 하면 차라리 귀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라디오를 듣는 것보다 TV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또 우리는 "맛을 본다" "만져 본다" "맡아 본다" "들어 본다" 이렇게 무슨 말에 "본다"는 말을 많이 붙여 씁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기를 잘해야 인생을 바로 살고 성공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눈이 인생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흔히 눈은 육신의 눈만 눈인줄 아는데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육신의 눈"이 있고 "정신(혼)의 눈"이 있고 "영의 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원자나 양자, 전자, 핵, 전기 등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정신의 눈으로 계산하고 따져 보아야만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가까운데 있는 것은 보이지만 멀리 있는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겉에 있는 것은 볼 수 있으나 속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볼 수 있으나 영적인 실재는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보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보여 달라고 하는데 육신의 눈은 부정확합니다. 똑바른 젓가락을 맑은 물그릇에다 집어 넣고 보십시오. 똑바른 것이지만 구부러져 보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히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은 그대로 있고 지구가 돈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의 눈을 가지고 다 보는 줄 알았다가는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줄 알아야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보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입니까?
근시안을 가지고 가까운 것만 보고 멀리 볼 줄 모르면 인생을 바로 살 수 없고 성공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치(鎖國政治)는 멀리내다 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로 인해 우리나라가 발전이 더디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도오죠 히데끼가 강대국인 미국을 바로 보았다면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마음을 못 먹었을 것입니다.
바둑도 몇 수 앞을 멀리 바라보는 사람이 바둑을 잘 둡니다. 인생을 사는데도 멀리 바라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은 보이지만 속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빛만 좋았지 맛이 없다는 말입니다. 독사의 알이 예쁘고 좋아 보이지만, 그것을 까보면 무서운 독사가 나옵니다. 이렇게 겉만 보았다가는 큰 실패를 당하고 맙니다.
믿음이 좋다는 처녀 총각들이 결혼할 때가 되어 중매를 좀 해보면 처음엔 "난 믿음이 좋으면 돼요" 하고들 말합니다. 그러다가도 막상 마주 대하고 나면 "에이 인물이… 그래서요…" 그러면서 인물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를 안 믿고 죄악이 가득해도 인물만 잘 생겼으면 "괜찮아요, 시집가서 믿게 하지요" 하면서 육신을 보려고 하지 속 사람을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속을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3. 긍정적인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눈으로 안 될 것만 보고 불가능한 것만 보는 사람은 성공적인 사람이 못 됩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5천명이 넘는 많은 무리를 먹이라고 할 때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 안 될 것만 생각 했습니다. "이 곳은 빈들입니다." "해는 저물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 가지고도 모자랍니다" "인가도 멉니다" 하고 안 될 것만 따졌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여도 예수님 의 능력을 믿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올 때에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가데스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탐꾼 열두 명을 보냈을 때 열명은 돌아와서 보고 하기를 "그 아낙 자손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세어서 우리는 그 앞에서 메뚜기 새끼와 같습니다. 그리고 성벽은 얼마나 단단한지 금성철벽(金城鐵壁)입니다. 절대로 못들어 갑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어서 들어갑시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본 여호수아, 갈렙만이 들어갔고 그 외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안 될 것만 보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직관적이고 영감적이고 묵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혼적인 것은 이론적이고 계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적이고 계산적인 것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영감적이고 직관적이고 묵시적인 긍정적인 것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4. 영적인 실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눈이나 지식의 눈을 가지고는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도 볼 수가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만 이 영적인 실재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났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의 영혼이 금방 뛰쳐 나와서는 차 밑에 있는 자기 시체를 교통순경이 와서 정리 하고 그 시체를 싣고 병원에 가서 죽었다고, 흰보자기를 덮어 씌우는 것을 다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다시 영혼이 들어와 살아났다는 간증을 하는 내용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해산시에 아기를 낳다 죽었는데 사람들이 자기가 죽었다고 슬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에 가서 천사에 이끌려 천국의 아름다움을 보며 구경하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세계지 만 이 세상에서 어린 자녀들을 두고 온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지만 집에 어린 자녀를 두고 왔으니 날좀 다시 살려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더니 천사가 다시 내려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죽어서 장사지내려 했던 그 시체 속에 영혼이 다시 들어와 살아났다는 실제로 간증하는 기사 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성령도 악령도 사람의 영혼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만 볼 줄 알았 지 내세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못 봅니다. 믿음으로 중생한 사람, 믿음의 눈, 영의 눈이 뜨여진 사람만이 영적인 실재를 믿을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볼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만 볼 줄 알았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이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 줄만 알았지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볼 줄 몰랐습니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이 고달파도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영생복락을 누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만을 볼 줄만 알고 내세를 볼 줄 모릅니다 보려면 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눈만 가지고 있으면 못봅니다. 거기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세계를 보려고 하면 믿음의 눈이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엔 빛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영의 세계 를 깨달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5. 장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함께 살다 헤어지게 되었을 때 롯은 푸른 풀밭만 보았지 소돔성의 죄악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 비참한 운명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리석 어 보이고 바보같이 보였지만 그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래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이성에 쳐들어 갈 때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집 속에 들어가서 큰 금덩어리와 은덩어리, 시날산의 좋은 외투 한 벌을 보았습니다. 그는 "덩어리 은덩어리 외투만 보았지 그것을 가진 후에 죄값으로 돌탕에 맞아 자기뿐 아니라 사랑하는 처자식이 돌 무덤 속에 장사지내게 될 장래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 오고야 말았습니다.
마귀는 멀리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장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현재의 말초신경만 자극하면서 달콤한 것만 좋아하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장래에 몇 백배 몇 천배 쓰디쓴 맛을 보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술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에는 쓴 맛을 보게 하지만 나중에 영원히 단맛을 보게 하고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불학무식한 어부였지만 장차 훌륭한 제자가 되어서 사람낚는 어부가 될 것을 알고 베드로를 택하셨습니다. 창녀요, 더러운 일곱 귀신이 들어간 여자였지만 장차 충성된 성도가 될 것을 알고 막달라 마리아를 택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탐관오리라고 개, 돼지 취급하는 삭개오였지만 훌륭한 성도가 되고 구원받을 가정이 될 것을 알고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겠다" 하고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미래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운명이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래를 볼 줄 모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오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 잠잘 때 자지 않고 노력하고 땀흘리고, 남이 나가 뛰어 놀 때 놀지 않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제멋대로 기분 좋게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현재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엔 눈물을 뿌리고 쓰라린 맛을 보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앞부분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저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태 6:19, 20) 하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 물질만 사랑하고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영안이 밝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 하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내가 못 먹고 못 입고도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알고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 보고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입견이나 교만 증오심을 버려야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선입 견은 마치 색안경과 같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는 것처 럼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유교 사상이나 자기 나름의 어떤 철학 사상이 들어 박혀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보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보기 위하여 선입견 도 교만과 증오심도 버려야 합니다.
[②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 학위를 열개 가졌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바 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죄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아무 리 똑똑해도 아무리 일류 학교를 나왔어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믿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게 될 때에 영의 눈이 밝아져서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③ 바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데 올라가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맑은 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시내를 멀리까지 다 볼 수 있는 것 같이, 심령이 맑고 죄악의 구름과 판개가 다 벗겨져 나가야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는 것을 멀리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④ 성령충만 받고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안 나타 났지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는 것 같이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8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19:18에도 보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 버는 눈은 밝은데 영의 눈은 깜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보고 살고 있습니까? 인생관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근시안을 가지지 말고 멀리 멀리 보는 눈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볼 줄 알아야 되겠 습니다.
부정적인 면을 보지 말고 긍정적인 면을 보는 눈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물질과 육신만 보지 말고 영적인 실재를 보는 눈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현재만 보지 말고 장래를 볼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크리스챤의 기본
마 6:22-24 / 강용규목사
우리가 잘 아는 두 가지 성경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라고 말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을 때만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배드리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고로 나는 크리스챤이다”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절대로 크리스챤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크리스챤의 기본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0년은 우리가 이런 기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크리스챤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처럼 세리 마태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나 마태를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무식하고, 성격이 급하고, 갈릴리 시골 사람이라는 것 밖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복음을 자신 있게 선포한 위대한 사도입니다. 세리마태도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자신의 동족을 속여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매국노 같은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적인 평가를 하게 되면 저평가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절대적인 평가를 받게 되어 모두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절대평가 속에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크리스챤입니다.
절대평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장점만을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잘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열등감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평가 속에 오늘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입니다.
오늘 또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느냐 하면 밝은 눈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밝은 눈을 가져야 됩니다. 영적인 눈,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갖게 되면 하늘을 나는 제비를 보면서 ‘저 값싼 제비도 하나님께서 저렇게 먹이시고 지켜주시는데 하물며 나일까 보냐’ 우리가 영적인 눈을 갖게 되면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 “오늘 폈다가 내일 지는 저 꽃도 하나님께서 저렇게 입히시건만 오늘 하나님의 딸인 나를, 아들인 나를 입히시지 않으랴” 이런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맑은 눈이고 이것이 영적인 눈입니다. 이런 눈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이 뜨인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중요합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새벽마다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윗도 일마다 때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쉬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날마다 기도생활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은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배려와 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배려와 희생적인 사랑은 필요도 없고, 절대로 배울 수도 없습니다.
함께 산을 오르면서 손을 잡아 주고, 냇물을 함께 도와 건너는 속에서 산 정상을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배우는 교회 공동체는 결코 혼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헌신과 희생을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로 나타낼 때 우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람처럼 헌신과 희생이 없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환난이 오면 그냥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께서 택한 존귀한 아들, 딸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을 새롭게
마 6:22-32 / 곽선희목사
한국은 금년에 월드컵 축구경기로 인해서 축구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관심을 여기에 모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축구 황제라고 불리워지는 '펠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1300골 가까운 득점을 올린 명실공히 축구왕이었습니다. '펠레, 나의 인생과 아름다운 경기'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원작명은 '펠레'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는 열다섯살에 프로 축구팀에 스카웃 되어가지고 축구와 함께 한평생을 삽니다. 양말로 둥글게 말아서 만든 공을 맨발로 차야 했던 가난한 시절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 축구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치료할 수 없는 근시였습니다.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나쁜 눈을 가지고 축구선수가 어찌 통산 1,300골을 득점할 수 있는 축구왕이 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근시 때문에 지장 받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내게는 말초적 감각, 즉 감각적 시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에 넘칠 때 공이 크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이 골프 치는 사람들, 어느 날은 성적이 좋고 어느 날은 나쁘고 그럽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골프공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작게 보이는 날이 있습니다. 또, 활을 쏘는 사람들도 과녁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과녁이 작게 보이는 날이 있어요. 그것은 내 심리적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근시라고 하는 핸디캡을 그는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적 시각, 정신력이 말해주는 감각적 시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손문의 '삼민주의'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생을 세종류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선지선각자입니다. 언제나 먼저 생각하고 먼저 알고 먼저 깨닫는, 그리고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후지후각자입니다. 꼭 경험을 한 다음에야 생각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부지부각자입니다. 경험하기 전에도 모르고, 경험한 다음에도 모르고. 어차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세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이 뭡니까? 역시 보는 것도 경험은 경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촉이라고 하는, 이 만진다는 경험보다 먼저 오는 것이 본다고 하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손에 닿기 전에 먼저 물체를 봅니다. 문제는 사고가 나기 전에 먼저 앞에 있는 것을 봅니다. 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경험 중에 가장 앞서 있는 경험입니다. 어쩌면, 우리 육체적 경험보다 앞서있는 것이 '시력'이요 본다고 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눈을 '아인'이라고 합니다. 이 '아인'이라고 하는 말은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샘'이라는 말이요 '원천'이라고 하는 뜻도 됩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본다고 하는 것이 우리 생각과 우리 모든 경험의 또 혹은 지혜의 샘이요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죠. '얼마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거든요. 그런고로 원천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랬습니다. 눈이 밝아야 한다고. 그 눈이 어두우면 그 생활 전부가 얼마나 어둡겠느냐. 눈이 밝아야 한다. 밝히 보고 밝게 깨닫고 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흐린 눈이 있습니다. 혹은, 나쁜 눈도 있습니다. 그럼 왜 어두워 졌느냐? 무엇엔가 씌웠지요. 무엇엔가 씌웠고 가리워져서 그 앞에 있는 것을 못 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너무나 유감된 얘기입니다만은 성경에 나오는 가롯유다라는 사람,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 많은 기적을 보았고 그 많은 능력을 함께 했고 그 많은 귀한 말씀을 다 들었건만 어쩌면 이 사람이 예수를 은 30을 받고 판다는 말입니까? 돈에 대한 욕심, 무엇인가 또 다른 욕심이 있었기에 그 많은 말씀을 듣고도 깨달음이 없고 그 많은 이적을 보고도 그는 무지 무각이요. 본 것도 깨달은 것도 없어요. 눈에는 돈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를 팔면 은 30이 될 것이라고, 예수를 은 30짜리로 보았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눈이 어두웠다는 말입니다. 돈에 눈먼 사람,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할 때, 제자들이 배를 먼저 타고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풍랑 때문에 시달리는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저들이 풍랑 속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멀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럽니다. 전 그 말이 너무너무 마음에 아파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다니, 이 사람들이 이게 정신이 있나?' 하지만 도대체 물 위로 걸어온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까, 또 그럴 수도 없고, 또 자기들이 너무 두려우니까, 지금 죽을 지경이니까, 또 혼비백산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죠. 어쨌든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메여있는 사람들,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밝은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곧은 것을 곧게 보지 못합니다. 환하게 열린 길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그런 기막힌 처절한 형편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리스 컬리(Iris V. Cully) 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Education for Spiritual Growth'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특징을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왜 평안이 없을까? 먼저는 불안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불안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불안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도 또 빗나가고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소유'를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어요. 돈을 많이 가지고, 은행에 돈을 많이 가지고, 땅을 많이 가지고, 집을 많이 가지고,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뭔가 이 많은 것을 가지면, 이 소유에 의해서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또 하나의 착각이에요. 많이 가질수록 점점 더 불안해요. 그런가 하면 알게 모르게 적개심의 노예가 되었어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어요. 그 동안은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눈이 흐려집니다. 도대체가 모든 사람들이 나를 공평하게 나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불만이 있어요. 그래서는 어딘가 모르게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요. 혹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있는 동안 절대로 밝은 세상을 볼 수가 없어요. 여러분 미워하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볼 수 있는 사람 보았습니까? 문제는 사랑밖에는 없어요. 사랑하고야만 세상을 밝게 볼 수 있는데, 어느 사이에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고 있어요. 혹은 섭섭한 마음으로, 이것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어요. 또 한가지는 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 불안과 적개심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힘밖에 없다. 권력이다, 힘이다. 글쎄올시다. 결국은 힘이 우리의 마음을 또 한번 어둡게 하고 있어요. 오직 겸손만이 밝은 시각을 가지게 하는 것인데 어느 사이에 힘에 의존하면서 교만해집니다. 점점 더 마음 눈이 어두워지고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어리석고, 너무너무 어리석을 정도로 눈이 어두워지고 만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어두워진 눈을 말합니다. 나쁜 눈. 그것은 편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만 보는 것이에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를 못해요. 새는 보는데,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못 봐요. 넓은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솜씨를 보지 못하느냐 참으로 미련한 것이에요.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한다는 것. 이 편시가 마음과 눈을 세상을 다 어둡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Diplopia' 입니다. 복시올시다. Overlap이, 겹치고 포개서 보는 거예요. 두 마음으로. 둘이 하나로 보이고, 하나가 둘로 보여요.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오버랩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가지를 한꺼번에 보려고 하니까 다 못보고 마는 것이죠.
최인호씨의 베스트셀러 '상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새 연속극으로도 나오는 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임상옥 이라는 사람은 아주 천한 신분의 참으로 어렵고 고달픈 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장사를 배웁니다. 마침내 큰 거부가 되는데 그 상도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벌러 다니는 장사꾼이지만 이익보다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는 것이에요.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요. 돈은 잃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죠. 현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고 말합니다. 강자는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스스로 만족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장사꾼이에요. 어디까지나 돈을 따라다니는 사람이에요.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과 인간을 볼 줄 아는 그런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그렇게 살았어요.
오늘 성경말씀에는 '눈이 성하면' 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성하다.' 아플로스 라고 하는 말은 싱글 홀드(Single hold)를 말합니다. 잘 조정된, 초점이 맞추어진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시력일 뿐만 아니라 단순하게 순수해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가끔 여러분, 해외에 나가서 사진을 찍어옵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여행 중에 카메라에 특별한 기술이 없다고 하니까 그냥 오토매틱, 자동으로 찍는 걸 가지고 가서 열심히 찍어왔어요. 찍어다 놓고는 척 보더니 "이거 왜 경치가 안나왔니?" 그런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카메라를 손에 들려면 카메라를 좀 공부를 해야지요. 이 공부 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갔는데 이 '자동카메라'라고 하는 것은 초점을 가운데에다가 맞추게 되어있거든요. 요거 초점이 하나예요. 한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딱 맞추면은 그것은 틀림없이 깨끗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두사람을 세워놓고 가운데다 찍으면 초점이 가운데로 지나가 버리거든. 그러면 또 사람도 희미하게 나올 뿐만 아니라, 사람을 세워놓고 사람에다 맞추면 뒤에 경치가 나오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 카메라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동카메라를 안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초점이 맞아야 되는 거예요.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소용없고 아무런 경치도 담을 수가 없어요. 초점이 중요하죠.
요한복음 9장 25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큰 능력을 얻어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까 시비가 많아요. '당신을 눈뜨게 한 사람이 누구냐?' '네가 눈뜬 날이 안식일이 아니냐?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이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했겠느냐? 안식일을 범한 것 보니까 너 눈뜨게 한사람은 죄인이다.' 뭐 시비가 많아요. 복잡해요. 그때 이 사람은 요한복음 9장 25절에서 아주 명답을 합니다. '거 복잡하게 묻지 마라. 내가 아는 것은 장님으로 눈 떴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것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눈떴다. 예수로 말미암아 눈떴다. 이것 뿐이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 모든 비방을 물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초점을 맞추세요. 'double focus'는 불가능해요. 'single focus'초점을 분명 맞춰야 되요. 그런데 말입니다, 난시라고 하는 게 있어요. Astigmatism이라고 하는 이 난시라고 하는 것은 캠블 모건(Cambell Morgan) 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광선이 눈의 안막 초점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되어진 눈의 구조적 결함'을 말합니다. 눈이 잘못됐어요. 구조적으로 잘 못됐어요. 그래서 빛이 안막에 똑바로 들어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무엇인가가 내가 주님을 똑바로 보도록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내 눈이 아무리 깨끗하고 밝아도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그래서 카메라에서는 초점문제와 빛 조리개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빛이 문제예요.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눈이라도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향하여 눈을 뜨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비춰야 됩니다. 말씀이 눈을 뜨게 하고 그리고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이 감화감동할 때 사물을 밝게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세상이 달라지길 원하십니까? 그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눈이, 내 시각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 바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 교인 가운데 이런 여 집사님이 계세요. 제가 어디가나 자랑을 합니다. 이런 교인이 있다는 걸……. 예수 믿은 지 참 오래됐고 집사님인데도 언제가 은혜를 받았대요. 은혜를 받으니까 어느날 눈이 싹 달라지더래요. 눈이 바뀌면서 20년이나 같이 산 남편이 오늘따라 그렇게 예뻐지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못차리겠대요. 눈을 봐도 예쁘고 코를 봐도 예쁘고 앉는 것을 봐도 예쁘고 걷는 것을 봐도 예쁘고……. 너무너무 예뻐서 잠자리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불평을 했어요. '하나님, 저렇게 예쁜 얼굴 좀 보면서 자게 만들지 왜 눈을 감고 자게 만들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소망교회 1등 교인이요"그랬어요. 여러분, 얼마나 잘 믿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남편의 얼굴이 견딜 수 없이 예뻐지거든 잘 믿는 줄 아세요. 아내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이거든, 내 신앙의 수준이 높은 줄 아세요. 그리고 자녀를 보나 세상을 보나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그렇거든 내 신앙의 수준이 높은 것이고요 '에이, 망할 놈의 세상!'하고 느껴지거든 땅에 떨어지는 시간이에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눈이 밝아지면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예수님 보세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그리스도를 보고 나를 보고 구원받은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고 나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는 겁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히사 우리 앞에 있는 밝은 기업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을, 나 자신을 아름답게 보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밝게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느냐
마 6:24 / 김경호목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물은 단지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재물은 맘몬이라고 하는데 돈이나 부의 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돈과 재물이 하나님과 비견될까요? 하나님을 섬기듯 돈을 섬긴다니요? 그것도 하나님과 돈, 그 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돈은 단지 필요에 따라 구하는 것이지 우리가 과연 돈을 신처럼 섬긴다는 말입니까? 왜 그렇까요?
이것을 아주 과학적으로 밝혀주신 분은 칼 맑스입니다. 그는 성경 다음으로 인류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 ‘자본론’에서 과학적으로 상품과 돈과 자본의 신성, 물론 맑스는 우리같이 거룩한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신성이 아니라 허구적인 성격 그러나 인간이 맹신하게 되는 성격으로 물신성을 말합니다.
여기 사과가 하나있다고 합시다. 이 사과의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도시에 나가 공부하는 아들을 생각하며 성정껏 사과나무를 돌보아 탐스런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럴 때 이 사과의 가치는 어머니의 땀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이 가만히 보면 다 인간의 땀과 사랑으로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노동, 그것을 만들어가면서 갖는 수고와 희망, 그리고 기대 이런 것들이 물질의 가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그 전체 가치의 구성요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장으로 나와 사과 하나에 천원이란 가치가 부여되면 그 어머니의 땀과 사랑은 감추어지고 단지 물질의 가치는 천원이란 숫자로만 통용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천원이란 가격을 보고 마치 그 사과 자체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어머니의 노동이 가치를 만든 것인데 이젠 사과 자체가 가지를 가졌다고 보게 되는 것 이것이 ‘물신성’입니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올라가면 그 상품을 교환하는 화폐 자체가 가치를 가진다고 봅니다. 이것은 ‘화폐의 물신성’입니다. 화폐는 단지 교환을 위한 약속이고 매개체 일 뿐인데 화폐 자체가 대단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되어 그 안에 담고 있는 본질인 인간의 노동, 땀과 사랑, 그리고 인간 자체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자본의 물신성’이 나옵니다. 이제 그 화폐는 단지 교환을 위한 화폐가 아니고 또 다른 가치를 낳은 자본, 투자가 됩니다. 이것은 단지 돈(Money-M)이 아니고 ‘또 다른 돈’(M')가 됩니다. 이 자본은 또 따른 자본을 만들어 내는, 돈이 돈을 낳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결코 돈을 남을 위해 쓰거나 내 놓을 수 없습니다. 없는 사람은 “에이 택시 탈것 지하철 타지” “에이 자장면 먹으면 되지‘하고 남을 위해 돈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본으로 여기게 되면 이것이 또 다른 부를 낳는 씨 암탉이 되므로 결코 남을 위해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본 자체가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 자본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이 그 자본에 부가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묵혀도 거기에서 가치가 나오질 않습니다 그 돈을 이리저리 쓰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주인은 인간이지 그 자본 자체가 아닙니다. 이런 상품과 돈과 자본의 물신성들은 본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마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인간이 이것을 얻기 위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쫒아다니는 주객전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라는 대 제국의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로마가 망했냐?”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성적 타락이니 게르만의 침입이니 하는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로마 멸망의 이유는 소유욕, 탐욕스런 맘몬 신의 지배가 로마 사회 안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곳에는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대리석으로 빛나는 도시와 화려한 사원이 그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로마당시 도시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주랑 현관, 목욕탕, 수도관, 유리로 치장된 아름다운 건물, 극장과 운동장, 산책길 옆을 흐르는 냄새나는 더러운 강을 복개하는 공사, 연회 이런 것이 로마 도시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화자찬하기를 “언제 바다와 내륙에 이렇게 많은 도시들이 존재했었는가?”라며 도시를 건설한 로마인들의 탁월한 우수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문화국민으로 만든다는 명분 아래 세계지배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는 로마의 세계 지배 정책입니다.
로마인들은 강을 넓히고 다리와 도로를 건설하고 요새를 세웠는데, 누가 이런 작업에 동원되었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개발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개발과 발전에 반기를 든 지식인들도 있었습니다. 프로퍼즈(Properz), 티불(Tibull)이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교묘하게 적을 찾으며 전쟁만을 계속한다. 이것은 추악한 금 때문이며. 엄청난 전리품을 탐하기 때문이다.” 실제 로마의 군인들은 정기적인 봉급 보다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탐나는 수입원이었으며 이것이 제도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수입을 얻기 위해 추악한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도시건설도 두 가지 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는 피정복지에서 로마인들이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이고 다른 하나는 건설과정에서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통행세를 받기 위해서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식사 때 사용하는 그릇을 너도밤나무로 만들었을 때는 전쟁이 없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금 그릇이 등장한 후부터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후에 세계 곳곳에 있는 값진 문화유산이 로마 시장으로 흘러 들어왔고 로마인들의 부와 향락은 넘쳐났습니다.
징병, 징용제도도 맘몬을 충족시키는데 악용되었습니다. 로마의 관리들은 피정복지의 어린이 노인에게 징병 영장을 보냈고 그것을 면제하는 대가로 고액의 뒷돈을 요구해서 챙겼습니다. 재판제도도 붕괴되었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법정에서 당하는 불이익과 판사의 매수를 시로 묘사하였습니다.
법이 무슨 소용있는가?
맘몬만이 지배하고
거리의 빈민들이 소송에서 항상 패배한다면
법정은 낡은 헌옷을 파는 가게에 불과하다.
지위를 가진 자에게 돈을 주어라
그렇지 못하면 물건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헌옷 가게에서 물건을 사듯 재판의 결과를 돈으로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맘몬이 판치는 사회, 끝간 데 없는 소유욕으로 병들어가는 사회 이런 로마 사회의 한 변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냐 맘몬이냐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로마 식 소유욕에 노예가 되어 살 것이냐 아니면 이런 맘몬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가치관과 질서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이냐를 요구하십니다.
돈도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가 고파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는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날 먹을 것만 거두라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쉽습니까? 배고팠던 사람들이 세상 지천에 먹을 것이 쌓여 있는데 어찌 그날 먹을 것만 거둘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한숨 자지도 못하고 밤새 거두어 자기 막사 안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온 천막 안에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광야 40년은 이렇게 반복하여 자신의 욕심을 조정하는 방법을 배운 시간입니다. 그들은 성서에 따르면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이 거두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 ‘나눔’이 이루어지고 서로가 이웃으로 형제, 자매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날 먹을 것만 거두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내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내일은 “또 하나님께서 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배운 것입니다. 광야의 훈련은 믿음의 훈련입니다. 내일에 대한 믿음-내일은 하나님 손에 있고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리는 믿음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우리의 손에 움켜잡고자 합니다. 확실한 현찰을 우리 손에 확보하고 싶어합니다.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박국)하신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 내 손에 그 안전을 쥐려하는 데서 돈이 요구됩니다. 확실 한 현찰- 그것은 막연한 하나님 보다 더 확실한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대신하고, 결국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수천억의 자산가인 고 정몸헌 씨가 그날 기분 나빠 뛰어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전에도 수없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12층 빌딩의 문을 열어놓고 오늘 뛰어내릴까 내일 뛰어내릴까 망설이고 뼈를 깎는 갈등을 하다가 그날 뛰어내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닌 돈이 우리의 미래를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돈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이 가지는 허전함, 인간에게는 돈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하나님 대신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 됩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가 굶습니까? 디오니소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 왔을 때 “햇빛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배짱이 있다면 그것은 수억의 자산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안빈락도(安貧樂道)를 말합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사내 대장부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고 누울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굳이 돈이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것이 잡으려 달려간다고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허전한 미래의 보장은 돈의 품속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맘몬 그 둘 중에 여러분은 무엇을 섬기시렵니까?
파송)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신뢰하십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편안하게 보장해 줄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 기쁨을 가지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실천해 나가는 기쁨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가 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은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마 6:24 / 김철한목사
하나님은 에덴을 창조하였다.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서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므로써 에덴에는 질서와 조화가 비틀어지고 왜곡이 나타났다. 사람에게 있어서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뿐이었다. 그런데 왜곡이 나타나자마자 영적 기능이 죽어버린 인간은 만물 앞에 경외감을 갖고 만물을 하나님 자리에 가져다 놓고 경배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 빈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 눈에 보이는 것을 움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삶의 주인으로 모셨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해와 달과 별, 산과 들과 강, 큰 나무, 기암 괴석, 무서운 짐승 등을 주인으로 모셨다. 이는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하였다.
오늘의 시대는 과학의 발달로 태양신, 별의 신, 달의 신 등의 숭배에서 벗어난 듯 하다. 그 대신 물질, 돈이 우리 인생에게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성도들에게도 돈이 위력을 발휘하며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대에 많은 성도들이 두 주인을 모시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주인과 물질이라는 맘몬신이다. 맘몬은 고대 이방의 돈의 신이었다. 칼타고의 부요신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나를 구원하신 주님은 분명 두 주인을 섬기기는 불가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의 증상은 이렇다.
1. 의식주 문제에 집착한다(마6:25)
이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에 대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의식주 문제에 집착하여 삶의 우선 순위가 물질이 된 사람은 물질이 주인인 것이다.
이 세상은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신(神)인 것처럼 떠든다. 매스컴의 광고는 온통 이것을 먹으라, 이것을 마시라, 이것을 입으라는 선전이다. 온통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도 선전이 부족해서 몸을 위해 이것을 발라라, 이것을 깎아라, 붙여라는 선전이다.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매스컴을 대면해도 의식주에 집착시키는 권고만이 가득하다. 그것은 또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우리의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건드리면서 광고한다. 여기에 미혹되고 속고 혼돈되어 의식주 문제에 더욱 집착하고 의식주도 더 좋은 명품으로, 더 유명한 브랜드 상품으로 집착하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행복한 줄 아는 착각 속에 산다. 이런 의식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삶이 물질이 주인이 된 모습이다.
2. 염려 속에 산다.
(마 6:25, 27, 28, 31)
의식주를 위해 사는 삶과 의식주 문제에 집착하는 삶의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다. 예수님은 마6:25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의식주가 염려의 대상이 되면 물질이 삶의 주인이 된 것이다. 즉 물질이 주인이 된 사람의 삶이란 아무 쓸데없는 염려에 빠져 산다는 것이다. 헬라어로 ‘메림나’라 하는 염려는 죄악이다. 마운스(R.H. Mounce)는 염려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라 하였다.
아무리 고민하고 궁리를 해도 염려로 사는 것은 키를 한 자나 더 자라게 할 수 없다. 염려는 무능이다. 염려는 불가능이다. 염려는 눈 먼 것이다. 염려는 불신앙이다. 염려는 분열된 색종이다. 혼돈이다. 물질이 주인이 되면 염려만 자라게 하고 염려만 커져가게 한다.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님은 염려가 하나님을 주인을 삼지 않는데서 오는 결과물로 언급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염려’란 단어는 6번이나 되풀이 되어 나온다. 염려는 주인이 누구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바로 물질이 주인이면 염려는 당연히 따라오는 그림자다. 그것은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3. 미래를 어둡게 산다. (마6:34)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주님이 주인이 된 사람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극복한다. 그러나 물질이 주인이 된 사람은 내일 염려까지 끌어다 염려하기에 괴로움에 떨어진다. 그래서 내일을 어둡게 산다. 내일이 밝지 못한 사람에겐, 괴로움의 사람에겐 감사가 없고 평안이 없으며 행복이 없다. 삶이 불행하고 더욱 불행해진다. 물질이 주인인 인생, 그 맘몬신은 분명코 불행을 선물하고 불행을 불러들이되 불행을 몰아내지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의 증상은 무엇인가?
첫째, 생명을 중요시 여긴다. (마6:25)
마6:25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다가 목숨과 몸둥아리가 병들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인데 생명을 내신 하나님 앞에 생명이 아닌 것을 가지려고 애쓰다가 잘못 되어서는 안됨을 안다. 이자를 챙기고 저금을 하며 성실하게 돈을 모으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살아가는 생명은 빵과, 옷, 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그 필요한 먹거리와 옷들을 위해 목숨과 몸을 파괴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지 물질을 위한 생명을 팔거나 파괴하거나 노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헌금 생활을 한다. 선교 헌금을 한다. 생명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구원을 위해 쓰는 것이다.
둘째, 자존감이 높아진다. (마6:26)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들을 다 길러주신다. 공중 나는 새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두신다. 하나님께서 살도록 하시고 기르시고 계신다. 이렇게 날짐승도 먹이고 입히시는데 인생은 어떤 존재인가? 귀한 존재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인생이 하나님께 가장 귀하다.
시8:5의 말씀대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신 인생을 어찌 방치하겠는가? 내가 귀한 존재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존감이 살아난다. 나를 이렇게 신묘막측(神妙莫測)하게 만드신 하나님이기에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들의 백합화 한 송이도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여도 자라나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한송이만도 못하다. 그렇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가장 귀한 나를 어찌 벌거벗은 채로 방치하겠는가? 무명 꽃도 기르시는 하나님이 아들로 삼은 나를 어찌 무관심하게 다루시겠는가? 그래서 자존감이 생긴다. 염려는 다가왔다가 동거하지 못하고 떠나간다. 내가 귀한 존재이기에 기쁨으로 세상을 산다.
셋째, 믿음으로 산다. (마6:30)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믿음에 선다. 무슨 믿음인가? 하나님이 입히시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믿음이다.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염려가 아니고 믿음으로 산다. 마6:32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나를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이 공급자가 되어주시는 것을 믿으면 평안하다. 행복하다. 염려, 집착, 어둠이 들어오지 못한다. 삶의 기쁨과 감사, 자유로움과 밝음이 삶의 내면에 깃들여진다. 믿음이 있기에 요동하지 않는다. 가난한 날에도, 실패한 날에도 요동하지 않는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 (마6:33)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물질이 주인인 사람의 우선은 돈이다. 돈이 지시하고 돈이 요구하는대로 모든 인생의 계획표를 작성한다. 돈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도 포기하고 친구도 포기하고 교회도 포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 사람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이 우선이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가 우선이다. 그래서 돈이 있으냐, 없느냐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의가 먼저다. 거기서 희생, 헌신, 사랑, 구제, 나눔, 섬김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앞세우는 그 사람에게 마6:33에서 의식주도 책임져 주신다. 모든 것을 더하기 해 주신다.저가 결단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하다. 돈은 눈에 보이는 것이어서 모든 삶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래도 하나님이 먼저여야 한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면 삶도 거룩해지고 물질도 거룩하게 사용된다. 물질이 악하게 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에 사용된다. 그러나 물질이 삶의 주인이 되면 하나님도 잃고 물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물질 때문에 생명을 잃는 불행을 초래한다.
우리는 이제 뒤집어야 한다. 하나님 아래 인간, 인간 아래 물질로 되어있는 질서가 깨지고 뒤집어진 삶의 현실을 오늘 다시 뒤집어야 한다. 뒤집는 것이 신앙이다. 뒤집기로 거듭나서 살면 마술 같이 물질은 선이 된다.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그 선택의 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주인되고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면 물질은 거룩해진다. 선도 악도 아닌 물질이 선이 된다. 생명이 된다. 허나 물질이 주인되면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아도 염려가 달라붙고 모든 것을 잃고 죄와 고통의 음부에 떨어지게 된다. 오직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섬기는 삶은 염려가 떠나가고 염려가 파괴되어 버리고 염려가 다가오다가도 도망가고 자족하며 살게 된다. 기쁨과 자유함으로 족하여 살게 된다.
당신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삶의 빛과 어두움,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유사 그리스도인이 된다.
염려지수를 낮추려면
마 6:24-34 / 송기성 목사
세계적인 설교자이며 베스트 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 (Max Lucado) 박사는「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Anxious for Nothing) 는 책에서 인류 최초의 염려는 죄책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염려는 우리의 숨과 잠과 에너지와 그리고 안녕도 앗아간다며 염려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6:24-34은 ‘하나님과 재물소유’ (God and Possessions) 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 곧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씩이나 염려하지 말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염려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다’ (메리조) 라는 말은 ‘나뉘다’, ‘분열하다’ 라는 뜻입니다. 지나친 염려는 정신을 분열시키고, 관계도 분열시키고 맙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염려는 고대 독일어 ‘부르겐’ (würgen) 과 어근이 연관되어 있는데 그 뜻은 ‘목 졸라 죽인다’ (to strangle) 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염려로부터 벗어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원에 의하면 불안장애는 전염병과 같은 속도로 번지고 있으며, 한 해에 약 5천만 명의 미국인이 공황발작이나 공포증 및 그 밖의 불안장애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은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환으로 해마다 3천억 달러의 의료비가 지출되고 생산성이 감소되며 신경안정제 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염려지수부터 낮추어야 합니다.
1.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자기 생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금자리는커녕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이 의식주의 문제로 근심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Aren’t you worth much more than birds?)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인간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지수를 낮추려면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존감을 살려서 염려지수를 낮추며 오히려 성공지수를 더욱 높여 가게 될 줄 믿습니다.
미국의 정치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a Rice)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1954년 11월 인종차별이 심한 앨라바마주 버밍햄에서 태어났으며, 8살 때 동생 데니스를 백인 우월주의자 폭탄 테러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10살 때 목사이자 교수인 아버지와 음악 교사인 어머니를 따라 워싱턴으로 백악관 견학을 갔다가 피부색 때문에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 일은 흑인 소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흑인으로서의 삶이란 불평등과 굴욕과 공포의 연속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현실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는 아버지에게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은 피부색 때문에 백악관에 들어갈 수 없지만, 두고 보세요. 언젠가는 제가 반드시 저 안에 있을 거예요. 저는 제가 그만큼 뛰어나다고 믿으니까요.”
콘돌리자 라이스 박사, 그녀는 “두 배로 열심히” 라는 표어를 내걸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였습니다. 1981년 26세에 스탠퍼드대 교수가 된 그녀는 1994년 39세에 ‘최연소, 첫 여성, 첫 흑인’ 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스탠퍼드대 부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2001년 부시 대통령 때 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가안전보좌관을 맡았으며, 2005년 부시 대통령 제2기 행정부에서는 국무부장관을 지냈습니다.
요한복음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염려지수를 낮추고 성공지수를 높여 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인생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이 자기 생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의식주 등 인생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염려하는 이유를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아무리 염려한다 할지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염려의 원인이 그들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믿음이 작은 자를 만들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지수를 낮추려면 인생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푸는 사람은 염려지수를 낮추며 오히려 평안지수를 더욱 높여 가게 될 줄 믿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 (1805-1898)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4세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된 그는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였습니다. 거짓말과 사기, 도적질과 도박, 음주와 방종 등, 결국 16세 때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25년 20살 때 학교 친구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인쇄된 설교문을 읽고 듣는 모임에 가서 큰 은혜를 받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 후 목사가 된 그는 ‘성경지식연구원’ (Scripture Knowledge Institution) 을 세워 다섯 가지 사역을 펼쳐 나갔습니다 : 성경의 기초 위에 학교를 조직하는 것,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것, 성경을 보급하는 것,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고아원 사역을 시작할 때에 2실링(50센트), 약 500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81:10) 는 말씀에 힘입어 기도하며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워 2천 명이 넘는 고아들을 양육했습니다. 1898년 93세로 그가 별세할 때까지 60여 년 동안 그는 15만 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며 기도로 양육했다고 합니다.
“걱정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요, 참 믿음의 시작은 걱정의 끝이다” 라는 고백을 남긴 조지 뮬러, 그는 그의 사역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완전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조지 뮬러의 의견이나, 기호나, 취미나, 의지에 죽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이나 비난에 죽었습니다. 형제들이나 친구들의 인정이나 비난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는 다만 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도록만 연구했습니다.” 아멘!
조지 뮬러, 그는 사람들로부터 ‘미친자’ 라고 불리우며 많은 반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시련을 많이 당했으며, 실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이 가진 믿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지난 세월 동안 조금씩 신장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여러 번 내가 근심걱정으로 내 정신이 아니게 되었을 뻔한 경우에도 나의 영혼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평온할 수 있었다.” 아멘!
마가복음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마음 속에 근심 있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푸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염려지수를 낮추고 평안지수를 높여 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그들이 자기 생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결코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희생의 길을 가실 줄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았고, 기사와 이적도 너무 매력적이었기에 발 벗고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출세와 성공을 기대했으며, 서로 자리 다툼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리와 교훈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보다는 이 세상 것에 대한 관심과 소원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매사에 염려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지수를 낮추려면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사람은 염려지수를 낮추며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사명지수를 더욱 높여 가게 될 줄 믿습니다.
젊은이교회에서 발간하는 ‘Light house’ 에 실린 사이가 만난 사람 최남희 권사님의 고백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2000년 11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정동교회 관리인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한 그는 신앙이 깊지 않았던 때에는 교회 출석 일수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셨나보다고 생각했다면서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정동에 와서 처음 겪은 시련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니가 아주 편찮으셨는데 자주 뵙지를 못했어요. 쉬는 날에도 혹여나 밖에 외출했다가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늘 붙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요. 저는 관리실이 목회팀의 동역자라고 생각해서 목사님들이 편히 목회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제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보기엔 정말 보잘 것 없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이 자리가 교회를 대표하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조심스러웠고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그 마음이 저를 신앙인으로 성장시킨 것 같아요. 교회에서 일했던 모든 날이 저한텐 신앙생활 이었던 거죠. 교회 일도 힘든 순간은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내 신앙이 더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청년들도 살다 보면 어려운 일들에 직면할 때가 올 거예요. 그 시간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잘 감당하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그럼 어느 순간엔 그 시간을 통해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성장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셨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아멘!
로마서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염려지수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기까지 사명지수를 높여 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채근담에 있는 글입니다. “밭에 난 잡초를 뽑으니 그것으로써 거름을 만들게 되듯이 사람의 고민도 그 잡초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뽑지 않고 내버려 두면 무성하여 곡식을 해롭게 하지만 일찍이 서둘러서 뽑아버리면 곡식은 잘 자란다. 그리고 뽑은 잡초는 따로 거름이 될 수 있다. 논이나 밭에 잡초가 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그것을 뽑을 힘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잡초를 뽑을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며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고, 인생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풀며,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염려지수를 낮추고 대신 성공지수와 평안지수와 사명지수를 높여 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둘 중 하나를 택해봐
마 6:24 / 김원효 목사
저희 가족들이 가끔 이런 게임을 합니다. “아빠는 둘 중 뭐가 좋아? 자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 빵이 좋아 떡이 좋아? 과일이 좋아 고기가 좋아? ” 아- 이 게임 같이 해봅시다. 서로의 취향을 아는데 좀 도움이 될 겁니다. 제 질문이 끝나자마자 주저하지 말고 신속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소리쳐 부르십시오. 시작합니다.
자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 빵이 좋아 떡이 좋아? 과일이 좋아 고기가 좋아? 물냉면이 좋아 비빔냉면이 좋아? 커피가 좋아 콜라가 좋아? 피자가 좋아 햄버거가 좋아? 갈비가 좋아 스테이크가 좋아? 삼겹살이 좋아 족발이 좋아? 떡볶이가 좋아 만두가 좋아? 고구마가 좋아 감자가 좋아? 비빔밥이 좋아 볶음밥이 좋아?
이렇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게임을 ‘밸런스 게임’이라고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먹는 것을 가지고 밸런스 게임을 했는데 이제는 다른 것으로 해봅시다.
미국이 좋아 캐나다가 좋아?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봄이 좋아 가을이 좋아? 바다가 좋아 산이 좋아? 비가 좋아 눈이 좋아? 장미가 좋아 백합이 좋아? 강아지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 추위가 좋아 더위가 좋아?(둘 다 싫어!)
자- 이제는 스타일에 대하여 해봅시다. 생머리가 좋아 파마머리가 좋아? 짧은 머리가 좋아 긴 머리가 좋아? 정장이 좋아 캐주얼이 좋아? 구두가 좋아 운동화가 좋아? 치마가 좋아 바지가 좋아? 청바지가 좋아 면바지가 좋아?
자- 이제는 결혼하지 않는 미혼 자매님들만 대답해보십시오. 잘생긴 총각이 좋아 돈 많은 총각이 좋아? 유머남이 좋아 매너남이 좋아? 연상이 좋아 연하가 좋아? 외모는 완벽한 내 이상형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좋아, 믿음이 좋지만 외모가 내 이상형이 아닌 사람이 좋아?
또 다른 밸런스 게임입니다. 천재적 음악 재능을 갖는 것이 좋아 천재적 미술 재능을 갖는 것이 좋아?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이 있는 것이 좋아 미래로 돌아가는 능력이 있는 것이 좋아? 자- 이번에는 좀 생각을 하는 밸런스 게임입니다. 잘 듣고 대답해 보세요. 내가 1억을 받는 대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100억을 받는다면 당신의 선택은? 1번 : 1억 받는다. 2번 : 1억 안 받는다.
어떤 기자가 한국의 모 정치인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1번 :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2번 : 다시 태어나면 대통령이 되는 것.” 이에 대해 그 정치인이 대답합니다. “답은 무조건 1번이네요.”
그러자 그 기자가 “정말 확실하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정치인이 “아- 지금 이 방송 전국에 다 공개되고 있는데 어느 대한민국 남자한테 물어봐도 1번 밖에 대답할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즉 아내의 후환이 두려워 100%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마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보다 아내를 택한다고 하면 여성분들이 “어머- 저 사람 멋있어!” 하고 여성 표를 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남성분들은 “에이- 거짓말이야.” 하고 그 정치인을 속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자- 이제는 신앙적인 밸런스 게임을 해봅시다. 기도가 좋아 찬양이 좋아?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좋아 밤에 기도하는 것이 좋아? 조용히 혼자 찬양하는 것이 좋아 여럿이 같이 찬양하는 것이 좋아? 백일 오전 금식이 좋아 일주일 온종일 금식이 좋아? 신구약 성경을 완독하는 것이 좋아 찬송가 645장을 모두 부르는 것이 좋아?
물고기 뱃속에서 3일 있다가 나오는 것이 좋아 사자 굴에서 하루 있다가 나오는 것이 좋아? 모태신앙이 좋아 세상 풍파 다 경험하고 나중에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좋아? 장로님이 되는 것이 좋아 목사님이 되는 것이 좋아? 날씨가 아주 좋은 주일날 가족들과 소풍가는 것이 좋아,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아?
여러분, 성경에 보면 이렇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이야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고, 성공과 실패가 갈라지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갈라지고, 지옥과 천국이 갈라집니다. 즉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평생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앞에서 “저걸 먹을까 말까?” 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광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너무 고생이 되니까 “다시 애급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고생이 되더라도 끝까지 참아볼까?“ 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가축이 너무 많아 이제는 같이 동거할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내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이때 조카 롯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편리함과 부요함과 화려함을 좇아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택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의 도시인 것을 간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할 때 롯은 간신히 맨 몸으로 피신을 했고 아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당장은 불편하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았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축복의 약속합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즉 문제는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선택의 문제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여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간단히 말하면 “돈이 좋아 하나님이 좋아?”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택시를 타면 꼭 운전기사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그날이 주일인데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주일예배를 가느라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기사 분에게 전도를 하는데 그 기사분이 좀 못마땅했는지 저에게 퉁명스럽게 묻습니다. “손님은 돈이 좋습니까? 하나님이 좋습니까?”
그 분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이겁니다. 제가 당연히 돈보다 하나님이 더 좋다고 할 테니까 그때는 그 분이 저에게 이렇게 반격할 겁니다. “손님은 돈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이런 반격을 당하게 되면 일이 좀 복잡해지고, 변론이 생기고, 서로의 기분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때 저에게 이런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기사 아저씨, 혹시 자녀가 있나요?” “예- 아들 하나 있습니다.” 그 아들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아들아, 너는 아빠가 좋아 돈이 좋아?” 이때 아들이 뭐라고 대답할까요? “나는 아빠보다 돈이 더 좋아.” 그러면 그거 호래자식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아빠가 이렇게 고생하며 아들 먹여 살리느라고 힘든 일을 하고 있는데 아빠보다 돈이 더 좋다고 하면 그건 좋은 아들이 아니잖아요. 저도요, 돈보다 하나님이 더 좋아요. 그러자 그 기사 분이 아무 말을 못합니다. 아마 속으로 그러겠지요. “이 예수쟁이 말 참 잘하네.” 즉 그 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벌려고 하나님을 못 믿고, 주일 예배를 못 드리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 주일예배를 드리게 하려고 딜을 했습니다. “아저씨, 요즘 한 시간 일하면 얼마나 벌어요?” “예- 만원 법니다.” “그러면 제가 2만원 드릴 테니 여기 교회 주차장에다 차 파킹하시고 예배드리고 가실래요. 하나님이 당신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아- 2만원 준다고요. 그거 진짭니까?” 그래서 그 분 그날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돈이 좋습니까? 하나님이 좋습니까? “아- 하나님이 돈을 주시는 분이니까 하나님을 택하면 둘 다 가지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거 말고요. 하나님을 택하면 돈을 못 갖고요, 돈을 택하면 하나님을 못 갖는 경우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솔직히 좀 고민이 되나요?
아마 돈도 돈 액수 나름이겠지요.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10억 원(1 million dollar)이 좋아 하나님이 좋아?” 또 다시요. “100억 원(10 million dollar)이 좋아 하나님이 좋아?” 확실히 대답해보세요. 정말입니까? 속으로는 후회하지 않나요? 옆에 분에게 물어보세요. “진짜세요? 후회하지 않나요?” “오- 주여! 보시옵소서. 이렇게 훌륭하고 위대한 신자들이 여기 캘거리 순복음 중앙교회에 있나이다.”
여러분, 저는 돈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돈도 많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물어봅시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100억 원을 주신다면 그 돈으로 선한 일, 주의 일을 하며 하늘에 쌓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좋은 집 사고, 좋은 차를 사고, 그 돈을 땅에 쌓아놓기를 원하세요?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결론입니다. 뭐를 더 좋아하고 뭐를 선택하든지 그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의 열매는 반드시 자신이 먹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성경이 가르쳐준 대로 선택하십시오. 그래서 가장 좋은 열매를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가운데 있을 때 구해야 할 것
마 6:24-34 / 배 혁 목사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설교 말씀 중에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말씀을 전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은 사람들이 염려가운데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를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당연히 누구에게나 목숨과 몸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목숨과 몸을 보존하고자 수고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목숨과 몸을 보존하고자 염려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들의 염려를 해결해 줄 것이 재물이라고 여겼고, 사람들은 재물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계의 염려로 인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재물이 자신들을 다스리도록 내 버려 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재물이 삶의 염려를 없애 줍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천년전 그들보다는 염려가 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못먹어서 죽을 것을 염려하지도 않고, 못 입어서 몸이 상할 것을 염려하지도 않을 만큼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들보다 더 많은 재물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염려가 더 적어졌다고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염려를 달고 사는 것입니다.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어니, J. 젤린스키는 사람들이 어떤 일에 걱정하며 사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22%는 사소한 고민거리 정도이고,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또 다른 4%는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걱정이 많은 사람한테, ‘걱정도 팔자’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에 얽매여서 재물로 문제를 좀 해결해 볼까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염려는 재물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재물을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지만, 돈을 가졌으면 건강이 염려가 됩니다. 재물은 있는데 자녀의 앞날이 염려가 됩니다. 때로 재물때문에 염려가 더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야기되는 사회의 악 중에는 재물에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물을 추구하며 사는 사회가 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재물을 욕심내고, 다른 이들의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을 해하는 범죄까지 성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목숨과 몸을 위해서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함으로 재물에 얽매여 이를 섬기는 삶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정한 염려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참된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염려가 아닌, 참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볼까요? 백합화가 들판에 가득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와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이유는 단순히 염려를 내려 놓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긴장을 풀라는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통하여, 사람들이 그것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사는 집 마당에는 사슴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런데 저와 아내는 그 사슴들 때문에 염려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추위가 계속 될 때에 새벽 기도회를 가려고 나갔다가 비내린 찬 잔디밭 위에 모여 앉아있는 사슴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드는 생각이, 이 사슴들은 이런 추위에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고 살지 괜히 염려하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것은 그렇게 염려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데 지금까지 잘 먹으며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들의 백합화는 길쌈도 하지 않는대도 솔로몬 왕이 입었던 그 어떤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내일 아궁이에 던질 풀들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잘 입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147:9절에, 시편저자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짐승들과 우는 까마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시며…” 시편 저자는 까마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신다고 했는데, 까마귀는 그 어미 까마귀들이 그 새끼들에게 아주 엄격하게 대한다고 합니다. 어미새는 까마귀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까지만 먹이를 주고, 조금이라고 날라갈 수 있으면 둥지에서 쫓아내서 스스로 먹고 살도록 독립시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미가 둥지에서 쫓아낸 우는 까마귀 새끼 조차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을 방치해 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도 돌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손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후, 이제 너희 자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6) 공중의 새보다 들판의 꽃들보다 우리를 더욱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새와 꽃들고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너희들은 더 귀하니까 먹고 입는 것은 당연히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30절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어떤 피조물보다 귀하게 보시고 이를 돌보아 주심을 믿지 못하고 염려가운데 사는 이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며 책임지고자 하는데, 자녀가 이를 믿지 못해 날마다 염려하며 근심중에 살아간다면, “얘가 나를 못 믿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 부모는 참 서운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셔서, 나를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귀한 존재로 여기는 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8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다른 자연만물들보다 사람을 더욱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너무나 감격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하물며’ 의 믿음입니다. 새와 꽃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우리를 귀히 보시고 돌보시지 않겠냐는 믿음입니다. 이 “하물며” 의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셔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동물과 같이 취급해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로 맺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자녀를 귀하게 여기며 책임지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염려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어서 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위해, 몸을 위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염려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귀히 여기며 돌보지 않으신다는 불신에서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목숨과 몸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확신하며 주님께 내 삶을 맡기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고 책임지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더 큰 것을 보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업신여겼고 상종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이방인들과 같다고 말하니,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모욕적인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과 몸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지 못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모여 있는 무리들에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는 이유,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사람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의를 이룰 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먼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몰라 혼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란 책을 쓴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3번째 습관을 이렇게 말합니다. “Put First Things First, 먼저 해야 할 것을 먼저하라” 그리고 그는 먼저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어떤 일의 성격을 중요한 일과 시급한 일로 나눕니다. 여러분들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십니까? 아니면 시급한 일을 먼저하십니까? 그는 성공하는 사람은 중요한 일을 먼저하고, 또한 시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미리 중요한 일들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시급한 일을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로 착각하며 그것에 얽매여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목숨과 몸을 보존하며 사는 것을 시급하고 중요한 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숨과 몸, 그리고 재물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서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의 목숨과 몸과 재물을 희생할 수도 있고, 때로는 더 힘써 목숨과 몸, 그리고 재물을 지켜 나갈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일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이유가 달라집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몸의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목숨과 몸이 존재해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먼저 구해야 할 것을 여전히 혼돈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염려와 문제를 제거해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때에 우리의 염려와 문제는 해결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마시는 이유, 우리의 목숨과 몸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몸을 위해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까를 구하며 살아가고자 하다가 염려가운데 빠져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삶의 염려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가치있고 귀하게 여겨주시는지를 기억하기를 바라십니다. 새와 꽃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귀하게 여기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갈 수 있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게 되고, 우리는 비로서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과 몸을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 목숨과 몸을 내가 책임지기 위해 살아가는 염려가운데 있는 이들은 믿음이 적은 자들입니다. 염려거리가 많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고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감으로 믿음이 적은 자들이 아니라, 믿음이 많은 자로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충절, 충성심
마태복음 6장 24절 / 김우생 목사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는 덕성이라고 일컫는 충절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충절 (loyalty) 또는 충성심은 그리스도인의 관계적인 덕성입니다. 본문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고 한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 이것은 충성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충절 또는 충성심입니다. 만약에 이런 충절, 즉 충성심이 부족하게 되면 그 나라는 문제가 있게 됩니다. 애국자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나 단체는 물론 그 가정에 진정한 충성심이 결여 되어있다면 얼마나 문제가 되겠습니까? 특별히 교회에 이러한 덕성이 없게 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일반 직장에서 불충하게 된다면 그 직장이 세워질 리가 없습니다. 이렇듯 충절, 충성심이라고 하는 덕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반면 부부가 서로 충성심이 있고 부모와 자녀, 또는 동기간에 서로 충성심이 있다면 가정은 세워집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덕성은 충절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충성심의 정의를 살펴보고, 그리고 성경 속에서 이러한 덕성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예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성심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어떻게 배양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충절의 의미
우리말 대사전에서 충절 또는 충성심은 간단히 '충성스러운 절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loyalty'라고 하는 이 충절은 웹스터 사전이나 옥스퍼드 사전에서, 하나는 '합법적인 정부에 충성하는 것', 둘째로는 '어떤 개인을 향하여 충성심을 보이면서 헌신되어 있는 것', 또는 '그와 관련을 맺고 있는 어떤 분을 향하여서 충성심을 보이면서 헌신되어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어떤 주의, 주장, 사상, 관습(customs) 등에 자신을 주며 헌신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특별히 '덕성의 책' (the book of virtues)을 쓴 윌리암 베네트라는 분은 그의 책에서 "충절이란 우리가 함께 하기로 한 어떤 사람과 또는 개인이나 그룹 또는 제도나 사상과 연결하여 그 헌신됨이 일관성을 지니는 것, 그것이 요동함이 없이 견고하게 머물러 있는 헌신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충절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족에 충성심이 있으면 가족과 함께 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대하여 충성심이 있다면 교회와 함께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할 때 저들과 함께 했으며 저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나 정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신앙과 믿음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이 충성심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충절은 행동이 따릅니다. 충절을 보이는 대상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줍니다. 그가 어떤 필요가 있을 때, 또는 어려움을 당하거나 보호가 필요하고 옹호가 필요할 때 옹호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한 셋째로 이러한 충성심은 일관성이 있어서 변치 않으며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가 한 약속한 말을 지키며 그가 헌신한 그 일에 일관성이 있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넷째로 충성심은 용기를 발휘합니다. 윌리암 베네트가 말했듯이 바로 충절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충성심의 모습으로, 즉 용기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충성심은 불편한 것이 있을 때 견디며, 시험이 있을 때 그것을 이겨나갑니다. 충성심과 충절은 그 대상에 대하여 복지와 유익을 위해 도움을 주고 돌볼 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용기를 발휘합니다. 그가 충성하는 대상이 공격을 당할 때 침묵하거나 피하지 않고 앞에 나아와 방어하는데, 이러한 행동을 용기라고 합니다.
Ⅱ. 충절에 대한 성경적인 예(例)
성경은 어떻게 보면 인물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후손들에 의하여, 어떻게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역사하였는가를 인물들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인물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구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일컬어지는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 바로의 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실했습니다. 그는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성경에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맡긴 일에 충성할 뿐만 아니라 맡겨준 자에게도 충성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충성했기 때문에 가정 총무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오직 자기 아내만을 제외하고 모든 전권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셉은 준수하고 잘 생긴 남자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부도덕한 행위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유혹을 받았는데, 한 번만이 아니라 매일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 유혹을 받았을 때부터 자기를 신뢰하는 주인에게 충성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큰 악이요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39:8-9).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 다윗이 있습니다. 그는 사울과 요나단에게 충절을 보였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향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여인들이 창화하기를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홀로 소유하려고 했지만, 강한 질투와 투기심 때문에 자기 앞에서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하여 격정이 일어나면 창을 던져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면 공허감 속에 빠져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해도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성경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두 번이나 쫓아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사울왕이 하나님이 기름부음 받은 왕이었으므로 그를 배반하지 않고 충성하였습니다. 다윗의 충성심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까지 이른 것을 보게 됩니다. 왕권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정권이 바뀌면 난리가 나듯이 왕권에서는 더욱 더 큰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절뚝발이가 되었는데, 그는 도리어 왕의 아들과 같이 대우를 받으며 왕의 상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이러한 모습들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서 다니엘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다리오왕에게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있을 때 다니엘은 총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은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투기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고소할 수 있는 틈을 얻기 위해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아무런 허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나라에서 맡은 일에 충성된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의 끝에 30일 동안 왕외는 아무에게나 다른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진다는 명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메대바사 페르샤의 변개치 않는 법은 왕도 한 번 명을 내리면 고치지 못한다는 아주 유명한 규례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한 결심, 즉 동창을 열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루에 3번 기도하던 습관을 계속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사자굴에 던지워졌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의 입을 다물게 하여 다니엘을 구했습니다. 다리오왕은 이를 목도했으며 다니엘을 다시 복귀시켰습니다. 그를 모해하려던 사람들은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셨던 그들의 삶 속에는 충절, 충성심이 있었음을 봅니다.
또한 에스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드림으로 그의 충성심을 보인 여성입니다. 우리 나라의 유관순이 자기의 목숨을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바침으로 그의 충절을 보였듯이, 성경에서 에스더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충절을 보였습니다. 하만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모르드개는 이것을 알고 유대인으로서 왕비가 된 에스더에게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왕비라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을 때 왕 앞에 나가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민족을 위하여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충절을 보였습니다. 마침내 에스더는 이스라엘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민족에게 충성한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성심은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확립시킵니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관계를 형성시켜서 아주 진정한 우정을 이루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속에서 이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은 생명같이 서로 사랑했고 충성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요나단이 죽은 후에도 다윗은 사무엘하 1장 26절에서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충절, 충성심은 진정한 우정과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Ⅲ. 충절, 충성심은 어떻게 개발시키는가?
첫째로 긍정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충성하기에 앞서 충성할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하여 충성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될 때 충성심이 배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불변하시고 영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흘려 내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분에게 나 자신을 드리는 충성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충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더욱 더 알수록 충성심이 배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애에 계획하신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런 지식 위에 신뢰감이 형성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동안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았고 신뢰감이 형성됨으로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셋째로 이러한 신뢰감이 저들을 친밀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뢰감이 있을 때 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어집니다. 여기서 충성심이 발생하게 됩니다. 넷째로 이런 과정에서 충성심은 사랑을 유발시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에 관해 이야기함으로 저들을 헌신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제자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가 너무 어렵다고 말하며 물러났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메시지를 들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는 충성심을 보이신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비극이 무엇이며 교회의 비극이 무엇이며 가정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성경과 주님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충절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 주의 말씀을 알고 주님께 드려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관계적인 덕성인 충절을 발휘하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다
마 6:24-34 / 김흥규 목사
<序: '염려,'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적>
현대는 정보 사회입니다. 인터넷의 도래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정보를 우리는 거의 날마다 접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보 과잉으로 인해서 우리가 꼭 알지 않아도 좋을 정보까지 습득한다는데 있습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나 "아는 것이 병이다" 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것까지도 시시콜콜 알게 되다보니까 근심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몰라서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입니다. 요즈음 유행한다는 괴질, SARS에 대해서도 차라리 모르면 그만일 텐데 너무 자세히 알아서 탈이 아닙니까?
국제 정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라크에서 일어난 전쟁을 안방에서 지켜보니까 전쟁의 파괴력에 대해 더 많은 두려움과 걱정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만 일어났다 하면 몇 초 되지도 않아서 해외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금방 전해져서 걱정거리가 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좌우지간 현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염려에서 시작해서 염려로 마칩니다. 건강 걱정, 자식 걱정, 직장 걱정, 돈 걱정, 정치 걱정, 경제 걱정, 환경 오염 걱정, 심지어 자꾸만 늘어나는 흰 머리털 걱정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의 염려에는 끝이 없습니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들에 따르면 모든 병의 70% 정도가 마음이 지어낸 것에서 오는데 그 주된 원인이 스트레스와 걱정 때문이라고 한다. 영적인 문젯거리를 가진 사람들이 보낸 수천 통의 편지를 읽는 가운데 나는 걱정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심장 전문의들은 염려를 심장 질환의 제 1원인으로서 꼽았다."
그렇습니다.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신경성 위장병에 걸립니다. 염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염려 때문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염려야말로 현대인들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최고의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염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주신 해법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本: 염려에 대한 예수님의 해법은?>
먼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정과 직장을 다 버린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들은 24시간 내내 주님의 뒤만 따르기로 작정한 풀타임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최고 관심은 장차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생계 문제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걱정거리를 안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해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염려는 두 주인을 섬기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25절의 첫 글자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25절 말씀이 24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25절은 24절에 대한 결론으로서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러므로 24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주님께서 25절 이하의 말씀 전체에서 주시고자 하는 요점을 바로 깨달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24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이 염려의 원인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 하다 보니까 염려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희랍어로 '염려한다'는 말은 본래 '마음을 나눈다'(to divide the mind)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왜 염려합니까? 마음이 나누어져서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돈, 둘 다 섬기려 하기 때문에 마음이 나누어져 염려가 생깁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살려고 하니까 염려가 찾아옵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 잡으려고 하니까 염려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마음이 끊임없이 분열되어서 평안이 없게 됩니다. 약 1: 8 말씀처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생각이나 행동, 결정 모든 면에 있어서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염려가 떠날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 속에 두 주인, 세 주인, 수많은 주인들을 섬기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 갈라져서 염려도 비례해서 많아지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생애는 누구를 섬기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섬기는 대상이 고귀하면 그 사람의 인생도 고귀하여집니다. 특별히 한 분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마음 속에 신뢰와 안정감이 생겨서 여러 주인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마음이 늘 단순하고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염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에 여러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섬기는 숫자에 비례해서 근심 걱정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염려를 덜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순히 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단순히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넉넉하고 가장 고귀한 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세상적인 주인을 많이 섬기면 많이 섬길수록 그 마음에는 염려와 근심이 떠날 날이 없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로, 쓸데없는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꼭 해야만 할 염려와 할 필요가 없는 염려가 있습니다. 몇 일 후에 시험을 치르는 학생은 시험 때문에 걱정을 해야지만 준비를 잘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어느 정도의 걱정과 긴장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아니면 사업을 하든지 간에 적당한 걱정은 업무의 성취를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아무 소용도 없는 걱정을 쓸데없이 사서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27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지금은 키가 커지기 위해서 영양 보충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해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키를 늘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키 크는 일은 전적으로 인간의 능력 밖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염려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옛날, 한국에 어떤 어머니가 우산 장사를 하는 큰아들과 짚신 장사를 하는 둘째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1년 365일, 두 아들에 대하여 걱정만 하는데 날이 화창하게 맑은 날은 날씨가 좋아서 큰아들이 하는 우산 장사가 안되면 어떡하나 걱정이고,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면 짚신 장사하는 둘째 아들 장사가 안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어머니가 눈을 돌려 세상을 밝게 보면, 날씨가 맑은 날은 "우리 둘째 아들이 장사가 잘 되어서 좋구나"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은 "우리 큰아들 우산 장사가 잘되어서 좋구나"하고 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년 내내 비가 오나 날이 맑으나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약 90% 이상이 거의 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가득 찬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문제를 놓고 아무리 고민해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 염려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과거에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을 가지고 오늘 아무리 고민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과거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 아무리 걱정해봤자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여러분, 쓸데없는 일에 염려하는 것은 마치 흔들의자(rocking chair)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움직여봤자 흔들의자는 여러분을 그 어느 곳으로도 옮겨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되시려면 꼭 해야만 할 염려와 염려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을 잘 분별하십시오. 그리하여 날마다 모든 쓸데없는 염려를 다 버리십시오.
셋째로,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돈 때문에 염려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시청각 교육을 하신 것이지요.
먼저 26절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보잘 것 없는 새, 그리하여 스스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챙기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련히 아셔서 먹을 것을 다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2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들판에 핀 꽃 한 송이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들에 핀 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련히 아셔서 입을 것을 다 챙겨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미물인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까지 아름답게 입하시기 때문에 31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이런 것 때문에 염려하는 것은 모두 이방인들, 즉 하나님 없이 사는 불신앙의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이런 것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사랑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 4: 19은 말씀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염려에 가득 차서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면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33절을 보세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세상의 불신앙인들과는 달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먹는 것, 입는 것은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폿 워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침례교 신학대학인 Southwestern Seminary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베이커 코우쎈(Baker James Cauthen) 교수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막 발발해서 중국이 쟁의 암운(暗雲)에 빠져 있었을 때인 1939년, 돌연 사표를 내고 중국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필 이렇게 위험한 때 중국으로 가냐고 물었을 때 코우쎈 교수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주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총성과 대포 소리가 나는 곳도 염려할 바가 못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세상 염려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結: 염려라는 쥐를 잡아라>
오래 전에 비행기가 처음 생겨서 항공 운행의 개척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공중을 날고 있는데 쥐가 뭔가를 열심히 갉아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종사의 지식으로는 쥐가 비행기의 주요 케이블과 조종 장치를 다 갉아먹을 경우 심각한 기체 결함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이미 출발지로부터 두 시간이나 날아왔고 그 다음 기착지까지 가려면 최소한 두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조종사는 처음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조종사는 곧 쥐가 무엇인가를 갉아먹는 설치류(rodent)라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런데 쥐나 토끼와 같은 설치류 짐승들은 땅 위나 땅 밑에서는 살 수 있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조종사는 즉시 비행기의 고도를 높여서 2만 피트 상공까지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쥐가 갉아대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쥐가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설치류인 쥐가 이 정도 높이에서까지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종사는 이렇게 함으로서 두 시간 후에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쓸데없는 걱정은 설치류 짐승인 쥐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정없이 갉아대면 결국 우리의 심신에 병이 듭니다. 조종사가 쥐를 잡기 위하여 고도를 높여 공중 높이 올라갔던 것처럼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기도할 때 염려는 죽습니다. 주님께 맡길 때 염려는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염려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 염려가 꼭 필요한 것입니까? 아니면 염려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입니까? 냉철하게 분별하여만 합니다. 쓸데없는 염려는 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쓸 것을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아멘.
염려로부터 자유하라
마태복음 6:24-34 / 서금석 목사
우리 가운데 날마다 염려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약 절반은 내일에 대한 염려와 노후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료는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반 정도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열이면 열 다 염려를 하면서 한평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사람마다 염려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를 찾아 내려가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염려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 평안,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염려의 뿌리요,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친구에게 "너는 늙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하는 말이 "내가 알기로는 늙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길뿐인데, 내가 이 방법을 택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대답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염려 없이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 살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는 사람 치고 근심과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1. 그렇다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이 염려를 재미있게 비유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아 대는 것입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소리는 요란하고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가고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굉장한 것 같기는 한데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익한 겁니다. 쓸모없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염려 자체가 버릇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버릇이 되고 고질적인 것이 되면, 마치 자외선에 너무 오래 피부를 노출시키면 피부가 빨리 노화되고 심지어 피부암에 걸리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과 영혼에 상당한 피해를 줍니다. 염려는 불면증, 위장병, 고혈압, 심장병, 두통, 시력상실 등을 발생케 하거나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염려는 정신에도 타격을 입힙니다. 신경쇠약, 우울증, 신경질, 무기력증, 판단력 상실 등을 유발케 합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염려는 영적으로 악영향을 미칩니다. 염려 끝에 성경에 어긋난 수단과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거나 미혹을 받아 잘못된 영에 접촉하게 됩니다. 극심한 염려는 신앙을 해이하게 합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그와 접촉하는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염려라는 단어의 성경 원어에는 "마음을 나눈다", "마음을 쪼갠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음을 나누어 찢는 것이 염려입니다. 이처럼 염려하는 것은 자신을 혹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생활의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영과 육을 망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 작은 사람에게 염려 주사를 놓는다고 해서 한번에 한자나 자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염려는 오늘로부터 나의 행복을 앗아가는 강도입니다.
2. 염려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까?
사실, 염려를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 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못하지만 염려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묶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⑴ 주인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므로 생기는 신앙의 부정적인 요인과 함께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인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왜 우리에게 염려가 있습니까? 결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두 주인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으로 염려를 극복하려면 주인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주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 우선, 하나님 제일로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을 중심으로 조정되고 배열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어요? 베드로가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갈릴리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을 때 그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어떻게 해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빈 배를 제공하고, 시간을 제공하고, 자기 일보다 주님의 일을 앞세워서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의 빈 배에 물고기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베드로에게 실제로 적용시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원칙을 적용하여 생활하면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염려에 대한 탁월한 대책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약속으로 인해서 마음 든든해집니다.
⑵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32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으십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습니다. 울음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똥 색깔만 보고도 아이가 배앓이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오장육부를 아십니다.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과 마음을 아십니다. 깊이 숨어 있는 것까지도 꿰뚫어 통찰하시며 아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몇 번 나타납니다. 25절 하반 절에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말씀하십니다.
31절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우리가 염려합니까?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기에 월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라는 말씀은 우리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격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모님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와 근심의 짐을 지고 끙끙 앓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그 짐을 주님께 다 맡겨 버리고 기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근심이 생기면 모든 근심의 짐을 주님께 다 맡겨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맡아 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시편 55편 2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시편 68편 19절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자녀 문제도 맡기세요. 사업문제도 가정문제도 맡기세요. 고민스러운 것, 걱정되는 것, 여러분을 짓누르는 것, 그것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입니다. 그것을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 시간에 그런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끗이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⑶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함으로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염려 때문에 생기는 불이익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삶의 우선순위에 혼란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25절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무엇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하고 어떤 일을 더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까? 염려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인지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선 순위를 바로 잡으라는 측면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사는 이 삶의 목적과 우선순위가 분명할 때 우리는 염려를 잊을 수 있습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을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마음속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평안히 있습니다. 희락이 있습니다.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영광이 있습니다.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을 구하라. 내속에서 내 집에서 내 나라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고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당연히 의로움을 구합니다. 변화된 삶의 모습을 구합니다. 구하라는 것은 그냥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현 되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내 속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애쓰라는 것입니다.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염려는 극복됩니다. 어둠이 물러갑니다.
⑷ 기도로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염려는 기도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메리 큐스만 부인은 수입은 적은데다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집을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식료품점에 50불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다섯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배고파 입을 벌리고 부인은 남의 집 빨래를 해주면서 헌 옷을 사다 아이들에게 입혔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하루는 아들이 연필을 한 묶음 훔치다가 들키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선생님한테 혼이 났습니다. 아들마저 이렇게 되자 부인은 앞으로 도저히 혼자 살아갈 희망이 없어서 근심하는 중에 정신 이상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으려고 연탄통을 열어놓은 채 아이들과 같이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부엌의 라디오에서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그 부인은 찬송을 들으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모든 문제를 혼자 단독으로 해결하려 하였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지 않았다.'
그 여자는 연탄불을 끄고 문을 열고 온종일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하자 변화가 왔습니다. 아직도 건강한 것 다섯 아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허물어져 가는 집에 세 들었으나 지붕이 있는 것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감사는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염려를 나 혼자 지고 근심하려 들지 마세요. 하나님과 상의하세요.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비극을 당하였을 때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외아들을 뇌막염으로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밤중에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병원에서 오는 전화인 줄 알고 겁을 냈습니다. 14번째 수화기를 들었을 때 병원에서 즉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겁에 질린 채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살아날 가망은 4분의 1밖에 없으니 용한 의사를 알거든 찾아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이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암당했습니다. 기도하자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자,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 뜻이면 살 것이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살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교회에 들려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드디어 이 부부는 하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고 그 후에야 평화스런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짐을 덜어주며 나 홀로 있지 않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이제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한숨을 쉬거나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당신의 축복을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돈 없다고 부자를 부러워하지만 두 눈을 10억불에 팔겠습니까? 두 다리를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손과 귀, 자녀 중 어느 것을 팔겠습니까? 당신이 가진 것을 계산해 보십시오. 삼성 그룹을 다 준다해도 팔지 않을텐데 우리는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가진 것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지 않고 우리는 늘 갖지 못한 것을 생각합니다.
⑸ 염려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언제나 생각이 나에게 집착되어 있는 한 염려나 근심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아예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염려가 그의 생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할 것을 찾는 사람에게는 결코 세상 염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꿀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자는 자기 문제로 고민하거나 염려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애틀의 프랭크 루프 박사(Frank Ruff)는 23년간이나 관절염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는 장애인이면서 인생을 넉넉하게 살 수가 있었는데, 그 비결은 남에게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있는 다른 장애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아 가지고 그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장애인들끼리의 단체를 만들어 서로 편지로 격려하였고 마침내 전국적인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매년 1만 4천여 통의 편지를 쓰고 방송과 집필로서 수천명의 병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목적 의식, 즉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세계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자기중심적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더 의미있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 기쁨을 그는 가졌습니다. 프랭크 루프 박사는 염려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참으로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염려를 없애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를 잊을 수 있고 남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남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일을 매일 하나씩 합시다.
링컨은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행복하려거든 그만큼 남에게 행복스럽게 할 만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을 제거하는 일이나 행복을 창조하는 일은 오직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데에서 이루어집니다.
뉴욕 어느 고아원에서는 하루에 세 가지씩을 의무적으로 실천토록 했습니다.
첫째, 매일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찾아 볼 것이요,
둘째는 매일 감사한 일을 하나씩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매일 선한 일을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 론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세상 그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 파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주님께서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염려할 필요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나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만 바라보세요. 그분 안에 평화와 안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 바라보고 내 모든 염려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주님, 저에게 이런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믿고 내려놓은 이 염려, 다시는 제 것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염려의 방향을 바꾸게 하십니다. 내 생각으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합니다. 선교 교육관 건축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전도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없어서 못할 것 같다구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가 돈으로 살아 왔습니까? 하나님 앞에 내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살아온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생명 다하고 그 다음 세대가 와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염려를 던져버리는 춘천중앙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마음의 평화를
마 6:24-34 / 박조준 목사
이 지구상에 인구가 50억을 넘어섰습니다. 그 숱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 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평화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처럼 찾고 있는 평화를 찾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그의 생을 통해서 꼭 가지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첫째가 건강 그리고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런 것들을 적어 가지고 그가 존경하는 경험 많으신 어른 을 찾아가 보여 드렸습니다. 이 어른은 젊은이가 적어 온 목록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시더니 그 청년을 향하여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 온 것들은 아주 훌륭한 것들이야. 그리고 일리 있는 목록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자네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 될지도 몰라 하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 엇을 빠뜨렸습니까? 하고 이 젊은이가 묻자 이 어른은 연필로 젊은이가 적어 온 목록을 벅 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마음의 평화 라고 크게 써 주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크게 깨달 았습니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나 사랑보다 권력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나중에 마음의 평화 라는 책을 써서 수백만 부가 팔렸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죠수아 리브만입니다. 사실 평화에 대한 내용의 책이 얼마나 많이 출판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음의 평 화를 얻기 위해서 그런 책을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세요. 이것은 평화로운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 세우신 근본 원칙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 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원리는 너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이 갈라지면 마 음이 서로 싸우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 안에 다툼이 있는 한 평화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편으로 다툼의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기 위해서 내려야 할 결정은 한 가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세상 재물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재물이란 것은 우리 육신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디에 우리 마음 을 미칠 것이냐. 어느 것이 내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인지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 느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롯의 처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 로 롯의 처는 하나님과 세상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하나만을 결정해야 하는 때 완전히 결정을 내 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따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떠나기도 해야 살겠고 그동안 차곡차 곡 모아 두었던 그 아까운 물건들을 놓고 떠나기는 너무 아쉽고 그래서 몸은 떠나면서도 마음은 소돔성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황불이 하늘로부터 내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타 버리게 될 때 절대로 돌아보지 말라 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그만 돌아보다 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롯의 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대해서 이야기도 했 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따라 소돔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소돔은 비옥한 땅이요 재물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평생 이런 곳을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롯의 아내는 마음에 큰 동요를 받았습니 다. 세상의 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소돔땅도 원 했습니다. 결국 최후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날이 왔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소돔성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과 구원의 길 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소돔성을 돌아다보았 습니다. 한 손으로는 별을 찾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더듬거렸던 롯의 아내는 마음이 둘로 갈라져 결국은 불쌍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는 말씀이 너무 옳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주도에 집회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저녁에는 집회를 인도하고 낮에는 시간이 좀 있어서 바다 구경을 했습니다. 멀리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바다를 보기만 해도 서울에 살던 사람에게는 얼마나 속이 시원해지는지요. 저는 바닷가에 서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출렁이는 바다 를 지켜보았습니다. 바다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썰물과 밀물이 계속 교차되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둘로 갈라진 마음 때문입니다. 하늘의 목소리가 바다를 부릅니다. 바다는 하늘에 있는 달의 자력에 의해서 끌려 올라갑니다. 그러나 이 지구가 나와 함께 머물러 있자 고 소리치기 때문에 바다는 완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지구와 달에서 울려오는 소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결코 평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 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을 결정할 때까지 결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 다. 우리 사람의 마음 속에는 주인이 되려고 싸우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하고 바르게 살기를 희망하는 고귀한 삶에 대한 이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 를 다 가지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괴테는 모든 사람은 건달과 신사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고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경향은 세 상의 것에 쏠려 세상의 것을 택하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평화는 없습니다. 왜냐하 면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찾을 때까지 참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는 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를 굳게 결심하셨을 때 그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 때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마음에 결심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아니하시고 행동해 야겠다는 주제가 섰습니다. 사람이 아무런 결심을 하지 아니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결심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시편에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쿼바디스 라는 책을 읽어 보셨으리라고 생각합 니다. 그 제목의 뜻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 도시를 개종시키는데 실패 하고 그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등지고 길을 떠나가는데 주님께서 나타 나셔서 베드로는 황급히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는 네 가 버리고 가는 로마로 가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기가 로마에 가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로마로 돌아간다는 것은 순교를 뜻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로 다시 돌아가는 베드로에게는 로마성을 피해서 빠져나올 때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정을 하고 나면 용기가 생깁니다. 아마 우리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찾지 못했을 것 입니다. 어떤 분이 말한 것 처럼 우리는 달리기 때문에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달 리지 않습니다. 어떤 노련한 선장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선원들을 향하여 폭풍을 정면으로 대하 라. 언제나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폭풍우를 견디어 낼 수 있는 방법이야 하고 소리쳤 다고 합니다. 우리의 결심은 용기를 동반합니다. 우리 마음에 완전한 결정을 하기 전에는 동요 가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결정을 하고 나면 용기가 솟아나고 그 마음에 평화가 깃드는 법입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이 엄습하는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그 마음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손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그 마음의 평화를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더러 의복과 음식과 세상 것에 대하여 염려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부 족함이 없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 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부족함이 없이 잔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마음에 만족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다고 해도 부족을 느낄 때 거기에 만족과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제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결정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 희에게 더하시리라 거룩한 삶이 반드시 고통스럽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 했습니다. 시편 37편 25절에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우선으로 택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절대로 버림을 당하거 나 걸식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찾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평화가 있습 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환경과 조건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이 달라지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 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 마음의 평화입니다. 환경이 나 조건이 주는 평안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무엇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의 평안이 참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평안을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평화를 소유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 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 망한다 고 했습니다. 두려워서 그럽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내가 잘못을 저질렀어. 언젠가는 반 드시 그 대가를 받을꺼야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범한 죄에 대한 대가로 인해서 오는 끊임없 는 공포가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는 모든 기회를 앗아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범한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범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을 알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주님께 용서를 빈 사람치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 없습니다.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회개하고 돌 아온 사람치고 냉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 려 하신다 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 기셨다 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 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깨끗해진다 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주님께 나아오세요. 그리고 모든 죄를 자백하므로 용서를 받으세요. 그래서 죄로 인한 두려움, 불안을 말끔히 씻어 버리세요. 참된 마음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시편 46편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 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사야 30장 15절에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 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잠잠하게 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놀라운 힘을 얻을 수 있 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 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기 때문에 장래의 일로 인해서 불안해하지 아니합니다. 담대하게 힘을 얻어 평화스러 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 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는 고 백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근심 하고 마음에 불안해합니까? 주님을 믿고 온전히 의지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 지하고 예수를 믿고 나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근심하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습 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 가 불 가운데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평화는 환경으로 인한 평화가 아닙니다. 환경이나 조건의 상관없이 주님이 나와 함께 하 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전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 떤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방 안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까? 여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언제 어 디서나 함께 하시는 것을 꼭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불안한 세상에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시기 원하십니까? 주님이 나와 꼭 함께 하시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 으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는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불안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살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속한 줄을 먼저 끊어 버리십시다. 그리고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용기를 가지고 사십시다. 우리의 잘못이 있으면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어놓아 용서를 받으십시 다.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꼭 믿고 그만을 의지하십시다. 그리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가 빼앗을 수 없는 참 마음의 평안을 안겨 주실 줄 믿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가집시다
마 6:24-34 / 박조준 목사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그 숱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 디로 말해 평화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처럼 찾고 있는 평화를 다 찾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입니다. 어떤 청년이 그의 생을 통해서 꼭 소유하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런 것들을 기록해 가지고 그가 존경하는 경험 많으신 어른을 찾아가 보여 드렸습니다.
이 어른은 청년이 적어 온 목록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시더니 그 청년을 향하 여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 온 것은 훌륭한 계획이야. 그리고 일리있는 목록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자네는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의 소유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될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이 청년이 묻자 노인은 연필로 청년이 써온 목록을 벅 그 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마음의 평화 라고 써서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크게 깨달았 습니다. 이 청년은 나중에 마음의 평화 라는 책을 써서 수 백만 부가 팔렸습니다. 그 청년의 이 름이 죠수아 리브만입니다. 사실 평화에 대한 내용의 책이 얼마나 많이 출판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를 얻 기 위해서 그런 책을 꼭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분명하 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세요. 평화로운 마음을 소유하기 위하여 세우신 근 본적인 원칙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 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원리는 너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면 마음이 서로 싸우기 때문에 평 화로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속에서 싸움이 있는 한 평화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 마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편으로 싸움의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 수님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기 위해서 내려질 근본적인 결정은 한 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 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세상 재물,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재물이라는 말은 우 리 육신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갈망을 표현한 말입니다. 어느 곳에 우 리의 마음을 바칠 것인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하 나를 결정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롯의 아내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요? 롯의 아내는 둘 사이 에서 하나를 결정해야만 하는 때 완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뒤를 돌아보았던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도 하였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따라 소돔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소돔은 비옥한 땅이요 재물이 많은 곳 이었습니다. 평생 이런 곳을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롯의 아내는 마음에 큰 동요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소돔도 원했습니다. 결국 최후의 선택을 해야 할 날이 왔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소돔 성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과 구원의 길 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돔 성을 돌아 다보았습니다.
한 손으로는 별을 찾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더듬거렸던 롯의 아내는 마음이 둘로 갈라져 결국 가련하게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는 말씀이 옳습니다. 한 열흘 전에 제 아내와 함께 제주도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결혼한지 21년만에 모처럼 처음으 로 같이 갔었습니다. 제주 영락 교회 김종식 장로님이 일부러 시간을 내주셔서 여러 곳을 구경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인상 깊었던 일은 제주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였 습니다. 겨울 바다 그대로 멋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해변에 서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출렁이는 바다를 지켜보았습니다. 바다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바다는 왜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할까? 그것 은 둘로 갈라진 마음 때문입니다. 하늘의 목소리가 바다를 부릅니다. 바다는 하늘에 있는 달의 자력에 의해서 딸려 올라가지만 이 지구가 나와 함께 머물러 있자 고 소리치기 때문에 바다는 완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지구와 달에서 울려오는 소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바다는 결코 평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 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인을 결정할 때까지 결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 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주인이 되려고 싸우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하고 신성하게 살기를 희망하는 고귀한 삶에 대한 이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 세 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괴테는 한 인간이 건달과 신사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을 후회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택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마음의 평화를 소유할 수 없 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찾을 때까지 참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는 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를 굳게 결심하셨을 때 그 장면을 생각 해 보세요. 예수님은 해야 한다는 음성,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망설이지 아니하고 굳게 결심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아니하고 행동해야겠다 는 주제가 섰습니다. 아무런 결심을 갖지 아니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우 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결심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 하고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 였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쿼바디스 라는 책을 읽어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제목의 뜻은 어디로 가 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를 개종시키는데 실패하고 그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 다. 그래서 길을 떠나가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어디로 가느냐? 고 말씀하셨습니 다. 주님의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 발길을 돌이켜 그 성에 가서 일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깨 닫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순교를 뜻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는 베드로 가 도피하여 로마성을 빠져나올 때 느끼지 못했던 평화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면 용기가 생깁니다. 아마 우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 올라 가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면 거기에서 어떤 어려움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말 한 것처럼 우리는 달리기 때문에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달리지 않습니다. 어떤 노련한 선장(船長)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선원들에게 폭풍을 정면으로 대하라. 언제나 그렇게 해. 그렇게 하는 것이 폭풍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방법이야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우 리의 결심은 용기를 동반합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결정할 때까지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결정하고 행하면 용기가 솟아나고 그 마음에는 평화가 깃드는 법입니다. 주님은 고통 이 엄습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그 마음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 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그 마음의 평 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 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의복과 음식과 물질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 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풍 족하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으로 주시지 않으 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는 하 나님을 제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결정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거룩한 삶은 반드시 고통스럽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 편 기자는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 (시 37 : 25)고 하였습니 다. 그렇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우선으로 택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절대로 버림을 당하거 나 걸식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찾는 사람의 마음 속엔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 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무엇보다도 삶의 내적인 평안을 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 내부의 긴장과 투쟁 그리 고 혼란으로 우리의 삶이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이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평안과 같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평안을 받아들이 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평화를 소유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 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면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 : 9)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두려워서 그럽니다. 죄 를 범한 사람은 내가 잘못을 저질렀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을꺼야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인해서 오는 끊임없는 공포가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는 모든 기회를 앗아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범한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여 참된 용서 를 구할 뿐더러 다른 사람을 내가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혹시 마음 속으로 글쎄, 다른 사람의 죄는 몰라도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기 어려울꺼야. 또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릴 염치도 없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저 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 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 고 하셨습니다. 우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된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용서못할 죄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주님께 나아오세 요. 그리고 모든 죄를 용서받으세요. 그래서 죄로 인한 두려움, 불안을 말끔히 씻어버리세요. 참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 님 됨을 알지어다 하였습니다. 이사야 30장 15절에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 고 하였 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잠잠하게 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놀라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 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 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기 때문에 장래의 일 때문에 불안해하지 아니합니다.
담대하게 힘을 얻어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 아니하리니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마음 이 평안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예수를 믿고 나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근심하므로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꼭 믿습니까?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 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환경으로 인한 평화가 아닙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전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 떤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방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언제 순교를 당할는지 알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까? 이유는 다른 것 아닙니다. 주님이 어디서나 언제나 함께 해 주시는 것을 꼭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안한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나와 꼭 함께 해주시는 사실을 믿으세요. 우리 마음의 평화를 누가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불안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살게 하여 줍니다.
이 세상의 줄을 끊어 버립시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십시다. 우리의 잘못이 있으면 솔직히 주 님께 내어놓아 용서받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그만을 꼭 의지하십시다. 그리하면 세상의 누가 뺏을 수 없는 참 마음의 평화를 안겨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