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의 섬나라 필리핀에서 살아온 지 10년이 되었지만 이번만큼 짜릿한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의 출발은 어느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정보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바탕가스 Laiya란 곳에 넓디넓은 백사장이 있는 해변이 있는데 멀리 걸어나가도 물 깊이가 허리까지 밖에 안차며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며 우리에게도 적극 추천해주셨다. 그래서 무료하던 차에 우리 부부와 처형 내외와 함께 4명이서 무턱대고 출발하였다.
길도 모르고 사전 예약도 안하고 핸펀 내비만 믿고 간단한 짐만 챙겨서 길을 나섰다.
내비가 알려주는 예상 소요시간은 2시간 45분 정도...
꾸불꾸불한 산길을 지나 바탕가스로 향하는 Star Tollway란 한적한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다가 중간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우리가 즐겨마시는 저렴한 아이스커피(원화로 약 800원 정도)를 사들고 다시 출발~
드디어 톨게이트를 빠져나와서 라이야 방향으로 달리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몇 개의 복잡한 마을을 지나고 평화로운 시골길을 달리다가 반가운 Laiya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달리는 도로 옆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진 해안도로를 상상했었는데 실제는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고 비치리조트 간판들만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여러 간판을 지나치다가 낚시하는 그림이 있는 예쁜 간판이 눈에 띈다. 여기 필리핀에 살면서 처음보는 간판에 이끌려 샛길로 들어가 보았는데 리조트에는 오피스도 잠겨있고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필리피노 남자 한명이 릴낚시대를 들고 지나가기에 붙잡고 여기서 낚시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그렇단다. 무슨 고기가 잡히냐고 물으니 이 나라 대표 어종인 띨라삐아와 방우스가 잡힌단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지만 우리가 원하던 하얀 백사장이 있는 해변가 숙소가 아니기에 좀 더 둘러보기로 하였다.
한참을 가다가 비치리조트 간판을 보고 들어가보니 제법 규모가 크고 수영장 등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해변이 가까이 있어서 좋긴 한데 기본 가격이 6,000페소(현재 환율로 12만원 정도)란다. 다시 돌아나오는데 어떤 필리피노 청년이 따라붙더니 자기가 좋은 숙소를 소개해 주겠단다. 바로 옆 2층 건물인데 올라가보니 좁은 방에 이층침대가 2개가 있는 전형적인 필리피노들의 숙소였다. 가격은 2,500페소(약 5만원)라는데 이건 분명 바가지 요금이다. 우리가 외국인으로 보이니까 덤태기 씌우려는 심보가 틀림없다 내가 보기엔 1,000~1,500페소면 충분해 보이는 방인데...
이것들이 우릴 뭐로 보고 ㅋ 우리도 필리핀 내공이 10년인데...
너무 방이 답답해 보이고 주변환경이 좋지 않아서 패스~~~
또 가다보니 이번엔 엄청난 규모의 리조트가 보인다.
비싸보이지만 경험삼아 한번 들어가 보았다. 역시 모든 시설이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4~5성급 숙소로 보였다. 1박 비용은 뷔페식 식사 3끼를 포함하여 4인 기준 13,000페소(약 26만원)... 마닐라 부유층들이 휴가를 즐기러 즐겨찾는 리조트인 것 같았다. 여기도 패스~~~
계속 바탕가스 시티 방향으로 가는데 산길을 깎아 도로를 새로 만드는지 여기저기 공사중이라 비포장 도로에 길이 엉망이다. 이런 험한 곳에 리조트가 있을까 의심하는 순간에 어김없이 비치리조트 간판이 보인다. 샛길을 따라 해변쪽으로 들어가보면 리조트가 나오는데 어떤 곳은 쾌쾌한 냄새가 나고 허름한 집을 몇 채 지어놓은 어촌마을 같은 곳도 있고, 어떤 곳은 말 그대로 화이트비치 리조트이고 부대시설들이 좋은데 가격이 비싸다.
대충 몇군데 다녀보니 해변 가까이 있는 숙소는 6~7,000페소 정도, 해변이 좀 떨어진 숙소는 2,500~3,000페소 정도에 1박 비용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산길을 따라 계속 오르락 내리락하다가 점점 길이 험해져 도저히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몇 군데를 더 둘러보다가 별로 마음에 드는 곳이 없기에 처음 보았던 낚시그림이 있는 리조트를 다시 가서 숙박비용을 알아보고 4,000페소가 넘지않으면 그곳에서 머물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시 달리고 달려서 드디어 도착을 했는데 역시 오피스에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마침 인부로 보이는 사람이 한명 지나가기에 이 리조트가 운영중이냐고 물어보니 잠깐 기다려보라며 어디론가 간다. 잠시 후 여자 한명이 상냥하게 인사하며 다가와서 자기가 안내를 하겠단다. 숙소를 여기저기 보여주는데 대나무로 만든 니빠헛(Nippa Hut)은 2,500페소, 10명 정도 들어가는 좀 더 큰 방은 5,000페소, 2층으로 된 분위기 있는 독채도 2,500페소... 가격이 괜찮네???
니빠헛은 아무래도 대나무로 만들어서 좀 눅눅하고 컴컴하고 답답해보이는 반면 2층 독채는 독립된 공간이고 돌벽이 인상적이며 확장형 침대가 있어서 4명이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이는데 가격도 같다니 뭘 더 망설이겠는가? 그런데도 우리의 용감무쌍한 한국 아줌마...협상의 귀재(?)...가격 깎기의 달인(?) 앨다여사(My Wife)는 필리피노 여성과 실랑이를 하더니 1,500페소에 흥정을 마친다. 대단혀~ ㅋ 놀라워라!!!
숙소를 정리하는 동안 대나무 정자에 앉아서 준비해 온 김밥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였다.
잠시 후 숙소에 들어가 에어컨을 먼저 켜놓고 짐을 정리하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는 바로 낚시대를 챙겨나왔다. 낚시터는 바닷가에 있는 연못인데 숙소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흙먼지가 날리는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보니 마치 그 옛날 대학시절 한국 진천에 있는 저수지로 낚시하러 가던 생각이 났다.
드디어 연못에 도착했는데 그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 크고 넓었다.
바다 바로 옆이라 만조 때는 바닷물이 들이칠텐데 괜찮을까? 내가 알기로 띨리삐아와 방우스란 고기는 민물에서 자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바닷물에도 산다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 필리피노에게 물어보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점에서도 산다고 한다)... 작년에 구입한 휴대용 릴대를 처음으로 펼치고 미끼로 삼겹살을 잘게 썰어 달아서 캐스팅을 했는데 릴링을 하다보니 뭔가 묵직한게 느껴져 당겨보았더니 커다란 나뭇가지가 딸려온다. 에이 이게 뭐람~ 릴대를 흔들어 나뭇가지를 떨쳐냈는데 아니~고기가 걸려있는게 아닌가? 방우스였다. 힘이 좋아서 이리저리 도망가려고 펄떡이는데 간신히 끌어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떨구고 말았다. 아쉽다. 첫 고기였는데... 살펴보니 낚시바늘이 펴져있었다. 하긴 10년 전에 한국에서 가져온 바늘이니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으리라~
그 후로 별다른 입질을 못받고 삼겹살 조각과 빵조각을 번갈아 써가며 계속 시도를 하는데 옆에 있는 초등학교 1학년 될까말까 한 필리피노 꼬마놈이 엉성한 대나무 낚시대에 바늘을 달고는 연실 방우스를 잡아내는게 아닌가! 우린 번듯한 릴낚시대를 가지고 힘도 못쓰고 있는데... 이런 젠장 젠장~~~
가만히 살펴보니 고기들이 물 속 깊이 있는게 아니고 거의 수면에 떠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뜰낚을 하니까 입질이 오기 시작하였다. 아하~ 바로 이거구나!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고기를 낚아내보자~
한마리 두마리 세마리 아~ 재미있어라... 힘이 좋아서 간만에 손맛을 제대로 느껴본다.
6시반쯤 되니 날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나오기로 하고 낚시대를 정리하여 숙소로 향하였다. 잡은 물고기는 킬로당 100페소를 내면 숙소에서 맛있게 구워준다고 하여 큰거 2마리만 우리 주고 나머진 너네들 먹으라고 필리피노 직원에게 주었다. 샤워를 한 후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는 4명이서 치열하게(?) 고스톱을 치며 밤11시 반에 하루를 마감하였다.
다음날 아침 컵라면으로 아침을 가볍게 해결하고는 바로 낚시터로 향하였다.
어제 갔던 길이라 한결 정겹게 느껴지는 시골길을 걸어 도착하였는데 맹그로브 숲까지 바닷물이 들이차서 필리피노 꼬마들이 신나게 헤엄을 치며 놀고있었다. 각자 자리를 잡고 가져간 치즈빵을 미끼로 낚시를 시작하였다. 처음엔 잠잠하더니 곧 소식이 퍼졌는지 입질이 시작되었다. 이상하게도 띨라삐아는 한마리도 안 잡히고 계속 방우스만 잡혔다.
낚시가 조금 지루해질 때 쯤 바닷가로 탐사를 갔던 앨다가 큰 소리로 나를 부른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꿈에 그리던(?)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에 달려가보니 정글의 법칙에서 봤었던 맹그로브 숲이 멋지게 펼쳐져 있고 얕으막한 곳에 바다달팽이와 소라, 조개 등등을 많이 잡아놓고 있었다. 멋진 산호들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신나게 바위 틈을 헤치고 다녔다.
숙소 체크아웃 시간이 11시라서 다음에는 장비를 더 챙겨서 또 다시 오겠다고 다짐을 하며 모든 짐을 챙겨싣고 출발하였다. 도중에 필리핀 대표 대중음식점인 이나살(Inasal)에서 맛있는 치킨바비큐로 점심을 먹고 탄산이 톡 쏘는 스프라이트로 입가심을 한 후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애초 큰 기대는 안하고 그냥 하얀 백사장이 있는 해변에서 즐기다 오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였는데 낚시간판이 시선을 끌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바다달팽이까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린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곳에서의 황홀한 시간에 비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만족스런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