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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쌓는 보물
마 6:19-3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19-34 /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눅12:33-34] 이 땅위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땅에서는 좀이 먹어 없어지거나 도둑을 맞기 쉽다. 20) 그러므로 그것들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서는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갈 염려도 없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눅11:34-36]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깨끗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고 23) 네 눈이 악한 생각과 욕망으로 흐려져 있다면 너는 심한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그 어둠을 어찌 이루 다 말하랴! 24)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눅16:13] 아무도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며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극진히 위하며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눅12:22-34] 그러므로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 설 교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마 6:24-34 / 엄기호목사
유명한 기독교 영성운동가 ‘헨리 나우웬’은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염려’란 마음에 ‘혹시’로 가득찬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찌하나’, ‘혹시 시집 못 가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멍청하고 미련한 짓입니까? 이처럼 ‘혹시’가 내 마음에 염려로 자꾸 차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조급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문제는 이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원어는 ‘메림나오’이고, 영어로는 ‘Worr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Worry’의 어원에는 ‘물어뜯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또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는 무서운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질식해 죽인다’, ‘숨을 막는다’, ‘목을 물어뜯어 죽인다’는 끔찍한 의미들이 ‘염려’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목숨에 대한 염려를 하고, 의복에 대한 염려를 하고, 음식에 대한 염려를 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고, 생활과 세상의 일에 대한 염려를 합니다. 재리의 유혹 때문에 염려하고, 결혼을 해도 염려하고, 안 해도 염려합니다. 학생들은 입시에 떨어질까 염려하고, 청년들은 이성에 대한 염려하고, 남자들은 지위나 명예를 잃을까 염려하고, 여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뻐보이나’, ‘뚱뚱하지는 않나’, ‘남편이 딴 여자에게 맘을 쏟지는 않는가’ 하며 염려하고, 노인들은 ‘늙어 보이지는 않는가’, ‘노후를 누구에게 의탁할까’ 염려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친 염려, 근심과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질식시키고, 결국 영과 육을 파멸시키는 독소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염려하라’고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염려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5장 25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러므로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우리는 전도를 위해 염려하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염려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나를 염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염려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7절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죄 가운데 빠질까, 내가 한 말 때문에, 성도를 실족케 할까,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불신자가 구원받는 것을 방해할까 염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염려해야 할 것들은 영적인 일을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위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염려하고, 믿음에서 떨어질까 염려하고, 특히 불신자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염려’라는 말이 365번 나오는데, 본문에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6회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염려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공중의 새를 보라
본문 26절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비롯해서, 모든 창조물들을 돌보십니다. 새들은 인간들처럼 양식을 마련하거나 모아두는 데 급급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인간이 이러한 새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공중에 나는 한 마리의 새는 사람에 비해 그 볼품이나 수명이나 가치로 보아서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십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2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한 정신병자를 위해 2천 마리의 돼지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가치는 돼지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셨고, 한 사람의 생명을 2천 마리의 돼지보다도 더 값지게 보신 것입니다. 사람은 돈이 있든 없든, 지위가 높든 낮든, 건강하든 안 하든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여기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은 ‘공중에 날고 있는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잠자거나 졸거나 앉아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새가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를 말합니다. 힘차게 무엇을 하기 위해 날아가는 새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날고 있는 새를 기르십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 힘차게 날고, 열심히 날고 있는 새를 먹이시고, 새장에 갇혀서 먹이만 얻어먹는 새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숲을 찾아다니는 새를 돌보십니다.
또 공중의 새는 어디론가 목표를 향해가는 새입니다. 새장 속에 갇혀있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새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엇인가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새들과 같이 육체적 양식에 집착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더 크신 은혜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본문 28~29절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백합화는 ‘아네모네’라는 양귀비꽃입니다. 이 꽃은 하루만 피는 꽃이요, 오늘 피었다가 내일은 지는 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처럼 의복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와 길쌈을 하지 않더라도 모든 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주셨고, 나아가서는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옷보다 더 화려한 모습으로 키워주셨습니다.
본문 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먹고 입는 일을 위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를 불신하는 이방인들의 태도입니다. 이방인들이란 천국의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없는 사람들, 신앙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이 땅에서의 삶만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보다 더 나은 삶,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지위를 얻고자 살아가고, 당장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전부요,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먹고사는 일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이들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안에 오직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면 우리의 삶의 양식은 달라져야 합니다. 땅의 일을 염려하는 자는 육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도는 영에 속한 자로서 하늘의 일을 염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돌보심의 교훈을 받고도 생활의 염려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고 믿음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본문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된 하늘나라에 대한 복음을 듣고 순종하며, 전파하기를 힘쓰라는 뜻이고 나아가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또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삶의 의를 추구해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 성령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나머지 부수적인 것은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솔로몬이 의로운 통치를 위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지혜뿐 아니라 부귀와 영화까지 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약속의 말씀은 언제든지 이루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들을 행하시는지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부요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4-34 / 김상복목사
영국 옥스퍼드 의과대학에서 웃음에 관하여 연구한 결과를 보면 어린 아이들은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 자라는가 봐요. 나이가 들수록 웃음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어른은 하루에 15번 정도 웃을까 말까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갈수록 염려와 근심과 고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고민하고 염려할수록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고민할 일이 없어지나요? 아니지요. 뭐든지 많이 할수록 잘 되는 법이어서 근심도 꾸준히 반복하고 연습하면 더 잘됩니다. 점점 근심걱정이 많아지고 웃음이 사라집니다. 웃음에 필요한 근육도 점점 쓰지 않으니 표정이 딱딱해지고 성품마저 굳어져서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70~80세가 되면 얼굴에서 웃음이 거의 사라지면서 결국 영원히 웃지 않기로 작정을 한 듯 굳은 얼굴로 끝날 수 있습니다.
요즘 경제위기 때문에 웃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통을 당하고 힘들어합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모두들 내년에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염려합니다. 금년은 2008년이고 오늘은 11월이 23일인데 내년 중반의 일을 미리 고민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형편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인생을 살되 염려는 하지 말고 살아라.”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생명을 지탱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안 주시겠습니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눈을 주신 것은 볼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귀를 주신 것은 들을 것이 있고, 입을 주신 것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손은 손으로 잡을 것이 있기 때문이요, 발은 갈 곳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 수행할 일들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자원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먹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도 주실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옛날에 저처럼 북한에서 내려온 같은 학년의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북한에서 집을 여러 채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던 집안이었으나 자본주의자로 찍혀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어요. 부모님들은 집을 다 두고 빈손으로 6.25전쟁이 나기 2년 전인 1948년에 아홉 명의 자녀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셨답니다. 온 가족이 고생을 참 많이 했고, 제 친구도 학교에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공책을 팔아 어렵게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를 굶었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루 밖에 안 굶었으니까요. 사흘, 아니 며칠씩 굶은 사람들도 많죠. 그 가운데 한 명이 저 입니다. 옛날에 굶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단 하루만 굶고 나머지 날들엔 다 먹었으니,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먹여주실 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간증이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루도 안 굶어 본 사람은 그 친구와 같은 간증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하되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노력은 하되 근심은 빼고 하십시오. 거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근심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염려하고 근심해서 키를 한 자나 더 크게 할 능력이 있느냐?” “걱정하면 네 몸의 세포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여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망가진다. 걱정은 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걱정은 접어놓고 살아라.” 우리가 염려하는 수많은 염려들이 사실상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긍정적 사고의 능력”이란 책의 저자 노먼 빈센트 필 박사의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 가운데 40%는 절대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30%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하니 70%가 쓸데없는 걱정인 셈입니다. 나머지 30% 중 22%는 별 것 아닌 사소한 걱정이며 4%는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걱정거리는 4%밖에 안 됩니다. 96%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일이 될지 안 될지 염려와 고민하면서 하면 될 일도 잘 안 됩니다. 에너지가 분산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늘 걱정을 하는 것일까요? 평생 걱정을 훈련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별로 걱정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삽니다. 저도 중학교 때부터 걱정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니까 걱정거리가 더 많아지고,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까 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걱정이 걱정을 낳아 걱정이 더 커지는 과정이 되풀이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분이 매일 하도 걱정이 많아서, 자기가 걱정 많은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걱정이 많지?’ 그래서 궁리를 하여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에만 걱정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수요일을 ‘걱정의 날’로 정하고 상자를 하나 만들어 마음속에 있는 걱정거리들을 적어 넣었습니다. 다음 수요일에도 똑 같이 걱정거리들을 적어 넣기를 반복했습니다. 나의 걱정거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 상자에 넣는 것은 내 마음속의 걱정을 상자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걱정거리들을 떼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걱정하는 것을 ‘불안’이라고 하지요.
얼마 후에 이 사람은 그동안 상자 속에 넣었던 걱정거리들을 꺼내어 읽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것들로 잔뜩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내가 걱정했던 일들은 실제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난 일들도 내가 걱정한 그대로 되지 않았네. 내가 그동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걱정해왔구나!’ 여러분도 이 사람처럼 여러분의 걱정거리를 적어서 상자에 넣어보세요. 그리고 2~3주 후에 꺼내 보십시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걱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가 돌보시리라.” 베드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이 목숨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저 공중의 새를 좀 봐라. 저 들에 있는 백합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루 있다가 없어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거든,” 그리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물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들이 저 공중의 새나 저 들의 짐승, 꽃이나 풀보다 얼마나,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가! 너희들은 너무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수가 없다. 무관심하게 팽개쳐두실 수가 없다.”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귀한 보물이 있으면 잘 돌보고 보관하지 아무데나 팽개쳐 놓습니까? 아닙니다. 잘 돌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너무 좋다, 너무 훌륭하다, 너무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들은 그저 ‘좋다’고만 하셨습니다. 너무도 귀한 우리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했으면 그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라요. 하나님은 우주보다 우리 한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나라에 갈 때까지 일평생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고 돌봐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염려를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다면 한 가지 염려를 하십시오. 약해진 믿음을 염려하십시오.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약해진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약한 것을 염려하십시오. 내 믿음이 왜 이렇게 작아 졌는가, 내 믿음이 왜 이렇게 부족한가 염려하세요. 믿음이 너무 약해져서, 너무 흔들려서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한 존재로 만드셨는데 이렇게 염려로 나 자신을 망치고 있다니! 스스로를 돌아보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믿음이 부족한 저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제 약해진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걱정하고 고민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내 믿음을 강건케 하여 주시옵소서. 내 작은 믿음을 키워주시옵소서. 내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옵소서.’ 이런 걱정은 많이 하면 할수록 축복입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난주 동안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묻혀 살았다면 오늘 이 자리를 떠날 때 절대로 그것들을 다시 가지고 돌아가지 마십시오. 모든 근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이것이 제 걱정이었고, 이것이 제 근심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고 돌봐주실 것을 믿고 맡기오니 맡아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염려는 뒤에 두고 평안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께 아뢰는 분들은 해결을 받습니다. 문제가 풀립니다. 염려가 사라집니다.
제가 대학생 때 읽은 칼라일의 “행복론”이라는 책을 보면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잠을 못 자는 때가 있었습니다. 칼라일은 잠이 안 올 때는 양을 세라고 합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아흔 아홉 마리를 세면 잠을 잘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어떤 날은 200마리를 세어도 잠이 들지 않더군요. 잠을 잘 자기 위해서 “따뜻한 우유를 마셔라”, “샤워를 해라”, “저녁에 좋은 음악을 듣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라” 등의 조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책에 보면 잠이 안 올 때는 일어나서 뭐든지 하라고 합니다. 잠이 안 올 때 불을 꺼놓고 누워있으면 어두운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생각할수록 뭔가 잘 안 될 것 같고 희망이 안 보입니다. 잠이 안 오면 불을 켜고 열심히 책을 읽든지, 성경을 읽든지, 기도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잠이 오는데 그 때 자면 된다는 것입니다. 잠은 언제 자야 하는가? 잠이 올 때 자는 것입니다. 잠이 안 온다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도 “내가 여호와께 구함에 그가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건지시리로다”라는 말은 신앙고백입니다. “내 앞에 걱정스럽고 두려운 문제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믿으면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근심 걱정과 믿음은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근심이 사라지고 근심이 커질수록 믿음이 작아집니다. ‘주여, 나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믿음을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문제가 크면 클수록 내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주셔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대로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김칫국을 이미 마셨는데 어떻게 합니까? 떡을 주실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이렇게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인생을 돌봐주십니다.
왜 우리가 걱정하지 말아야 하나?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돌봐주실 준비가 이미 되어 계십니다. 32절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3살짜리 아들이 “엄마, 내일 아침에 먹을 거 있어? 없을 것 같아 걱정이야!”라고 한다면 엄마가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 여러분과 저의 일생을 끝까지 돌봐주실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도 목사님, 인생을 걱정 안 하고 살 수 없잖아요! 조금씩은 해야죠.” 그래요. 정말 걱정을 해야 한다면 하루씩만 하십시오. 주님이 그러셨죠.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문제가 일어나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까지 몇 달, 몇 년 후의 것들까지 꾸어다가 미리 걱정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고 우리 삶에 평화가 없습니다.
본문에 “네가 눈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질서와 섭리를 여러분이 눈을 들어서 보십시오. 새와 꽃과 짐승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달으십시오. 들의 토끼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 토끼도 돌보시는데 하물며 나를 돌봐주시지 않으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자연을 보고 지혜를 배운 것처럼 눈을 들어 자연을 보시면서 여러분도 인생을 배우십시오.
28절에는 “생각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배우고 머리로 생각해 보고 배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머리를 주셨으니 이치적으로 생각해보라는 것이지요. 사물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돌봐주시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요? 더욱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지금 이 시간까지 지내온 것이 주님의 은혜인데 앞으로 남은 인생도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돌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저도 종종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오늘까지 은총 베푸신 하나님께서 남은 인생도 베푸실 줄로 믿습니다.’ 믿는다는데 하나님께서 안 하실 수가 없습니다. 생각은 하고 눈은 떠서 보되 염려는 버리십시요. 일은 하되 염려하지 마세요. 믿기는 하되 염려는 하지 마세요. 기도하되 염려는 하지 마세요. 감사하되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하나님과 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것이고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끝까지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많으면 제대로 키우기 힘이 드니까 아이를 안 낳든지, 아니면 한 둘만 낳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들은 최소한 4~12명을 낳으셨습니다. 그 시대 우리 부모님들이 부자였습니까? 아니지요. 얼마나 못 살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남과 북에 양쪽에 있는 저희 형제자매가 아홉인데 모두 대학을 나왔습니다. 대학원 나온 형제들도 몇 명 있고요. 돈이 있어서 공부했나요? 공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 제가 돈은 없는데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공부하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저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져왔던 염려를 도로 갖고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주셔서, 우리의 염려는 접어놓고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화 속에 기쁨으로 감사하고 기도하며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찾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평생 체험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마 6:24-34 / 이성우 목사
이 세상에서 제한된 시간, 제한된 능력, 제한된 기회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성공적이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그 정해진 우선순위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서 달라지겠습니다만 꼭 필요한 두 가지를 말한다면 그것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을 우선하는 것과 가장 서둘러서 먼저 처리할 일을 우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부지런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어떤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인지를 잘 구분해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것에 따라서 일을 잘 처리해간다고 한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이 정한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이루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히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까라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일까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게 되는 중요한 분깃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며 실패한 인생인지, 그리고 어떤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며 실패한 인생인지의 문제는 분명하게 구분지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을 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제한된 인생을 사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으로 이어져 가느냐라는 것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를 많이 가졌느냐 혹은 많은 것을 누렸느냐 라는 식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갈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그런 식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한 판단 기준일 뿐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우리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존재,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서의 삶만으로 끝나게 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6장 24절-34절까지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산상수훈’의 한 대목에 속하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려고 하고 있는 가장 중심적인 내용,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과연 어떠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그 맡은바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7장의 전반부인 1-18절까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관한 교훈이며, 후반부인 19-34절까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주제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주제입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제나 기도, 혹은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을 함에 있어서 외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의 심령 가장 깊숙한 부분이 하나님 앞에서는 속속들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며, 무엇을 먹고 입을까를 염려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고 계신다는 ‘신전 의식’이 투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하늘에 속한 천국 시민으로서 이 세상을 나그네의 심정으로 초연하게 살아가도록 요청받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좁은 길의 삶은 고뇌의 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광과 기쁨의 길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의 경우에도 경건생활과 관련된 전반부의 말씀과 일상생활과 관련된 후반부의 말씀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둘을 분리시켜서 따로 따로 생각하지 말고 연장선상에서 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나 기도, 그리고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이 뒷받침되게 될 때 비로소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중심주의로, 혹은 하나님 제일주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게 할 때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먹고 마시는 문제와 무엇을 입을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러한 삶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 성공적인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결론적으로, 인생의 최고 가치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깨달아 알아서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필요한 것일 뿐인 것들을 위해서 온갖 정열을 다 쏟으면서 살기보다는 최고로 중요한 것을 찾고 그것을 누리는데 힘쓰게 되면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채워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4절 말씀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면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결국 이 세상에는 두 주인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이 세상적인 것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 두 부류의 주인들 중에 어느 한 주인을 섬기면서 자기가 섬기는 주인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나머지 말씀들은 이러한 큰 틀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모습의 삶의 방식을 나란히 대조시켜서 제시함으로 무엇을 삶의 최고의 가치, 곧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갈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결단하도록 인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 하나님을 열정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며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관계 맺게 되는 세 가지 대상이 있는데, 이들 세 가지 대상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 맺기를 하느냐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대상 가운데, 첫째는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은 섬김과 경배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최고의 가치가 되시는 분으로 우리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대상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이웃인데, 이 이웃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함께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살아가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에는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을 갖추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재물인데, 이 재물은 지배의 대상으로서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지혜롭고 의미 있게, 그리고 가치 있는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균형 잡힌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았던 행복한 인생의 한 사람을 잠깐 소개한다고 하면,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 8-16절에 소개되고 있는 시돈 땅 사르밧 성에 살고 있었던 한 과부를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 다투어 우상 숭배에 빠져들던 때에, 이방 땅 시돈의 사르밧에 살던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요구대로 이제 마지막 남은 떡 가루 한 움큼과 기름을 가지고 자기와 아들을 위해서 떡을 구워 먹기 전에 먼저 그것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그의 집에 있는 가루 통에 가루가 다 하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여인입니다.
또한 우리가 신약성경으로 눈을 돌려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의 아름다운 행동이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찾아 읽어볼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6장 1-15절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소년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의 무대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세다 광야이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자기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데,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지만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을 때, 한 소년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담겨있는 자기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내어드림으로써 그것을 가지고 5천명쯤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둬들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소년은 자신의 헌신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많은 무리들이 함께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으며, 주님의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 보이게 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두지 않고 재물을 주인삼고 섬기며 그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다가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한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12장 13-21절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소출을 거두어들이게 되었지만 재물에 대한 탐심에 사로잡혀서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 만족감에 사로잡혀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들의 신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일꾼을 존경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재물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밤새워 고민할 일
마 6:25-34 / 이정익목사
어느 회사에서 10년 근속한 사원에게 보너스로 2개월간 유급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그 사원은 한편 좋았지만 또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원이 깊이 생각한 후에 유급휴가를 포기하고 회사에 반납했습니다. 상사가 “왜 휴가가지 않고 반납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원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포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없는 동안 회사 운영이 잘 안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이고 또 하나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회사가 제대로 잘 운영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산장사 소금장사 두 아들을 둔 어머니와 같은 심정입니다. 비가 오면 소금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고 날이 좋으면 우산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는 어머니는 일 년 내내 걱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 같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오든은 현대는 “불안해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리스터는 오늘을 “각종 염려로 목말라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래서 많이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불안해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말씀 중 말씀이고 교훈중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가서 주옥같은 교훈을 주셨다 해서 산상수훈이라고 했고 너무 값진 교훈이라 해서 산상보훈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5장 첫머리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십니다. 그 복은 진정한 복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고 그 삶의 내용과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중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기도하는 방법을 말씀하시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삶에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물질과 함께 섬길 수가 없습니다. 물질에 열중하다 보면 하나님은 섬길 수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와 더 궁극적인 문제들이 많은데 그런 중요한 문제들은 생략하고 불필요한 일로 근심과 걱정한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사람들은 겉은 멀쩡한데 모두 속마음에는 별의 별 근심과 걱정들로 가득 쌓여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기인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다고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못하고 모든 짐을 내가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
본문은 “너희 염려로 키가 한자나 크나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 의복보다 마실 것 보다 입을 것 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즉 목숨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비유로 말씀 하시기를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다 하나님이 입하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왜 걱정을 하느냐, 너희는 그들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냐, 들풀도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너희야 말하면 무엇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근심하고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심하고 염려해 보았자 별로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놓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질없는 근심과 염려들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히고 지장을 초래하고 우리의 신앙 내용이 빈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손해가 많음
사실 이 같은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은 참 무서운 생활입니다. 사람이 염려와 걱정이 깊으면 그 자체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광우병만 뼈를 송송 구멍 내는 것이 아니고 염려와 근심도 뼈를 송송 구멍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근심이 많을 때 밤을 순식간에 지새우게 합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골수와 진액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손해되는 일이 많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연구조사에 의하면 우리들이 하는 걱정내용은 80%는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2%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고 8% 만은 걱정할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8%까지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세상에는 이 염려와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하루 밤에 1억 명 이상이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을 잔다고 합니다. 종근당의 펜잘은 보통 한 달에 58만 통이 팔리는데 연말이 되면 60만 통이 팔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하면 오늘 사람들이 약으로 살고 불면증에 시달리겠습니까. 그렇게 밤을 새워보아도 별로 되는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키를 한자나 크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과 염려는 이렇게 손해가 많습니다. 근심과 걱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다 빼앗아 갑니다. 잠도 빼앗고 입맛도 빼앗고 재미도 즐거움도 삶의 윤기도 다 빼앗아 갑니다. 거기다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심 과 걱정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아프게 하고 두통에 시달리게 합니다. 육체의 병중 80%는 신경성에서 비롯된다고 (Dr W. C. Alvarez)합니다. 이 신경성 병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건강을 해칩니다. 몸에서 진액을 마르게 하고 얼굴에 생기를 잃게 하고 고사되게 만듭니다. 손해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많은 사람의 얼굴이 표가 납니다. 기미가 나타납니다. 삶에 생기가 없습니다. 참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근심과 걱정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병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인공심장기를 달고 다니는 분은 걱정과 불화한 마음을 며칠 동안 가졌는데 배터리가 급히 방전되어 위험을 당할 뻔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이 근심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해 주는 사례입니다.
어느 장님이 산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빠져버렸습니다. 굴러 떨어지다 구덩이로 뻗어가던 나무뿌리에 걸려 나무뿌리를 붙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발이 땅에 닿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어 매달린 채 고민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힘이 빠져 죽으면 죽자 하고 손을 놓으니까 땅 바닥이 10cm였습니다. 그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며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우습고 한심한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금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이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모두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이 소경의 신세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왜 걱정하느냐”고 한탄하십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이 밤새워 걱정하는 사안들은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별로 중요치 않은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다가 더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걱정들은 순식간에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걱정꺼리들이 별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가정들 마다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통지표 받아오는 날은 온 집안이 곡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을 반 죽여 놓습니다. 죄인 심문하듯 하고 밤잠을 설치고 집안 망하는 것처럼 온 집안이 난리를 떨며 온 가족이 아이의 시험에 울고 웃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집에 더 큰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덜컥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이이가 심각한 정신장애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그동안의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뀝니다. 공부문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공부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기만 하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이렇게 너그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집안 망하는 것처럼 걱정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아이 시험 치는 날 아침에 식사하면서 아들에게 “오늘 시험 5등안에 들지 못하면 부자지간 인연을 끊자”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시험치고 들어오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너 오늘 시험 어떻게 되었냐? 5등 안에 들었냐” 그러자 아들이 “아저씨는 누구세요“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시험이 문제입니다. 이 시험 성적으로 석차가 오르내림에 따라 웃고 울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야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네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난 후에 생각해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공부가 삶에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때가옵니다. 그 때는 그냥 혼자 씨익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공부가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안달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를 우리 다음 세대인 우리의 아들 딸 들이 대물림해서 또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생이 모두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면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불필요하게 근심하고 걱정할 겨를도 없어집니다. 사람이 바빠서 정신없이 살아갈 때는 자잘한 생각들은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이나 근심이 많은 사람에게 여행을 가보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몸을 움직여 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앉아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은 바쁘게 살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잘한 걱정들은 없습니다. 그런 걱정들이 자리 잡을 틈도 여유도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노동을 주셨습니다. 땀 흘리며 일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고 무료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면 불필요한 생각에 무섭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들보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이나 불면증은 젊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분주히 살아가고 정신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아이가 다 크고 생활이 안정되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지는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어딘가 숨겨져 있던 허무감과 온갖 잡념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식
여기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먼저 할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일단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면 철저하게 신뢰하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조의 섭리를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의 삶은 물론이고 내일의 문제와 나의 인생 전체도 심지어는 나의 생과 사도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홍해를 가르시는 능력을 믿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밀려오는 걱정과 근심들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온갖 밀려오는 잡념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의 기도도 묵상도 그 앞에 나아감도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점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음부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지옥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신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미리 믿었더라면 아들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 사건이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을 것이고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은 요셉을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사람으로 만드셔서 나와 만나게 하실까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도 그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 번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무작정 집을 떠나던 날밤 환상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네 자손을 이 땅의 모래처럼 이루게 하리라”고 아브람에게 약속한 것을 다시 일깨워주셨고 20년 만에 대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야곱입니다. 그날 밤에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재삼 다짐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짐승에게 그렇게 찢겨 죽게 하실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셉에게 얼마나 많은 꿈을 보여 주셨습니까. 그 꿈들이 모두 범상치 않은 꿈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꿈들이 모두 의미 없는 꿈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은 너무 일찍 포기하고 이 사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오죽 했으면 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점을 설명한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모두 그 섭리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 홍해를 건넌 사건, 광야 40년 생활, 가나안 진입한 사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 등을 생각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들입니다. 이 사건들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섭리를 설명하면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왜 걱정하느냐, 하나님은 들의 잡초나 공중의 새들보다 너희를 더 사랑하신다.” 오늘 우리들이 근심할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함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고 근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밤새워 고민하고 걱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34 / 김영규목사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장의 후반부에는 물질생활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물질생활은 뒤집으면 영적생활이 됩니다. 물질생활을 바로 하면 영적 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물질생활 교훈의 전반부는 주로 재물의 취급에 대한 주제였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재물을 땅에 쌓아 둘 수 없다. 하늘에 쌓아 두라! 재물에 대한 영적 안목을 가져라! 그것이 지난 시간의 교훈입니다. 오늘은 재물에 대한 교훈의 후반부입니다. 이 부분의 주제는 염려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물질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염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본문의 주제어는 “염려”입니다. “염려”란 단어가 다섯 차례나 나옵니다. “염려”란 단어는 헬라어로 “merimnavw”(메림나오)입니다. “mevro"”(메로스)에서 유래된 말로 그 뜻은 “나누다”는 뜻입니다. 염려란 마음이 나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해지지 않고 흔들리고 움직입니다. 무엇에든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왔다 갔다 합니다. 확신이 없고 신뢰가 없습니다. 결국 염려는 불신앙과 맥을 같이 합니다. 염려와 의심은 사촌지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6)
염려는 영혼 문제에서 시작되지 않고 육체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합니다. 육체를 감싸기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육체를 살리고, 육체를 유지하는 일이 근심의 출발점입니다.
염려는 하나도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염려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절)
여기서 “키”(hJlikiva)라고 번역된 단어는 “나이” 혹은 “세월”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염려함으로 나이를 연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걱정 근심을 해도 키도 자라지 않고, 생명도 연장되지 않습니다. “염려 근심 많이 했더니, 키가 10cm나 자랐네!” “걱정 근심 실컷 했더니 1년 더 살게 됐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염려는 득이 없습니다. 오직 해로울 뿐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우울증에 걸립니다. 육체의 온갖 질병이 나타납니다. 스트레스, 위장병, 신경통, 두통, 각종 암이 염려에서 옵니다.
염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선물입니다. 염려는 그릇 된 사고, 바르지 못한 생각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먼저 목숨과 음식이 대조 됩니다. 목숨(yuchv)은 호흡이란 뜻이고, 육체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숨, 즉 생명을 창조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생명을 창조하여 주신 분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음식을 주시지 않으실까요? 다음으로 몸과 의복이 대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드셨습니다. 인체는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터 생명 작용을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심장은 멈추지 않고 뜁니다. 피가 전신을 순환하고, 신경망이 거미줄처럼 온 몸에 퍼져 있습니다. 매일 음식을 먹고 분해하고, 에너지를 만들어서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 대단한 몸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의복은 안 주실까요?
염려는 잘못된 사색입니다. 그릇 된 사유, 방향이 잘 못 된 사고가 바로 염려입니다. 잠시만 생각해 보세요. 중요한 것을 주신 하나님이 덜 중요한 것을 안 주실까요? 큰 것을 주신 하나님이 작은 것을 안 주실까요? 보석을 주신 하나님이 보석함은 안 주실까요? 자동차를 주신 하나님이 연료는 안 주실까요? 생각을 바로 하세요. 25절과 34절에, 염려하지 말라는 구절을 대부분의 영문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do not be anxious for your life”(NASB) “do not worry about your life”(NIV) 그런데 오래된 번역에는 “Take no thought for your life”(KJV)라고 번역했습니다. “anxious” 혹은 “worry”라는 단어 대신에 “think”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어에 “think”라는 단어는 생각하다는 뜻인데, 염려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생각과 염려는 같은 뿌리입니다. 생각을 바로 하면 기쁨이 되고 평안이 됩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염려가 되고 고통이 됩니다. 조금만 사색해 보면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바른 사색 좀 하시고 염려하지 마세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염려는 신뢰 부족에서 옵니다. 어디에든지 믿고 맡기지 못함으로써 오는 감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염려합니다. 결국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너희는 믿음이 작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첫째는 공중의 새 이야기이고, 둘째는 백합화 이야기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쯤 공중에 새도 날아다니고, 저만치 백합꽃이 보였을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사람에게서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예화는 공중의 새들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6-27절)
지구상에는 8,600 종의 새가 있습니다. 어떤 새도 자기 밭이 없습니다. 농사짓지 않습니다. 종자 씨앗도 없습니다. 심지 않습니다. 거두지 않습니다. 창고에 저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충분히 먹고 삽니다. 우리나라에 날아온 철새들을 보세요! 가창오리 떼가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이 까맣게 보입니다. 그 많은 새들이 시베리아에서 한국까지 그 먼 길을 실수 없이 날아옵니다.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어디에 먹이가 있는지, 수첩에 적어놓지 않았어도 다 알고 있습니다. 참새를 길러보셨나요? 알에서 나온 참새는 보름이면 둥지를 떠납니다. 일 년이면 세 차례 번식을 합니다. 엄청난 개체가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른 참새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새는 먹이를 자주 먹어야 합니다. 단 한 마리라도 제때 먹이를 주지 않으면 다 굶어 죽습니다. 그 많은 새들을 하나님은 다 기르십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집니다. 최근 뉴스에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연간 개 사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2조 원입니다. 먹이만 주는 게 아닙니다. 개 미용실, 전용 택시, 전용 유기농 간식, 유치원, 영양관리, 액세서리, 보험, 건강검진 등등. 사람이 하는 것을 다 합니다. 심지어는 개 장례식장이 전국에 270 개소나 됩니다. 평균 20, 30만 원에서 많게는 300 만 원이나 됩니다. 관도 있고, 뼈를 돌로 만드는 메모리얼 스톤도 있습니다. 만일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을 이런 식으로 기른다면 비용이 얼마나 들어갈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문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개에게 돈 들인다고 개와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공중의 새들은 언제 죽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기억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런 짐승들도 하나님은 충분히 먹이십니다. 사람은 얼마나 귀한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두 번째 예화는 들의 백합화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30절)
백합화는 자기를 치장하려고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길쌈하지 않습니다. 길쌈한다는 말은 실을 뽑아낸다는 뜻입니다. 실을 뽑지도 않고, 천을 짜지도 않고, 디자인을 하지도 않고, 옷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아름답게 꾸미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합니다. 솔로몬은 금이 너무 많아서 은은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백향목으로 만든 왕궁에서 상아 침대에 누워 잤습니다. 그 당시 흰 천은 매우 귀해서 왕이나 되어야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의 옷도 들의 백합화만 못 합니다. 예전에 백합 한 뿌리를 우리 집 마당에 심은 적이 있습니다. 봄에 싹이 나서 꽃을 피웠는데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설교하시던 부근에 백합꽃 향기가 진동했을 겁니다. 솔로몬의 영광에 아무리 크다 해도 백합꽃 향기를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백합화와 우리를 비교해 보세요. 백합화는 며칠 있다가 말라버립니다. 곧 땔감이 되어 아궁이로 들어갑니다.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잠깐 사는 들풀도 이렇게 아름답게 가꾸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입히시지 않으시겠는가? 믿음 좀 가져 봅시다! 염려하지 말고, 믿으세요! 하나님은 내게 있어야 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32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제 염려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두 가지 실천 지침을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실천 지침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
“zhtei'te de; prw'ton th;n basileivan tou' qeou' kai; th;n dikaiosuvnhn aujtou', kai; tau'ta pavnta prosteqhvsetai uJmi'n.”
이 구절은 세 단어로 시작됩니다. “zhtei'te de; prw'ton” “But seek first!” 헬라어 문장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구하라!(zhtei'te) 그러나(de) 먼저(prw'ton)! 구하는 것은 당연한 데, 무엇을 먼저 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양식을 구하고, 의복을 구합니다. 그런데 첫째로 열심히 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순서를 바꾸면 곤란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누가 넥타이를 선물로 사줬습니다. 그 때에 나는 양복이 없었습니다. 넥타이에 맞춰서 와이셔츠를 사고, 거기에 맞춰서 양복을 사고? 순서가 잘못됐지요? 집을 지을 때, 일군들이 오는 순서대로 공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맨 먼저 미장이들이 와서 모르타르를 만듭니다. 그 다음에 벽을 쌓습니다. 그 다음에 목수들이 와서 벽을 뚫고 문과 창문을 집어넣습니다. 내장 공사를 하고 나서 지붕을 얹습니다. 맨 나중에 중장비가 와서 다 둘러엎고 기초 공사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순서가 바뀌어도 괜찮은 것도 있지만, 절대로 바뀌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이 목숨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의복이 몸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육체가 영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그것을 세상 무엇보다도 먼저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세요. 내세 천국, 교회 천국, 심령 천국 구하세요. 하나님의 의가 뭡니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의입니다. 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매 순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세요. 그것만이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의의 길입니다.(요6:29) 돈을 벌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돈을 벌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위해 벌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데 쓰세요. 세상 나라, 세상 기업 세우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먼저입니다. 하나님 교회 세우는 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에 쓰세요. 내 뜻과, 내 계획을 성취하려고 돈을 벌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kai; tau'ta pavnta prosteqhvsetai uJmi'n.”(33절)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NASB)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하는 모든 것! 음식, 의복, 거처, 지위, 명예, 그 무엇이든지 다! 먼저 구할 것만 제대로 구하면 다른 것은 그냥 따라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먼저 구하란 말씀만 하시고, 나중에 어떤 것을 구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그냥 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이것저것 구하지 마세요. 먼저 구할 것만 제대로 구하세요. 그러면 다른 것은 다 따라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화차만 있으면 객차는 몇 량이든지 다 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차는 수십 수백 량이 있어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영혼은 육체를 끌고 갈 수 있어도 육체는 영혼을 이끌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를 이끌 수 있어도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이끌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어도 인간의 의는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세요. 그러면 인생의 모든 것은 다 따라서 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
두 번째 실천 지침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이 부분을 킹 제임스 성경이나,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34절, 우리말 성경)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 내일에 대한 염려의 주체는 내일이라는 시간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내일이라는 시간에 이 세상에 계속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걱정 근심까지 미리 내 것으로 끌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노력을 가불해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일 공부를 오늘 하고, 내일 회사 일을 오늘 미리 합니까? 내일 사랑할 것을 미리 당겨서 사랑하고, 내일 기뻐할 것을 미리 앞당겨 기뻐합니까? 내일 만족할 것을 미리 앞당겨 만족하고, 내일 감사할 것을 미리 감사합니까?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염려 근심만은 미리 앞당겨 합니다. 내일의 자녀 문제를 오늘 미리 합니다. 내일의 사업 문제를 오늘 걱정하고, 내일의 가정 일을 당겨서 근심하고, 내일의 건강 문제를 오늘 미리 걱정합니다. 내일이란 시간에 어떤 상황이 될는지 알 수 없는데 왜 미리 걱정합니까?
중요한 것은 현재라는 시간입니다. 현재는 그냥 열심히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현재는 염려의 시간이 아닙니다. 현재 괴로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괴로움입니다. 오늘 중으로 달게 받으면 됩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고, 내일이란 시간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내일 일에 대한 염려만 떼어낸다면 염려의 90%는 없어질 겁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물질생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염려의 문제입니다. 염려는 잘못 된 사색, 그릇 된 사고입니다. 염려한다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합니다.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부족, 신앙 부족입니다. 눈을 들어 공중의 새를 보세요. 들의 백합화를 보세요. 잠깐만 관찰하고 사색해 봐도 금방 답이 나옵니다. 야생 동물이나, 야생화를 먹이고 치장하시는 하나님이 인생을 방치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삶의 지침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이 우선순위만 제대로 지킨다면 우리가 금생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충분히 공급해 주십니다. 둘째는 내일 일을 앞당겨 걱정하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일에 주력하세요. 오늘 일이 비록 고통스런 일이라 해도 그것은 오늘의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으세요. 내일은 내일이란 시간이 알아서 할 겁니다. 내일의 근심을 앞당기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오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믿어라 2 - 염려하지 말아라
마 6:25-30 /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염려와 생각이 차이
윌리엄 오슬로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며, 미국에 있는 유명한 존 홉킨스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가 풋내기 의대생이었을 때,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이러한 어둠에서 끌어낸 것은 우연히 읽게 된 토머스 칼라일의 글 한 토막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똑똑하게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잘 알 수 없는 내일을 염려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몬트리올 제네럴 병원에서 근무하던 무명시절부터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사람이죠. 그가 훗날 예일 대학에서 연설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미래는 오늘뿐이다. 미래 안에 내일이란 없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날은 바로 오늘이지 내일이 아니다.”‘지금’이라는 시간을 주님께 계속 드린다면, 주님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오늘을 산다면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잘 생각해 보라!”라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염려’라는 말과 ‘생각’이라는 말이 동시에 나옵니다. 흥미롭죠? “염려지 말라!” 그리고 “생각하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일 일을 생각하면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내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참고 견디셨으니,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이 있지만, 내일을 생각하며 불안하기보다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미래를 맞으셨습니다. 안달하는 불안한 자세가 아니라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내일 일을 대할 것을 바라십니다.
왜 염려하는지 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보았는데 흥미롭게 정리를 해두었네요. 첫 번째로 큰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큰일이 없으면 아주 하찮고 작은 일로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큰일이 벌어지면 그런 걱정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일을 보면 참 시시한 것들로 걱정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애를 태웁니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 아이를 붙들고 앉아서 혼내면서 집안 망하는 것같이 걱정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걱정하고 근심할 일입니까? 그러다가 아이가 덜컥 병이 나서 누우면 지금까지 하던 걱정거리는 한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공부 못해도 좋다, 그까짓 5등 하다가 10등으로 밀리면 어떠냐, 앞으로는 거짓말해도 좋다, 그러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하면서 근심 걱정에 싸여 있던 마음이 순간적으로 너그러워집니다. 큰일이 생기면 그렇게 쉽게 너그러워질 것을 아주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며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집집이 보면 형제들이 별것도 아닌 문제로 서로 다투고 따지고 아옹다옹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도 큰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덜컥 병이 나서 입원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동안의 일은 싹 사라져 버립니다. 큰일이 있기 전에 문제들을 해결하면 좋았을 것인데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가끔 큰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소한 문제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일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너무 편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너무 편하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 편할 것 같아도 걱정이 많아집니다. 잡념이 많아집니다.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가야 하는데 일하지 않고 너무 편하니까 염려가 많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인데 “거룩한 일에 분주하라!” 자신의 삶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가함’이 근심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건강 염려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죠. 물론 우리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염려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재미있는 통계입니다. 정신병 환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고 합니다. 여자 중에서도 자녀가 많은 여자보다 자녀가 적은 여자가 많다고 합니다. 아이 하나 있는 여자보다는 아이가 하나도 없는 여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아이가 없는 여자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더 많고, 바쁜 사람보다 한가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시간이 많고 한가하면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근심하게 되고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흉을 보거나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되지요.세 번째로 결단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매일매일 결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를 많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옛날 사람은 생활이 단순했고 단조로워 까다로울 것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가전제품을 사고, 핸드폰을 사고, 학교를 결정하고, 직장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해졌나요?
자기가 사는 마을에 태어나 서당에 다니고,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들, 농사를 지어도 남들이 하는 대로 하면 되었지 특별히 결단 내리고 할 일이 없었습니다. 장가를 가도 동네에 처녀가 한둘밖에 없어서 선택하느라고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시장에 가서 넥타이를 하나 사도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몇 개 걸린 것 중에서 하나를 사면되니까 살아가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자동차 사고 날 염려도 없었고 경쟁이 심한 것도 없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다 전복이 되거나 바퀴 하나가 빠져도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매사에 결단이 요구됩니다. 장가를 가도 여자가 많아서 고민입니다. 미스 김을 선택해야 잘 살 것인지 미스 리를 선택해야 잘 살 것인지, 넥타이 가게에 가면 넥타이가 수백 개 걸려 있는데 그 많은 것 가운데 어떤 것을 고를지 몰라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보면 우물쭈물하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교회도 워낙 많으니까 어디를 가야 좋을지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결단력이 없어서 우물쭈물하는 사람에게 고민이 많습니다. 결단력이 있어야 매사를 시원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일본 격언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고,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고,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 지극히 일본인다운 아주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단력이 없어서 더 많은 근심과 걱정 가운데 사는 것도 맞는 것 같습니다.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늘 근심 가운데 합니다. 평생 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고민합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겨 놓고 시원스럽게 믿고 나가는 사람이라야 은혜를 입고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모자람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우리에게 언제 염려가 찾아오나요? 우리가 원하는 것 만큼 채워지지 않을 때가 아닌가요?
사실 우리의 염려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이죠.
산상수훈이 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조금만 더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평범함을 넘어서는 신앙이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이죠.
모자랄 때 염려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신앙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채워주실 때 감사를 알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상식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무나 당연한 신앙의 행위를 넘어서서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의식주의 문제가 다 생명을 위한 것인데, 생명이 하나님께 있는데, 지금 모자라는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역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염려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높이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특별히 사도 바울은 그의 삶에서 ‘모자람’ 때문에 고민하며 기도했던 사람이죠. 그가 목회자로서 가능하면 완벽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함으로 우리를 사용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의 가시를 가지고 기도할 때, “그것이 너에게 은혜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도 바울이 감사로 그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가시를 가지고 있으므로 평생토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도가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에서 모자람 때문에 찾아오는 곤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 무엇인가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모자람으로 당황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염려를 기적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주님이 계시느냐를 생각하도록 하신 것이죠. 포도주가 모자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만드신 기적의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던 역설 말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자랄 때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갈까요?
요한복음 6장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발단은 이 많은 무리를 어떻게 먹일까? 고민할 때,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나온 오병이어였습니다.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 정말 하찮은 것,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축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자라다고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강준민 목사님의 책에 보니까, 아주 멋진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 더욱 큰 기적을 에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잠시 거절하실 때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믿어라!
우리의 삶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질문을 하죠. 아니 하나님께 따져 묻기도 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분을 믿어야만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강준민 목사의 책 [기다림은 길을 엽니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 자신이 열 살이나 열한 살에 불과할 무렵, 아버지와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하렘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주에 일어났던 사건을 ‘주의 피난처’라는 책에서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는 어느 글에서 성범죄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버지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
아빠, 성범죄가 뭐예요?”
아버지는 질문에 대답할 때 늘 하시던 것처럼 나를 쳐다보셨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 위에 있는 여행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코리, 이거 들고 내리겠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어 보았다. 가방은 아버지가 아침에 산 시계와 부품들로 가득했다.
“너무 무거워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 어린 딸에게 이런 짐을 들라고 시키는 아버지는 아주 이상한 아버지일 거다. 코리, 지식도 마찬가지란다. 어떤 지식은 아이들에게는 너무 무겁단다. 네가 나이가 들고 더 튼튼해지면 그때는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그저 아빠가 너를 위해 짐을 들 거라고 믿어야 한단다.”
나는 만족했다. 만족했을 뿐 아니라 너무나도 평안했다. 이 질문과 내가 하는 모든 어려운 질문에는 해답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들을 아버지가 갖고 계시게 하는 데 만족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고난은 신비에 속합니다. 고난 속에서 보배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교훈하시고, 성장시키시고, 축복하십니다. 고난의 이유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고난을 통해 성장하십시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요셉처럼, 다윗처럼 기다림을 통해 축복을 받도록 하십시오.
염려보다는 기다림과 인도하심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어느 비행사가 이런 일을 경험하였답니다. 두 시간 가량 비행을 한 후 그는 기체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으며 곧 이 소음이 쥐가 무엇을 갉아 먹는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사이에 쥐가 기체내로 들어 와서 그의 비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쥐의 날카로운 이빨이 정밀한 기체를 얼마나 갉아 먹을지를 몰라 그는 몹시 두려운 생각에 잠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떠나온 지점으로 되돌아 그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고 앞으로 착륙할 지점에 도착하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위치에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쥐는 설치동물이기에 높은 곳에서 적응력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 사실을 상기한 비행사는 비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천 피트 상공으로, 또 1천 피트 상공으로, 이런 식으로 상공을 비상하여 고공 2만 피트 높이로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쥐가 갉아 먹는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가 다음 착륙지에 안전하게 착륙하였을 때 기체의 구멍에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려는 마치 쥐처럼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갉아 먹습니다. 그러나 이 염려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살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이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염려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염려하지 않는 법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법
첫째, 염려가 아닌 생각하는 것이죠.
본문 28절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씀하죠. 여기에서 생각하라는 말은 원어로 ‘카타 만다노’입니다. ‘카타’라는 말은 철저하게, ‘만다노’라는 말은 배운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배운다.’
이 말은 믿음으로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염려로 들의 백합화가 자랍니까?
제가 성지순례에서 찍었던 사진인데,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제철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만, 여지없이 때가 되면 다시 핍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단지 아직 보이지 않을 뿐이고,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꽃이 졌을 뿐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잘 자라는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32~33절에 보면 그 염려를 극복의 방법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구하라.’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구하라.’라는 말입니다.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염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내일로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로 인하여 불평하기보다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스케일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는 34절에 나오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며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게 최선입니까?”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염려의 날이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들의 염려는 지금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그것이 끝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분노하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염려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정말 억울한 일과 예기치 않은 일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당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최고봉은 창세기 50장 20절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그가 살아가는 순간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일을 보면 장래가 얼마나 불투명하고 염려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순간순간마다 ‘형통함’을 경험합니다. 그가 당하는 일이 마지막이 아니라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국에는 하나님께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고통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다 난기류에 휩싸여 흔들리는 시간도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시간입니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참는 시간이 문제지 지나갑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염려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착하고, 선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고” 이전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임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 행복하다]라는 책에서 유정옥 사모님이 참 멋진 글을 썼습니다. 먼저 염려의 시간을 지나온 누군가의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요.
나는 요즈음 내 삶의 모든 경기에 임하면서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것은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이름 대진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다윗도 그 경기의 대진표의 이름을 바꿀 수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다.
소년 다윗 VS 골리앗 장군 (누가 보아도 다윗이 진다)
하나님 VS 골리앗 장군 (누가 보아도 골리앗이 진다)
모세도 그 경기의 대진표의 이름을 바꿀 수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다.
양치기 모세 VS 애굽의 바로 왕 (누가 보아도 모세가 진다)
하나님 VS 애굽의 바로 왕 (누가 보아도 바로 왕이 진다.)
나는 요즈음 내 삶의 대진표를 다시 짜고 있다. 내 이름을 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다. 예를 들면,
유정옥 VS 말기 암 (누가 봐도 유정옥이 진다)
하나님 VS 말기 암 (누가 봐도 말기 암이 진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피할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하여 염려의 방법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맡기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대진표를 다시 짜야합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우며 염려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결국, 염려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염려의 먹구름 속에 가려진 찬란한 태양과 같은 하나님의 뜻이 보여야 합니다. 먹구름은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먹구름을 주신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란한 태양을 주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찌 염려하느냐
마 6:25~34 / 김광일 목사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i)의 단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시청 공무원이 실수를 해서 시장의 구두를 밟고 말았습니다. 즉시 사과를 했지만 시장이 다른 직원과 대화에 열중하느라고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온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시장이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해고 될텐데.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잠을 설친 그는 다음 날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잘못을 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시장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를 본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시장이 화가 나서 자신을 모른 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음날도 출근하자마자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시장이 혼자 있었습니다. 그는 시장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십시오. 모르고 그랬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장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 찾아와서 귀찮게 굴기 때문입니다. “당신 정신 나간 것 아니야!” 고함을 치며 나무라자 그는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꼼짝없이 해고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흔들어 깨웠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뻣뻣한 시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장은 구두를 밟은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는데, 그는 시장이 자신을 해고하지 않을까 계속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염려가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걱정과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염려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지 염려가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염려는 영어로 ‘worr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worry’의 어원은 ‘물어 뜯는다’ 로서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인다’ 라는 뜻입니다. 염려는 사람을 질식시켜 버립니다. 영혼과 육체를 서서히 죽어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염려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하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염려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당시에는 먹을 것이 심각했습니다.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마실 것인가는 생존과 직결된 염려였습니다. 겉옷 하나로 생활하던 시대에 무엇을 입을 것인가의 염려 역시 사느냐 죽느냐의 염려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살다보면 굶을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를 수 있습니다. 옷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보다 귀한 목숨을 잃어버리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소용이 없나니
아서 랭크 (Arthur Rank)는 주야로 사업에 대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서 랭크에게 지혜가 떠올랐었습니다. 매일 매일 염려에 붙잡혀 지내기보는 일주일 중 하루만 염려하는 날로 택하여 염려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중히 생각한 끝에 수요일을 염려하는 날로 정했습니다. ‘수요일 염려상자’ 를 만들어 염려가 생길 때마다 메모지에 염려의 내용과 날짜를 기입하여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수요일에 개봉하는 것입니다. 어느 수요일엔가 랭크는 메모지를 뒤적이며 정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메모지에 기입하여 상자에 넣을 때 염려거리로 생각되었던 것이 며칠이 지난 수요일에 꺼내어 보았을 때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랭크는 수요일 염려상자를 통하여 시간이 지나고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염려들이 희미해지고 염려할 이유마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요일 염려상자가 제시하는 결론은 염려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무익합니다. 염려해서 주어지는 이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여기의 ‘키’로 번역된 ‘헬리키아’는 ‘생명’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네가 염려한다고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건강에 대해 염려한다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염려는 건강을 해치는 무서운 독소가 됩니다.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염려한들 소용이 없는데 어찌 염려하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염려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건강만 상하고,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마치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는 이와 같이 요란하게 만듭니다. 에너지만 소모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익하고 아무 소용없는 염려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이 있나니
J. C. 페니 (James Cash Penney)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재정난을 겪으면서 걱정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페니는 패틀크릭 병원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치고 낙심한 그에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더니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는데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염려를 몰아내었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페니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쳤습니다. 저를 도와주 십시요”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으며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 그 방을 나올 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한 결과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염려를 이긴 것입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를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도 돌보아주십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들의 백합화를 가꾸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냥 버려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 힘든 상황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준비 단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지 뮬러 (George Muller)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염려는 믿음의 부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믿고 염려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는 내일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염려한다고 오늘의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염려한다고 내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앞당겨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염려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기도를 하나니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서 싸우다가 저녁이 되면 창가로 다가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이 교회가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당신의 세상이요,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을 친히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거운 짐을 혼자 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염려의 제목들은 하나님이 대신 져 주실 것입니다. 염려를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복음성가를 아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본문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가 산더미 같아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염려가 생기면 고민합니다. 낙심합니다. 염려는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으로 기도를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함으로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염려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가장 적절한 것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 하지 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없는 이방인처럼 염려하지 말고, 염려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도 티테디오스 바울, 요한도 티테디오스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 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란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염려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 를 붙이시기 바랍니다. 티테디오스 즉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기도하며 물리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드디어 새벽기도회를 통해 구약을 다 끝내고 얼마 전부터 신약으로 와서 마태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들었던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보다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염려는 마치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한마디로 백해무익한 겁니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염려한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염려하는 것이 아예 습관화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A. W. 토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단지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거나 불행이 그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이란 것도 사실은 겉보기에 불행으로 보일 뿐, 실상은 불행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섭리의 비밀스런 참뜻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불행하다 여기고 염려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십계명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 제 11계명이 있다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뚜렷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염려하는데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네 인생을 갉아먹는 두 개의 적이 있는데 하나는 어제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렇다면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과연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물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염려하지 않고도 살아 갈수 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 말씀 속에서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며 “염려하지 말라.”는 동사가 3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려 550번이나 하고 계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여러분! 잘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들이 골리앗의 덩치에 주눅이 들어 벌벌 떨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은 오히려 역발상으로 덩치가 커서 쉽게 맞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환경, 똑같은 사정을 바라보고 한쪽은 “쳐부수기엔 너무 큰 존재”라고 했지만, 다른 한쪽은 ‘커서 맞히기 좋은 표적’이라고 한 겁니다. 이처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는 그 당시 벌벌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 수도 있고, 골리앗을 물리치고 백성의 영웅이 된 다윗처럼 살 수도 있는 겁니다. 여러분! 백해무익이란 말의 뜻을 다 아시지요?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전혀 없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염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전혀 무익합니다. 불필요 합니다. ‘무익, 불필요’ 이는 염려가 지닌 첫 번째 특징입니다.
전혀 무익하고 불필요함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염려의 노예가 되어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무기력증에 빠진 채 헤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염려함으로 역사나 상황을 바꾼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염려는 불필요하다고 하시면서 키 작은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손으로 잡듯, 이 확연한 진리 앞에서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으며,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키 작은 것을 탓하고 아무리 고민한다고 한들, 조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할 때 제가 갖고 있는 성경에는 ‘키’옆에 숫자 2라고 쓰여 있고, 아랫단에 ‘또는 목숨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네가 염려함으로 네 목숨을 한 시간이나 더 연장할 수 있느냐?”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옛날 번역엔 “네 생명을 일각이나 더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한다고 해서 임의로 키가 다 큰 장년의 키를, 생명이 다한 사람의 목숨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 염려는 무익,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해롭다는 말입니다. 염려라는 말을 성경 원어에서는 메림네오라고 썼는데, 이 말은 메르나오 - ‘쪼갠다, 갈라낸다’는 말과 누스 ‘마음’이란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란 것이 우리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인격을 분열시킵니다. 갈라진 인격을 가진 사람은 그 모든 일에 견고함이 없고 변덕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 감정을 쪼개어 상하게 만듭니다.
염려하면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어떤 사건이든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이성을 분열시키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구별도 못하고,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냥 자기 맘대로, 자기 편한 대로 살아갑니다. 영어로는 염려를 worry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물어뜯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처럼 염려에 물린 사람은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염려를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느린 형태의 자살’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염려의 도가 깊어지면 자신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급기야 수명을 단축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미친 개에 물린 생쥐처럼 염려에 물린 사람은 영혼의 기능이 마비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 염려는 전염성이 대단히 강합니다. 전염병보다 염려는 전염이 더 잘됩니다. 염려하는 사람과 늘 만나고 같이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라는 병에 전염이 되고 맙니다.
아니? 때로는 염려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쳐다봐도, 그 염려가 옮겨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염려는 무익하고, 유해하며, 전염성이 강한 참으로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예!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단어를 세 번 쓰고 있는데 첫째, 25절에서 염려하지 말라. 둘째, 31절에서 염려하여 이르기를...하지 말라. 셋째, 34절에서 염려하지 말라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눈 여겨 관찰해 보면 25절, 31절, 34절이 한결같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이런 공식이 성립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접속사 단어 하나에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담겨져 있으며, 염려하지 않는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가지고 있는 뜻을 풀어서 말해 보면 ‘이미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 뭐 이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정의를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나서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택의 문제” 다같이 24절과 2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러분! 그러므로는 항상 앞 귀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4절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내용에 이어서 25절 “그러므로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고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이를 ‘이미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라는 그러므로의 정의와 연결해 본다면 이런 뜻이 됩니다. ‘재물과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너희는 이미 하나님 쪽으로 선택과 결론이 내려졌으므로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명과 행복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신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편으로 선택이 끝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쪽으로 결론이 내려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여기에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걱정거리를 만나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당해도 동요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을 택하기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품에 들어오기만 하면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미아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보라.’는 뜻은 단순히 눈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배우라.’는 뜻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안목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볼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 세상 근심 걱정 염려는 다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늘 항상 넘쳐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새랑 비교하셨을까요?
① 새는 날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에겐 곳간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곳으로 날아가면 되는 겁니다. 날개를 달고 높이 날아가 보면 땅의 것들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 앞에 바위가 있고 태산이 있다 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날아서 넘어가 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② 새는 위도 작고 창자도 짧습니다. 새가 돼지의 욕심, 황소의 배를 가졌더라면 아마도 날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새는 대변 소변 산란을 다 한 기관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③ 새는 또한 멀리 보는 원시안을 가졌습니다. 벌레는 코 앞의 일만 봅니다. 반면에 새는 멀리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당신 자녀들에게 믿음의 날개를 주시고, 멀리 보는 눈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꾸만 내가 뭘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며,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한 마디로 너는 내가 선택한 내 아들, 내 딸이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거나 근심 걱정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정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일진대 근심 걱정 염려는 다 하나님께 맡기고, 늘 항상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가 주신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문제” 먼저 2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다같이 31절과 32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가정주부들은 당장에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살림을 안 해 보셔서 그렇지? 단 하루를 지내도 뭘 먹을까 뭘 입을까 걱정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사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 의식주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걸 해결해 보겠다고 하루 종일 뛰어 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런 것 가지고 연연하며 염려한다면 “너희는 이방인 즉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말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만약에 우리가 의식주에 매달려서 염려하다 보면 그 문제에 매여서 한없이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영적인 관심을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적인 염려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염려들을 다 거두시고 영적인 만족, 신령한 염려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근심 걱정 염려가 다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라는 겁니다. 염려거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염려거리가 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염려거리가 달라집니다.
① 늘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의의 옷을 염려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정결하게, 좀 더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잠5:14)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염려하노라.”
②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던 사람이 성령에 목이 말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던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더 먹고 싶어 몸부림치게 됩니다.
기도의 갈증, 말씀의 배고픔, 성령에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갈망 등 - 이런 것들이 진정 우리 성도들의 신령한 염려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너희가 염려하느냐? 너희 믿음이 죽을 것이다. 너희가 믿음을 갖고자 하느냐? 너희 염려가 죽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다가 근심 걱정 염려를 다 맡기고, 대신 믿음과 평안을 얻는 즐거운 교환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염려를 참된 평강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4세기의 교부 가운데 크리소스톰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가 어느 날 체포되어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됩니다. 황제의 회유를 듣지 않는 크리소스톰에게 황제가 말합니다.
“나는 너의 전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 이에 크리소스톰은 말합니다. “저의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나는 너를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떼어놓겠다.” “나의 가족과 친구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너를 이 나라에서 영원히 추방하리라.” “저의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나는 너의 목숨을 끊으리라.” “저의 생명은 이미 하나님 품에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어서 말합니다. “황제여, 당신이 저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에 찬 고백이야말로 진정 영적인 교환, 즐거운 교환을 맛본 멋진 신앙인의 태도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전혀 맛볼 수 없는 하나님 자녀들의 당당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십자가를 통해 나는 죽고, 예수 부활을 통해 내가 다시 살아난 영적인 교환을 경험한 사람 - 그는 진정 세상 염려를 신령한 염려로 교환한 즐거운 교환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근심 걱정 염려일랑 다 주께 맡기고서 그 대신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림으로 즐거운 교환의 비밀을 만끽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34절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 다같이 33절과 34절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여러분! 개역 한글판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하던 것을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문 상으로는 이것이 맞습니다. 염려의 주어가 달라지는 겁니다.
염려를 하더라도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니, 너희는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는 그 시간을 반드시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너희가 미리 잡아당겨 염려하면서 앉아 있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게 진정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염려를 예수 십자가 앞에 맡기고 믿음을 얻는 즐거운 교환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즐거운 교환을 통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수없이 급한 일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횡포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긴급한 일들이 다 중요한 일은 아닌데, 늘 이놈의 급한 일에 쫓겨 정작 중요한 일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급한 일은 늘 언제나 소란스럽고 방정맞기까지 합니다.
반면에 중요한 일은 늘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그래서 소란스런 일을 먼저 하다 보면 조용한 일,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 세상 염려를 신령한 염려로 교환했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33절 말씀 제가 다시 읽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누르고 넘치도록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솔로몬의 일천번제 사건을 잘 압니다. 한 번 번제에 소 한 마리를 각을 떠서 태워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번제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려 일천 번의 번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만약 하루에 세 번 드렸다면 1년이란 기나 긴 시간 동안 왕이 다른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오직 번제 드리는 일에만 올인 해야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너무 감동 받으셔서 솔로몬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 순간 그가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왕의 직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 지혜를 달라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더 크게 감동받으셔서 그가 구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광까지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또 주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염려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러분! 우리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주의 일에 힘쓰면, 주께서 우리 염려를 온전히 맡아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으로 우리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이런 근심 걱정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부족할 때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30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2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그 분을 믿는다면 우리 삶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범사에 감사’
34절 말씀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결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 또 감사하느라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주가 주시는 새로운 날들에 늘 언제나 감사하면서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근심 걱정 염려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위로가 우리 삶 속에 가득 넘쳐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370장 1절)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근심 걱정 염려는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똑똑히 목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늘 항상 주 안에서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주의 행하심을 온 세상에 기쁘고 즐겁게 간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걱정할 걸 걱정하세요
마태복음 6:25-34 / 이영기 목사(진주제일교회)
성경은 곳곳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합니다. 특히 이사야 41:10-1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너에게 화를 낸 모든 자들이 수치를 당하며 당황할 것이다. 너와 다투던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처럼 되어서 멸망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너에게 대적하는 자들은 만나지 못할 것이며, 너와 싸우는 자들이, 허무한 것 같이 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아멘. 그래서, 이 정도라면 우리가 왜 걱정하겠습니까? 이 정도라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정도라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명기 28:1-6,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당신들에게 찾아와서 당신들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들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태가 복을 받아서 자식을 많이 낳고, 땅이 복을 받아 열매를 풍성하게 내고, 집짐승이 복을 받아 번식할 것이니, 소도 많아지고 양도 새끼를 많이 낳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곡식 광주리도 반죽 그릇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7-14절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았나요? 우리, 언제나 힘들었어요. 언제나 걱정투성이입니다. 이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나 보다. 그러니까 복을 주지 않으시지….” 이런 생각밖에 안 드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까마득해집니다. 그래도 난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했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정도로 했는데도 아무 복이 없다면, 도대체 얼마나 더 애쓰고 발버둥 쳐야 하느냐 말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복을 주실 만큼 할 수 있을까요?
아프리카 열병으로 인해 살아있는 소를 땅에 묻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없을까요? 있다면, 그 마음은 어떨까요? 신명기 28:18, “당신들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와 당신들 땅의 곡식과 소 새끼와 양 새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그런 일 당했을까요? 신명기 28:58-59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 책에 기록된 율법의 모든 말씀을 성심껏 지키지 않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에게 큰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 재난이 크고 그치지 않을 것이며, 그 질병이 심하고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재앙이 닥쳐도 우리는 할 말이 없네요. 재난이 그치지 않아도 할 말이 없네요. 그 질병이 심하고 오래 계속되어도 할 말이 없네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심껏 지키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말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학교 다닐 때에 몇 명이 친구 집에 갔습니다. 그 어머니가 목사님이십니다. 그래서 차려준 과일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받으셨고, 들을 수는 없지만, 상대방은 뭔가 심각하게 말하나 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고따위로 하니 그런 일이 생기지!” 그 순간에 등줄기를 타고 진땀이 쫙 흐르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사님 아이가 그만 뜨거운 물에 빠져서 발을 데었다고 기도해 달라고 전화한 거였습니다. 아!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가요? 신앙생활을 고따위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뜨거운 물에 빠뜨리시나요?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때마다 매를 들고 때리는 폭군 같은 분이 하나님이신가요? 십일조 안 했다고 교통사고가 나게 하셨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넘어져서 팔이 부러지게 하셨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그래서 고난을 겪은 건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고난을 겪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 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이것은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겁니다. 고난과 아픔과 슬픔과 질병과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순종하면 복을 주고,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주신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보세요. 신명기 28장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예,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겁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겪고, 끝내 죽는 겁니다. 그들은 여전히 고난을 겪고, 그러다가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믿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6-27,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예,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교회, 호감을 사는 성도가 될 때에 주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십니다. 처음 교회에 왔을 때, 어떤 분이 나에게 그랬어요. 어떤 사람이 서울서 내려온 의사인데 교회를 나오고 싶어 하더랍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나오라고 말을 못 하겠더랍니다. 그 당시 어수선한 교회였으니 말입니다. 자기 마음에도 들지 않은 교회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내가 먼저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이 교회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든지 데리고 나오고 싶은 겁니다. 그런 교회가 되어야, 주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여 주시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 사는데 가장 필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요? 예, 믿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여전히 염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여기 28-29절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적어도 솔로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알려면, 우선 솔로몬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솔로몬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다윗에게는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 여섯 명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 열한 명, 그래서 모두 열일곱 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를 건드렸다가 압살롬에게 죽고, 둘째인 길르압은 병들어 일찍 죽은 걸로 추정되고, 셋째인 압살롬은 아버지께 반란하였다가 요압 장군에게 죽고, 그리고 넷째인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을 죽으려 하지 자기가 왕이라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와 나단 예언자가 다윗을 만나서 솔로몬이 왕이 된 겁니다. 그렇게 왕이 된 솔로몬은 기브온의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 그래서 솔로몬은 백성을 다스릴, 특히 그들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드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고,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와 영화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일곱 해 동안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성전 안에 들여놓아야 할 것들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열세 해 동안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궁전과 성읍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부유함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열왕기상 10:14, “해마다 솔로몬에게 들어오는 금은 그 무게가 육백삼십육 달란트였다.” 한 달란트는 35kg입니다. 그러면 한 해에 들어오는 금이 약 23톤 되는 겁니다. 이 밖에도 상인들로부터 세금으로 들어온 것과 무역업자와의 교역에서 얻은 수입과 아라비아 모든 왕과 국내의 지방장관들이 보내오는 금도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금을 두드려 펴서 입힌 큰 방패를 이백 개나 만들었습니다. 방패 하나에 금 육백 세겔, 그러니까 7.2kg이 들었습니다. 작은 방패도 삼백 개 만들었는데, 여기도 방패마다 금 삼 마네, 그러니까 1.8kg이 들었습니다. 아예 열왕기상 10:21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이 마시는 데 쓰는 모든 그릇은 금으로 되어있었고, 레바논 수풀 궁에 있는 그릇도 모두 순금이며, 은으로 된 것을 하나도 없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은 귀금속 축에 들지도 못하였다.”
그러면 솔로몬의 영광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8-29절,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 못하였다.” 그러면, 백합화 꽃과 솔로몬이 차려입은 옷이 비교가 될까요? 은은 귀금속 축에도 들지 않을 정도로 금이 많았던 시절에, 왕의 옷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그런데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 못했다는 말씀이 이해되나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공중의 새도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아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답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입히셨다는 겁니다. 그것도 솔로몬이 차려입은 옷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입히셨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입히셨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대답해 보십시오.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를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보다 더 잘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그런데 왜 걱정하느냐?”라는 겁니다. 그래서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나중에 솔로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왕기상 11:9-10, “이와 같이, 솔로몬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솔로몬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 아들 대에 나누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모아둔 재물들, 그리고 금으로 만들어둔 방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열왕기상 14:25-26, “르호보암이 즉위한 지 오 년째 되는 해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주님의 성전에 있는 보물과 왕국의 보물을 다 털어갔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갔다.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가져갔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죽은 지 불과 오 년 만에 그 보물과 금 방패를 이집트 왕 시삭이 다 가져갔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어요. 열왕기상 9:4-9, “너는 내 앞에서 네 아버지 다윗처럼 살아라. 그리하여 네게 준 율례와 규례를 온전한 마음으로 올바르게 지켜라. 그리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그에게서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네 왕좌를, 영원히 지켜주겠다. 그러나 너와 네 자손이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등을 돌리거나, 내가 네게 일러준 내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곁길로 나아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숭배하면, 나는, 내가 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끊어 버릴 것이고, 내 이름을 기리도록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을 외면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성전이 한때 아무리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속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놀랄 것이고, ‘어찌하여 주님께서 이 땅과 성전을 이렇게 되게 하셨을까?’ 하고 탄식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조상을 이집트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주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미혹되어, 그 신들에게 절하여 그들을 섬겼으므로, 주님께서 이 온갖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래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면 우리가 삽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죽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둘로 나누셨어요. 그리고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셨어요. 그래서 여로보암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왕이 되자마자,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 백성들이 다윗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남쪽 유다의 접경지인 벧엘에 두고, 하나는 북쪽의 단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 그리고선 여로보암은 높은 곳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습니다. 그래서 북왕국의 왕들이 잘못하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가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였다”라고 반복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로보암에게 그 나라의 절반을 주셨을까요? 그런 사람에게 그 나라의 절반을 주느니, 차라리 솔로몬의 아들이 그 나라를 다스리면 안 되었을까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정하여 사람을 세우십니다. 우리는 내가, 혹은 어떤 사람이 대단해서 하나님께서 세운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그런 조건이 있다면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늘 두려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래서 늘 조금이라도 성경을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이 없어서,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같은 사람을 쓰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1:37,-38, “여로보암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 너는 네가 원하는 모든 지역을 다스릴 것이다. 네가, 나의 종 다윗이 한 것과 같이,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고, 내가 가르친 대로 살며, 내 율례와 명령을 지켜서, 내가 보는 앞에서 바르게 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내가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세운 것 같이, 네 왕조도 견고하게 세워서, 이스라엘을 너에게 맡기겠다.” 예, 이전에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전에는 그가 어떻게 살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입은 뒤에는 다릅니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살았지만,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도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겁니다.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잘 살아도 멸망입니다. 죽어라 하고 애쓰고 수고해도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에베소서 2:3-6,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옛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와 똑같이 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31절,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시다는 것을 아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런 것으로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연히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주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환경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은, 이방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는 거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이제는 걱정할 것과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세요. 우리는 대부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걱정합니다. 말하자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정말 여러분에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걱정할 일입니까? 그래요, 걱정할 일이라고 해요. 더구나 당장은 걱정할 것이 없어도, 내일, 그리고 오 년 뒤, 십 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주님께서 책임지신다잖아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하셨어요.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 말씀에 하나님께서 보증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으로 이 말씀에 보증이 되셨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믿고 안 믿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니까요. 다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과 구원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벌과 죽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걱정할 것을 걱정하세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요?”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라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우리가 대단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헛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불타는 불바다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세요?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렇다고 장담하지 마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들까요? 우리,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잖아요? 여전히 악을 행하며 살고 있잖아요?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서 정말 우리가 그 사랑으로 살고 있나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예배드립니다. 그렇기에 기도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배드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기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 말씀의 순종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예배드릴 수 있을까 걱정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기도할 수 있을까 걱정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걱정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마음껏 감사할 수 있을까 걱정하십시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걱정했던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넉넉하게 풍성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염려에서 해방된 자
마 6:25-34 / 이대성 목사(광성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님 전에 나아온 여러분은 물론이요, 집에서 유튜브로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님들까지도 모든 염려로부터 온전히 해방되는 기쁨과 감격을 맛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염려에서 해방된 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염려에서 해방된 자” 여러분! 염려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림나오’인데요? "마음을 나눈다." "마음을 찢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나누어 찢는 것이 바로 염려인 겁니다.
이처럼 염려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셋째는 생활의 염려입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되면 인간임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키 작은 사람에게 염려 주사를 놓는다고 해서, 한 번에 한 자나 자라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염려는 오늘 이 순간 내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강도와 같은 존재인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염려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염려는 자동차에 앉아서 시동을 건 다음에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것과 같다고...
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러레이터를 한 번 밟아 보십시오. 굉음을 내면서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괜히 아까운 기름만 소비됩니다. 뭔가 굉장한 것 같기는 한데 소음만 요란합니다.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염려란 것이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에너지만 몽땅 다 소진합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백해무익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이를 잘 알면서도 계속해서 염려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염려하는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 참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뜯어보면 그렇게 믿음이 좋은 데도 염려를 전혀 하지 않고 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할 정도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였지만, 막상 자기가 염려해야 될 상황에 부딪히니까 그도 똑같더라는 겁니다.
에바브로 디도라고 하는 제자가 사도 바울이 수감되어 있는 로마 감옥에 찾아왔다가 그만 중병이 들어 병세가 지극히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얼마나 근심을 했던지 나중에 에바브로 디도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병이 다 낫자마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장 27절 말씀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제아무리 믿음이 좋은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근심, 걱정, 염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6장 25절 말씀이 우리는 그다지 공감이 가질 않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도무지 우리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강한 반감과 의구심이 솟구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원하는 계획만 있을 뿐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켜 주는 능력을 가진 신 정도로만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자기가 잘해서 좋은 성과를 올리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제발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좋은 성과를 올리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당신에게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내 뜻과 내 계획만 잘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평생토록 당신을 나의 신으로 믿고 섬겨주겠습니다.
거기에다 나 죽거든 그동안 당신을 평생 믿은 공로를 봐서 나를 천국에 가게 해 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뭐 이런 식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닌,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태도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규례대로 제사를 드린다 해도, 또한 지금 내가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 해도,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현대 사조인 인본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 공리주의, 다원주의 등 이 모든 사상의 공통점은 ‘나 중심’, ‘내가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나를 위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앙이 항상 그 수준에서만 머물게 될 때는 이게 틀린 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평생 동안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중요시 여기는 신자는 늘 항상 염려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말씀하시지만, 과연 신자들 중에 몇 %나 염려를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지나치게 우상으로 섬길 때’에는 제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도 그 염려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인인 내 인생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이신 내 인생을 살고 있는 신자라면 그 염려는 주님 안에서 깨끗이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든 염려는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절대 믿음 안에서만 온전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을 도무지 포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이라도 나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아예 외면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에 붙들려 있는 인간이기에 다가 올 미래의 자신의 삶에 대해 불안감이 있게 되고, 늘 항상 염려가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이제 다같이 28절에서 30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렇지만 여러분? 솔직히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솔로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그런 영광을 맘껏 누리면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렇다 보니 세상 것을 그토록 갈급해 하는 것이고,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염려하면서 자기 인생을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참으로 보배롭고 찬란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을 한 번이라도 떠올려 본다면 누구든지 솔로몬과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보길 꿈꿀 것입니다.
세상에서 귀하고 좋은 것은 모두 다 자기 마음대로 누리고 살아가는 그런 인생이야 말로 모든 인간이 소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부귀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솔로몬의 영광을 들의 백합화 꽃 하나 보다 못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대체 이해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 눈에 들의 백합화는 그저 하찮은 꽃에 지나지 않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우리 눈에는 그냥 꽃일 뿐이지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으로는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은 겉에 입혀진 가치를 판단해서 그 사람을 구별하고 대접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세상의 좋은 것으로 자신을 치장해서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영광’을 따라가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들의 백합화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왜 입니까? 그 이유는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그 꽃 또한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으로 말씀한 들풀은 내일 당장 아궁이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들풀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세상은 하늘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보물은 하늘이 아니라,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이 높이는 것은 오로지 세상의 보물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대접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 참된 영광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세상 것으로 주어지지 않고, 하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것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돌보아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돌보아 주시는 사람은 영원토록 하늘나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영화는 세상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그 분의 전적인 은혜로 돌보심을 입은 나사로 같은 거지나 걸인도 솔로몬의 영화를 입은 세상 그 어떤 군주보다 더 나은 것은 그에겐 영생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말씀하시고, 우리들은 항상 ‘현실의 세계’만을 바라보면서 이해하다 보니 예수님의 이 말씀이 통 이해가 되질 않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지금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 그 어떤 군왕보다 더 나은 영광과 영화를 입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세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보지 마시고, 그 세상 속에 하나님 말씀을 통과시킴으로 보배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8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는 이 말씀은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을 말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적 옷’을 복선으로 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시각에서 ‘옷’을 바라보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시각에서 ‘옷’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영원, 영생의 시각에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예수 그리스도의 의 밖에 없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흰옷으로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들의 백합화와는 결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존귀한 당신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흰옷인 의의 옷으로 입혀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의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뛰어난 영광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만 하면 세상 염려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아니라, 염려할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려주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33절 말씀을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설교 모두에 ‘나 중심적 신앙’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신앙의 소유자라면 교회에 30년 아니 평생을 다녀도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을지도 모릅니다. 왜입니까?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진정 예수 믿고 회심한 성도라면 결코 ‘나 중심적인 신앙’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 염려는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염려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금방 다시 말씀의 검으로 극복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잠시 잠깐 염려할 수는 있어도 곧바로 다시금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염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이런 불안감은 ‘나는 내일에도 보란 듯이 살아야 한다.’는 자기 우상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어제도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내일도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확신!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히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나와 늘 항상 돌보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서 늘 항상 돌보아 주심을 믿고서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여러분! 이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늘 항상 돌보아 주신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의 흰옷을 입었기에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 같은 문제는 이제 지엽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겁니다. 물론 의식주가 풍족하면 좋겠지만 좀 부족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꾸만 내가 우상이 되어서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받고자 한다면 그 욕심은 저와 여러분을 결국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는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문제'를 항상 먼저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염려는 별로 할 시간조차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의사였다가 기독교 작가로 변신한 크로닌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광산촌에서 계속 의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광산촌에 한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녀는 좌천되어 오지로 온데다가 월급마저 형편없었음에도 전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항상 생글 생글 웃으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그런 간호사의 모습을 본 크로닌 박사는 안쓰러워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가치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분명 그것을 다 아실 텐데 말이야..."
크로닌 박사가 이 말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간호사의 억울한 사정을 다 아실 텐데 어째서 이 간호사를 이처럼 비참한 곳에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간호사는 크로닌 박사의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하나님께서 아신다면 전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시키신 바로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이요, 가장 큰 만족인 겁니다. 보수문제, 환경문제, 처우문제 등...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 시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아무리 처우와 환경이 좋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결국 불행한 사람입니다. 엉뚱한 일을 하면서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보상과 축복을 받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디테디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식하고 가난했습니다. 그들의 삶에 있어 인간적인 기쁨이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목격한 뒤로부터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는지 모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일평생 동안 오로지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고자 애쓰고 힘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정과 삶의 현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즉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이 전해지는 데 있어 통로가 되고, 초석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이처럼 헌신된 삶을 살다 보니 근심, 걱정, 염려는 다 사라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이라는 바로 이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 '디테디오스 베드로' '디테디오스 요한' '디테디오스 도마'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모든 염려에서 해방된 자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주님 품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할지라도 ‘디테디오스 이대성!’ 얼마나 신이 납니까? 이제 여러분도 스스로 자기 이름을 넣고서 한번 선포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테디오스 OOO!'
그렇습니다. 여러분? “디테디오스 OOO!” 이게 바로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세상 염려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소망의 주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나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는 곧 그 어떤 경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세계입니다. 일평생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던 죠지 뮬러의 말처럼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인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비록 우리 주변에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할지라도 참된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 염려에서 해방된 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디테디오스 OOO!'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후로는 모든 염려에서 온전히 해방된 자답게 근심, 걱정, 염려는 다 주님께 맡겨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사탄 마귀를 대적함으로써 우리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 없다
마 6:25-34 / 김원효 목사
여러분들 중에 세상 살면서 걱정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떤 성도님이 걱정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중에 목사님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걱정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1만 5천 명 정도 인구가 있는데 거기는 한 사람도 걱정을 안 하고 삽니다.”
“아- 목사님! 거기가 어디인가요? 저도 거기서 살고 싶습니다.” “바로 이 넘어 공동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사람들은 죽음으로 그 걱정과 스트레스를 탈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께 큰 범죄가 됩니다. 마귀가 기뻐할 일입니다. 크리스천은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지 걱정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영으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데 그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근심 걱정 염려하며 죽겠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죽으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잠시 후에는 모두 죽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죽으려고 애쓰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하루하루 보람 있게 사십시오.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기에도 너무도 짧습니다. 그러니 짧은 인생을 쓸데없이 걱정으로 채우며 우울하게 슬프게 불행하게 살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고 했습니다. 고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십시오. 불행을 행복으로 전환하십시오. 근심 걱정을 모두 주님께 맡기십시오.
따라합시다. “주여, 이 걱정도, 저 걱정도 모두 맡아 주세요.” 최근에 저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 걱정은 제가 오래 전부터 해온 아주 작은 걱정입니다.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영적 세계에 접하면서 생긴 걱정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최근에 저는 기도 중에 귀신을 쫒아내는 기도를 자주 합니다. “이런 귀신아, 저런 귀신아, 여기에서, 저기에서, 아무에게서 나가라. 나간 귀신들은 다시 들어오지 마라.” 그런데 귀신이 슬피 울면서 말합니다. “나 나가면 어디로 가?”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들린 사람의(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한 사람,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이라고 소개함) 귀신을 쫒아내셨습니다. 그때 귀신들이 예수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우리들을 무저갱에 들어가라고 하지 마시고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돼지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근처 돼지 떼에게 들어가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비탈을 내리달아 물에 빠져서 자살을 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귀신들이 왜 돼지에게로 들어가고 싶어 했지요? 그리고 왜 물에 빠져 죽은 거예요? 돼지에게로 들어갔으면 기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물에 빠져서 죽은 귀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물론 성경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떤 때는 성경적으로 확실히 대답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확실히 찾지 못할 때에는 목사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천국 가서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귀신을 쫒아낼 때에 귀신에게 “귀신아, 너 왜 못생긴 돼지에게로 들어가려고 해? 돼지가 그렇게 좋아? 차라리 귀여운 강아지에게 들어가면 더 낫지 않니?” 아- 뭐, 이렇게 귀신에게 쓸데없이 물어보고 귀신들 이사 걱정해 줄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요는 그 돼지들에게 귀신이 들어가 2천 마리가 죽은 겁니다. 재산상의 큰 피해를 본 겁니다.
이로 인해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여기서 떠나라고 부탁합니다. 즉 귀신을 쫒아내서 사람을 고친 것은 좋은데 재산피해가 생긴 것은 안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예수님, 왜 귀신들을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어요? 돼지도 귀한 생명인데 너무 안됐잖아요? 그리고 남의 재산 피해를 내면 안 좋잖아요?”
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제가 귀신을 쫒아낼 때 귀신이 울면서 ”나 어디로 가?“라고 물을 때 참 난처해집니다. ”돼지에게나 들어가라.“고 할 수도 없고 ”태평양에 있는 가장 큰 고래에게나 들어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도대체 이 귀신들 어디로 보내야 되는 거예요?
제가 한국의 순복음 기도원 전도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귀신들린 중년의 여성이 상담실에 들어왔습니다. 평상시에는 일상생활을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제가 물으니까 그 분이 저를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저요. 귀신이 들렸어요.” “아- 그래요? 자신이 귀신들린 것을 어떻게 알아요?”
“전도사님이 저를 세게 안수기도 하시면 이 귀신이 튀어나와요?” “아- 그래요? 한번 해봅시다.” 그래서 제가 아주 세게 안수기도하면서 “귀신아, 나와라.” 하니까 그 분의 눈동자가 슬며시 돌아가더니 귀신이 나옵니다. “히히히히!”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놀라서 그때부터 “이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한참동안 씨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몇 시간 동안 하도 질기고 안 나가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무당한테나 들어가라.” 그러자 귀신이 대답합니다. “싫어. 싫어. 나 춤추기 싫어.” “그러면 김일성에게나 가라.” “싫어. 싫어. 개는 나보다 더 독종이야.” “아- 그러면 너 어디로 갈 거야?”
자- 이리하여 요즘도 귀신을 쫒아내는 기도를 하면서 제가 그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 이 귀신 어디로 가지? 어디로 보내야 되는 거야?” 여러분, 아니- 제가 지금 귀신 이사하는 것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잖아요? 귀신 이사 갈 처소를 마련하는 것은 귀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새로 온 이민자 도와주듯이 도와줘야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귀신이 나가도 그들이 거하는 한계를 하나님이 이미 정해놨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범위 안에서 귀신이 이사하는 겁니다. 목사가 되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 처소를 염려해 주는 것은 좋은데 귀신들 이사하는 처소까지 내가 염려하며 살아서는 안 되잖아요.
제가 기도를 하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내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이렇게 받아도 살기가 힘든데 나보다 사례비를 적게 받고 사는 개척교회 목사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야?” 이런 말을 하면 제 집사람이 늘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우리보다 다 잘 살아요.”
그래도 제가 걱정이 되서 그들의 생활비 수입과 지출을 이리저리 계산해봅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이것입니다. “아- 그들도 살 수는 있겠구나! 내가 괜히 걱정했네.” 물론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염려가 되어 몇몇 성도님들에게 전화를 해봅니다. “요즘 COVID-19 때문에 힘들 텐데 어떠세요?” “예- 좀 힘들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목사님은 어떠세요?”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가장으로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사람이 먹고 사는 걱정 안하고 사는 분, 별로 없을 겁니다. 저도 목사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고 모기지, 전기세, 가스비, 전화비, 각종 요금들 면제해주는 것 절대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여기 캐나다에 와서 사시면 예수님도 그런 요금들 내셔야 합니다. 실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세금을 내시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공종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을 보라. 하나님이 이것들도 다 입히시고 먹이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 천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 고로 쓸데없이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할렐루야!
자- 이제 확실하게 답이 나왔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같이 따라 해봅시다. “주님, 알겠습니다. 다시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충성!” 그런데 이렇게 말해놓고 조금 있으면 또 걱정을 하실 거잖아요? 아니- 이건 웬 팔자야! 혹시 ‘Lamp Syndrome(램프 증후군)'이라는 용어 들어보셨나요?
동화 속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보면 주인공이 Lamp에서 마법의 거인 ‘지니’를 계속 불러내듯이 걱정을 계속 불러내는 겁니다. 즉 스스로 쓸데없는 걱정을 계속 불러내서 스스로 불행하고 우울하게 인생을 사는 겁니다. 우울증에 걸린 분들의 증상 중의 하나가 쓸데없이 걱정을 많이 하는 겁니다.
특히 생활 걱정, 미래 걱정, 인간관계 걱정, 이런 저런 여러 가지 걱정 많이 합니다. 그래서 우울해요. 슬퍼요. 그리고 나중에 보면 결론은 이러고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죽겠다고 합니다. 즉 우울증은 호르몬 질병이지만 이로 인한 근심병이기도 합니다. 이를 극복하게 위해서 호르몬 조절하는 약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 즉 그런 것까지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분이 책임을 지십니다. 고로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염려를 맡겼으면 요술 램프에서 지니를 불러내듯이 자꾸 끄집어내지 마세요.
할 일 없이 걱정에 몰두하지 마시고 그 시간에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가 1장부터 645장까지 불러보세요. 이것 마스터하면 하나님이 크게 복을 주실 겁니다. 그리고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또 한 번 보세요.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결론입니다. 그런 것까지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삽니다
마 6:25-30 / 박상훈목사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남자가 78명, 여자가 24명, 합계 102명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뉴욕의 맨하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으로 지어진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 102명도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농사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 그들이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시금 금식을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힘들 때마다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쯤 우리의 생각을 고쳐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영국에서 살 때보다도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정치의 자유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식을 선포하지 말고 차라리 감사를 선포하십시다. 우리가 감사의 주간을 정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많은, 더 큰, 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주간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그들이 감사주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6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염려에서 출애굽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탔던 배가 파손이 되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홀로 살아 남아서 무인도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인도에서 그는 28년 동안이나 생존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극적으로 구조를 받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28년 동안이나 홀로 살 수가 있었습니까? 그의 정신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한 마디로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그래도 자기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습니다. 그러나 따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아무데서도 옷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옷을 입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날씨가 따뜻하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한 자루 이외에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섬 안에는 자기를 해칠만한 짐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귀한 깨달음을 스스로 얻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은 무인도에 홀로 남은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감사할 조건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드릴 조건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뜻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형식적인 감사, 습관적인 감사, 마지못해서 억지로 드리는 감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세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재물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좇아간다면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서 별로 염려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만 해도 사정이 달랐습니다. 우기인 겨울철에도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산에는 눈이 쌓이지 않습니다. 여름 농사철이 되어도 개울에 눈 녹은 물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농사짓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실 물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니까 형편이 어렵습니다. 옷을 사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염려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25절 하반부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그들과 우리에게 음식보다도 더 중한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 의복보다도 더 중요한 몸과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을 음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의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아무리 창고에 곡식이 많이 쌓여있은들 목숨이 붙어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했습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영혼을 도로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아무리 우리에게 값비싼 옷이 많이 있은들 우리에게 건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병원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몸져 누워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벌의 환자복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지켜주셨습니다.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왜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까?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사실 그런 것보다는 무엇인가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잊고 푹 잤으면 좋겠는데 머리에 맴돌면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 생각에 빨려 들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럴 때 잠을 청하기 위해서 숫자를 세기도 합니다. “하나, 둘, 셋, 넷…” 계속해서 숫자를 세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잠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다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숫자를 세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잊으려고 했던 그 문제에 다시금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는 한 번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염려를 감사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을 밝은 생각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들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그래도 딸아이는 건강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돈 때문에 걱정이 되십니까? 과거에 더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속에 고요와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건강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입을 옷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에벤에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두 가지 예를 들으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산상설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공중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을 것입니다. 들에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새를 가리키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가리키면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공중의 새에 대한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는 농사 짓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농사 짓는 일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공중의 새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결코 염려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잘만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26절 하반부에 보니까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천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그 팔이 짧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언제나 그 팔로 섭리하시면서 돌보고 계십니다. 새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풀을 키워주시고 새들의 먹이가 되는 벌레를 길러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새들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 끝부분에 보니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눅12:24에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는 “공중의 새”가 “까마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까마귀는 어떤 새입니까? 부정한 새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증히 여기도록 되어 있는 새입니다. 그 보잘 것 없는 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먹이십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그 자녀들인 우리를 왜 먹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중의 새에 이어서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 한 벌 해 입기가 정말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옷이 너무 흔합니다. 한 두 번 입고 나서 집안에 걸어놓은 옷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꽃의 색깔을 무엇으로 하며,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으로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덜컹 덜컹 소리내면서 옷감을 짜는 일도 없습니다. 옷감이 남는다고 해서 가위로 옷감을 잘라내는 법도 없고, 옷감이 모자란다고 해서 실로 기우는 일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아름다운 옷도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에 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입은 옷은 아무리 잘 만든다 할지라도 기운 곳이 있습니다. 몇 번 입고 나면 구겨집니다. 염색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물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들의 백합화는 하루살이 들풀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할지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마른 들풀들을 거두어다가 떡을 굽는 땔감으로 이용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하루살이 들풀조차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루살이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서 영원토록 살아갈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염려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염려에 빠져들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바라보면서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면서 잠시 그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한 존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못한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데 하물며 그 사랑 받는 자녀들인 우리를 왜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30절 끝부분에서 이렇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우리가 염려합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염려는 얕아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얕아지면 염려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감사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어지면 감사도 적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감사가 부족합니까? 세상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한 마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은 깊어질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기에서의 키는 우리의 신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원문상에는 우리의 수명 곧 생명의 길이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말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생명을 일각이나 더 하겠느냐.”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앞날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의 한 부분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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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감사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집 처마에 뾰족한 고드름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집 앞마당에는 뚱뚱한 눈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고드름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올 텐데.' 그렇게 되면 자기는 녹아서 없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고드름은 자기의 처지를 생각할 때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고드름은 앞날에 대한 염려 때문에 너무 슬퍼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문득 고드름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눈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눈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눈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드름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눈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눈사람아! 너는 이제 곧 녹아서 없어질 텐데 걱정이 되지도 않니?”
그때 눈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쓸데없이 염려하니? 생각해봐. 너의 말대로 나는 녹아서 물이 되겠지. 그러면 나는 흘러가면서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고, 잠든 꽃들을 깨워줄거야. 그리고 나는 계속 노력해서 바다로 흘러갈거야. 바다는 본래 나의 고향이거든! 나는 내 고향으로 곧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마음이 설레. 그러니 내가 염려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니?”
그 후로도 고드름은 앞날에 대한 염려 때문에 늘 찡그린 얼굴로 지냈습니다. 몸은 날로 야위어갔습니다. 그러나 눈사람은 소망 속에 늘 빙그레 웃고 지낸 덕에 살진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고드름과 같습니다. 늘 세상 염려 속에 싸여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가 아니라 감사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즉시 그에게 손을 내미셔서 그를 건져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자신의 그 체험을 생각하면서 벧전5:7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기서 “권고”라는 말은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take care”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예비하시고 앞서 가시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늘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걸어가는 우리의 승리로운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눈 녹듯이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구할 것
마 6:25-33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겠기에 오늘은 이 본문 자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기보다 교육과 선교에 관해서 생각을 나누려 합니다. 그래도 우선 본문을 잠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이 나올 때에는 뒤따르는 내용이 중요함을 암시합니다. 그 첫 번째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말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숨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고 음식물과 의복에 대한 염려만 하고 있다면 문제이지만, "목숨을 위하여"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신 말씀도 그렇습니다. 목숨과 몸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는 것인데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고 새삼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모르셔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말씀의 진의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사람들 자신이 염려하고 안 하고 하는 데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이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임을 가르치려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26절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은 당연히 농부들처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다 먹고 삽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들 또한 심지도 말고 거두지도 말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들은 농부들처럼 심거나 거두거나 창고에 모아들이지는 않으나 그것들 나름대로 열심히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며 사냥해온 먹이로 부지런히 새끼들을 먹여 기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새들이 자라나고 살아가는 것이 그것들 스스로의 노력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다 하나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살피시는데 하물며 그보다 한없이 더 귀한 사람의 목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자라게 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몸과 목숨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열심히 돈을 벌고 재물을 모으며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궁극적인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결국 재물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고 우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하신 말씀도 사람이 먹고 자라고 사는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염려를 많이 해도, 사람의 키 한 자도 늘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들의 백합화나 들풀도 마찬가지입니다. 28-30절의 말씀은 그 사실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0절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모든 생명 특히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각별한 돌보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힘이 오로지 돈에 있다고 믿게 되고 돈의 노예가 되는 것,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문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관의 문제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의식주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규정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31-32절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책임을 지시고 심지어는 공중의 새 한 마리나 들의 백합화와 들풀까지도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그것도 모르고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다른 어디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섬기지도 알지도 못하는 불신자들의 행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바른 신앙의 자세는 무엇이겠는가 하는 결론을 내려주신 말씀이 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면 되고 우리의 삶의 염려와 이에 따르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각 가정에서 그 삶의 책임을 다하며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놀고먹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은 안 하고 하늘에서 쌀자루, 김칫거리, 돈봉투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명한 바 있습니다(살후3:10). 최선을 다하여 힘껏 일하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삶의 궁극목적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일이 되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 돈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라고 믿음으로써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 우리의 삶의 궁극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신앙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먼저"라는 말은 시간적인 선후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중요성과 가치순위에 있어서 최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중요한 것도 많지만 무슨 이들을 하든 그 모든 일의 궁극목적은 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관심과 정력과 물질과 재능과 건강을 탕진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가진 바 재능도 다르고 물질적 여유도 다르며 생업도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일과 지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해야 합니다. 각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무슨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갈 때에 어떤 과를 선택하며 무슨 직업을 갖게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먼저 구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자녀들의 마음속에 각인시켜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신자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던 먼저 구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신앙과 이에 따른 직업관, 물질관, 인생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이고 기독교문화의 확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5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품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일차적으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서 그가 정해주신 우리 각자의 자리를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지키며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품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그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언더우드교육관을 봉헌하면서 머릿돌에 그 빌2:5의 말씀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언더우드교육관을 드나드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나아가서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는 선교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서 청소년문화선교부를 새 제직부서로 신설했습니다. 오늘날 삶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방황하며 지내고 또 인터넷의 발달과 그 활용의 확산으로 음란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삶과 교회의 문화에 친숙해지게 해주는 선교사역의 절대적 필요성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청소년문화선교부는 청소년선교에 관심 많고 열정적인 제직들이 모여 청소년문화선교를 위한 사역들을 이미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거나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학원선교를 강화하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학원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러 학원선교사를 파송하여 학원선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명의 학원선교사가 수백 명 학생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상담과 지도를 하며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비기독교학교에서의 청소년문화선교사역은 꿈도 꾸기 힘든 일입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가 교사들을 현장선교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학교에서 6년간 중고등학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6년간 받은 기독교교육이 오늘의 저의 신앙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저는 늘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제가 형성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던져주시는 신앙적인 말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는 "조금씩 없어지는 재물도 거듭되면 나중에는 크게 축 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이 학원선교의 효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국어선생님, 수학선생님, 영어선생님, 국사선생님, 자연선생님, 미술선생님, 음악선생님 할 것 없이 삶의 경험에서 나온 신앙간증이나 충고의 말씀들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한 마디씩 툭 툭 던져주는 것이 몇 년 동안 쌓이면 그들의 신앙과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문화선교부에서는 우리 교회 안의 계신 현직교사들이 한데 모여 같이 기도하고 학생지도의 경험들을 나누며 보다 효율적인 학원선교의 방안을 모색하고 필요한 자체훈련도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선생님들이 모두 각 학교에서 일종의 자비량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일으키는 작은 선교의 불씨를 하나님께서는 큰 불길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교사로 봉직하시는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모여 함께 새 역사를 이루려는 우리 교회의 이 귀하고 중요한 사역에 동참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결산할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교사로 만들어주고 수십 년 살게 해주었는데 너는 그 기간에 몇 학생에게 나를 소개하고 몇 명이나 내게로 인도했느냐?" 그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실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
학원선교는 우리 학원선교사나 현직교사들에게만 그 책임을 미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보다 더 많은 관심, 보다 더 확실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학교 안팎의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하나님나라의 문화를 심는 사역에 다같이 힘을 모음으로써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와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구할 것
마 6:25-33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겠기에 오늘은 이 본문 자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기보다 교육과 선교에 관해서 생각을 나누려 합니다. 그래도 우선 본문을 잠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이 나올 때에는 뒤따르는 내용이 중요함을 암시합니다. 그 첫 번째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말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숨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고 음식물과 의복에 대한 염려만 하고 있다면 문제이지만, "목숨을 위하여"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신 말씀도 그렇습니다. 목숨과 몸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는 것인데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고 새삼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모르셔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말씀의 진의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사람들 자신이 염려하고 안 하고 하는 데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이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임을 가르치려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26절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은 당연히 농부들처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다 먹고 삽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들 또한 심지도 말고 거두지도 말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들은 농부들처럼 심거나 거두거나 창고에 모아들이지는 않으나 그것들 나름대로 열심히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며 사냥해온 먹이로 부지런히 새끼들을 먹여 기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새들이 자라나고 살아가는 것이 그것들 스스로의 노력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다 하나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살피시는데 하물며 그보다 한없이 더 귀한 사람의 목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자라게 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몸과 목숨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열심히 돈을 벌고 재물을 모으며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궁극적인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결국 재물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고 우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하신 말씀도 사람이 먹고 자라고 사는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염려를 많이 해도, 사람의 키 한 자도 늘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들의 백합화나 들풀도 마찬가지입니다. 28-30절의 말씀은 그 사실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0절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모든 생명 특히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각별한 돌보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힘이 오로지 돈에 있다고 믿게 되고 돈의 노예가 되는 것,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문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관의 문제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의식주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규정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31-32절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책임을 지시고 심지어는 공중의 새 한 마리나 들의 백합화와 들풀까지도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그것도 모르고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다른 어디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섬기지도 알지도 못하는 불신자들의 행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바른 신앙의 자세는 무엇이겠는가 하는 결론을 내려주신 말씀이 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면 되고 우리의 삶의 염려와 이에 따르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각 가정에서 그 삶의 책임을 다하며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놀고먹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은 안 하고 하늘에서 쌀자루, 김칫거리, 돈봉투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명한 바 있습니다(살후3:10). 최선을 다하여 힘껏 일하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삶의 궁극목적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일이 되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 돈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라고 믿음으로써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 우리의 삶의 궁극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신앙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먼저"라는 말은 시간적인 선후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중요성과 가치순위에 있어서 최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중요한 것도 많지만 무슨 이들을 하든 그 모든 일의 궁극목적은 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관심과 정력과 물질과 재능과 건강을 탕진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가진 바 재능도 다르고 물질적 여유도 다르며 생업도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일과 지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해야 합니다. 각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무슨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갈 때에 어떤 과를 선택하며 무슨 직업을 갖게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먼저 구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자녀들의 마음속에 각인시켜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신자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던 먼저 구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신앙과 이에 따른 직업관, 물질관, 인생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이고 기독교문화의 확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5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품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일차적으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앞에서 그가 정해주신 우리 각자의 자리를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지키며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품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그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언더우드교육관을 봉헌하면서 머릿돌에 그 빌2:5의 말씀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언더우드교육관을 드나드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나아가서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는 선교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서 청소년문화선교부를 새 제직부서로 신설했습니다. 오늘날 삶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방황하며 지내고 또 인터넷의 발달과 그 활용의 확산으로 음란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삶과 교회의 문화에 친숙해지게 해주는 선교사역의 절대적 필요성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청소년문화선교부는 청소년선교에 관심 많고 열정적인 제직들이 모여 청소년문화선교를 위한 사역들을 이미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거나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학원선교를 강화하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학원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러 학원선교사를 파송하여 학원선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명의 학원선교사가 수백 명 학생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상담과 지도를 하며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비기독교학교에서의 청소년문화선교사역은 꿈도 꾸기 힘든 일입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가 교사들을 현장선교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학교에서 6년간 중고등학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6년간 받은 기독교교육이 오늘의 저의 신앙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저는 늘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제가 형성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던져주시는 신앙적인 말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는 "조금씩 없어지는 재물도 거듭되면 나중에는 크게 축 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이 학원선교의 효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국어선생님, 수학선생님, 영어선생님, 국사선생님, 자연선생님, 미술선생님, 음악선생님 할 것 없이 삶의 경험에서 나온 신앙간증이나 충고의 말씀들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한 마디씩 툭 툭 던져주는 것이 몇 년 동안 쌓이면 그들의 신앙과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문화선교부에서는 우리 교회 안의 계신 현직교사들이 한데 모여 같이 기도하고 학생지도의 경험들을 나누며 보다 효율적인 학원선교의 방안을 모색하고 필요한 자체훈련도 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선생님들이 모두 각 학교에서 일종의 자비량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일으키는 작은 선교의 불씨를 하나님께서는 큰 불길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교사로 봉직하시는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모여 함께 새 역사를 이루려는 우리 교회의 이 귀하고 중요한 사역에 동참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결산할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교사로 만들어주고 수십 년 살게 해주었는데 너는 그 기간에 몇 학생에게 나를 소개하고 몇 명이나 내게로 인도했느냐?" 그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실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
학원선교는 우리 학원선교사나 현직교사들에게만 그 책임을 미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보다 더 많은 관심, 보다 더 확실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학교 안팎의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하나님나라의 문화를 심는 사역에 다같이 힘을 모음으로써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와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 이상호목사
먼저 서로 환영하는 순서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이 시간 같이 은혜받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1. 현대인의 정신병
한신대 정태기 교수에 따르면 현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정신병 환자라고 합니다. 서구가 800년 동안 변화된 것들이 일본에서 130년 만에 일어났고, 우리나라에서는 30년 만에 그 모든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갑작스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내일에 대한 불안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내일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의 성격을 급하게 만들어 불안 신경증을 유발하는데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게 합니다. 또 그 반대의 현상으로 내일에 대한 불안증은 무기력증을 만듭니다. 마음으로는 다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우울증을 뜻합니다. 그리고 불안을 잊으려고 쾌락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는데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쇼핑중독, 알코올 혹은 마약 중독, 음화(X비디오) 중독 등 다양한 중독 증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온통 경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더욱 내일에 대한 불안증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것들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는 기운을 막는다고 했습니다(눅 8:14). 즉 생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는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눅 21:34)고 했습니다. 즉 옳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여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2. 안일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은 결코 안일하게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쉬는 안식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병환자들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예수님 주변에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결코 내일을 팽개쳐 버리라는 안일하고 무책임한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안일하고 게으른 사람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이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니라.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하여 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사 32:9-11)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을 매우 꾸중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염려가 없이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재물을 의지하며 계획도 없고 질서도 없이 쾌락을 일삼으며 사는 팽개쳐진 삶을 의미합니다.
시중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중 빌 게이츠의 ‘21세기, 생각의 속도가 결정한다’나, 신한국 신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인 심형래씨의 책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내일을 향한 도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남보다 빨리 변화를 예측하여 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결코 그리스도인들은 나태하거나 안일한 태도로 내일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찬송가 330장 가사처럼
어둔 밤 쉬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3.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예수님은 자연을 통하여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과학법칙을 발견하고 과학을 발달시키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 과학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에서 삶의 진리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열등한 생물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를 보고 꽃을 보이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그들과 사람의 사는 법이 다릅니다. 사람은 새와 달리 농사를 지어야 하고 꽃과 달리 수고하여 베를 짜야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도 새나 꽃처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여기에 바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좀더 구체적인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27절)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염려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일을 염려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신 자연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새도 꽃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새처럼 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일을 위하여 곡식을 넣어둘 창고가 있는 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안전하게 해줄 어떤 조치도 계산도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루하루 사셨습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없이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며 자연처럼 사신 분입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4) -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염려는 내가 가지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그 욕망이 내일을 염려하게 만듭니다. 성공과 실패, 얻음과 상실, 즐거움과 고통에 대한 미리 계산하는 버릇은 우리를 내일에 대한 염려로 몰아넣게 됩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없이 오늘을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삽시다. 내일은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염려할 일과 상황이 생기면 염려할 일이 생긴 것으로 보지말고 기도할 일이 생긴 것으로 알고 그 상황을 기도제목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서 싸우다가 저녁이 되면 창가로 다가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이 교회가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당신의 세상이요,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을 친히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가겠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즉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일들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주신 세월을 세상적 염려로 낭비하며 사는 불충의 삶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먼저 할 것
마 6:25-34 / 박지온목사
오늘 또 남은 시간 우리 '성찬식' 그래서 그 '저녁에 성찬을 나누었다!' 그래서 성만찬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침이니까, 점심때니까, 성 오찬이라 그래야 됩니까! 그래서 이 성만찬, 성 오찬! 이렇게 붙일 것 없이 성찬식! 그래서 성찬식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또 살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계획과 역사를 확인하는 그런 축복된 기념의 시간입니다. 다른 것은 전혀 '기념하라!' 소리를 안 했는데 오직 예수께서 이 하나만큼은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평생 기념하라!'
그리고 이 일이 자꾸 사단의 공격을 많이 받아요. 사단이 뭘 하느냐? 속이고 있습니다. '구원 못 받았다! 너는 희망 없다!' 그리고 '너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자꾸 속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증거를 대면서 증거를 대면서 기념하라 그랬습니다. 속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조금 연관을 짓는다면 지난 번 시간에 뭐라 그랬습니까?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문제는 두 주인을 섬길 때에 갈등과 저주와 고난이 계속됩니다. 두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시오. 아버지시오. 내 주인이 되셨는데...' 그런데 자꾸 아니라고 그럽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꾸 세상 신을 쫓고, 세상 물질을 따라가고, 세상 욕심을 배제하지 않고 이렇게 나가기 때문에... 그래서 신앙생활에 사실상 어려움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직설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성찬예식을 하고, 또 우리 신앙생활하기 전에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해결해야 될 것인가 그런 문제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시체에다가 아무리 좋은 비단옷을 입혀도 더 썩을 뿐 소용이 없어요. 먼저 이 시체를 살려야 됩니다. 생명을 주고 난 후에 비단옷을 입히던지, 그 다음에 맛있는 고기를 주던지, 그 다음에 얼굴에 화장을 하던지, 그래야 되는 것이지, 생명이 없는 여기에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먼저 성경이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6장 33절 말씀 보면, 너희는 먼저 뭐라 그랬습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어떻게 된다 그랬습니까? 다 따라온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이것이 너무 쉬운 것이 이 문제입니다. 이걸 거꾸로 하려고 그러니까, 너무 어려운 겁니다. 너무 쉬운 것인데 거꾸로 하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서서 걸어다니면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손으로 걸어다니라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는 거꾸로 손으로 걸어다녀서 한 2, 3보를 못 가요. 거꾸로 서기는 서는데 2, 3보를 못 가요.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순서를 따라 하면 너무 쉽습니다. 왜? 저절로 돼요. 저절로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하면 도저히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흔히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는다!' 그럴 때에 예수 믿는다는 사실부터 먼저 되어야 되는데, 생명을 받아야 되는 것인데, 예수 믿는 것 빼어 버리고 '복 받는다!' 이렇게 되니까! 거꾸로 되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십일조 한다! 뭘 한다!' 흔히 그럴 때에, 예수 믿고 생명 얻고 십일조 한다! 선교헌금 한다! 여기는 저절로 되는 것과 함께 뭐냐하면, 될 수 있도록 주시기도 하고 될 수 있도록 인도도 하시지만 이것이 안된 상황에서 생명이 안 된 상황에서는 하면 할수록 더 어렵고 고통이 오고 더 괴롭게 되는 겁니다. 이 점이 우리가 이해되어 버리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죠.
우리 오늘 성찬식 여러분 참 귀중합니다. 왜? 모든 것 이전에 예수께서 나와 여러분을 위해서 생명 주시고, 이 생명 주신 이 생명에 구체적인 증거로 피 흘리시고, 살을 찢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하고 받아들이면, 생명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모든 것을 의무로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내 아들을 낳았다! 내 딸을 낳았다! 오늘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은, 유아세례 아이를 낳고 난 후에 '아이를 낳았다!' 생명이 주어진 그 순간부터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그러나 죽었다! 낳았지만 불행이 죽었다! 그 날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내어버려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 인도하시는 가장 큰 중심적인 배경이 뭐냐? '생명 들어갔다!'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왔다. 임마누엘입니다. 그때부터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이 사건이 바로 되어야 됩니다.
어제 박상희 집사님이 정신 건강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일본의 정신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듣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을 하더라 구요. 어떤 아이가 정신 문제가 심각했는데 이 아이는 개 같은 인격이라!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다는 것이 개소리로 우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을 보면서 정신문제, 이제 종일 개소리 하면서 이 정신문제 있는 사람들이 그런 어떤 기록이 나오더라 구요. 그래서 나는 그 '그런가 이런 희한한 인간들도 있는가 보다!'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그 겪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더라구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인격이 개 같은 인격이니까, '나는 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뭐 울어도 개소리를 내면서 우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이 사람을 치료하려고 그러니까 어떻게 치료해야 될 것인가? 그 치료하는 방법이 뭐냐하면, '나는 사람이다!' 이걸 계속 말해 줬거든요. 한번 받아합시다. "나는 사람이다" 왜 인격이 희한한 인격들만 모였거든,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다 하는 이 말로 계속 반복해서 이 말로 사람이라는 인식만 시켜 줘도 치료가 된답니다. 참 중요하죠. 개 같은 사람을 놔두고, 이건 안되면 치료가 안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오는 문제가 안 되잖아요. '사람이다!' 이것만 인식을 시켜주고, 이 말만했는데, 치료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치료가 확실히 되는 정신건강에 치료의 확실한 출발이 뭡니까? 치유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문제 치료는, 나는 뭡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래서 일본에 있는 그 선교사님이 아이가 너무 이상하고, 도대체 이해가 안 되고, 이 가정에 그냥 막 물건 부시고, 그러니 뭐 도저히 아이는 학교도 못 가고, 이런 아이를 불러 가지고 제일먼저 뭐냐?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일본을 책임져야 될 복음화의 일꾼이다!' 이 인식을 심어 줬는데 치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완전히 바꾸어 가지고 치료가 된 사실을 제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이 여러분들이 먼저 뭐냐? 먼저 하나님의 자녀다! 참 생명이 회복되어야 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따라 오는 것이 여기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 자다!' 이것이 회복 안되면, '모든 것이 해결 자다!' 거꾸로 하려고 그러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된다는 사실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신분에, 어떤 사실에 처했기 때문에 이런 치료를 받아야 되느냐? 이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런 변화가 이 회복이 있어야 되느냐? 우리의 현실적인 놓여져 있는 신분들을 좀 봐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되죠.
여러분들과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저주와 죽음에 이 어둠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 뭐라 그랬습니까? 원죄라 그랬습니다. '원죄!' '내가 뭘 도적질했다! 뭘 훔쳤다!' 그것은 원죄의 결과입니다. 내가 죄인 된 결과입니다. 여러분들의 죄가 뭘 잘한다 못한다. 이것은 그 다음에 문제예요. 그러니까 혹시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좀 착하다! 나는 좀 선행을 좀 했다! 나는 좀 뭔가 했다! 그것은 잠시잠깐 어떤 착각일 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본질상...
그래서 이 문제로 원죄라는 이 인식이 안 되는데서부터 종교로 빠지고, 그 다음에 복음으로 빠지고, 그러니 여러분과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앉았고 뭐 있지만 우리 마음 실질적으로 본질을 파헤쳐 나간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그런 부패한 완전 타락된 그런 신분으로 이 땅에 먼저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창세기 3장에 빠졌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누구의 손에 빠져있습니까? 사단의 손에 빠졌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멸망될 수밖에 없었던 동기가 뭐냐하면, 그 배경이 뭐냐하면, 사단이 여러분과 저를 지배하고 있는 순간 본질적으로 지옥 갈 수밖에 없고, 본질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고, 본질적으로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애를 써도 저주와 멸망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해방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부터 해방을 수습할 수 있느냐?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고자하면 할수록 더 악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런 멸망 받은 상태가 어떤 상태냐? 어떤 상태로 진전이 되느냐? 창세가 3장 16절부터 20절까지 오는 문제 아닙니까? 시간 갈수록 허무해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땅에 복음 없이 살아가면 시간 갈수록 허무해집니다. 이 허무해진다는 말에 대해서 인식이 잘 되어야 되죠. 뭘 하면 할수록 허무해집니다. 나는 이것을 제가 이 소리를 몇 번했습니다. 사람이 뭘 바라던 것에 성공하면 할수록 뭐가 됩니까? 기쁘고 좋아져야 되는데 허무해져버립니다.
그 은순기 권사님 아들이 최종한 장로님이죠, 지금. 그분이 고등고시 그때 법관 되기 전에 시도를 2번, 3번 그렇게 했죠. 해 가지고 나중에, 이제 또 기도까지 받고 그때 집중기도하고 그런데 그 때에 그 법관, 고등고시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에 문답을 아마 하러왔던 것 같아요. 세례문답을 하러 왔는가? 그때에 제가 물었습니다. '합격한 소감이 어떠냐?' 그러니까 저를 멀뚱히 바라보시더니만 하는 말이 목사님 허무합니다. 이러더라 구요. 합격했으면 좋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머나먼 소원을 두고 그때 뭐 그냥 고등학교 아마 뭐 어릴 때부터 어떤 소원을 가졌겠죠.
그러니 얼마나 공부를 하셔 가지고 여러분 잘 아시다 시피 그 집안은 키가 커요. 그런데 얼마나 공부를, 공부에 파묻혀서 키도 그렇게 안 크시더라 구요. 이런 분이 합격을 하면 너무 좋아야 될 것인데, 합격한 소감이 뭐냐 물으니까? 저를 보고하는 말이 그것도 즐겁게 하는 말이 아니고 멍하게 바라보시다가 하는 말이 '허무합니다!' 이러더라 구요.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본연의 문제입니다. 뭘 이루면 이룰수록 인간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이룰수록 허무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성경이 말씀한데로 아이를 가져도 허무하고, 낳아도 허무하고, 성공해도 허무하고, 안 해도 허무하고 그래서 여러분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전도서에 인간에 모든 이 축복된 삶을 이 바로 보지 못하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되고 일곱 번이나 계속 헛되다! 그랬습니다. 여기다가 땅땅 뭘 뚜드리면? 목탁 두드리면 뭐가 됩니까? 불교 교리가 되어버립니다. 참 생명이 안 들어가면 참 생명 없으면 이리로 빠져 버립니다. 여러분 참 생명 없이 이 땅에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헛됩니다!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이 땅에 가장 많은 병이 뭐냐하면,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허무에 빠졌을 때 오는 겁니다. 이게 찐하게 되면 자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소망이 없으면 여기에 오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나는 도저히 그걸 뭐 이해를 깊이 못했는데, 병이 들고 난 후에 소망이 없어지니까, '아, 죽겠다!' 싶으니까 뭐가 오느냐 하면, 우울증이 오더라 구요. 그 다음에 '야, 참 하나님의 소망이 내게 없다!' 그러면 이것은 '여기에 빠져 죽겠구나!' 여러분들은 참 예수 믿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 이루어 졌다! 생명이 들어왔다! 이 축복이 얼마나 위대하다! 그건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엄청나고 큰 풍성한 이 축복과 은혜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해주시고 우리가 이 사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지금 기쁘다라는 말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래서 기쁘다!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이루어지고, 생명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졌다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내 생활과 사실에 확인될수록 우리 가장 확인 될 수 있는 일이 뭐냐하면 우리 전도라는 것이 가장 사실로 확인되거든요. 그러니까 전도하는 일에 기쁨이 오는 것이죠.
그래서 어제 그 박상회 집사님이 세계적으로 벌써 이름난 그 연구소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인데, 그런데 그 분이 참 감사한 것은 이제 다락방 한지 이제 10여 년... 참 연구원 때에 이제 다락방을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 사명 위해서 전도라는 것, 선교라는 것, 생각만 해도 힘이 난답니다. 어떻게 그것이 됩니까? 생명이 들어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이 그 안에 있으니까, 그래서 수석으로 학과를 마치기도하고 그러시는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내가 세계 복음화 위해서 전도와 선교를 깨닫게 되니까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7일간 꼬박 밤을 새우면서 7일간 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건강하냐? 그 뭐 별로 건강하지 않아요. 제가 보니까 밀어버리면 넘어질 것 같은데, 그 무슨 말을 하느냐? 여러분 참 생명이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모든 필요가 채워집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어떤 면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 연구를 해 보면, 학생들이 진짜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길이요, 또 축복인 그런 열매가 맺혀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멸망한 자들에게는 어떤 현재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느냐? 요한복음 8장 44절이죠.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예수께서 진단했습니다. 그러니까, 멸망 받은 자들이 현재 어떤 신분 속에 빠져 있느냐?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 아비 누구입니까? 이건 사단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복음이, 참 생명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신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단의 자녀입니다. 예수께서 직접 진단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우리 그 학습세례 문답을, 특별히 세례 문답하실 때는 꼭 이렇게 질문합니다. '오늘이라도 죽으면 어딜 가겠느냐?' 그러니까 '천국 간다!' 그래요. '어떻게 갈 수 있느냐?' 그러니까, 이러면 막상 이렇게 질문 하니까 그런지, 답을 어떤 사람은 잘 못해요. 가만히 있어요. 뭘 해야 되는지 모르는가 봐요.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 되죠!'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그러니까 그때에 눈치 빠른 사람들은 금방 대답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갑니다!' 이러더라 구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 갑니다. 뭐 죄가 없기 때문에,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죄 투성인데, 지금 이 시간도 별별 희한한 죄를 짓고 앉은 사람 많아요. 아마 눈을 감으면 눈앞에 어른거리는 이상한 죄를 짓고 있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도 어디 갑니까? 자신 없는 모양이네. 그래도 어디 갑니까? 천국가요. 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 마음에 영접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뭘 주었어요. 권세를 주었어요. 희한한 인간도 돼요.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는 모든 인간 됨됨이는 그 다음에 따라오는, 더하여 지는 문제지, 내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갑니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되는 배경이 뭡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예수께서 내 안에 오시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어떻게 와요? 쑥 들어와요.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쑥 들어와요!" 자리 잡았습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이때부터 '아프다! 슬프다!' 상관없어요. 실패했어도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자녀! 그때부터 내 마음에 방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원을 맞추기만 하면 모든 것 더하여 주시리라! 약속입니다. 너희는 먼저 이 일이 이루어 져라!
그래서 오늘 성찬 예식이 너무 귀중한 것은 이 일이 이루어 진 것이, 사단이 너무 배가 아파 가지고 계속 공개하는 것이 뭐냐?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자꾸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른 것은 다 기념하라 소리를 안 했어요. 이 사단의 공격을 아시기 때문에, '절대로 놓치지 마라!'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살을 찢겨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증거 꺼리 주시기 위해서 그 증거거리를 늘 가지고 기념하면서 이 사실에 속지 말라고 우리에게 뭐라 했느냐? 성찬 예식을 기념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성찬예식을 거행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증거를 대면서 마귀한테, '봐라, 자녀 안 되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피로 명하노니 자꾸 속게 하는 사단의 세력은 완전히 추방 받을 지어다! 결박 받을 지어다!' 여러분 확신하는 만큼 그 다음에 뭡니까? 따라오는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축복이 따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찬 예식 때 진짜 하나님의 방향을 맞추어서 소원가지고 기도하시면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정말 오늘 이 사실을 확신하고 확정하세요.
바로 이렇게 되는 순간에 여러분들이 지금 멸망 받은 자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실존이 뭐냐하면, '너희에 허물과 죄로 죽었다!' 그랬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아닙니까! 그때에 뭡니까?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때에는 세상풍속을 쫓고 도저히 나올 수가 없죠. 이 자리에 나왔다는 사실부터 희한하잖아요. 놀기 좋아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세상 풍속을 쫓아 산으로 들로 따라 가야 되는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뭡니까? 진노의 자녀! 이런 자녀들이 긍휼이 풍성하시고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역사 속에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 그랬어요.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서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은혜라 그럽니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되는 겁니다. 여기에 마음이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보니까 어떤 경우를 느끼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참 별난 사람 많더라 구요.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 '저 사람도 예수 믿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 복음을 확실히 잡고 내 생각을 많이 바꾸었다 그러면, '맞아, 바로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그 별난 사람이 누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됩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때부터 소원이 그에게 담겨지고 그로 통해서 그 이상한 사람이 변화가 되는 겁니다. 변화라는 것은 여기서 오는 것이죠. 모든 축복이 임해지게 될 때에 개인에 변화가 옵니다. 가정에 변화가 옵니다. 그때에 다른 사람이 변화를 증거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오는 것이 이 멸망하는 사람들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 뭐냐하면, 고린도 전서 10장 6절 뭐합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귀신에게 절하는 것 여러분 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저절로 오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다른 것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두 주인을 섬기는 것, 참 복음이 바로 안 되면 두 주인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교회 와서도 뭔가 복 받을 일만 생각해요. 그 복 받는 일이라는 것은 진짜 복은 생명인데,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할 것은 생각 안 해요. 뭘 합니까? 그저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이런 문제에 빠지게되죠. 이 사람의 최후가 다른 게 아닙니다. 영원한 멸망과 지옥의 역사 속에, 여기서부터 해방 받는 해방 받은 사실적인 증거가 십자가에 피 흘리심!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럴 때에 사단이 떠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왜냐? 내 개인이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피 흘려주심으로 십자가에서 다 해결해 주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모든 흑암이 다 떠나갑니다. 부르기만 하면 떠나갑니다.
그런데 사단은 자꾸 속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확신이 사라집니다. 확신이 사라지게 될 때에 우리의 기도가 희미해집니다. 이럴 때에 성찬 예식이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확실하게 되어줍니다. '봐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흑암 세력은 완전히 꺾일 지어다!' 증거 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피'라는 말이 나갈 때에 사단이 벌벌 떠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뭡니까?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증거가 내게 확실히 나타날수록 확신하게 됩니다. 확신이 나오면 나올수록 뭐가 나옵니까? 기도의 응답이 확실해 집니다.
오늘 여러분 진실로 참 생명을 받은 자로 성찬 예식을 드릴 때에, 정말 하나님의 소원을 여러분 담으시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방향 맞추어 진정한 소원이 내게 이루어 질 때에, 조용히 주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는 순간에 여러분과 저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이 축복된 역사가 이번 한 주간뿐 아니고 이 한해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믿음을 위하여
마 6:25-34 / 민경설목사
항상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 한 일보다 잘 못한 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결단에 대해서도 아쉬움들이 있게 됩니다. 다 똑같이 주어진 365일이라는 시간을 다 써버린 후, 삶의 평가서는 어떻게 나올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해의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매듭을 지을 때가 지금입니다.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새해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새해를 잘 못 여는 이유는 매듭을 잘 못 지은 결과입니다. 과거를 정리하지 못했기에 계속 연장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그때마다 우리의 삶을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계속 끌고 가면서 합리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믿는 자들이 해야 할 결단이 있습니다. 그 결단은 2003년을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2004년에 더 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믿음이 한 단계 성장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어떤 기관에서 1000년 동안 인류역사에서 영향을 미친 사람 1000명을 조사했는데 인류역사에 공헌한 사람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더 큰 믿음을 갖는 믿음의 기본적 원리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의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25-32)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면 믿음이 커집니다. 그 염려에 매여있으면 믿음이 커질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먹고 마시며 산다는 생각을 가지면 염려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내가 그 하나님의 자녀라면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십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9)
하나님을 믿고 은혜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은혜로 산다면 먹고 마시는 문제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은혜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두 번째, 우선 순위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인간의 삶은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는 모든 것을 덤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세 번째, 내일의 일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내일을 살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우리는 한 날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7일에는 안식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지고 다음 날에 안식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하고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을 하고 일을 시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미래를 보장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내 속에 오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한 사람을 책임지십니다. 그 분과 교제하며 살면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큰 믿음을 향하여 2004년에도 힘차게 매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죄란 무엇인가
마 6:25-34 / 김명혁목사
죄란 무엇인가(28)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
오늘 아침 염려와 근심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피조물인 인간이 짊어지고 다니는 짐과 같은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염려가 죄악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염려는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용하는 죄악이다.” 미국의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Worry is wickedness. It is atheism. 염려는 악한 것이고 염려는 무신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인간은 염려하고 근심하며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며 불행하게 살아가고, 건강, 공부, 직업, 결혼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참새나 백합화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참새나 백합화는 사람들처럼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불행하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들 중 하나는 원망과 불평이고 다른 하나는 염려와 근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이방인들과 불신자들과 현대인들의 삶의 특성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예수님께서 책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화된 한국 사람들이 덜 현대화된 브라질 사람들보다 염려와 근심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죄악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28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 염려와 근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염려와 근심은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우리를 먹이시고 마시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26절을 읽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드리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보다 귀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8절 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들의 백합화와 들풀을 입히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들풀보다 귀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입히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믿는 아기들은 아무 염려나 근심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줄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비록 가난한 거지일 찌라도 아기들은 아무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지 아빠나 엄마보다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무식하게 믿었기 때문에 비교적 염려와 근심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38선을 넘을 때나 6.25 전쟁으로 피난을 갈 때나 돈 100불을 가지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때나 때로는 생활비가 부족하여 일을 할 때나 귀국해서 정보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할 때나 도둑을 맞을 때나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별로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무식하게 그저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30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들의 염려와 근심의 대부분은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입니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 팀이 근심 걱정의 내용을 조사했는데 근심 걱정 거리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직 걸리지 않은 병에 대한 근심 걱정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에 대한 근심 걱정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재난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습니다.
미국의 교육자인 카네기 박사가 어렸을 때 염려와 근심에 쌓여 자주 울곤 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가 살던 미조리 농촌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어린 카네기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왜 우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산 채로 땅에 묻힐 것 같아서 울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계속해서 염려와 근심에 빠지곤 했습니다. 천둥과 벼락에 맞을 가봐 염려했고, 나이 든 친구 화이트가 자기의 코나 귀를 자를 가봐 염려했고, 커서 결혼할 여자가 생기지 않을 가봐 염려했고, 결혼할 수 있다면 아내에게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 가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가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는 내가 걱정했던 걱정 거리의 99%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일에 대한 쓸데 없는 걱정을 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우라는 말은 기 나라에 쓸데 없는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우 라는 사람에게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기 나라에 살던 우 라는 사람이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땅이 꺼지지 않을까 하는 근심 걱정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걱정하는 그의 친구가 그를 찾아가서 그를 위로하면서 함께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 나라의 우 라는 사람으로부터 기우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염려는 것은 우리의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침해하는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죤 하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다.” 우리의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라고 고백하면서(시31:1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불행이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고 믿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위로와 행복이라고 기록했습니다. “Ignorance of God’s providence is the ultimate of all miseries; the highest blessedness [and abundant comfort] lies in the knowledge of it”(기독교강요1권 17장 11절).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믿지 않는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을 모두 다 주께 맡겨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평생의 걸음을 걷게 하시 마 약속을 하셨고 우리들을 평생토록 안아 주시 마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40세가 될 무렵 하나님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의 걸음을 걷게 하셨다”는 신8:2의 말씀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너를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라”는 사46:4 말씀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시마 약속하신 시편 121:8 말씀을 읽고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지키시리로다”(시121:8).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432).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의 손길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에게서는 모든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감사와 평안과 기쁨이 마음에 차고 넘치게 됩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455장). 우리의 내일이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염려와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염려와 근심은 백해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근심을 해 보아도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까 염려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27절을 읽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여기 키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키를 말할 수도 있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인간의 키나 수명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건강 때문에 염려하면 건강이 더 악화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면 소화불량에 걸리고 불면증에 걸리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신경질과 짜증을 내게 됩니다. 결국 웃음이 없는 불행한 병자가 되고 맙니다. 염려와 근심은 마음과 몸과 뼈를 상하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다윗과 욥은 근심으로 눈이 쇠하고 어두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쇠하며”(시6:7).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욥17:7). 염려와 근심은 결국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몸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죤 루복이라는 사람은 “하루의 염려는 일주일의 노동보다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또한 말씀을 죽게 만들고 신앙을 죽게 만들고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13:22).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이제 염려와 근심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 세 가지를 간단히 말씀 드리므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첫째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중요 합니다. 내가 지고 가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5: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시55:22). 염려와 짐을 감추고 숨기면서 자기가 맡아 지고 가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모두 들어내고 주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성도들에게도 알리고 성도들에게도 맡겨야 합니다. “너희 짐을 서로 지라”(갈6:2)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선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나라와 나의 집의 필요를 먼저 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셋째 하루하루 수고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기고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괴로움을 지니고 수고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수고하면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수고에는 괴로움이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수고와 괴로움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루하루 수고하고 괴로움을 지니는 것은 인간의 삶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수고를 좋아하고 노동을 좋아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날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노동과 근로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 나라에 있어서 먼저 있어야 할 것은 근로이다. 근로로야 민심이 안돈 된다. 근로를 떠나서 당심과 불평에 떠들썩한 민심은 언제든지 안돈 되지 못한다.” 마6:33,34을 읽으므로 설교를 마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염려와 행복
마 6:25-34 / 이정선 목사
옛날 우리 조상들의 덕목 가운데 하나는 청빈이었습니다. 특히 청빈은 관리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관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청빈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악인의 대표적인 표상이 탐관오리 아닙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 악인의 상징이지요. 변사또 같은 인간입니다. 실제로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의 폭정은 민중의 집단적인 저항을 초래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탐관오리에 대비되는 표상이 바로 청빈한 선비입니다. 비 오는 날이면 지붕이 새는 그런 집에서 살았다는 황희 정승 같은 분이 한 예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빈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는 욕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덕적 표상으로 제시되는 모델은 쌀독에 쌀이 떨어졌는지 어쨌는지 관심도 없고, 또 떨어졌다 한들 걱정도 하지 않으면서 책이나 읽는 선비입니다. 남편이 그 모양이니 그저 죄 없는 아내만 속이 탈 뿐이지요. 옛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치관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삶의 행태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듯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사실 요즘 우리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입는 거야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좀 있을 수 있겠지요. 오천 원짜리 시장표 티셔츠 입는 사람과 이십만 원짜리 명품 티셔츠 입는 사람의 차이는 심각할 정도 아닙니까? 그러나 비록 오천 원짜리를 입을망정 헐벗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명품을 못 입어서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 먹고 살 만하게 된 우리에게는 이제 이 말씀이 구속력을 상실한 것입니까?
질문을 한 가지 더 해봅시다. 그럼 아프리카처럼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 말씀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와 다른 것일까요?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굶어 죽어도 찍소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까? 겨우 거적때기 하나로 몸을 덮고 한겨울을 길거리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그렇게 곤란한 처지에서도 뭔가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지 말고 그냥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가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오늘 먹을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입만 벌리고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는 먹을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으면서 이제 와서는 먹을 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25절 처음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는 접속사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바로 앞에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돈의 대비가 여기서는 먹는 것, 입는 것 vs 목숨, 몸의 대비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쌀독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고 걱정도 없는 선비처럼 되라는 말씀도 아니고, 당장 굶어죽는 사람에게 아무 염려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면 하나님이 먹여주신다는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좀 헷갈리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헷갈리지요? 먹을 것 염려하는 것은 목숨 때문인데, 목숨이 더 중요하니 먹을 것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거든요. 입을 것 염려하는 것도 몸을 위한 것인데,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니 입을 것 염려하지 말라는 것도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 헷갈리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수님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말씀을 한번 살펴봅시다. 2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경 좀 쓰면 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치고 고기도 볶고 해서 식탁이 풍성해질 수 있고, 귀찮아서 대충 먹게 되면 김치 하나 놓고 밥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또 마음먹기에 따라서 오천 원짜리도 아무렇지 입고 다닐 수도 있고, 기어이 명품을 입어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 말씀처럼 음식보다 목숨이 훨씬 중요하고, 옷보다 몸이 훨씬 중요하지 않습니까? 오천 원짜리 입고 다닌다고 몸이 축나고, 명품 입었다고 몸이 날아다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기 먹는다고 목숨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채소 먹는다고 목숨의 가치가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아요. 물론 먹는 음식에 따라서 삶의 질을 얘기할 수 있고 또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있겠지만, 여기서 주님은 그런 것을 논하려고 이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논지는 우리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들 때문에 염려하지만, 우리의 목숨과 몸을 관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위해서 음식을 먹지만 그 목숨 하나님이 관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위해서 우리가 음식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말짱 헛수고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몸을 위해서 좋은 옷 입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몸을 관할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몸을 위해서 명품 입으려고 수고해서 염려하는 것도 전혀 효력이 없는 헛된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 좋은 의복을 위해서 애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행위, 즉 재물을 섬기는 행위와 동일시됩니다. 그리고 재물을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 즉 목숨과 몸에 관한 문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우리의 목숨과 몸을 관할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란 하루아침에 뚝딱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한번 작정하고 결심한다고 해서 삶이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말씀을 상고하고 반복해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늘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샘플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입니다. 우리는 은행에 잔고가 많지 않으면 근심이 늘어나지만, 공중의 새는 은행구좌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 없이 잘 삽니다. 들의 백합화 역시 화장도 하지 않고 명품도 사 입지 않지만, 역사상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고 말해지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못했다고 주님은 평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염려와 노력, 모든 능력 다 합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새 발의 피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삶일까요? 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예수님의 대안 제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이 교훈을 시작하셨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의 결론은 우리 인생이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고, 보물을 땅에 쌓고, 잘 먹고, 명품 고집하고, 좋은 집과 좋은 자동차, 그리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멀리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는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정말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뭐라고 하셨어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뭐예요? 우리가 주기도문 부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나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는 저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 박사 같은 분들의 삶을 무슨 전설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우리의 삶에서 그런 모습이 나타나기를 우리 주님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될 때, 먹는 것, 입는 것, 부자가 되는 것, 이런 것들은 이차적인 가치, 상대적인 가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을 때 이것을 가상히 보신 하나님께서 부귀와 영화를 덤으로 주셨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에게 부귀와 영화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덜 중요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대가로 보너스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은 보너스, 별로 원치 않는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참으로 누리는 행복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방인들은 행복만을 추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돈이 많아야겠지? 예쁜 아내를 얻어야겠지? 공부를 많이 해서 Ph.D를 따면 행복할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매우 제한되고 한시적이며,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원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복을 추구하거나 누리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내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 사람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미래를 보장받았는데 내일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인생이라는 게 결국 늘 내일 걱정하면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내일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행복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먼저 할 일 먼저 하라
마 6:25-34 / 곽선희목사
E.M. 그레이라고 하는 교수가 쓴 책에 "The Common Denominator of Success"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성공의 공통분모"라고 하겠습니다.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의 생애와 그 삶의 철학, 그리고 업적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비결에 공통분모가 없을까, 공통점이 무엇일까를 연구해서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첫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게으른 자에게는 성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열을 다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하면 그 일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뭘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통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무래도 인간의 힘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이 저자의 말대로는 운이 좀 따랐습니다. 역시 운이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같이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하고 틀리고 누구하고 원수지고 누구를 비방하고...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 분이 말하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하면 성공한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 이롭고 해롭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버느냐 못 버느냐, 여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냐, 우리 모두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였습니다. 중요한 일, 소중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거기에 정력을 쏟았습니다. 우선 순위를 정했습니다. 실천을 했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Seven Habits of Effectice People"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써서 알려지고 한국에도 두 번이나 와서 특강을 한 일이 있습니다. 베스트 셀러 저자로 많이 알려진 분입니다. 이 코비 박사의 또하나의 알려진 저서가 있습니다. "First Thing First(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긴급한 것을 먼저 하면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다.' 그럿습니다. 긴급한 것. 무엇인가 급하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급할수록 다시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급한 것만 서두르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그런 허점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 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인간, 미숙한 인간을 구분합니다. 성숙한 인간이란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무를 보는 사람은 숲을 못봅니다. 숲이라고 하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산을 올라갔다가 조난을 당했다고 합시다. 내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자꾸 산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가면 되느냐? 안됩니다. 등산 전문가들은 '길을 잃었거든 올라가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저 밑을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한 다음에 내려가라'했습니다. 조난은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부분보다 전체를 봅니다. 그런데 미숙한 사람은 언제나 부분을 봅니다. 작은 것을 보고 큰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또한 성숙한 사람은 보다 멀리 봅니다. 눈앞의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다음, 다음, 몇차원 높여서 멀리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여호수아와 갈렙,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하였습니다(민 13-14장).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러나 같이 갔던 다른 사람들은 현실만 보았습니다.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 앞에 서니 우리들은 메뚜기같더라.' 이렇게 망조가 들었습니다. 보다 멀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는데 현실만 생각합니다. 바로 소인배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여기서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숙한 사람은 자기일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고뭐고 할 것 없고 나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결국은 나도 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립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항상 보다 크게, 보다 넓게, 보다 멀리, 그리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먼저 할 일 먼저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먼저 할 수 있을까? 먼저 목적지향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인 무엇인가, 항상 물어야 합니다. 묻고, 그 목적을 향해서 일직선적으로 그 목적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적에 위배되는, 달리 돌아가는 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의미창조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 일을 위해서는 내가 목슴을 걸 만큼, 그만큼 확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가입니다마는 제가 1974년쯤 겪은 일인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주일날 목사님이 안계시는 교회를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몇주일 안내받아서 설교를 하고나니 점심시간에 집사님들끼리 모여서 숙덕숙덕하더니 돈을 모아서 자동차 한 대를 사주는 거입니다. "목사님, 이 차를 타고 내왕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시러 가기도 번거롭고요.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그 차를 몰고 교회마당에 척 들어섰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달려나옵니다. "아니, 여기까지가 어떤 길인데 손수 운전하고 오신 것입니까? 목사님 계신 곳에서 여기까지 오는 Pasadena Freeway에서 옛날에 제임스 딘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 위험한 길을 지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교회로 오는 길이니까 왔지요. 교회를 향하여 가는 길이니 가다 죽어도 좋다, 하는 마음으로 온 것입니다. 놀러가는 길이었다면 못왔지요. 가다 죽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이래서 안되지, 하는 일들은 하지 마십시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하는 일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하는 일 먼저 하는 지혜입니다. 목숨을 걸만한 그런 의미의 일을 먼저하라, 이것입니다. 또한 쉬운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도록 은사를 주신 일은 쉽습니다.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야 합니다. 닫힌 문 두드릴 것 없습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게끔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을 꼭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은 못해서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해서 안한다고. 결국 다 못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십시오. 누군가가 할 것입니다.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십시오. 누군가가 할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 가장 쉬운 일, 확실한 일, 거기에 하나님의 효과적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것입니다. 또한 나는 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남의 일 간섭하지 마십시오. 그거 신경쓰지 마십시오. 오늘도 내가 할 일만 내가 합니다. 부부간에도 아내는 남편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내가 아내이면 아내일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두십시오. 남편은 남편일만 하십시오. 심지어는 자녀교육까지도 그렇습니다. 자녀들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당신일만 똑똑히 하십시오. 아이들은 저절로 클 것입니다. 내가 할 일, 이것만 내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지혜의 지름길입니다. 어차피 다 알 것도 없고 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 할 수도 없고 다 가질 수도 없습니다. 다만 나에게 맡겨진 일, 오늘 맡겨주신 일만 알고 거기에 충성과 진실을 다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본문에 보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잘 설명해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입니다. 우리, 그것 때문에 고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본문에는 그 해결의 길이 걱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하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받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시느냐, 누구에게 이 모든것을 넉넉히 주시느냐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먼저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요 그리스도의 의를 먼저 이루어야 그 다음에 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할 일 먼저 하는 , 그 순서가 바로되어야 합니다. 그 순서가, 우선순위가 바로될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해결책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귀한 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만족하게 여기시고 '내가 네게 천국열쇠를 주겠다. 너는 베드로다. 그 신앙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 큰 복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는 말씀을 하시니 '안됩니다'하고 말리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냉정하시게도, 정말 예수님답지 않게 냉정하시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고 질타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가차없이 '사단'이라고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너는 사단이다, 하십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왜 그러셨을거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영광도 주셨습니다. 능력도 주셨습니다.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바랐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을 바랐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지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뜻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기도하십니다. 그 '나의 뜻'이 무엇인지 한없이 궁금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분명히 십자가를 안지시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내일이 아니고 다른 시간에... 혹 그런 뜻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뜻 앞에 섰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무슨 말씀입니까? 내 뜻은 뒤에 두고 '아버지의 뜻부터 먼저 이루십시오' 하신 후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내려오실 때 하나님께서 내게 지우시는 십자가를 내가지지 않겠느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 먼저 이것부터 마시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해서 부활의 영광을 얻고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먼저 십자가를 -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내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따라가려고 합니다. 십자가에 내가 매달려야 하는데 십자가를 또 지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내 멋대로.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엄청난 희생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 그러고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이루고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말씀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그 성격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다음에는 나로 인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해야 하고, 내가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아야 하고, 나와 하나님의 나라, 나로 인한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원을 아뢰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응답 해주시기를 내가 너에게 세 가지 소원만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한 가지도 고마운데 세 가지를 들어주시겠다니.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했더니 모든 사람이, 모든 여자가 사랑을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는데, 그러다보니 귀찮아 못견디겠는 것입니다. 사랑공세에 지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할 수 없이 두 번째 카드를 내놓았습니다. '하나님, 여기서 구원해주십시오.' 그래서 이제 모면을 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카드를 소모하고 마지막으로 이제 무슨 소원을 아뢸까, 뭐라고 기도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업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데 "내가 만일에 너라면 '사랑의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겠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두 번째는 '솔로몬 왕처럼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주십시오.' 세 번째는 '범사에 진실하고 충성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겠다." 이 사람이 조용히 생각하다가 '아멘'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앞에 놓고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앞으로 임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그 위대한 나라를 앞에 바라보면서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이것이 우선순위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겠습니까? 이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는 말 '제테요'는 특별한 말입니다. 히브리어적 개념으로는 기도한다는 뜻이요 목적삼는다는 뜻이요 온정력을 다 기울여 힘쓴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eek'라고 번역합니다.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모든 것을 주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는 것, 먹는 것, 입는 것, 이 모든 것 - '타우타 판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일 내가 하고, 내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그는 그의 일을 하십니다. 주시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십니다. 내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아니하므로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순위가 바로 되어야 뒤에 성공이 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일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 임영수목사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가 근심에 관해 소개한 다음가 같은 로마인들의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근심이 강을 건너다가 품질이 좋은 진흙이 많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근심은 이 품질이 좋은 진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근심이 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동안에 주피터Jupiter(로마신화: 최고의 신, 천문학: 목성)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근심은 주피터에게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에 정신을 넣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주피터는 근심이 청한대로 기꺼이 해주었습니다. 근심이 이제 정신을 가지게 된, 자신이 만든 것에다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주피터는 반대하며 주피터 자신의 이름을 붙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근심과 주피터가 새로 만든것의 명칭에 대해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에 땅이 들고 일어나 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 제공했으므로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요구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싸우다가 사투른Saturn(로마신화 :파종의 신, 천문학 :토성)에게 이 사건을 올바르게 심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사투른은 다음과 같은 비교적 올바르게 생각한 것으로 여겨지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주피터, 너는 이 새로 생겨난 것에 정신을 제공했으므로 이것이 죽으면 정신을 가지고, 땅 너는 몸을 제공했으므로 이것이 죽으면 몸을 가져라. 그리고 근심 너는 먼저 이것의 형체를 만들어 이러한 존재로 있게 했으므로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 너의 소유로 하거라. 그리고 싸움의 원인이 된 명칭은 이것이 땅, 즉 Humus로부터 만든 것이므로 호모(Homo-사람)라고 하여라."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근심하는 존재입니다. 근심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순간까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근심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근심에 따라 규정됩니다. 그러나 근심은 인간을 불안정하게 하고 어느 곳에서도 평안히 휴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자신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언제나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돌보심에 자신을 맡겨 드리는 존재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하지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잘못 오용되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은 인간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항상 기도만 하면 된다든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뜻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본 뜻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도 있고, 그것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존을 위한 염려에만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잘 알고 계시며 인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믿음으로 자신을 맡기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돌봄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는 생각하기를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염려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매일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어린 아이가 자신의 삶이 지탱되어 가는 힘의 근원을 깨닫는 다면 그는 그 근원을 신뢰하고 염려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근심은 언제나 두려움과 관련이 됩니다. 근심은 "자기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가지는 현실적 두려움"에서 생겨납니다.(Ulrich Luz)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기 위한 염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산상 설교에 반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두 종류의 예를 통해서 한가지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는 새들에 대한 비유에는 들판에서 고달프게 일해야 하는 남자들의 수고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지도 않고 물레질 하지도 않는 백합에 대한 비유에는 여인들이 전형적으로 행하는 베짜는 노동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봄,여름, 가을에 걸쳐 들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노동이 오직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 의한 수고일 때 그에게는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현존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있을 때 그의 노동에는 감사와 휴식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베를 짜는 여인이 오직 자신의 염려와 근심, 노력에 의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 베틀 소리는 그의 탄식과 한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자신의 생명과 아이들의 장래를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 그의 베틀 소리는 찬송의 장단이 될 수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도만하고 놀고 먹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 현존이 누구의 섭리가운데 있는 가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새로 나온 신간으로 "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현재 생존해 있는 영국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R. W. Stott) 목사입니다. 그는 신학자며 목사이지만 그 책을 출간하므로 인해 일약 명성있는 조류학자가 되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아버지는 심장병 전문 의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런던 도심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과학자처럼 온갖 분야의 자연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토트 목사는 "그의 아버지는 훌륭한 아마추어 식물학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철이 되면 대여섯살 된 스토트를 시골로 데리고 가곤 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은 다물고 눈과 귀만 열라"고 충고하곤 했습니다. 어린 스토트는 그 덕분에 자연을 관찰하는 훌륭한 훈련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나는 곧 자연을 관찰하는 일에 푹 빠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어린시절부터 새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그것은 그의 전공인 신학과 같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국내외를 다니면서 그가 관찰한 2,500여종 새들 가운데 150여종의 새들을 통해 배운 교훈을 사진으로 담아 책으로 출간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가 말하는 새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훈들 가운데 첫 번째 교훈은 믿음입니다. 스토트 목사는 우리는 새들을 통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먼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리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 책에 이러한 시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울새가 참새에게 말했다.
나는 정말 알고 싶어,
왜 이 근심 많은 인간들은
이토록 안절부절 못하며 바쁘게 사는지
참새가 울새에게 대답했다.
친구야, 내 생각엔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안계신게 분명해
너와 나를 돌봐주시는 그분 말이야." -체니(Cheney)-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의미합니다. 새들은 열심히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그들이 발견해서 먹는 먹이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새들은 집을 짓습니다. 그들이 짓는 집의 재료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 다음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보호를 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새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토트 목사는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찾아 날아 다니는 것은 공급하시는 하나님과 새들의 협력이라고 했습니다."
염려와 걱정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귀를 둔하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 가운데서 우리의 생을 지켜줄 수 없는 것들에 매어 달리게 하고, 그것들을 우상으로 섬기게 합니다.
요즈음과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생의 염려와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테러의 후유증으로 인한 경기침체, 대량 실업, 전쟁에 대한 염려, 생화학 무기에 대한 공포등은 우리의 삶의 기반을 모두 흔들어 놓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눈과 귀를 열고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은 우리의 실존과 세상이 인간의 힘에 의해 보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며,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게 될 때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하게 됩니다.
족한 하루
마 6:34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짤막한 세 마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중 첫 번째 문장은 이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입니다.
먼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내일 일은 내가 염려할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내일" 그 자체가 염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염려를 할 수 있는 인격적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간의 주인,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모든 시간과 세월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일 일도 주관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일에 대한 염려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 다음의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문장은 앞선 말씀들을 뒷받침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함께 가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 관해 염려를 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일들에 관한 염려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일 일에 관한 염려를 할 겨를과 여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바로 살기도 힘듭니다. 오늘 하루 무사하게 지낸 것도 사실은 내가 잘 해서가 아닙니다.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어차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면 내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되는 것인데, 스스로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기도 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는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말 염려는 쓸데없는 일입니다. 염려를 아무리 한들 과거를 한 치도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미래에 관한 염려 또한 소용없는 일입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을 위한 염려를 제대로 하려면 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어날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내야 하며 그 모든 가능성에 완벽하게 대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하나? 내일 폭설이 오면 어떻게 하나? 내일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내일 아침 집문을 나설 때 기와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내일 퇴근할 때 파란 불이 켜져서 길 건너는데 술취한 운전수가 트럭을 몰고 덮치면 어떻게 하나? 전철을 탔는데 뭐가 잘못 되어서 전속력 질주를 하다가 대형충돌로 전복된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일 다 생각하면 겁나니까 아예 집안에 드러누워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 그런데 저 천장이 갑자기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세 딸애들이 학교에 간다고 나갔다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라도 되면 어떻게 하나? 등등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가 지나고 보면 예상했던 모든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그치고 지나간 것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염려는 쓸데없었던 염려로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손해보는 일을 합니까? 왜 그런 염려로 인생을 소진하며 삽니까? 그렇다고 염려를 안 할 수도 없고, 일일이 다 하자니 너무 힘들고, 그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개인에게는 전담경호원을 붙이던가 시설물에 대해서는 안전관리를 책임지는 전문업체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전문업체에 맡기고 편하게 지내야지 각 개인이나 회사나 기관이 모두 직접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장 완벽한 안전관리자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안전을 위한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건 돈도 한 푼 안 듭니다. 그 어떤 장비나 시설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계약기간이 무제한입니다. 생명과 행복이 영원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매일 주어지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내일의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6-7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도 우리의 삶의 안전을 위한 완벽한 예상과 대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 안전"이라는 것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그 어떤 천재적 범죄자의 의도나 계획까지도 꿰뚫어 보시며 그 어떤 천재지변도 다 그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각자의 장래를 위한 개개인의 당연한 책임으로서의 준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문제삼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실 부분을 스스로 하겠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차지하실 여지를 내드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하지만 자기의 앞날에 대비할 줄 아는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하지 말고 놀고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의 새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지만 공중의 새가 먹이를 찾느라고 얼마나 열심히 날아다니며 살피는지 모릅니다. 들의 백합화를 또한 예로 드셨지만 꽃이나 나무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나무나 꽃들 보면 늘 햇볓을 따라 움직입니다. 열심히 햇볓을 받아서 탄소동화작용을 해서는 자라기도 하고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가 자기들의 노력으로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 속에 모든 피조물들이 각각 힘써 일을 해도 그 결실을 얻는 것은 피조물 각자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것에 응답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의 결과라는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면서도 우리 각자에게는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염려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4:6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면서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어서 8-9절에서는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권면하기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한 후 이어서 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종하고 만사를 그의 손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우리를 데려가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염려를 해도 부르심을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10년 후에나 우리를 불러가려 하신다면 아무리 염려하지 않고 잠들어도 내일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로 만족하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족한 하루를 갖는 것은 족한 영원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으면서 내일 일을 잘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3절의 권면, 즉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 성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말씀에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것은 단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모든 것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오늘도 내일도 언제라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족한 하루를 사는 것이 내일을 염려하지 않으면서도 잘 준비하는 길입니다. 예레미아 애가 3장 22-26절의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주의 성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고" "무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즉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일들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주신 세월을 세상적 염려로 낭비하며 사는 불충의 삶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끄는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가리키듯 이에 앞선 모든 말씀에 근거한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앞서는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앞서는 모든 말씀이 도달하는 그 정점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 직전의 말씀인 33절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인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의 주권자이시고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심과 사랑과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의 자녀들을 돌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매일 매일 그 날을 주 안에서 충성되게 살고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족한 하루가 매일 매일 계속됨으로써 일생 복된 삶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내일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매일 하루를 족하게 삶으로써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마 6:33 / 정필도목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별히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았으며, 성령으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성령이 함께 해주시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아도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이 흘러넘치는 은혜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또 얼마나 큰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주 교회를 나오면서도 도무지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 없고, 예수를 믿어도 즐거움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매여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몸으로 장수할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 볼까? 어떻게 하면 출세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누려볼까?” 자나깨나 이 생각이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6-8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나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라고 묻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풀이나 들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때 아름답고 탐스럽게 피어났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어 떨어지는 들의 꽃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여관과 같은 곳으로 즐거움도 잠깐이요 괴로움도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애착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 곳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천국과 같은 곳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 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인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일 먼저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문은 매우 좁은 문이기 때문에 죄 짐을 지고서는 결코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짐을 다 벗어버려야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죄 짐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죄 짐을 벗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36을 보면, 베드로가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애통해하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이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받을수록 천국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왜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왜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 앞에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않으면 늘 마음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선포했습니다(롬 14: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잘 먹고 잘산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천국은 먼저 성령충만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온 가족들이 은혜를 받아 성령이 충만해지면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되며, 은혜받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천국과 같은 교회가 됩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천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천국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부산 400만 시민들이 성령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 면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심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 11:15).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에 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만 잘 다니면 다 되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명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답게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째 사명은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천국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지면 기쁨이 충만하여 얼굴이 빛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모습 자체가 확실한 전도가 됩니다.
마음 천국을 이룬 사람이 가정을 천국과 같은 가정으로 만들고, 교회를 천국과 같은 교회로 만들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복음화하여 천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만 예수 믿어 천국을 이루며 살 것이 아니라, 안 믿는 이웃들에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5,8).
성령이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려고 하면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이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롬 8:18).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괴로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장차 받을 영광이 크다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이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0:4을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당해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장차 가서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름답게 잘 꾸민 새 집에 들어갈 때 기분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천국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5절 이하를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습니다.
아마 위에 열거한 각종 보석들을 다 보신 분들이 드물 것입니다. 천국에는 열두 문이 있는데 그 문이 모두 한결같이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그 규모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우 화려하고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의 박물관에서 매우 큰 보석들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이며 각종 보석들을 구경하며 크기가 너무 커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이 보석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국의 길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는데 얼마나 좋은 금인지 맑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금으로 된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상이 되십니까? 바로 이곳이 저와 여러분이 장차 가서 살 천국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 나라에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천국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심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배고픔과 헐벗음과 많은 위험과 고난 중에 있었지만,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항상 찬양하며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천국을 맛보며 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기쁨이 넘쳤길래 성도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외쳤을까요.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어디를 가든지 열심히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항상 담대히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순교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디모데후서 4장에서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의 사명을 다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사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달게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 나라에서 면류관 쓰고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우선순위는?
마 6:33 / 김원효목사
얼마 전 제가 캐나다 동부의 아주 먼 타주에서 이곳 캘거리로 이주해 오신 분들을 이것저것 도와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먼저 교회에 들러서 성전구경도 시켜주고, 대성전에서 잠시 앉혀놓고 기도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이들이 그 동안 인생 바쁘게 살다보니 하나님을 못 믿고 오늘 이렇게나마 교회에 처음 왔습니다. 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분들이 처음에는 집 렌트를 하려다가 나중에는 집을 사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리얼터 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고 저는 뒤로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 분이 교회에 왔으면 좋겠는데 오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제가 교회 한번 오라는 음성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얼마 후 그 분이 이런 답장이 왔습니다. “목사님, 전화 주신 줄 몰랐어요. 요즘 리얼터님과 집 보러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집구해지고 이것저것 정리 좀 되어야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평온한 주일 보내세요.” 이 분의 답장을 들어보면 믿음이 있고 체험이 있으신 분들은 뭔가 바로 느끼는 것이 있을 겁니다. 뭐지요?
바로 이겁니다. “집구하러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먼저인데! 이것저것 정리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먼저인데! 마음의 여유는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되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 벌써 한 달이 후딱 지났습니다. 이 분들이 교회에 못 오신 것을 보면 아직도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정리가 아직도 안 되신 모양입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민생활 참 바쁩니다. 더구나 먼 타지에서 이사 와서 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특히 집을 사고 난 후에는 가구와 가정용품들 사야하고, 학교 개학도 했으니 애들 학교에 매일 데려다줘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직장도 알아봐야 하고, 너무나 할 일이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바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그 와중에 우리는 오늘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그 분들은 예배를 못 드리고 있습니다. 왜지요? 다름 아닌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혹은 성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캐나다 와서 아주 자주 가는 쇼핑몰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와 가까운 곳에 있는 월마트입니다. 아시다시피 월마트는 세계 최대의 체인망을 이룬 거대기업입니다. 그 월마트를 창업한 분은 샘 월튼이라는 분입니다. 그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미국 시애틀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사업가로 큰 성공을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인해 사람들이 굉장히 놀랐습니다. 뭔 말일까요?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잘못 정했다.” 그는 월마트를 만들고 키우느라고 늘 바빴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자녀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손자들 이름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노년에 혈액 암에 걸리고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 뒤돌아보니 너무나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그가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 나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잘못 정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우선순위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 1. 가족 2. 건강 3. 평안 4. 일 5. 취미생활 6. 타인과의 좋은 관계 7. 신념의 자아 성취. 물론 저와 여러분들의 우선순위도 이와 비슷할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분명한 차이점은 그 우선순위 중 1순위가 하나님이냐 아니냐는 겁니다.
믿음이 적을 때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1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나와 내 가족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믿음이 자라나면서 결국 하나님이 나의 가장 우선순위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나와 내 가족이 가장 행복해지는 비결인 것을 깨닫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왜 불행한지를 알고 있고,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친아버지입니다. 누구보다도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고 있고,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려는 분입니다.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기까지 보통 얼마의 세월이 지나야 할까요? 그리고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어도 진짜 그대로 실천하고 살기까지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까요? 제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닫는 성경구절 중 하나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즉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모든 것이 뭘까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에게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앞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건강, 평안, 일, 취미생활, 타인과의 좋은 관계, 신념의 자아 성취...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았으니 죽어서도 천국이고, 영생이고, 부활이고, 영원한 행복입니다.
여러분, 이거 상당히 괜찮지 않습니까? 저의 경우 중고등 학교 시절부터 느끼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좀 못생겼구나!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도 좋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재주도 부족하구나! 더구나 공부도 잘 못하는데... 아-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누가 나 같은 사람한테 시집이나 오려고 할까? 나는 앞으로 뭐하고 살지?”
아- 뭐하고 살기는요? 그저 남들이 사는 대로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요? 대학 들어가서 공부하고, 한국 남자니까 군대도 갔다 오고, 직장 잡아서 일하다가, 한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결혼했으니 아이도 낳고, 그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다가 때가 되어서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말로는 쉽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대학 들어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죽어라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죽어라고 공부하지만 모두가 일류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내가 원하는 곳에 취직을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일하는 것도 스트레스가 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고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결혼해서 애 낳고 살다보니 아-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돈 없어도, 직장 없어도 부모님이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그런데 결혼하니까 내가 그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실력이 달리는데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준다고 했습니다. 뭐-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아니- 세상 살기도 바빠서 죽겠는데 뭔 시간이 많아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사느냐 이겁니다. 이딴 것은 마음 편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유가 있고 시간이 남아도는 팔자 좋은 사람이나 교회 가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 모태신앙이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교회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간신히 교회 처음 나갔습니다. 교회 처음 가서 느낀 것은 일단 불편합니다. 답답합니다.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 앉은 사람들은 다들 소리 내어 찬송가를 잘 부릅니다. 그런데 저는 찬송가 하나도 모릅니다.
더구나 저는 박자 관념이 없고, 목소리도 좋지 못하고, 학창 시절에 가장 싫어하는 과목 중 하나가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형제님 자매님 같은 인사말이나, 할렐루야 아멘 같은 표현들이 저는 굉장히 어색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와서 앉아 있으면 더 자신감이 떨어지고, 그러잖아도 내 스스로 못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회에서는 더 못난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3년이면 라면도 끓인다는 말이 있듯이 저 같은 사람이 목사가 돼서 사람들 앞에서 찬송가도 선창하고, 형제님 자매님 할렐루야 아멘 같은 표현도 불편 없이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목사가 되었으니 강대상에서 ‘축원합니다.’라는 말도 서슴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아- 세월 참 많이 변했습니다. 김원효 진짜 많이 변했습니다. 옛날에 세상적으로 놀았던 제 친구들이 저의 변한 모습을 보고 “야- 니가 진짜 원효니?”라고 말을 합니다. 암튼 교회 다니는 것이 처음에는 일단 제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저희 집 담벼락과 교회가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교회에서 전도 대상이 되었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먼저 그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도 할 수 없이 교회에 끌려가다시피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에 옛날 저처럼 마지못해 교회에 끌려오신 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배드리는 것이 답답하고 힘드신 분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아- 살았다!”라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그게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겪는 당연한 현상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 다니는 숫자가 점차 늘어나다 보니 슬슬 아는 찬송가도 생기고, 아멘 할렐루야도 익숙해집니다. 목사님 설교도 자주 듣다 보니 처음에는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고 지루했었는데 나중에는 “뭐-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네. 그냥 참고 들으면 들을 만하네.” 정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체험이 하나 둘 생깁니다. 또 다시 교회를 멀리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적으로 좀 타락해보니까 처음에는 그게 좋았는데, 나중에는 하나님을 떠나니까 인생이 자꾸 피곤해지고 힘든 겁니다. 그렇게 왔다리 갔다리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후 나의 인생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최우선주의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암튼 하나님의 일이 가장 먼저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다 보니 진짜 하나님 약속하신대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받는 축복이 임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 비결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비결을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그래서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좀 더 많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약속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줍니다. 인생의 보람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사실 오늘의 이 비결, 이 성경 구절 하나만 제대로 알고 실천만 해도 크게 복 받는 인생이 됩니다.
결론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 분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결국 불행해지고 맙니다. 월마트 창시자 샘 월튼처럼 나중에 “나는 인생 잘못 살았다.”는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최우선으로 사시며 결국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을 위한 기도의 위력
마태복음 6:33~34 / 이규현 목사
현대인들은 살면서 많이 고민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고민합니다.
오늘 한 일을 내일도 할 수 있을지, 지금 자신이 가진 실력이 미래에도 유용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안전하다고 해서 내일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걱정합니다.
오늘날 사람의 능력이 극대화됨으로 인해 엄청난 문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이 극대화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또한 많아집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지만, 사람의 지혜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염려합니다.
많이 염려하는 것은 현재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염려하는 것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불면증 등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오늘날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염려, 근심, 불안, 두려움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불안, 두려움, 염려 등은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염려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고 해서 염려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하지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염려는 미래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는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다가 미래를 염려합니다.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살아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은 분명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것,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이 외에는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염려하는 것에 대해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매우 간단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염려에 대해 특별한 처방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염려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염려하는 것으로 인해 삶이 오히려 파괴됩니다. 정서적으로 위축될 수 있습니다.
둘째, 염려하는 것은 비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없어지거나 문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비생산적입니다.
셋째, 염려하는 것은 미래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지금, 현재에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를 염려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염려하는 것에 대해 복잡하거나 심오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매우 간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일을 계획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단순합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오랫동안 깊이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바로 행동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깊이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대로 바로 행동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대로 즉시 행동해야 하는 말씀이지. 오랫동안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바로 행동해야 하는 말씀을 오랫동안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은 명령하신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은 명료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무엇인가 하라고 할 때, 엄마는 아이가 이해하기 어렵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는 엄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말해야 합니다. 명료하게 말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수 6: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순종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수(高手)는 단순합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단순해진 것은 아닙니다. 고수가 되기까지 시행착오를 많이 한 결과 삶이 단순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만 행동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부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염려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염려하지 마.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가 뜻하는 대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염려합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많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을 주께 맡기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로 인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의 말씀을 NIV성경으로 보면,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염려를 던지라(cast)고 했습니다. 마치 공을 던지듯 염려를 던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염려를 던져야 합니다. 염려를 던지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염려를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해주시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수원지에는 물이 흘러넘칩니다. 수원지의 물이 파이프를 통해 연결되어있으므로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옵니다.
파이프를 통해 수원지와 집이 연결되어있어도, 수도꼭지를 돌리지 않으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수도꼭지를 돌려야 물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늘’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이나 먼 훗날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오늘 필요한 양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필요한 양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허락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내일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진 것은 내일을 보증합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날마다 오늘의 양식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오늘이 있어야 미래가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한 주가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루’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 미래로 가게 하셨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다른 시간입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오늘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과거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왕년에 자신이 대단했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계속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을 생각하며 원망합니다.
이런 사람은 과거를 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경험한 것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치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늘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엄청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늘 미래만 이야기합니다. 오늘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뿐입니다. 오늘을 무의미하게 보내면, 삶이 허무해집니다.
기독교에서 내일의 천국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람은 미래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려면, 오늘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실재(實在)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오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이미 오신 하나님,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을 통해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서 내일도 먹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주도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내일을 맡기는 것은 내가 내 삶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내일을 맡김으로 하나님께서 삶에 개입하실 것을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를 살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출 16:1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쌓아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철저히 의존하는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배가 부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게 하셨습니다.
잠언 30장 8절에 보면,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의 문제 속에 빠져듭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기뻐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문제와 상황이 우리를 끌고 가는 듯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상황의 피해자, 상황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생존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삶이 풍요로우면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력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내일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돈이 있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고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원활하게 돌고, 체온이 온전하게 유지되고, 편하게 호흡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루 동안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하루 동안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내일도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날마다 오늘 하루를 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그곳이 어디인지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라는 의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았다면, 내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일 일을 오늘 미리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 일은 내일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 충실하지 않으면, 내일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오늘 하루 열심히 살면, 내일을 살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을 많이 염려하는 사람은 오늘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내일도 동일하게 우리를 도우십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7~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은 염려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도하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기도의 초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기도는 명확해야 합니다. 명확하게 기도해야 분명하게 응답받습니다.
빌립보서 4장 5~7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래를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지금 오늘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목할 때, 염려는 사라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안과 염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더 많이 염려하게 되고, 불안해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주목할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고,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꾸준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음이 정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정리한 후, 마음이 비어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께서 임하셔야 합니다.
세상은 혼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을 삶 속에 맞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오늘도 동행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을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가득해야 합니다. 하루를 살게 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끄시는 하나님,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승리합니다.
거창하게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창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는 내일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내일이 불안합니다. 오늘을 살면서 살아계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며 하나님을 경험할 때, 내일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이라고 찬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을 주셨습니다. 오늘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목하게 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일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요,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날마다 천국을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천국을 경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셔서 우리가 삽니다. 하루를 사는 동안 죽음의 위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생명을 연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의사가 포기한 생명이라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모두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