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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마이 카
남편이 직장에서 쓰러졌다는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막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 중이었다. 그날따라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끼니를 거를까 생각하다가 엊그제 동네에 새로 생긴 반찬가게에서 산 맛깔스럽게 생긴 오징어젓과 명란젓이 생각나 밥 반 공기만 먹은 후였다. 물 묻은 고무장갑을 벗기도 귀찮고 모르는 번호라서 처음엔 받지 않았다. 곧바로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세 번째는 남편의 사무실 전화번호였다. 상대방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는 남편의 직장 후배였다. 중견 기업의 임원인 남편의 신임을 얻어 승진 가도를 달리는 젊은 남자로 회사의 행사 자리에서 나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것을 눈여겨봤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머리숱이 적은 어느 의사가 나에게 동의서를 내밀며 남편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는 피곤한지 연신 입을 벌려 하품했다. 그러다 잠꼬대하는 것처럼 부정확한 발음으로 뇌혈관이 터져서 빨리 수술을 안 하면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수술이 잘 되더라도 중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겁에 질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내가 손을 올려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는 동안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나는 다섯 살배기가 연필을 쥐고 처음으로 따라 써 본 제 이름처럼 동의서에 서명했다. 의사는 내 손가락 땀이 밴 종이를 낚아채더니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멀리서 그가 두 팔을 머리 뒤로 넘기며 기지개를 켰다. 그의 하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남편은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수술실을 나온 의사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창밖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간 조명이 운치 있게 비추고 있어 몇몇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가 남편의 시신을 보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는 목례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일본에서 사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알리기 위해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남편의 장례식장 복도에 근조화환들이 가득 찼다. 회사, 동창회, 거래처, 골프장뿐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를 알 수 없는 이름들도 많았다. 그중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당신의 비즈니스 파트너, 퀸 Queen’
비즈니스 파트너는 무슨 얼어 죽을 파트너. 남편이 접대를 핑계로 드나들던 술집일 것이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여자 문자로 생전에 내 속을 그렇게 썩이고 아들과도 멀어진 주제에 죽어서까지 지랄염병이다. 남의 상갓집에 입간판처럼 세워둔 그 화환이 꼴도 보기 싫었다. 조문객들에게 술집을 광고하려는 그 마음이 아주 괘씸했다. 나는 첫날부터 일을 거들고 있는 문석에게 그 화환을 치워버리라고 말했다. 문석은 한동네에 살던 아들의 어릴 적 친구이다. 그는 통통하고 키가 작았지만, 붙임성이 매우 좋았다. 우리 집에 어찌나 자주 놀러 왔는지 당시 바빠서 집에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던 남편보다 밥을 더 자주 해 먹였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묵묵히 공부해서 지금은 경찰이 되었다. 당시에 마치 내 아들의 일인 것처럼 축하해줬다. 남편의 장례식 기간 내내 휴가를 내고 도우러 왔다고 했다.
“어머니, 이거 그냥 버려요?”
“문석아, 그냥 내 눈에 안 보이게 어디에 치워버려.”
나는 조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식장 안으로 들어가 상주인 아들 옆에 섰다.
조문객 중에 술집 여자가 있는지 눈여겨봤지만 죄다 검정 옷차림을 한 까닭에 이 여자가 저 여자 같아서 잘 모르겠다. 같은 여자로 태어나서 누구는 남자에게 웃으며 술 따르는 대가로 돈과 사랑을 받고, 다른 누구는 남자에게 평생 밥을 차려 주지만 사랑조차 받지 못한다. 전자는 사회에서 금기하지만, 후자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게 인간의 커다란 모순 같다고 생각했다.
발인 날 문석이 영정 사진을 들고 그 뒤로 남편의 직장 사람들이 관을 운구했다. 장례식 내내 무표정했던 아들은 침울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표정이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렸다. 화장한 뒤에 유골함은 남편 고향의 선산에 있는 산소에 두기로 했다. 생전에 남편은 시부모님 묘지에 둘레석을 두르고 그 안쪽으로 유골함을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공간을 다 채우려면 나도, 아들도, 그 후손의 후손이 죽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이곳을 찾지 않으리라. 그 술집 년들이라고 죽은 당신을 찾아올 것 같아? 살아생전에 나를 그렇게 외롭게 했으니 이제부터 당신도 좀 외로워 봐.
며칠 후 남편의 직장 후배인 그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사무실에 남겨진 남편의 물건들을 정리해서 보내드릴까 했는데 주차장에서 남편의 차를 봤다고. 사람을 시켜서 물건들을 차와 함께 보내드릴까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차 키가 없었다고 한다. 차도 가지러 올 겸 회사로 한번 나오시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옷장을 뒤져서 남편이 회사에서 쓰러졌던 날 입었던 정장을 찾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집 근처 백화점에 갔다가 마침 정기 세일이라 샀던 짙은 남색 정장이었다. 구겨진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가 만져졌다. 차 키를 꺼내어 책상에 놓고 엠블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남편이 전무이사로 승진하고 집 근처 매장에 가서 계약했던 외제 고급 세단이었다. 나는 운전이 서툴러 덜컥 겁이 났다. 남편의 차 키를 핸드백에 넣고 집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회사에 도착해서 전화를 거니 곧 말쑥한 정장 차림의 그가 나와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를 남편의 사무실로 안내하며 비서에게 차 좀 갖다 달라고 하고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사과 상자 크기의 플라스틱 바스켓이 있었다. 회사 야유회 날, 산 정상에서 웃고 있는 그가 담긴 사진이 보였다. 그 밖에 각종 표창장과 임명장 같은 것들이 있었다. 반대쪽에서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발견했다. 오래전, 그러니까 시어머니께서 아직 살아계실 때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날 시어머니는 당신의 영정 사진까지 찍었던 터라 기억에 남아 있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비서가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왔다. 항공사 승무원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묶은 젊고 날씬한 여자였다. 남편은 내게 비서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므로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비서가 나가려던 문을 그가 열고 들어왔다.
“사모님, 번거롭게 여기까지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가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커피를 손에 들고 말했다.
“저, 그게 아니라 전무님 차 키를 찾았어요. 책상 서랍 구석에 있었는데 저희가 꼼꼼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빠뜨린 거 없는지 확인하라고 시켰는데, 좀 전에 찾았어요.” 그가 겸연쩍은지 다시 한번 뒷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차 키가 두 개일 수도 있나요?”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핸드백에서 차 키를 꺼냈다. 그가 내민 차 키와 같은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가 바스켓을 들고 나를 지하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차 키 하나를 들고 이곳저곳을 향해 버튼을 눌러댔다. 저 멀리서 ‘삐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나도 그를 따라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에 남편의 차와 같은 차종, 같은 색의 차가 한 대 있었다. 그런데 번호가 다르다.
차 앞에서 아무런 말이 없던 그가 다른 차 키를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남편의 차 앞에서 버튼을 누르자 ‘삐빅’하는 소리가 났다.
“전무님께서 같은 차가 두 대인 줄 저도 몰랐습니다.” 그가 다시 뒷머리에 손을 올리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몰랐다. 남편이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당장 두 대의 차를 가지고 집에 갈 일이 걱정이었다.
“제가 운전해서 댁에 가져다드리면 좋은데 좀 이따가 사장님께서 주재하시는 회의가 잡혀 있어서요. 사모님, 혹시 대리 기사 불러 보셨어요?”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대신 불러드리겠다고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시 후 요금까지 자기가 냈다면서 기사가 오면 같이 가시면 될 거라고 말했다.
“사모님, 저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아무쪼록 댁까지 안녕히 가세요.” 그는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곧 차 키를 건네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되돌아와 나에게 차 키 두 개를 넘겨주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그가 사라지자 나는 남편의 차 트렁크를 열어 바스켓을 넣었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나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적당히 그을린 안색에 광대뼈가 돌출해 있었다.
“대리 부르셨죠?” 그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대리 기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운전에 서툰 내가 따라갈 수 있도록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했다.
“문제없습니다, 사모님. 제가 앞에서 천천히 갈 테니 저만 따라서 오세요. 혹시 저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내비에 주소 찍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의 자신만만한 웃음기 어린 친절한 말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대리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네고 남편의 차에 올라탔다. 내가 시동을 걸자 그가 운전석과 룸미러를 조정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 후엔 내비게이션에 집 주소를 입력하라고 말했다.
“자, 준비됐습니다. 그럼 천천히 따라서 오세요. 혹시 저를 놓치면 그냥 갓길에 세우세요. 제가 찾을 테니까.” 하고 말하고는 그는 남편의 다른 차 쪽으로 갔다. 그가 차를 몰고 내 앞으로 오자 창문을 내려 내게 손짓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차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몇 차례 신호 대기에 걸리고 출발하는 동안에 그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서 가니 앞에서 천천히 운전하고 있는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좌회전하는 곳에서 차선 변경을 하지 못하고 직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이미 좌회전해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문득 갓길에 세우라는 그의 말이 생각나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차선을 변경했다. 그때 뒤에서 ‘빵’하고 경적이 크게 들렸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아버렸다. 다행히 뒤에 있던 차와 부딪히지 않았다. 그 차는 옆 차선으로 빠지더니 내 옆을 지나가며 창문을 내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울상이 된 채 천천히 갓길에 차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세주처럼 그가 나타나 내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그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뒷차 운전자에게 세운 내 차를 비켜서 가라고 손짓했다.
“괜찮으세요?” 나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더 천천히 갈 테니까 잘 따라서 오세요.” 하고 말하고는 다시 뒤에 있던 차를 향해 옆으로 빠지라고 손짓했다. 곧 그가 출발했고, 나도 그를 따라갔다.
다행히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파트 입구 차단기가 그의 차 번호를 인식하고는 문을 열었다. ‘차를 아파트에 등록까지 해놓고 굳이 나에게 숨긴 이유가 무엇일까?’ 대리 기사가 세운 차 옆에 나란히 주차하며 생각했다. 때마침 기사가 그 이유로 생각되는 물건을 들고 내렸다. 그의 손에는 이름난 명품 로고가 박힌 핸드백이 들려 있었다.
“사모님, 조수석에 이게 있었는데요. 혹시 사모님 건가 해서요.” 그가 나에게 차 키와 함께 핸드백을 건넸다. 나는 내 것이 아닌 그것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잠시만, 오늘 너무 감사해서 이것 좀.” 나는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5만 원 지폐를 한 장 찾아 건넸다. 그는 광대뼈가 올라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돈을 덥석 받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건 제 명함이니까 혹시 다음에도 대리 기사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장거리, 단거리, 아침에도, 밤에도 다 가능하니까 연락만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는 빠르게 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긴장하며 운전해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왔다. 땀에 젖은 속옷을 벗고 샤워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나는 경찰인 문석에게 차 번호를 문자로 보내 주인이 정말 남편인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얼마 후 문석에게 전화가 와서 남편 명의로 된 차라고 말해주었다.
“어머니, 근데 이거 작년에 접촉 사고 한 건 있네요. 별거 아니긴 한데, 장소가 강원도예요.”
“날짜가 언제지?”
“에이 어머니, 돌아가신 아버님 뒤를 캐서 뭐 하시게요.”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알았다. 고맙다, 문석아.”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소파에 던져둔 남편의 차에서 나온 핸드백을 열어 내용물을 식탁 위에 쏟았다. 각종 화장품이며 담배, 여성용품이 쏟아져 나와 어지러웠다. 담배 케이스 속에 있는 라이터에서 익숙한 문구를 발견했다.
‘당신의 비즈니스 파트너, 퀸 Queen’
내용물을 뒤적이다 명함 케이스를 발견했다. ‘대표이사 Grace M. Cha’라고 쓰여 있었다. 그레이스라고? 웃기지도 않아. 미들 네임이 M인 걸 보니 차미경 아니면 차미란인데 뭘.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까 생각하다가 아쉬운 건 내 쪽이 아니라는 생각에 관뒀다.
며칠 후 남편의 두 번째 차, 그러니까 나란히 주차된 차 중에 문제의 그 차가 사라졌다. 대리 기사와 차를 가져온 후로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니 정확히 언제 사라진 것인지 모른다. 나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지만, 다시 문석에게 연락했다.
“아파트 CCTV 보면 금방 잡힐 텐데, 요즘에도 그렇게 용감한 도둑이 있네요. 제가 이따가 가서 볼 테니까 어머니는 가만히 계세요. 주차장 어디예요?” 나는 문석에게 주차장 위치를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차미란인지, 차미경인지, 아무튼 명함의 번호로 전화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가 차 가져갔니?”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누구? 무슨 차? 아, 난 또 누구라고. 오빠 와이프구나.” 상대가 웃으며 말했다.
“길게 얘기할 거 없고 네가 그 차 가져갔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올 때 내 핸드백 가져오시고. 가게 주소 불러줄 테니까 이따가 거기서 봐요.” 상대가 전화를 끊었다.
“이런 싹수없는 년.”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화려한 간판들이 유혹하듯 반짝거리고 시끄러운 음악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전형적인 유흥가였다. 길 건너 쪽에 ‘퀸, Queen’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지하에 있는 가게로 들어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무릎이 안 좋아 난간을 잡으며 천천히 내려가고 있을 때 문석에게 전화가 왔다. 문석은 CCTV로 그 차 도둑을 찾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사진 몇 장 보낼 테니 확인해 보라고 덧붙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문석이 보낸 사진들을 살펴봤다. 사진 속 인물은 그때 운전해 준 대리 기사였다. ‘이 사람이 왜?’ 나는 그 남자와 그레이스 차와의 연관성을 이리저리 상상해 봤다. 두 사람이 서로 알 확률은 비행기 옆 좌석에서 4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우연히 만날 가능성보다 낮으리라. 잠시 후 문석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그 대리 기사를 도둑으로 신고해야 하는지 갈림길에 섰다. 그의 친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 내게 명함도 줬는데.’
“내가 그 차를 누구에게 빌려준 걸 깜박했지 뭐니. 내가 이렇다 요즘.”
“그 사람이 누군데요?” 문석이 물었다.
“아, 있어. 네가 모르는 사람.” 나는 그냥 둘러댔다.
“어머니, 그럼 문제없는 거죠?” 그가 확인차 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그 차 이제 어머니에게로 명의 바꾸셔야 해요. 안 그럼 벌금 내요.”
“어 그래 그렇게 할게. 괜히 너만 수고하고 미안하게 됐다.” 하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그레이스 차를 만나러 내려갔다.
자동문이 옆으로 열리자 열 평 남짓한 새하얀 공간이 나왔다. 앞쪽에 하얀 소파와 카운터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불투명한 유리 벽으로 된 사무실, 오른쪽으로는 긴 복도로 연결돼 있었다. 마침 화장을 진하게 하고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복도에서 걸어왔다.
“그레이스 차, 어디 있어요?”
“그레이스? 그레이스가 누구지? 아, 미경 언니요. 저기 안쪽 방에 있어요.” 그녀가 유리 벽 사무실을 가리켰다. 나는 노크를 할까 하다가 손잡이를 힘껏 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레이스, 아니 차미경은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계란형 얼굴에 검붉은 뿔테 안경을 썼고, 머리는 승무원처럼 곱게 빗어 착 달라붙게 고정했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엉덩이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있었다.
“왜요? 생각했던 이미지랑 달라요? 오늘 예약 손님은 이런 복장을 좋아하셔서.”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의식하며 말했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는데 그쪽 볼에만 작은 보조개가 있었다.
“내 핸드백 가져왔어요?”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자기 핸드백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왜 네 핸드백이 내 남편 차에 있는 거지?” 나는 핸드백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놨다.
“음, 오빠하고는 뭐랄까?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그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이 핸드백, 오빠가 사준 거예요. 오빠가 그 차도 나한테 준다고 했는데. 사모님은 운전 못 한다고.” 그녀는 휴대전화에서 남편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찾아 어느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집사람은 운전도 못 해. 그레이스, 드라이브 마이 카.^^’ 라고 쓰여 있었다.
“너 따위가 뭐가 좋다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린 집에서는 못 받는 서비스를 해 주잖아요?” 다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박한 것.”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집에만 계셔서 사람들이 얼마나 천박한지 모르죠? 당신 남편, 어떻게 놀았는지 한번 보여줘?”
그녀의 입이 비뚤어지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유리문이 부서질세라 쾅 닫고 나왔다. 안에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지가 떨려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간신히 버텼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난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왔다. 나는 유흥가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천천히 걸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음료를 받아 자리에 앉자마자 벌컥벌컥 마시니 그제야 벌렁거리던 가슴이 좀 진정됐다. 등과 겨드랑이, 사타구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문득 울고 싶을 정도로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핸드백에서 그 대리 기사 명함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이나 계속됐지만 받지 않았다. 괘씸한 마음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당장 내가 찍어주는 곳으로 그 차 가지고 와요. 한 시간 내로 안 오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메시지를 읽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음료를 다 마시자 나도 모르게 얼음을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남은 얼음이 거의 녹았을 무렵 그가 카페로 들어왔다.
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그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는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이 차를 딱 하루만 빌리려 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집에 가는 내내 이어졌는데 요약하자면 이랬다. 한때 잘나가던 카센터 사장님이었던 그는 가게가 망해서 큰 빚을 지고 아내와 이혼했다. 처음에는 위장이혼으로 시작했지만, 아내가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그녀에게 새 애인이 생겨버렸다. 하나뿐인 아들도 데려가서 같이 사는데, 그는 아들이 보고 싶어도 전처가 못 만나게 했다. 사정해서 오랜만에 아들을 보러 갈 기회가 생겼는데 못난 아빠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카센터를 하던 시절, 차에 관심이 많던 아들은 이 브랜드의 차만 들어오면 좋아했다. 그래서 어제 이 차를 ‘빌려’서 아들을 만났고, 오늘 ‘반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나는 입을 열었다.
“문은 어떻게 열었어요? 차 키도 없는데 시동은 어떻게 걸고?”
“사모님, 제가 카센터만 십 년 넘게 했습니다, 흐흐.” 그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고 시동을 멈추었을 때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쪽도 알다시피 나는 운전도 서툰데 비싼 차가 두 대나 생겼어요. 제가 그 쪽에게 차 한 대를 사용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드리는 건 아니에요. 그 대신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나를 태우러 와요. 그렇게 하면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갈게요.”
“음, 이 좋은 차를 제 것처럼 쓸 수 있다면야 저도 좋습니다. 다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당일에 호출하시면 안 되고, 적어도 하루 전에는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제가 선약이 있을 때는 안 될 수도 있고요. 음, 또 나머진 차차 서로 맞춰 봐요.” 그가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천장의 전등 빛 아래서 그의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며칠 후, 나는 문석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의 명의를 나에게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보험을 갱신하여 그를 피보험자로 등록했다. 이제 나에게 운전기사가 생겼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우쭐해졌다. 아무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디에 가면 좋을까 생각해봤다. 문득 연예인들이 출국하기 위해 공항에서 내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공항 정도는 가야 폼이 나겠지.’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선글라스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산 거 어디에 놨더라?’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장을 뒤져 공항 면세점에서 샀던 선글라스를 찾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봤다. 공항에 간 김에 아들 보러 일본이나 다녀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터넷으로 주말에 출발하는 도쿄행 항공권을 알아봤다. 그리고 아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돼? 엄마가 요즘 외로워서 이번 주말에 아들 보러 가고 싶은데.' 곧바로 아들에게 답이 왔다.
'아빠 장례식 때 본 게 얼마 전이잖아요. 주말에 바쁜데.'
'그래도 좀 만나줘. 엄마 토요일 두 시 비행기이니까 시간 맞춰서 공항에 마중 좀 나와.'
'아이참, 다 정해놓고 연락은. 알았어.'
나는 곧장 기사에게 문자를 보내 이번 주 토요일, 공항에 갈 테니 태우러 오라고 했다. 기사에게 알겠다는 답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들뜨고 신났다. 근래에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당일에 기사가 올 시간이 되자 나는 트렁크를 끌고 문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이리저리 만졌다. 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는 중인데 길이 많이 막혀요. 조금 늦겠어요.”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나는 처음엔 초조하다가 나중엔 화가 났다. 그는 결국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요? 비행기 놓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길이 막혀서 그런데 어떡해요? 지금 공항 가면 늦을 것 같은데. 아무튼 빨리 타세요.” 그는 그대로 차에 다시 탔다.
“짐 좀 트렁크에 넣어 주세요. 나 혼자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라고.” 내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가 투덜거리며 다시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짐을 넣었다.
기사의 예상대로 공항까지 가는 길은 가고 서기를 반복하였다. 비행기를 놓칠 것 같아 초조하고 불안했다. 차가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나는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창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차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트렁크를 열어 달라고 했다. 낑낑대며 혼자 짐을 꺼내고는 곧장 항공사 카운터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항공사 직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해당 비행기는 이미 탑승을 완료해서 탈 수 없다고 했다. 직원은 환불 규정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허탈한 기분이 들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구석진 벤치에 앉아서 아들에게 일본에 못 가게 됐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알았어.’ 하고 짧은 답이 돌아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되돌아올 수 있냐고 물었다. 당신 때문에 늦었으니까 당신이 책임지라고 소리쳤다.
“저 지금 돌아가는 길이예요. 적어도 하루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친절한 말투와 행동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천천히 트렁크를 끌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두 시간 이내에 배차된 버스는 전부 매진이었다. 나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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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드라이브마이카 즐겁게 잘보구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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