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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일어선 사자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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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연구실에 한 여학생이 끼익 하고 문을 열며 들어간다.
여학생은 "교수님~ 교수님~ 안 계세요?"하며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깜짝 놀라 "끼약~~~"하고 비명을 지른다.
방 안쪽 책상 옆 바닥에 중년 남성이 피를 흥건히 흘린 채 엎드려 쓰러져 있고
벽에는 일어선 사자가 그려진 종이가 붙어 있는데
사자 그림에 피로 X자가 굵게 칠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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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바뀜)
교수연구실에 경찰 감식반들이 사체 주변의 사진을 찍으며 조사를 하고 있고,
중년의 김 형사가 청년 박 형사로부터 보고를 듣는다.
박 형사 : 피해자는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최영필, 나이는 44세.
칼에 여러 번 찔렸고, 사망추정시각은 어제 28일 밤 9시부터 11시 사이랍니다.
김 형사 : 가족은 ?
박 형사 : 아직 독신이라 혼자 살고 있다 합니다.
(곁에 있던 여학생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 여학생이 최초 발견자인
이수연 학생, 역사학과 대학원생입니다.
김 형사 : 수연 양, 처음 교수님을 봤을 때 어땠어요?
수연 : 글쎄요, 너무 놀라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김 형사 : 교수님과는 평소에 자주 만나나요?
수연 : 네, 그럼요. 지도교수님이거든요.
김 형사 : 혹시 원한관계라든가 뭐든 짐작가는 게 있나요?
수연 : 대단한 건 아닌데 혹시해서요. 사실은 저희 학과에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있는데
요즘 트러블이 좀 있었어요.
김 형사 : 트러블이라면 어떤?
수연 : 노르웨이에서 온 헬레나라는 여학생이 최 교수님을 짝사랑했거든요.
김 형사 : 짝사랑?
수연 : 네. 헬레나가 여러차례 교수님께 구애를 했는데
교수님이 받아주지 않으셔서 자존심에 무척 큰 상처를 받았죠.
김 형사 : 그래서 무슨 행동이라도?
수연 : 친구들한테 "가만있지 않겠다"고 큰 소리 쳤나봐요.
김 형사 : 박 형사! 빨리 가서 헬레나라는 학생 조사해봐.
박 형사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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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 원룸건물 현관 앞) 형사 둘이 208호의 초인종을 누른다.
초인종 옆 스피커에서 "누구세요?"라고 응답한다.
김 형사 : 아, 경찰입니다. 헬레나 양? 잠시 여쭐 게 있는데요.
(스피커에서 서툰 한국말로) 네? 경찰이요? 무슨 일로요?
김 형사 : 잠시만 나와 주세요.
(헬레나가 원룸 현관앞으로 나온다)
김 형사 : 안녕하십니까?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경찰입니다.
헬레나 : (서툰 한국말로) 무슨 일이시죠?
김 형사 : 최영필 교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래서 수사중이죠.
헬레나 : 네? 교수님이?
김 형사 : 학생이 최영필 교수님을 짝사랑했다던데 사실입니까?
헬레나 : (더듬으며) 네, 맞아요.
김 형사 : 여러 번 구애했지만 거절당했다던데...
헬레나 : 그러게요. 정말 슬펐어요.
김 형사 : 듣기에 가만있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다던데 맞습니까?
헬레나 : 잠깐만 뭐에요? 저를 의심하는 거에요?
김 형사 : 참고로 질문하는 거니까 답변해주세요.
헬레나 : 큰 소리친 건 맞지만 술 김에 그냥 해본 말이에요.
김 형사 : 어제 28일 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어디 있었죠?
헬레나 : 으음.. 친구들이랑 술 마셨어요.
김 형사 : 박 형사, 친구들 연락처 받아서 확인해 봐.
박 형사 : 네.
헬레나 : 저는 아니에요. 알리바이도 확실하다고요.
김 형사 : 혹시 달리 의심가는데라도 있을까요?
헬레나 : 저보다 피터를 조사해보시죠.
김 형사 : 피터? 피터가 누군데요?
헬레나 : 아유, 저를 쫓아다니던 남학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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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 다른 원룸건물 현관 앞) 형사 둘이 308호의 초인종을 누른다.
초인종 옆 스피커에서 "누구세요?"라고 응답한다.
김 형사 : 아, 경찰입니다. 피터 군? 잠시 여쭐 게 있는데요.
(스피커에서 서툰 한국말로) 네? 경찰이요? 무슨 일로요?
김 형사 : 잠시만 나와 주세요.
(피터가 원룸 현관앞으로 나온다)
김 형사 : 안녕하십니까?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경찰입니다.
피터 : (서툰 한국말로) 무슨 일이시죠?
김 형사 : 최영필 교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래서 수사중이죠.
피터 : 네? 교수님이?
김 형사 : 그런데 피터 군이 헬레나 양을 짝사랑했다던데.
피터 : 네, 제 이상형이거든요.
김 형사 : 헬레나 양이 최 교수님을 짝사랑한 거 알고있죠?
피터 : 네.
김 형사 : 헬레나 양이 최 교수님에게 거절당하자 분노했다죠?
피터 : 제가요?
김 형사 : 헬레나 양 대신 최 교수에게 보복해 주겠다고
떠벌이지 않았어요?
피터 : 아 그거, 그냥 헬레나한테 잘 보이려고 과장한 거에요.
김 형사 : 어제 28일 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어디 있었죠?
피터 : 아르바이트 중이었는데요.
김 형사 : 박 형사, 아르바이트 가게에 조사해 봐.
박 형사 : 네.
피터 : 형사님, 저 아니에요. 터무니없다고요.
김 형사 : 네네, 누구나 조사받을 때는 다 그렇게 얘기해요.
피터 : 제 친구들이 들으면 어이없다고 웃을 일이거든요.
김 형사 : 그런데 피터 군은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피터 : 스웨덴요.
김 형사 : 헬레나 양, 피터 군 모두 북유럽에서 왔군요.
이렇게 먼데까지 굳이 무슨 일로?
피터 :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한반도는 쌍둥이거든요.
김 형사 : 쌍둥이? 영문 모를 소리로군.
피터 군 실례 많았습니다. 박 형사, 가지.
박 형사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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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안, 두 형사가 마주앉아 얘기한다)
김 형사 : 치정 사건인가 했는데 아닌 듯 하고.
박 형사 : 그런데 김 형사님, 사건현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죠.
김 형사 : 뭐가 있었던가?
박 형사 : 일어선 사자 그림 말이에요.
김 형사 : 음, 그렇지. 그런 게 있었지.
박 형사 : 그게 혹시 중요한 메시지 아닐까요?
김 형사 : 일어선 사자라면 외제차의 엠블럼 아닌가?
박 형사 : 아 그런 차가 있긴 하죠.
김 형사 : 그치? 그럼 국산 애호가가 범인인가? 박 형사, 최 교수 차가 뭐지?
박 형사 : (서류를 뒤져보더니) 아, 아니네요.
최 교수는 국산 자동차를 타는데요.
김 형사 : 음, 보자... 영국 축구팀 첼시의 로고가 일어선 사자 아니야?
박 형사 : 그래요? 어디 인터넷에서 찾아 볼까요?
(노트북을 사용하며) 맞네요. 첼시. 김 형사님 축구 매니아세요?
김 형사 : 어 뭐, 내가 첼시를 좋아하기는 하지.
박 형사 : 근데 살인사건과 연관짓기는 너무 뜬금없네요.
김 형사 : 유럽의 많은 나라들 국기 속에도 일어선 사자가 있긴 하지.
박 형사 : 유럽과 우리나라를 관련짓기는 쉽지 않죠.
김 형사 : 아 참 최 교수가 서양사 전공이지.
박 형사 : 네.
김 형사 : 최 교수가 서양사 연구하면서, 일어선 사자를 연구했다거나.
박 형사 : (노트북을 사용하며) 최 교수 논문을 뒤져봤는데
일어선 사자 얘기는 없네요.
김 형사 : 요즘, 사람들 블로그 많이 쓰지 않아?
박 형사 : (노트북을 사용하며) 아, 있네요. 최 교수 블로그.
어디 블로그에서 검색해볼까? (잠시 후) 아 있어요. 일어선 사자.
김 형사 : 글 제목이 뭔데?
박 형사 : 으음, "꿈꾸는 은하".
김 형사 : 뭐, 꿈꾸는 은하? 뭔 소리야? 주어야, 목적어야?
박 형사 : 창작소설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김 형사 : 소설?
박 형사 : (마우스를 스크롤하며) 글에 최영필이 등장하는데요? 배경은 1993년.
김 형사 : 자전적 소설인가?
박 형사 : 어디 검색해보자..일어선 사자
김 형사 : 뭐래?
박 형사 : 유럽이요.
김 형사 : 유럽?
박 형사 : 유럽 전체를 하나로 봐서 일어선 사자래요.
김 형사 : 황당하군.
박 형사 :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머리, 게르만왕국이 가슴, 라틴왕국이 배다리,
영국이 앞발이래요.
김 형사 : 아, 잠깐. 아까 피터 군이 뭐랬지?
박 형사 : 글쎄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한반도가 쌍둥이다?
김 형사 : 그럼 한반도가 머리?
박 형사 : 아, 블로그에 나오네요. 동북아시아 전체를 하나로 봐서
허리를 훽 구부린 곰이라는데요.
김 형사 : 가슴은?
박 형사 : 고구려 왕국
김 형사 : 배는?
박 형사 : 중국이 배다리.
김 형사 : 앞발은?
박 형사 : 일본
김 형사 : 아 몰라몰라. 머리 아퍼.
박 형사 : 제가 집에서 글 전체를 찬찬히 읽어보고 내일 말씀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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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경찰서 안, 두 형사가 마주앉아 얘기한다)
김 형사 : 읽어봤어?
박 형사 : 네.
김 형사 : 뭔가 건졌어?
박 형사 : 좀 황당한 얘긴데요. 최 교수 자신이 기준인이래요.
김 형사 : 기준인?
박 형사 : 중요한 사건이 최 교수를 기준으로 결정된대요.
김 형사 : 사례는?
박 형사 : 2004년에 웰빙 열풍과, 삼태극 유행이 있었잖아요.
최 교수가 '잘살자'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에서 삼태극을 주장했는데
잘살자를 영어로 번역하면 웰빙이란 거죠.
김 형사 : 과대망상 아냐?
박 형사 : 근데요. (화이트보드의 일어선 사자 그림과 구부린 곰 그림을 가리키며)
사자의 앞발은 영국이고, 곰의 앞발은 일본이라잖아요.
김 형사 : 그래서.
박 형사 : 그것 때문에 브렉시트 사건이 터졌다는데요.
김 형사 : 브렉시트가 뭐야?
박 형사 : 영국(Britain)과 탈퇴(Exit)의 합성어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말이죠.
김 형사 : 그게 어때서?
박 형사 : 곰의 앞발 일본은 독립국이잖아요.
그러니 사자의 앞발 영국도 유럽연합과 합치지 말고 독립해야한다는 거죠.
김 형사 : 일본이 중국과 합치든 말든 유럽하고 뭔 상관이야?
박 형사 : 쌍둥이라잖아요. 사자와 곰이.
김 형사 : 과거에 비슷한 일이라도?
박 형사 : 중세시대에 고구려왕국이 멸망한 후 거란,여진,고려 셋으로 갈렸듯
게르만 프랑크왕국이 셋으로 갈라져서 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를 거쳐
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이 됐잖아요.
김 형사 : 삼국분열. 둘 다 가슴이란 얘긴가?
박 형사 : 현대에도 사자와 곰의 앞발이 같은 운명을 걷는다는, 뭐 그렇다네요.
김 형사 : 음 잠깐.
박 형사 : 왜요?
김 형사 :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말야.
박 형사 : 네.
김 형사 : 문제는 누군가 그걸 믿는다는 거지.
박 형사 : 아, 그게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 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행동을 좌우할
계기가 되겠군요.
김 형사 : 역시 어제의 북유럽 유학생들이 범인인가?
박 형사 : 유럽연합의 통합을 깨트린 사건 유발자가 최 교수라고 믿었을까요?
김 형사 : 둘을 불러서 조사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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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취조실, 두 형사가 두 학생을 심문한다.)
김 형사 : 이거봐, 학생들! 우리나라에 온 목적이 뭐야?
학생들 : 목적이라뇨? 당연히 공부죠.
김 형사 : 흥, 혹시 유럽연합의 스파이 아냐?
피터 : 스파이라뇨? 아니요. 전혀 아닌데요.
박 형사 :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한반도가 쌍둥이란 건 누구 생각이야?
헬레나 : 최 교수님 블로그에서 봤어요.
김 형사 : 한국에 오기 전 유럽에서 이미 알고 있었나?
피터 : 아뇨, 그땐 한국말도 몰랐어요. 한국에 온 후 알게 됐다구요.
김 형사 : 그럼 무슨 계기로 한국에 올 결심을 했지?
헬레나 : K-pop을 좋아해서 한국이 좋았다고요.
김 형사 : 알리바이가 너무 분명해서 오히려 수상한데, 혹시 짠 거 아니야?
피터 :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말씀 드린 거라구요.
김 형사 : 잠깐. 어제와 얘기가 다른데.
어제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쌍둥이 관계를 알았던 것처럼 얘기했잖아.
피터 : 아뇨, 몰랐어요. 보이지 않는 쌍둥이의 힘이 우리를 인도한 거죠.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중에 불가사의처럼요.
김 형사 : (박 형사를 바라보며) 어때? 아니지?
박 형사 : 네. 이 둘은 아닌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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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사무실)
김 형사 : 설마 브렉시트 문제로 유럽이 한국을 탓하겠어?
박 형사 : 그죠?
김 형사 : 블로그에 뭐 다른 건 없어?
박 형사 : 아, 그게요. 댓글 중에 악성 댓글이 있더라고요.
김 형사 : 어떤?
박 형사 : "누구 맘대로 중국과 합치냐? 이 정신병자야."라고요.
김 형사 : 사자와 곰의 쌍둥이 관계 말인가.
박 형사 : 네, 유럽이 통합했듯 한중일도 통합하자는 말에 열받았죠.
김 형사 : ip는 추적해봤어?
박 형사 : 네, 의뢰해놨습니다.
(노트북을 확인하더니) 아, ip 추적 결과가 나왔네요.
김 형사 : 빨리도 통보해 주었군. 어디야?
박 형사 : 자유연합 사무실요.
김 형사 : 자유연합이라면 그 꼴통 우익단체?
박 형사 : 그러네요.
김 형사 : 불러들여.
박 형사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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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취조실)
김 형사 : 자유연합 대표 이만구 씨.
이 대표 : 네.
김 형사 : (노트북을 보여주며) 여기 댓글 당신이 달았죠?
이 대표 : 어디 보자. 아 맞습니다.
김 형사 : 점잖치 못하게 너무 막나간 것 아닙니까?
이 대표 :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정신병자죠 당연히.
김 형사 : 한중일 통합이 그렇게 싫었어요?
이 대표 : 그럼요. 말이 좋아 한중일 통합이지, 중국한테 먹히는 것 아닙니까?
사회주의 중국한테 먹히면 한국 자본주의는 끝이에요, 끝.
김 형사 : 최 교수가 밉던가요?
이 대표 : 암요, 밉죠.
김 형사 : 죽여버릴 만큼?
이 대표 : 네? 아니, 무슨. 그 정도는 아니죠.
박 형사 : 똑바로 얘기해요. 너무 미워서 죽인 것 아닙니까?
이 대표 : 아닙니다. 생사람 잡으시네.
김 형사 : 28일 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어디 있었죠?
이 대표 : 잠깐만요. 어, 집회가 있었네요.
김 형사 : 어디서요?
이 대표 : 광화문 광장.
김 형사 : 확실해요?
이 대표 : 네. 아마 사진도 찍어뒀을걸요.
김 형사 : 흐음.
이 대표 : 정말 최 교수가 죽었답니까?
김 형사 : 그래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잖소.
이 대표 : 나름 불쌍하네.
김 형사 : 동정하는 거요?
이 대표 : 최 교수가 나중에 입장을 바꿔서, 대환영이었거든요.
김 형사 : 바꾸다니?
이 대표 : 한중일 통합은 포기하고, 한미동맹 중심으로요.
김 형사 : 적에서 동지로 돌변?
이 대표 : 그러게요. 그 친구 회개했군 싶었는데.
김 형사 :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 형사! 나 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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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사무실)
김 형사 : 살인 현장의 일어선 사자 그림에 X표 말야.
박 형사 : 네.
김 형사 : 그건 당연히 쌍둥이 반대, 통합 반대라고 생각했는데.
박 형사 : 다른 의미일수도?
김 형사 : 저기 말이야, 혹시 다른 쪽 댓글은 없었어?
박 형사 : 다른 쪽 댓글요?
김 형사 : 한중일 통합 반대파는 이미 조사했고.
박 형사 : 한중일 통합 지지파?
김 형사 : 최 교수가 입장을 바꿨으니 통합 지지파가 열받지 않았겠어?
박 형사 : 찾아볼게요.
김 형사 : 그래, 최 교수 블로그에 한미동맹 얘기가 있을거야.
박 형사 : 거기에 악성댓글을 단 자.
김 형사 : 어때?
박 형사 : 아 있어요. "에라이, 배신자야 밤길 조심해라"라고.
김 형사 : 누군지 알겠어?
박 형사 : 떡하니 밝혔네요.
김 형사 : 뭐라고?
박 형사 : 대배달 연합회장 송기헌
김 형사 : 빨리 불러서 조사해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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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취조실)
김 형사 : 대배달 연합회 회장 송기헌 씨 맞습니까?
송 회장 : 네.
김 형사 : 최영필 교수 알죠?
송 회장 : 누구요?
김 형사 : 최영필 교수 말이요, 역사학과 교수.
송 회장 : 아, 난 또 누구라고. 알죠 최 교수.
김 형사 : 사적으로 친분이 있습니까?
송 회장 : 아니요, 만난 적도 없습니다.
김 형사 : 그럼 어떻게 알죠?
송 회장 : 기준인.
김 형사 : 기준인, 기준인 그러는데 도대체 기준인이 뭐요?
송 회장 : 아 뭐, 그런 게 있어요.
김 형사 : 최 교수 블로그에는 자주 방문했나요?
송 회장 : 그렇죠.
김 형사 : 블로그에 악플도 달았고?
송 회장 : 악플이 뭐요?
김 형사 : 악성 댓글 말이요, 욕이나 비난질.
송 회장 : 아 달았죠. 다 그럴만 하다니까.
김 형사 : 어째서요?
송 회장 : 최 교수가 이랬다 저랬다 입장을 바꾸는 바람에
얼마나 큰 혼란이 초래됐는지 알아요?
김 형사 : 한중일 통합?
송 회장 : 그렇소.
김 형사 : 당신은 통합 지지파요?
송 회장 : 네.
김 형사 : 최 교수가 돌변하는 바람에 배신감을 느꼈고?
송 회장 : 네.
김 형사 : 죽일 만큼 밉던가요?
송 회장 : 혼구멍을 내줘야지.
김 형사 : 그래서 죽였어요?
송 회장 : 네?
김 형사 : 최 교수를 당신이 죽였냐고.
송 회장 : 무슨 말씀인지.
김 형사 : 최 교수가 죽었단 말이요.
송 회장 : 나는 모르는 일이요.
김 형사 : 미웠지만 죽인 건 아니다?
송 회장 : 네.
김 형사 : 도대체 뭐가 그렇게 큰 배신이죠?
송 회장 : 최 교수가 처음에 통합을 주장했을 때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김 형사 : 어떤?
송 회장 : 친중 분위기를 타서 대통령도 중국과 친해졌지.
김 형사 : 대통령도 기준인을 아나요?
송 회장 : 물론. 정보기관이 주기적으로 기준인 동향을 보고했으니까.
김 형사 : 다른 각료들도 알아요?
송 회장 : 다들 알아요. 일부는 반대도 했지만.
김 형사 : 반대라면?
송 회장 : 대통령이 무속인에게 의존한다고.
김 형사 : 무속인요?
송 회장 : 네. 최 교수가 바리데기 운운했거든.
김 형사 : 최 교수가 무속인인가요?
송 회장 : 아니, 좀 과장된 거지. 바리데기 설화 언급 쯤이야 뭐.
김 형사 : 어떻든, 아까 얘기요. 대통령이 나서서 중국과 친하게 지냈다?
송 회장 : 근데 최 교수가 입장을 바꿨지.
김 형사 : 통합 주장을 폐기한거요?
송 회장 : 다시 미국에 달라붙자고 주장했으니 중국이 얼마나
기분 나빴겠어? 애들 사탕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김 형사 : 정부의 갈지자 행보가 이것 때문?
송 회장 :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지.
김 형사 : 중국도 기준인을 알까요?
송 회장 : 아마 알 걸. 어쨌든 사드다 뭐다 시끄러워졌지.
김 형사 : 그래서요?
송 회장 : 이렇게 중국과 험악하게 지내서 되겠어요?
김 형사 : 굳이 중국과 잘 지내야 될 이유라도 있나요?
송 회장 : 앞으로의 4세대 문명에서는 중국이 맹주야.
김 형사 : 맹주?
송 회장 : 3세대 맹주는 이제 한물 갔어.
김 형사 : 중국이 리더가 된다는 건가요?
송 회장 : 그럼. 그러니 우리도 중국과 잘 지내야지.
김 형사 : 도대체 친미니, 친중이니 꼭 강대국에 빌붙어야 하나요?
우리나라에 독립파는 없어요?
송 회장 : 모르는 소리. 지금은 원시반본(原始反本) 시대야.
김 형사 : 원시반본?
송 회장 : 가지와 잎사귀에 흩어져 있던 기운이 뿌리로 돌아가
합쳐지는 시기지.
김 형사 : 뿌리로?
송 회장 : 한중일 삼국은 모두 고대 배달국의 후손이야.
김 형사 : 배달국?
송 회장 : 환웅이 다스렸던 나라지.
김 형사 : 그래서요?
송 회장 : 한중일이 모두 뿌리인 배달국으로 돌아가 합쳐야 해.
김 형사 : 그래서 죽였나요?
송 회장 : 아니라니까.
김 형사 : 통합을 배신한 최 교수가 눈엣가시였죠?
송 회장 : 살인이라니, 무슨 증거 있어?
김 형사 : 내가 기필코 증거 찾아낼 겁니다.
송 회장 : 그러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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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사무실)
김 형사 :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자구.
박 형사 : 네.
김 형사 : 현장의 일어선 사자 그림 말이야.
박 형사 : 네.
김 형사 : 거기 X표를 다르게 봐야 할까?
박 형사 : 왜요?
김 형사 : 내 육감으로는 송 회장이 의심스러워.
통합 지지파들의 소행 같거든.
박 형사 : 지지파들이 사자 그림에 반대표시를 할 리는 없죠.
김 형사 : 혹시 X가 로마자로 숫자인가?
박 형사 : 10 이요?
김 형사 : 어떻게 생각해?
박 형사 : 글쎄요.
김 형사 : 최 교수 블로그에서 10 한번 검색해 봐.
박 형사 : (노트북을 사용하며) 딱히 안나오는데요.
김 형사 : 그래?
박 형사 : 아 맞다. 김 형사님, 송 회자이 4세대 어쩌구 떠들었죠?
김 형사 : 그렇지 4세대.
박 형사 : 최 교수 블로그에 4세대 관련 글이 많더라구요.
김 형사 : 4세대라.
박 형사 : 그림의 X자를 잘 보면 4와 연관되지 않나요?
김 형사 : 4마디. 4칸.
박 형사 : 어때요?
김 형사 : 좋아, 박 형사! 대배달 연합회 사무실 주소가 어떻게 되지?
박 형사 : (노트북을 사용하며) 어, 종로4가 4번지 한일빌딩
4층인데요.
김 형사 : (손가락을 튕기며) 그래 이거야.
박 형사 : 일부러 4와 연관된 곳에 사무실을 둔 건가요?
김 형사 : 4에 대한 집착이지.
박 형사 : 미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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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배달 연합회 사무실 건물 1층 현관 앞, 10명 정도의 형사와 10명 정도의
연합회 직원들이 대치하여 몸싸움을 하고 있다)
김 형사 : 어, 비켜.
송 회장 : 못 비켜.
김 형사 : 수색영장 집행이야. 방해하면 큰일 나.
송 회장 : 어딜 감히.
(연합회 직원들이 몸싸움에서 밀려 건물 옆으로 비켜나게 되고
형사들이 건물 안에 진입하여 4층에 도착한다.)
김 형사 : 어, 자물쇠를 채워놨네.
박 형사 : 자물쇠를 부숴야겠는데요.
김 형사 : 저기 구석에 소화기 있다.
(자물쇠를 소화기로 내리쳐 부수고 형사들이 사무실 안에 들어가
곳곳을 뒤진다)
박 형사 : (진열장의 받침대 위에 세워놓은 식칼을 가리키며)
김 형사님 저기 보세요.
김 형사 : 음, 아주 자랑스럽게 보관했군.
박 형사 : 롱기누스의 창이라도 되는 줄.
김 형사 : 피도 안 닦고 그대로군.
.
(김 형사와 박 형사가 1층으로 내려왔다.)
김 형사 : (식칼을 들이밀며) 이봐 송기헌이.
(송 회장이 말없이 김 형사를 쳐다본다)
김 형사 : 이래도 부인하겠어?
송 회장 : 최 교수는 죽어도 싸.
김 형사 : 인정하는거지?
송 회장 : 예수가 33세에 죽었듯 기준인은 33세에 죽어야 해.
김 형사 : 그래서?
송 회장 : 44세나 살고 죽은 건 복에 겨운 거야.
김 형사 : 누구 맘대로 사람 수명을 정해?
송 회장 : 난 단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죽였을 뿐이야.
김 형사 : 얼씨구.
송 회장 : (팔을 번쩍 들며) 대배달 만세! 대배달 만세!
김 형사 : (목소리를 높여 호통치며) 이거봐 송기헌이!
(송 회장이 말없이 김 형사를 본다)
김 형사 : 아무리 거창한 명분도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순 없어!
박 형사 : (송 회장에게 수갑을 채우며) 가자구.
(수갑을 찬 송 회장이 고개를 떨군 채 끌려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