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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생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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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이 22층짜리 아파트의 옥상 난간 앞에 서 있다.
영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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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이야! 앞이 보이질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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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이 난간을 넘어 뛰어내리려는 순간 휴대폰 벨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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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 여보세요.
종민: 영필아, 나다, 종민이.
영필: 아, 종민이구나.
종민: 전화했었냐? 부재중 전화가 떠서.
영필: 야 정말 고맙다. 전화해 준 건 너뿐이다.
종민: 무슨 일인데?
영필: 만나서 얘기하자.
종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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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집에 영필이 들어서니 종민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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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 영필아, 여기.
영필: (자리에 앉으며) 반갑다 종민아.
종민: 잘 지냈어?
영필: 말도 마, 지독했다.
종민: 왜?
영필: 인생이 꼬여서 지옥 같은 나날이었어.
종민: 야, 너 서울대 법대 합격했다고 난리였잖아.
영필: 다 옛날 말이지.
종민: 사법시험 합격 못했어?
영필: 응.
종민: 너같은 수재가 왜?
영필: 사실, 교통사고를 당했거든.
종민: 어디서?
영필: 고속도로에서 승용차가 전복됐어.
종민: 저런.
영필: 외상은 없었는데 바닥에 머리가 처박히면서 충격이 있었나봐.
종민: 그래서?
영필: 그 후로는 머리가 멍하고 기억력도 엉망이 됐어.
종민: 그랬구나.
영필: 사시도 떨어지고, 늦은 나이에 취직도 안되고. 고생이었지.
종민: 이상하다, 예전에 너 사시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영필: 2004년에 헛소문이 돌았지.
종민: 헛소문?
영필: 사실, 동명이인이 사시 합격했거든.
종민: 동명이인?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 말이야?
영필: 응. 합격한 거 나 아니라고 해명하는데 짜증 많이 났다.
종민: 여기 저기서 축하 전화 많이 왔겠네.
영필: 그러게 말야, 입만 아팠지. 그게 또 얄궂은 상황이었어.
종민: 왜?
영필: 2002년에 다른 선배가 사시 합격한 것 같았거든.
종민: 선배?
영필: 응, 근데 불합격한 것처럼 거짓말하며 동명이인 핑계댄 듯.
종민: 거짓말을 왜?
영필: 어느 여자집에서 뒷바라지하며 돈을 대 줬나봐.
종민: 아, 그 여자랑 결혼하기 싫어서 불합격했다고 속였구나!
영필: 그러게 말야.
종민: 여자가 못생겼나 봐?
영필: 그렇지. 근데 그걸 군대 동료에게 얘기했거든.
종민: 동명이인 핑계대는 선배 얘기를?
영필: 그래. 근데 내가 비슷한 상황으로 오해받기 딱 좋았지.
종민: 혹시 너 진짜 합격한 거 아냐?
영필: 아냐, 내가 왜?
종민: 합격했으면 빡세게 일해야 하니까. 열심히 일하기 싫어서?
영필: 내가 아무리 게을러도 그 정도는 아니다.
종민: 그래서 어떻게 생활하는데?
영필: 낮에는 배달일, 밤에는 대리운전, 빡세게 살았어.
종민: 요즘 다들 힘들지 뭐.
영필: 미안한 얘기 좀 해도 될까?
종민: 뭔데?
영필: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종민: 얼마나?
영필: 1억원.
종민: 야, 나한테 그런 큰 돈이 어디 있냐?
영필: 내가 정말 급해서 그래.
종민: 왜?
영필: 사채를 좀 썼거든, 1천만원 빚인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어.
종민: 사채를 왜 써?
영필: 신용카드 돌려막기로 버티다가 한계에 다다렀거든.
종민: 그래서 1억원이나 사채를 갚아야 하는구나?
영필: 미안한데 어떻게 좀 안될까?
종민: 나도 형편이 좋지 않아. 300만원이 한계다.
영필: 에이, 됐어. 그냥 인생 포기하련다.
종민: 어허 무슨 소리야? 인생 포기라니?
영필: 나도 이제 자포자기다.
종민: 기운 내, 영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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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집을 나선 영필은 다시 아파트 옥상에 오른다.
눈물을 흘리며 뛰어내리려는 순간 휴대폰 벨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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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 여보세요?
모친: 됐다, 영필아 됐어!
영필: 되다뇨?
모친: 영필아, 로또가 터졌어!
영필: 로또? 정말이에요?
모친: 정말이고 말고.
영필: 1등 당첨이요?
모친: 그래, 1등! 이젠 됐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영필: 우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군요.
모친: 어디냐? 빨리 와라. 가슴이 쿵쿵 뛰어 죽겠다.
영필: 네, 빨리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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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이 2층으로 내려와 도어록을 풀고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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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 어머니!
모친: 영필아!
영필: (모친을 부둥켜 안으며)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모친: 고생은 다 잊자. 축복에 감사해야지.
영필: 잠깐, 로또 번호 좀 볼께요.
모친: 확실하다니까.
영필: (노트북으로 로또 번호와 영수증을 맞춰보고) 당첨이다! 만세!
모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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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영필은 호프집에서 종민과 다시 만난다.
영필: 종민아 여기.
종민: 응 먼저 와 있었구나.
영필: 나도 조금 전에 왔어.
종민: 좋은 일 있다며, 뭔데?
영필: 놀라지 마라, 나 로또 당첨됐다.
종민: 정말? 1등?
영필: 그래 1등.
종민: 야, 말로만 듣던 로또 당첨자가 내 친구라니.
영필: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
종민: 축하한다.
영필: 이제 빚도 갚고 결혼도 하고 새 인생을 살아야지.
종민: 꽃길만 걷겠군.
영필: 정말 실감이 안난다.
종민: 이번 주 로또에 당첨된 거야?
영필: 응, 1145회.
종민: 자동으로?
영필: 아니, 수동으로.
종민: 번호를 어떻게 골랐어? 신기하네.
영필: TV 보다가 힌트를 얻었지.
종민: 무슨 TV?
영필: 어머니가 "나는 솔로"라는 sbs 프로그램이 재밌다고 같이 보자셔서.
종민: 어, 나도 알지. 맞선처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영필: 예전 회차부터 다시보기를 했거든.
종민: 최신 게 아니고?
영필: 예전 5기 멤버인데 나이가 왠지 끌리더라고.
종민: 어떻게?
영필: (메모지를 보여주며) 남성 나이가 44,37,35,33,32,34세,
여성 35,34,29,29,29,31세.
종민: 잘 모르겠는데?
영필: 44,37,33,31세를 뽑아보면 간격이 7,4,2잖아.
종민: 응, 742.
영필: 내가 74년생이고, 어머니 생일이 4월27일이거든.
종민: 아, 그래서 필이 꽂혔구나.
영필: 왠지 느낌이 좋았어.
종민: 번호 4개는 뽑았고, 나머지 2개는?
영필: 29세가 반복됐잖아.
종민: 세 명이나 29세군.
영필: 2 더하기 9는 11이잖아.
종민: 그렇지, 11.
영필: 그래서 2와 11을 당첨번호로 봤어.
종민: 그럼 번호가 다 나온거야?
영필: 응, 2,11,31,33,37,44가 당첨번호야.
종민: 번호 잘 뽑았다, 대단하네.
영필: 아 벌써 두근거린다.
종민: 자식, 한 턱 낼 거지?
영필: 당연하지. 거하게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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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금을 수령한 영필은 주일에 교회를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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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로또 당첨은 신이 주신 선물이야.
영필: 그렇죠.
모친: 감사 헌금을 드리자.
영필: 얼마나 할까요?
모친: 1천만원은 해야지.
영필: 그렇게나 많이요?
모친: 그럼, 그것도 충분한 건 아냐.
영필: 저는 1백만원 정도만 생각했는데.
모친: 큰일날 소리, 제대로 감사를 표시해야지.
목사: 안녕하십니까?
모친: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 얼굴들이 활짝 핀 게 좋아보이시네요.
모친: 그게요,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목사: 뭔데요?
모친: 로또 1등에 당첨됐지 뭡니까?
목사: 축하합니다.
모친: 감사합니다.
목사: 근데 당첨금은 얼마나?
모친: 20억원이요.
목사: 아이구, 경사네요.
모친: 저희도 너무 기뻐요.
목사: 정말 공교롭군요.
모친: 뭐가요?
목사: 새 예배당 신축 자금이 딱 20억원 모자라거든요.
모친: 건축 자금이요?
목사: 네, 제발 20억원을 채워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말이죠.
영필: 그래서요?
목사: 그 20억원을 교회에 헌금하라는 것이 신의 뜻이겠죠.
영필: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목사: 신의 섭리는 정말 경이롭습니다.
영필: 20억원을 바치는 게 신의 뜻이라고요?
목사: 잘 생각해 보세요, 천국에서 박수를 칠 겁니다.
영필: 너무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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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영필과 모친이 한숨을 쉰다.
모친: 당첨금을 교회에 모두 바치라니.
영필: 그거 다 사기에요.
모친: 어허, 그런 말 하면 못쓴다.
영필: 목사에게 속으면 안돼요.
모친: 신의 뜻이라잖니.
영필: 그 말을 믿어요?
모친: 20억원을 바치면 신께서 더 큰 돈으로 다시 채워주실 거다.
영필: 안돼요. 절대 못 줘요.
모친: 영필아~.
영필: 사채도 갚아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절대 못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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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에서 신랑 영필을 친구 종민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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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 영필아, 결혼 축하해!
영필: 종민아, 고맙다.
종민: 정말 인생 한 방이구나.
영필: 사법시험 한 방이면 인생 역전일 줄 알았는데.
종민: 로또 한 방으로 인생 역전!
영필: 정말 꿈만 같다.
종민: 신부가 정말 예쁘던데.
영필: 나이 50에 32살 신부를 얻었으니 너무 좋다.
종민: 신혼 집은 마련했니?
영필: 응, 10억원짜리 아파트.
종민: 인생 활짝 폈구나.
영필: 연시야, 여기 와서 인사해!
연시: 안녕하세요.
종민: 안녕하세요.
연시: 저는 연시라고 해요.
종민: 저는 영필이 친구 종민입니다.
연시: 와 주셔서 감사해요.
종민: 결혼 축하드립니다. 근데 어디서 만나셨어요?
연시: 결혼 중매 회사요.
종민: 영필이가 맘에 들던가요?
연시: 그럼요, 첫눈에 반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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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영필의 행복한 생활을 즐겁게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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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와 내연남인 기돈이 커피숍에서 만나 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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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돈: 빨리 서방 죽이지 않고 뭐하니?
연시: 서두르지 마, 곧 죽을 거야.
기돈: 독약은 틀림없이 섞어주고 있지?
연시: 응, 들키지 않게 섞고 있어.
기돈: 근데 왜 안 죽어?
연시: 치사량이 쌓여야지.
기돈: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등산 가서 확 밀어버릴까?
연시: 실족사?
기돈: 더이상 못 참겠어.
연시: 조금만 참아. 생명보험도 들었고 큰 돈이 곧 굴러들어올거야.
기돈: 아파트도 있고 예금도 상속하고 정말 기대된다.
연시: 시어머니 돌아가셨으니 전부 내 독차지야.
기돈: 아이구 이 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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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은 연시와 함께 등산했다가, 숨어있던 기돈에게 바위에서 떠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망하여 음부에서 천년 동안 긴 잠을 잤다.
영필이 깨어나 보니 늑대들이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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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 아이쿠 깜짝이야.
늑대: 깨어났군. 겁먹지 마. 안 잡아먹어.
영필: (덜덜 떨며) 뭐하시는거죠?
늑대: 네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니?
영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기억이 없어요.
늑대: 그럴거다. 자 이 영상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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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이 컴퓨터를 보니 전생의 영상이 낱낱이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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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이게 살아생전의 너다.
영필: 젠장, 저 나쁜 여시.
늑대: 감쪽같이 속았군.
영필: 너무 억울해요.
늑대: 연시와 기돈은 나중에 업보를 당하게 될 테니 진정해라.
영필: 여기는 어디죠?
늑대: 심판장이다.
영필: 심판이요?
늑대: 살아생전의 일을 심판하고 내세를 결정하지.
영필: 저 천국 갈 수 있나요?
늑대: 어디? 기독 천국?
영필: 예 신의 나라요.
늑대: 못 간다.
영필: 왜요? 교회 열심히 다녔는데.
늑대: 배교했잖아.
영필: 그래도 교회 등지기 전에 한참동안 열심히 예배 참석했는데.
늑대: 헌금 내기 싫어서 배교했지.
영필: 그럼 저 지옥 가나요?
늑대: 원래는 지옥에 가야했지.
영필: 그럼 아니라고요?
늑대: 다른 곳에서 널 부른다.
영필: 어디요?
늑대: 빈부 은하계.
영필: 뭐라고요?
늑대: 너는 기독 은하계로 못 가고 빈부 은하계로 끌려간다.
영필: 빈부 은하계가 뭔데요?
늑대: 생전의 부자들이 가는 곳이다.
영필: 살기 좋아요?
늑대: 누구에겐 좋고 누구에겐 힘들지.
영필: 제가 왜 빈부은하계로 끌려가요?
늑대: 소유욕에 집착했으니까.
영필: 그게 나쁜 건가요?
늑대: 아니, 나쁘지 않아.
영필: 소유욕이 나쁘지 않다?
늑대: 충족 방법이 문제지.
영필: 수단과 방법?
늑대: 능력을 계발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면 큰 상금을 받는다.
영필: 자수성가한 재벌 회장은 빈부은하계에서 큰 상금?
늑대: 맞아. 이와 달리 불로소득에 의존한 벼락부자는 고생을 하게 된다.
영필: 불로소득?
늑대: 너는 복권 벼락부자니까 빈부은하계로 끌려가서 고단하게 산다.
영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늑대: 뭐가?
영필: 기껏 복권 당첨시켜 주고서 벌을 내리다뇨?
늑대: 당첨금을 바르게 썼어야지.
영필: 목사 말처럼 건축 헌금으로 바쳐야 했다는 건가요?
늑대: 아니, 건축 헌금은 쓸 데 없는 짓이다.
영필: 그럼 어디에 써요?
늑대: 가난한 자를 위해 기부하거나 사용했어야 한다.
영필: 빈민 구제?
늑대: 그렇다. 당첨금으로 빈민을 구제했으면 내세에 큰 상금을 받겠지.
영필: 저는 어떻게 되나요?
늑대: 빈부 은하계에서 가난한 노동자가 돼 고단하게 시작한다.
영필: 고단한 삶이 운명인가요?
늑대: 절대적인 운명은 아니다.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어.
영필: 노동자로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부자로?
늑대: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지.
영필: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겠어요?
늑대: 노력하지 않으면 고단한 삶뿐이다.
영필: 영원히 고단하게 살아야 하나요?
늑대: 아니다, 3만년을 채우면 다른 은하계로 다시 이민갈 수 있어.
영필: 다른 은하계?
늑대: 식욕은하계, 성욕은하계 등 다른 쾌락은하계로 이민가거나.
영필: 빈부은하계도 쾌락은하계의 일종이군요.
늑대: 축구은하계, 음악은하계 등 여러 은하계로 이민갈 수 있다.
영필: 누가 결정하는데요?
늑대: 네가 선택할 수 있다.
영필: 쾌락은하계가 있으면 금욕은하계도 있나요?
늑대: 그렇지, 불교 은하계 등이 있지만 너는 점수를 충족하지 못했다.
영필: 아이구 가난한 노동자의 고단한 삶이라니.
늑대: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소소한 재미가 많으니까.
영필: 마음 먹기 나름인가요?
늑대: 범사에 감사하면 어느 곳이나 천국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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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필의 미세한 영혼 캡슐은 담배 한 개피 크기의 작은 우주비행체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여 빈부은하계로 옮겨진다.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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