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 재정의 목적은 최대한 아끼는데 있으며 남는 재화와 자원은 오로지 자국에 없는 희소자원의 획득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경제이념입니다. 여기서 최대한 아끼는데 있다는 것은 국가재정의 절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억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즉 쥐어짜내서 사람들의 소비를 억제하고 쥐어짜낸것으로 없는 희소자원을 얻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중상주의경제의 시대, 학자들은 식량이 부족한 어떤 국가가 식량을 사서 신민들에게 배급하면 그 돈으로 대포나 말, 아니면 선박을 만들 목재를 살 기회비용을 잃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피복과 같은 소비재를 위해 재정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보았죠. 이러한 개념에 의해 재화와 용역의 이동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또한 많은 국가들이 일종의 상인허가권같은 것을 만들어 다시금 부가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것에 비용을 물렸습니다. 조선의 경제정책 역시 기본은 이와같은 이념에 기인합니다.
이 개념은 한동안 유럽의 정론으로 인정받았고 후에 플랑드르의 상공업자들이 바로 이 소비재의 판매들 통해서 막대한 부를 얻고 그들이 축적한 부를 역시나 기존관념에 의하면 기회비용을 안기는 소비재일 뿐인 주택이나 사회간접자본등에 과감하게 투자한 결과가 노동과 부의 이동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켜 소비의 중심지인 도시를 경제활동에 없어서는 안될 곳으로 만들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담스미스(1723-1790)같은 몇몇 선구자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새로운 평가를 받게됩니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시점까진 여전히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중 가장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도시환경과 주거환경으로의 부의 투사는 비교적 근대(EX. 나폴레옹 3세(1850-1871)) 에 이르러서야 유럽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군주체제를 옹호하는 사법체제, 입법권의 개념 : 근대적 사법체제는 나폴레옹(1804-1814)의 시기에 있어서나 완성됩니다. 근대이전의 사법이념와 근대이후의 사법이념에서 가장 큰 차이는 주권재민을 인정하는냐 그렇지 않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르네상스와 절대왕정기의 사법이념에서는 군주제와 국가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이시기의 사법체제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범죄는 군주권에 항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법권의 역사에서 근대이전의 사법체제 역시 중세의 것과 비교하면 몇가지 중요한 진보를 이루는 데 이중 두드러진 것이 사법부의 2중체계에 의한 2심제, 그리고 모든 사법은 법을 통해서만 된다는 법치주의의 확립이었습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2심제는 기실은 중세로부터 존재한 지방사법권과 중앙사법권의 양립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이 것은 분리된 서로 다른 재판정에서 한번더 재판을 받을수 있는 것이었고 이중 중앙의 상급법원에서부터 보다 법리적으로 타당하며 상급법원의 권위와 정신을 훼손할 여지가 없는 판결을 내리려 한 노력과 이때부터 증대되기 시작한 중앙권력의 지방권력으로의 개입의 결과 법치주의가 확립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경우는 다중구조의 사법체계와 상급법정에서부터의 법리수립에 대한 노력과 법치주의의 확립이 비교적 명백한 국가군에 속했습니다.
입법권은 존재자체가 (고대로부터 존재한)사법체제보다 완전한 근대적 개념의 정치이념입니다. 이 것이 결정적으로 채택되는 계기는 된 사건의 하나로 영국의 명예혁명을 들수 있을텐데 당시 영국이 참정권에 있어 재산과 학력, 심지어 출신조차 제한하는 체제였음을 감안하면 입법권의 시초가 동서양을 걸쳐서 존재해온 귀족들의 관습적인 권리에서 출발했음은 비교적 자명합니다. 영국에 대해 제한해서 말하자면 권리장전의 시초가 이전의 권리청원이나 아니면 더 올라가서 중세로도 귀결되는 것이고 보다 원시적인 입법권의 형태인 귀족들의 권한은 이미 조선에도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경제문제에 관한 단상 : 심지어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조차 그 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는 기독교적인 보수적인 사회에 기인하는 자영농에 의한 국가였습니다. 노예제는 당연한 것이었죠. 이와 같은 개념은 독립전쟁당시 워싱턴의 부관이었던 해밀턴(1755/1757 ~ 1804)에 의해 비판받고 강력한 보호무역과 상공업진흥책을 쓰는 국가의 길을 그는 제시하나 그는 곧 암살당하고 그 뒤 한세대가 흘러서야 영국과의 전쟁도중 영국의 금수조치로 성장한 북부의 산업자본가들에 의해 미국의 새로운 길이 제시되나 이 역시 자영농을 주장하는 기존경제를 옹호하는자들과의 처참한 살육극(남북전쟁)이 있은뒤에야 정착이 가능했습니다. 만약 이 때 미국이 국가의 안정만을 추구했더라면 당시로선 급진적으로 보였던 새로운 경제이념으로의 국가정책의 전환은 1세기정도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죠. 사족으로 그런 안정을 깨버렸기에 지금의 찬양과는 달리 당시사람들은 링컨을 암살이라도 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네덜란드&스페인 : 적어도 절대왕정이 들어설때까지만 해도 후의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좌우할 결정적 요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왕정의 성립과 함께 유럽전역에서 시작된 파괴적 패권주의가 다음 시대로의 새로운 장을 엽니다. 파괴적으로 치달아가는 유럽의 정세에서 네덜란드와 스페인 두 국가는 완전히 다른 두길을 걷습니다.
하나는 대외적으론 고립주의를 유지하면서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전략을 취한 반면 다른 하나는 패권주의를 택합니다.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지도자가 필요치 않은 한편 개개인의 역량이 중시되는 발전전략을 취한 한쪽에서 다수에 의한 통치를 모티브로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검토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선 민족주의, 그리고 중세적 억압과 맞닿아 있는 강압적 종교이데올로기가 판을 칩니다.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유럽을 침탈한 스페인은 그러나 곧 한계에 부딫히고 결국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그 세가 꺾이는 반면 네덜란드는 한때 전세계의 상업에 관여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후에 아담스미스는 '국부론'을 저술하여 네덜란드인들의 그 것을 영국의 정책의 기조로 삼을 것을 그의 왕과 귀족들에게 진언하고 채택됩니다. 자본주의의 탄생이죠.
네덜란드와는 달리 영토와 인구면에서도 나름의 역량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그 들의 역량을 구대륙에 투사하는 대신 신대륙에 투사할 여력또한 가지고 있었고 결국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장점만을 합친 국가로서 두고두고 이름을 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기존의 시각들중 일부는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이 그러한 정책적 기질을 그들의 종교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그러한 시각은 대체로 부정됩니다. 네덜란드인들의 선택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아마 그냥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조선(1392-1910)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서양의 동양을 대한 시각중 가장 악질적인 편견중 하나가 동양을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미개한 세계로 보는 것일 것입니다. 정치문제에서 이문제로 나아가면 동양의 가장 고전적인 정체는 근대적 절대왕정이 아니라 고대적인 군주제겠죠. 그렇다면 고대와 근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즉위하자마자 선제의 총신을 반역죄로 몰아 사형시킨 헨리8세와 명종의 차이일까요? 스페인의 종교재판의 이면에는 종교이념적으로 잘 무장된 일사분란한 나라 오스만투르크를 강력한 나라의 모범으로 생각한 이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더욱 큰 틀에서 지리학상 동서로 가장 길게 뻗은 유라시아대륙 중~고위도상의 문화권사이에서 이제 만년은 훌쩍 넘은 인류의 역사상 특정문화권간의 진보의 차이가 몇백년분이나 차이가 난 경우는 있긴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조선은 르네상스기까지만 해도 최첨단을 달리다가 후에 이런저런 변수에 의해 최첨단의 자리를 북해연안의 국가군들에게 내준 국가일 뿐이라 보는게 타당한 평가라 봅니다. 어제의 안정은 내일의 정체가 되고 그 누구도 최첨단의 길을 영원히 걸을순 없겠죠. 더욱이 어떤 진보는 격렬한 댓가를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설사 면화나 팔아먹는 농업국가 미국을 구상한 링컨이라 하더라도 그 누가 그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100만을 넘은 남북전쟁의 사상자수를 고려할때말입니다.
조선의 또다른 불행중의 하나는 그들의 시스템이 얼마나 잘 정비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그다지 좋은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되겠죠. 조선이 중국을 공격한다는 무자비한 수를 쓰지 않는 다음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외교적으로는 중세적인 국가서열구도에 입각한 중국식 책봉체계에 일치감치 굴복하고 중국의 황제의 밑에 조선의 왕이 있음을 명문화하고 그 것을 정당화했지만 나폴레옹이 조선에서 태어났더라도 그 이상의 선택이 가능했으리라 보진 않습니다. 그와 더불어 여전히 왕과 여왕이 있는 나라가 있고 재산과 학력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철폐한 보통선거의 역사가 아직 100년도 안된 시점에서(흔히들 잊혀지는 문제인데 귀족의 작위와 직위(예. 상원의원이나 지역의회의 의원직)세습철폐는 보통선거인정보다 더욱 근래의 일임) 그 것이 과연 조선의 후진성에 속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도 의문이고요.
첫댓글 나폴레옹이라면 쿠데타로 정권 잡고 중국 상대로 전쟁을 해서 오늘날의 청을 세웠을지도 모르지요..-_-;;
프랑스와 대불동맹의 국력차 <<<<<<<<<<<< 조선과 청의 국력차 이정도 될텐데요.
서유럽 말고는 상업+기계공학+ 과학+ 인문,예술 을 국가가 장려해서 영원히 직접키워준 경우는 보기드물지염 ㅡ,ㅡ ; 대항해시대만 플레이 해봐도 새로운 벌래나 어류만 조사해와도 보수를 주는걸 보면서 동양에 얼마나 많은 열등감을 느꼈던지.... 대영무역을 통해 상업이 크게 흥했던 청나라라고 해야 현장관리+지방관리+ 조정관리들이 행상들 주머니 털기 바빴던게 현실입지요.서유럽인들이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발전은 없었을듯. -어떤 진보는 격렬한 댓가를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 이말이 참 비참하지만 맞는말이지염.
청대에 유행한 고증학이나 사고전서같은 업적들을 보면 상업, 기계공학. 과학, 인문, 예술을 그저 장려하는 선까진 동양도 서양의 발에 맞추어 따라갔다고 봐도 되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의 사변화로부터의 탈피(=실용화)가 명대후기에 도래한 서양인들에 의해 자극받았음은 비교적 명백하기 때문에 대략 한교님이 지적하신 부분에서부터 시대적으로 동양이 서양에 비해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듯합니다.
그러나 청대의 사고전서가 황제의 명에 의해 제작된 바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예술과 인문, 그리고 기술로의 투자 역시 절대왕정과 뗄레야 뗄수 없고 여전히 이시점까진 동서양간에 본질적 차이가 났다고 보긴 힘들듯합니다. 그에 비하면 근대적 사법체계, 민주주의, 자유무역과 보호주의 등 위에 열거한 가치들은 한동안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차이로 이해될 정도로 두드러진 서양만의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이들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 대체로 19세기입니다. 아마도 사고전서(1782년완성)은 근세동양의 마지막 마스터피스이고 이후 현대가 올때까지 한동안 동양은 잠잠하죠.
화차나 자격루같은 것에서도 느낄수 있지만 한교님이 말씀하신 피상적인 현실에 대한 귀족들의 관심은 동양에도 있었다고 봐야하고 동서양 공히 군사적, 경제적 이유로 학문을 대했으나 서양은 어느순간부터 앞서나간 이유를 굳이 찾자면 그 것은 화학이나 유전학, 물리학들의 순수과학이 서양에서 나와서 그렇지 않는가 합니다. 그리고 순수과학의 아버지들도 조금은 뻙스러운 예외인 뉴턴등을 제외하면 라부아지에나 멘델같은 이들은 윗글의 사회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의 인물들이죠.
일단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진 않지만.. 프랑스의 '아카데미' 라는 교육기구를 생각해보면 어느한가지 사상이나 이론에만 교조화 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학문들의 정보들이 서로 집중적인 장소에서 계속 연대하고 공유하면서 유기적인 발전이 이뤄져 가는데 동양에서는 일단 대학이라는 개념부터가 애매하고 ㅡ,ㅡ ;; 거의 공무원 시험에 치중해 있다고 봐야할까요 ㅡ,ㅡ;;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그래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전통적인 강대국이기라도 했죠...조선도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였지만, 중국은 동양에서 지금의 미국수준?(그이상?)아닌감요??
후금의 국력이 일본보다 강하진 않았을겁니당.
관점에 따라서겠죠 전투력면에서만 따지자면 팔기가 테르시오를 깰가능성은 윙드후사르와 테르시오의 대결을 가정하는 만큼이나 있을법한 가정이지만 영주들의 사병으로 이루어진 일본군이 테르시오를 깰 가능성은 과연 어느정도 일까요? 결국 후금의 성립역시 중요한 회전에서 한번승리의 결실아니었던가요. 그리고 조선역시 일본과 상황이 같아서 비록 어느정도 기병이 존재하긴 했으나 명과 마찬가지로 농업경제의 보병국가였고 비대칭전력이 적은 상황하에서 국력차를 뒤엎긴 어려웠을거라생각합니다.
한교// '후금(청)'의 '국력'이 일본보다 강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전쟁'을 치러 밀릴 정도는 아닙니다!!!^^; '후금군'은 '팔기'처럼 강력한 '기병'은 물론이고, 중국식 '화기(火器)'를 갖춘 '보병'도 상당히 '정예'했어요...ㅎㅎ
매디벌광님//명나라의 내부적 탓이 크지 않겠습니까. 밑에 해동천자님이 화기병들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이들 한녹영병들은 배부른 정치적 야망때문에 청군에 투항했다기보다 배고파서.. 혹은 포로로 잡혔다가 그대로 저항없이 종군한 사람들이고 이 영향 역시 명나라의 병크가 상당히크죠 ㅡ,ㅡ;; 그리고 스페인 테르시오와 일본 아시가루부대의 상호비교는 사실 매우 힘들지만 두 병과 모두 "자국 기병들의 자신감을"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는 점 입니다. 일본군이 하마기병으로 몰락한 데는 아시가루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거지.. 아시가루들의 전술이나 장비에 발전이 없었다면 하마기병은 못봤을거에요.
더구나 명나라 내부적으로도 후금과의 마지막 회전에서 비판의 여론이굉장히 높았습니다.스스로 그들의 장비가 낙후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고 당연히 질수밖에 없었다는 상소를 본적이 있어요 자기들도 스스로 약체화되는것을 알았죠.그 이유야 명나라 조정의 실정이 불러온 결과라는건 불보듯 뻔하니.. 상소내용이 대포도 몇문 못가져갔고 투구는 화살에 관통당했는데 어찌 이길수있겠나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한녹영군을 대거 동원하지못할때.. 병자호란당시 조선군과의 보병 전투를 보면 정말 일본군보다 지리멸렬하고 청군 스스로 전투손실을 강요하게 하는 억척스러운 전투를 벌입니다. 대체로 방패로 무장한 보병들을 계속 돌격시켜서 뚫을때까지 스크램블을 보내다가 조선군이 화약이 떨어지면 점령하는 경우도 나옵니다.이런 고기방패식 보병돌격은 영원성 전투에서도 그랬고.. ㅡㅡ;;; 명나라의 자체붕괴로 인한 화기군의 투항이 아니었으면 ㅡ,ㅡ;;;;;
한교님께서는 여러 이유를 대시면서 후금이 강한게 아니라 명이 당시 못난 것을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후금 군사력이 약하다는 명제나 일본 군사력이 후금 이상이었다고 성립하기는 힘듭니다. 인용하신 내용은 서광계가 "아국은 화기와 전차가 장기인데 무순을 넘어가면서 많이 못 가지고 갔고 갑주가 좋지 않아 두송은 머리에 화살을 맞아죽으니 패하는 것은 당연..."운운한 것 같은데, 물론 그 말이 다 거짓은 아닙니다.
하지만 심하 전쟁 당시 후금이 대규모 기병대를 집중 운용하여 신속히 4로군을 각개격파하고 두송군과 전투를 벌였을 때 전차와 대포까지 구비한 야전 축성물을 기병으로 밀어버리는 등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 또한 힘들어보이는군요.
후금이 너무 부곽되는거 같아서...., 깐다기보다는 후금군도 어리버리한 면이 있다는걸 든겁네다. 무역권 징수표 받았서 부족을 규합했다고 수십년만에 중국의 경제력을 압도하는 강성대국이 되었다고 보기에는 좀 의문이 잇어서요.. 그리고 보병의 비교 테르시오 vs 일본 아시가루 의 연장선에서 청나라 보병을 비교한 것도 있습니다.청기병을 위력을 의심한건 아닙니다만;
반면 조선은 일본식 조총전래와 전방화력집중형 병과구성으로 전투해서 후퇴는 했지만 몇몇 국지적인 거점방어전에서는 종래의 보병돌격만 강요하는 청군에게 큰 손실을 입힌 경우도 나옵니다. 1진 살수 2진 조총부대 3진 조총부대 하는 대열로..
매디벌광님ㄴ의 생각에 전적으로는 동감합니다 냥~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