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전 순 희
사회교육원 원우회 축제의 밤의 날짜가 결정되었단다. 어린 시절 소풍 날짜를 받아 놓고 손꼽아 기다리던 들뜬 기분이 되어 해야 할 일도 미뤄놓고 마냥 웃고만 싶었다. 안무는 어떻게 할까. 각자 준비 할 것들이 무엇인가. 다른 반 보다 더 잘하 고 싶은 생각으로 한마음이 되었다. 작은 명예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 다면 하나의 개체가 큰 성을 이루듯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싶었다.
연습 을 위해 노래방에 모여 의견을 내고 수선을 떠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교 1학 년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젊은 회원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나이인 우리들을 보고 노래방 주인은 의아해 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어린아이가 되어 넉넉하게 웃고 즐길 수 있는 이 시간들이 너무도 좋았다. 저마다 찌푸리고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조바심을 내었는데 급기야 시작시간 에는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가뭄이 들어 농작 물이 시들고 우리네 마음까지 갈증이 나 있었는데 단비가 내려주어 혹시 우리 의 축제일이 길일인가 싶어 즐겁기만 했다.
봄 단비처럼 깨끗한 마음이 되어 누구라도 친해보고 싶고 그냥 손이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며 지난 옛 생각들을 모아보았다. 알록달록 조각난 천으로 꿰메어 놓은 조각이불 같았던 날들 돗자리를 한 줄씩 매어가듯 한 가닥씩 짜여 내려가는 되돌릴 수 없는 인생, 마음만 앞선 모든 것들이 지나가 버렸다는 아쉬움과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수많은 날들,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서성거렸던 젊은 날들, 잃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을 후회하듯 또 다가올 날에 또 다른 무엇으로 후회하고 안타까워 안달을 할까?
차분히 준비되지 않았던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다가올 어떤 색깔의 아픔 을 맛보며 살아야 할지 와락 겁이 났다. 집에 돌아와 부질없이 수첩에 빼곡 이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이 시간 나와 함께 같은 마음이 되어 속내를 읽어줄 사람은 누구일까?
갑 자기 멀리 떨어져 살고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떠올랐다.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담을 쌓고 저 멀리 서성이게 했던 친구들 문득 외로움 과 소외감에 가슴이 철렁했고 왠지 한 길가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온 느낌에 자꾸 챙기고싶고 허전한 마음이 되었다. 가야 할 곳도 가고싶은 곳도 많기만 한 것 같은데 갈 수도 갈곳도 없는 그런 나이 오십 고개를 넘고 있다.
이런 날에 친구와 함께 밤 기차를 타고 나와 그 너의 젊음을 서로 나누어 어깨에 기대고 얹어 놔보고 싶다. 목적지도 없이 어 디론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보고도 싶고 하늘이 훤히 비치는 비닐우 산을 받쳐들고 수취인도 없는 두툼한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 보고도 싶다.
비가 그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르듯 우리네 삶 역시 어느날은 먹구름 몰고 오는 소낙비 되어 또 잔잔한 추억 떠올리게 하는 가랑비 되어 내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비에 젖어 살기 일쑤인 날이 허다하다. 잃고 싶지도 놓치고 싶지도 않은 나의 일부분의 매듭이 되어 조심스럽게 수필반 회원들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사랑의 끈으로 묶어놓고 싶어진다.
음악에서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기 해서 '도돌이표'나 '쉼표'가 있듯이 오늘과 내일을 연결하는 고리. 잠시의 삶을 되돌아보게도 음미 할 수도 있게 하는 모처럼의 자기 정화나 자아인식이라는 시간을 내어 주는 비... 모든 이 들에게 받기만 하고 되돌릴 줄 모르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날들 늘 기대고 안기고만 살았던 어쩌면 맹물처럼 세상을 살았는지 모른다. 무미, 무취 무색인 물의 생명처럼......
내가 받은 사랑의 몫을 적으나마 되돌릴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모난 것은 갈고 닦고 둥근 것은 굴리고 헤푸게도 웃어보며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줄수 있 는 삶을 살리라. 이 모자라 몸으로 하는 봉사활동도 넉넉함이 부족해 배고픈 그들의 허기도 면해 줄 수 없지만 사람이 그리운 그들의 영혼에 한 가닥 사랑이라는 단어 를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주체 할 수도 없이 너무나 빨리 내 곁을 떠나가 있는 나의 소중한 딸들, 알 수 없는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나무가 되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내 외로움은 무엇인가?
잡다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큰딸에게서 전화가 왔 다.
“엄마, 올 여름 방학은 어떻게 할거야?” 시간이 어쩌고 또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 놓으려니
“엄마는 나 고3 때도 해외여행 다녀오고, 내가 다 봤어, 장롱 속에 여권은 왜 감추어 놓았어? 도장이 쾅쾅 찍혔더라구”
출장을 간다고 핑계를 대고 다녀왔는데 들키고 말았으니 미안한 마음으로 깔 깔거리고 딸도 나도 한바탕 웃고 말았다.
가을날의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보며 외가를 갔던 생각이 났다. 그 노을 빛 이 얼마나 고왔는지 인자하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모든 이 들을 감싸 줄 수 있는 그런 고운 노을 빛 닮은 노후를 맞이할 수는 있을까?
나는 오늘 가뭄이 들어 모두들 애타게 단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기꺼이 단비가 되어 사랑을 나누리라 생각 해 보았다.
2000/ 8집
첫댓글 나도 모든 이 들을 감싸 줄 수 있는 그런 고운 노을 빛 닮은 노후를 맞이할 수는 있을까?
나는 오늘 가뭄이 들어 모두들 애타게 단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기꺼이 단비가 되어 사랑을 나누리라 생각 해 보았다.
가을날의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보며 외가를 갔던 생각이 났다. 그 노을 빛 이 얼마나 고왔는지 인자하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오늘 가뭄이 들어 모두들 애타게 단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기꺼이 단비가 되어 사랑을 나누리라 생각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