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과 '후아유'를 비슷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PC를 매개로 두 사람이 만난다는 사실 밖에 없을 것이다. 그점을 제외한다면, 두 영화의 차이는 도스와 윈도우 XP만큼이나 크다. '접속'이 나쁘고 '후아유'가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전혀 다른 운영체계를 가지고 영화를 꾸며나간다는 점이다.
두 영화의 제목을 보라. '접속'은 제목그대로 두 사람의 만남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였다. 90년대의 깔끔한 여성과 여전히 80년대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두 남녀의 만남. 두 사람은 얼굴을 모르고, 채팅을 통해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된다. 아이디란 통신을 위한 그사람의 통신용 이름일 뿐이고, 채팅을 하는 사람과 PD와 텔레마케터로 활동하는 실제의 두 남녀는 분명히 같은 사람이다. 채팅이라는 것 자체가 여전히 조금은 신기했던 시절, '접속'은 채팅이 아니었다면 전혀 인연이 아니었을 두 남녀가 채팅을 통해 대화를 시작하고, 결국 만나게 된다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야
그런데 '후아유'는 유니텔의 문자채팅에서 3D 아바타로 변해버린 시대답게, 제목 그대로 상대방에게 '너 누구니?'라고 묻고 있다. 조금은 느물거리고 지저분한데다가 상대방의 마음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자기 말만 툭툭내뱉는 지형태와 별이, 혹은 서인주의 깊은 마음속 비밀까지 친절하게 들어주고 배려하는 멜로는 같은 인물일까? 형태가 장난삼아 시작한 멜로라는 아바타 채팅속 캐릭터는 어느새 너무 크게 자라버려서 인주의 마음을 빼앗아버리고, 형태는 그런 멜로에게서 인주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한다. 만약 형태가 멜로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바로 그순간 보이는 남자와 보이지 않는 남자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될만큼 둘은 전혀 다른 존재인 것이다. 둘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불과 몇 년전이라면 이런 질문은 개념조차 이해가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채팅하는 사람이 나인데 어떻게 그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채팅에 익숙한 요즘 젊은이들은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다. 채팅하는 나와 실제 나는 분명히 다르다. 어떤 사람은 더 얌전하고 '착한척'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익명성을 무기로 숨겨진 개차반같은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본인이 최대한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보이려 노력한다해도 잘해야 화상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채팅은 실제의 그것과 달리 사람의 의사를 왜곡되게 만들기도 하면서 채팅속의 사람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생각하거나, 반대로 그 사람에 대해 환상을 갖기도 한다. 영화속에서 형태의 친구 남훈(이장원)이 실제 모습과 아바타가 전혀 다르다는 이유로 '사기꾼'으로 몰리는 식의 에피소드는 이제 더 이상 화제 거리도 안되는, 실제 인물과 인터넷속 인물을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채팅할때는 모든걸 다해줄 것 같다가 만나면 밥값도 아까워하는 사람들, 그게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다. 인주가 멋진 남자라고 생각하는 '멜로'에게 지저분하고 속물스러운 형태에대해 설명할 때, 그녀는 과연 형태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2002년의 트랜디 영화
그러니 이 영화는 매우 트랜디한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다. 개념자체가 이전 세대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니까. 중요한건 영화 전체의 뻔한 스토리보다는 영화를 볼 20대 전후의 남녀들이 공감할 사고방식과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 그렇게 인주가 멜로에게 집착하는지, 또 형태는 멜로를 어쩌지 못해 안달할 수 밖에 없는지 공감하도록 만들어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괜히 명필름이 3년전부터 기획하고 TTL 캠페인을 기획한 화이트가 트랜드 조사를 맡은 영화가 아닌 것이다. 단지 채팅할때의 통신어 사용이나 벤처기업과 63빌딩 수족관에서 인어쇼를 하는 여성같은 직업이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는 꽤나 정밀하게 둘간의 라이프 스타일을 그려내고 있다. 돈이 딸려서 팀장이 대기업 게임팀으로 돌아가고, 직장에서 '신라면 사발면'을 먹고 직장에 있는 침실에서 자며, 자금 사정에 따라 이사를 밥먹듯이 하는 형태의 직장은 정말 소수의 대기업 직원이 아니라면 늘 불안한 직장생활속에서 밤새기를 밥먹듯하며 먹고살아야하는 요즘 직장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팀장이 직원들에게 월급나올때까지 '알바'를 허락하는 직장이라는 것은 기성세대의 눈에 봤을때는 이해가 안되는 일일수도 있지만, 요즘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진지 오래고, 직원들은 자기 한몸 지키는 것도 불안해하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게 요즘이다. 이는 인주나 그녀의 친구도 마찬가지여서, 이들은 이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고정적인 직장이 아니라 언제고 이직이 가능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에게 미래는 불안하고, 그만큼 매일매일의 일상은 중요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보는 사람보다는 익명의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자폐소녀'가 되어 마음을 닫고 있던 인주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보영이 아니라 멜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앞날을 모르는 불안함,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가장 기본적인 정보 몇가지만 있으면 쉽게 그 흔적을 찾아 그 사람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인터넷 시대, 그게 요즘의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A day in my life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런 라이프스타일이나 인터넷 문화에 대한 트랜드를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라 인주와 형태의 캐릭터 그 자체다. 이들의 캐릭터는 '접속'과 비교해 매우 큰 차이점을 한가지 가지고 있다. 바로 '매우 평범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접속'의 남녀 주인공들은 사실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었고, '접속'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영화들이 가진 캐릭터들은 어딘가 한군데 특출난 부분들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거나, 혹은 인기가 있거나, 아니면 매우 우울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영화속의 인주와 형태는 얼굴은 선남선녀지만 그속의 인물들은 매우 평범한 보통남자와 보통 여자들이다. 인주는 마음속에 큰 상처가 있지만 그걸 심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하루하루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보통 아주 거친 영화가 아니라면 고운말 바른말쓰며 조신하게 행동하는 여주인공들과 달리 꽤나 거칠게 말하거나 통신어를 쓰면서 이야기한다. 국가대표 수영선수 출신이라고 꼭 교양있거나 모든 면에서 올바를리는 없지 않은가. 형태역시 회사에서는 프로젝트를 이끄는 팀장이긴 하지만 인주 표현에 따르면 돈밝히는 속물타입에 옷에서는 냄새나는 단정치 못한 남자다. 멜로(?)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 오빠라고 부르라며 느물거리는 것이나 거기에 맞장구치는 모습같은 것은 다른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보다 현실적인 요즘 남녀의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재미는 상당부분 여기서 온다. 평범하고 결점많은 두 남녀가 일반적인 영화의 전개를 벗어나는 대화를 툭툭 내뱉으니 신선할 수 밖에.
거기에 같은 남자 '두명'이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은 그 상황을 관객들에게 잘 이해시키면서 진행되기에 그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대체 형태는 또다른 자신과 삼각관계에 빠져버린 이 꼬이고 꼬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고, 정말 대책이 없는 이들의 갈등과 사랑은 보는 이에게 꾸준히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한다. 트랜드를 잘 잡은 소재와 그 트랜드를 디테일하게 묘사한 캐릭터 설정과 묘사가 중심 스토리에 설득력을 주면서 상당히 공감을 살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요한건 드라마
그럼 이 영화는 '접속'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만약 영화가 기획과 설정, 그리고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한 트랜드 묘사에만 국한되는 것이라면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를 고가의 소프트웨어로 만드느냐 번들로 만드느냐는 감독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점에서 '후아유'는 영화의 방향만큼이나 그 연출력에 있어 '접속'과 차이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분명히 트랜드 자체는 매우 잘따라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 트랜드를 가지고 있는 두 인물간의 갈등관계이다. 두 사람이 멜로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갈등,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일텐데,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최호감독은 그것을 '억지'로 풀어내고, 호흡도 유지하지 못한채 영화의 흐름을 끊어버린다.
짧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영화가 이들이 만나서 멜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갑자기 호흡이 길어지면서 온갖 이야기들을 하고, 또 엔딩에 이르러서는 그때까지 잘 쌓여온 갈등관계가 무색할정도로 '쉬운' 방법과 지리한 흐름을 갖고 영화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현대적인데 오프라인에서 둘이 만나는 부분은 거의 신파에 가깝다. 구구절절 대사로 모든걸 설명하려하고, 그러다보니 편집은 늘어지면서 그사이에 있었던 참신한 감각들을 까먹게 만든다. 최소한 엔딩이라도 조금 달랐다면 훨씬 나아질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이 영화는 설정과 트랜드의 묘사에서는 탁월하지만 그 중심에 놓여있는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감독의 연출력이 정말 아쉬운 부분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까닭인지 남녀주인공을 연기하는 조승우와 이나영역시 채팅때의 대사는 매우 감각적이고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둘이 만날때는 '설명'조의 연기를 해서 그런지 어색한 느낌을 준다.
정식판을 기다리며
다만 이나영이나 조승우 모두 그들의 전작보다는 한결 나은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조승우는 '춘향전'에서 조금 보여주었던 그 능글맞은 끼가 이 작품에서 확연히 살아나면서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요즘남자의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고, 너무 예쁜 인형같기만하던 이나영은 부분부분 여전히 어색하고 딱딱하게 대사를 말하기는 하지만 거의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천사몽'보다는 훨씬 다양하게 감정표현을 하면서 CF만큼이나 예쁜 모습을 보여준다. 또 트랜드를 따르면서도 요즘의 인기가요대신 20대가 혼자 있을 때 듣는 음악들, 혹은 20대의 '정서적 트랜드'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모던록음악이나 발라드 음악들을 사운드트랙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도또한 인상적이었다. 이대로 OST만 나온다면 OST일뿐만 아니라 훌륭한 컴필레이션 앨범이 될만하다.
하지만 그래도 트랜드가 어색한 드라마의 전개는 메꾸지 못하는 법. 매우 잘된 기획영화지만 감독 스스로가 이 트랜드를 잘 이해하지 못한것처럼 보이는 영화가 훌륭한 영화가 될 수는 없다. 캐릭터나 사건의 전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갈등을 일으키고 해소하는 방법에는 동의하기 힘든 영화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후아유'는 제목처럼 야심만만하게 요즘 젊은이들의 정체성을 던지는 '기획'을 잘한 영화지만, 그것을 뚜렷하게 대답해주지는 못하는 '베타 테스트'의 영화가 되고 말았다. 조금 더 있으면 정식버젼이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