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유다 백성은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갔다(25,21ㄴ).>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5,1-12
1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통치 제구년 열째 달 초열흘날에,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곳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공격 축대를 쌓았다.
2 이렇게 도성은 치드키야 임금 제십일년까지 포위당하였다.
3 그달 초아흐렛날, 도성에 기근이 심해지고 나라 백성에게 양식이 떨어졌다.
4 드디어 성벽이 뚫렸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칼데아인들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임금의 정원 곁에 있는
두 성벽 사이 대문을 통하여 아라바 쪽으로 갔다.
5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임금을 뒤쫓아 예리코의 들판에서 그를 따라잡자,
그의 모든 군대는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6 그들이 임금을 사로잡은 다음,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임금에게 데리고 올라가니,
바빌론 임금이 그에게 판결을 내렸다.
7 그는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8 다섯째 달 초이렛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제십구년에
바빌론 임금의 신하인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9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웠다.
이렇게 그는 큰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0 또한 친위대장이 이끄는 칼데아인들의 모든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가며 허물었다.
11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은 또 도성에 남아 있던 나머지 백성과
바빌론 임금에게 넘어간 자들,
그리고 그 밖의 남은 무리를 끌고 갔다.
12 그러나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다(미치 앨봄).
사진설명: 인천 교구의 신부님 어머니께서 선종하셔서 장례미사를 위해 청라성당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