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 매봉으로
긴 장마가 물러설 기미가 보이는 칠월 넷째 일요일이다. 모처럼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평소 점심나절에 거제로 복귀하는데 아침부터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같은 생활권 바로 손위 작은형님과 접선해 셋째 형님이 사는 가덕도로 향했다. 코로나 여파로 흩어져 사는 형제들이 자주 뵙지 못하고 지냈다. 지난 오월 초 고향에 들려 형님들과 식사를 같이 하고 선산을 둘러온 적 있다.
매주 주말이면 가가대교를 지나다닌 가덕도는 차창 밖으로 보고 스쳤다. 부산 시내에서 교직 생활을 마친 셋째 형님 내외가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어 그간 몇 차례 찾았다. 한 때 형님 건강이 염려되었으나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 노인 복지회관에서 개설한 문화강좌나 건강프로그램에 다녔는데 코로나로 휴관 중이라도 가덕도 일대 둘레길을 무념무상 걸으면서 건강을 관리한다.
형님이 두 아우를 부른 뜻은 지붕 어느 틈새 빗물이 새어 방수작업을 하자는 명분이었다. 물이 흥건히 새는 것도 아니고 비바람이 칠 때 약간 떨어지는 물방울인 듯했다. 형님의 안부가 궁금한 차에 당연한 걸음이라 생각 들었다. 창원터널과 굴암터널을 지나 신항만에서 가까운 가덕도였다. 천가동의 교육단지에서 멀지 않은 눌차만 동선동 목조 전원주택에 사는 형님 댁에 닿았다.
형님은 아침 산책을 다녀와 아우들을 맞아주었다. 너른 잔디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사철채송화가 가득했다. 봉숭아가 꽃을 피웠고 나팔꽃도 넝쿨을 감아가며 붉은 꽃잎 입술을 펼쳐 달았다. 때 이른 코스모스도 꽃을 피웠다. 정원 자투리 텃밭에 가꾼 방울토마토는 끝물이 되어 갔다. 옥수수는 수염을 달고 나와 수확이 한창이고 부추는 웃자라 있었다.
형님은 두 아우가 가져가라고 텃밭에서 지은 몇 가지 수확물을 박스에 담아 놓았더랬다. 고구마 잎줄기와 호박잎과 부추를 비롯해 옥수수 등 갖가지였다. 창원에서 빈손으로 달려간 아우는 농사를 짓는데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하고 덥석 받기만 해 미안했다. 테라스의 벤치 파라솔 아래서 형님이 손수 농사 지어 수확했다는 수박을 한 조각 들면서 작업 설계와 이후 일정을 논의했다.
창원에서 간 작은형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빗물이 새었을 법한 틈새를 찾으니 전에 발견하지 못한 곳을 찾아냈다. 벽면 환풍기 틈새로 비바람이 치면 빗물이 스며들어 거실에 물방물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실리콘을 틈새로 주입시켜 밀봉시켜 물방울이 새지 않도록 작업을 마쳤다. 노후화된 지붕의 다른 부분은 추후 근원적인 보수공사를 예정하고 일은 마무리 지었다.
창원 작은형님은 텃밭 수확물들을 트렁크에 싣고 가덕 형님과 아우를 산행 기점인 천가동 임도까지 태워주고 댁으로 복귀했다. 나는 가덕 형님이 정한 코스로 산행에 동행했다. 천가동에서 두문으로 넘는 고개에는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는 국군묘지가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가덕도가 연고인 국군용사 25위 호국 영령을 모신 추모공원이었다. 현충원 국립묘지 밖의 추모 공간이었다.
나는 오래 전 연대봉만 오른 적 있었는데 형님이 이사 온 이후 동반자가 되어 여러 곳을 순례한다. 연대봉도 두 차례 올랐고 응봉과 운주봉을 올랐다. 이번엔 가덕도 4대 봉우리의 남은 하나인 매봉으로 향했다. 활엽수림이 우거진 숲길을 걸어 매봉 정상까지는 힘들지 않고 올랐다. 정상에 서니 전망이 탁 트였다. 신항만과 명지 일대가 다 드러나고 거가대교도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정상에서 김밥과 곡차를 비우고 응봉으로 내려섰다. 숲길은 가팔랐지만 내리막이라 힘들지 않았다. 응봉을 앞둔 산허리에서 채석장을 지나 동묘산으로 향했다. 진달래가 아름답게 핀다는 산봉우리에 서니 눌차만 일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수 년 전 산불이 났던 조림지는 형님이 봄날에 고사리를 꺾기도 했다고 했다. 형님 댁에 닿아 간단히 요기하고 2000번 버스로 거가대교를 건넜다. 20.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