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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 마태오 9,9-13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대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
우리의 잘난 모습,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을 보고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애와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에, 그렇게 자비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용서와 사랑, 그 자애와 호의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 실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죄인들인 내 형제들을 단죄하기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 호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곳에서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무죄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
만약 죄인이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영근 신부님 글입니다
9월21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마태오 9,9-13
우리는 지금 내세에 가게 될 똑같은 세상을 만들며 산다.
넷플릭스 ‘수리남’은 마약왕 조봉행의 실화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국정원은 애초에 조봉행을 잡고 싶었지만, 수리남 대통령과 깊은 유착관계가 있는 그를 건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7년간 진행되었습니다.
국정원은 뜻밖의 조력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강인구라는 이름을 가집니다.
그는 수리남에서 마구 버려지는 홍어를 한국에 수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로 사는 조봉행이 그를 마약 밀입국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돈도 없고 약한 이들을 이용해 한국으로 마약을 밀반입하여 많은 가난한 이들이 죄도 없이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전요한(조봉행) 목사는 신도들과 함께 천국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란 자신이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배신하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면 바로 총살입니다. 자기만 천국이지 실제로 주위는 지옥입니다.
우리에게도 힘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힘으로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천국을 만듭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면 주위는 무자비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마태오 사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그를 사도로 맞아들였습니다.
자비의 세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잘 사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자신들만 천국이고 주위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그들이 바치는 희생은 뇌물이었습니다.
마치 전요한 목사가 힘을 얻기 위해 수리남 대통령에게 주는 뇌물과 같습니다.
그 뇌물은 마약을 팔아서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권력층이 주는 돈과 신뢰로 하느님까지도 팔아먹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서 은총을 받으면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는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지금 어디 계실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될 때 내세에 어디로 가게 될지 알게 됩니다.
내가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인사하고 함께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각자 방으로 다 들어갑니까?
내가 천국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올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자녀들을 이용해서 나를 높이려 했다면 그 가정은 지옥이 됩니다.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강의를 많이 다니다 보니까 성당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바로 본당 신부가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들은 각자 자신들이 천국이라고 여기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주의하려고 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가게 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흘러넘쳐서 천국이 실현된 것이 우리 각자의 성당이 되게 해야 합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한 노부부가 한화로 약 12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복권 당첨금으로 받았지만, 이를 전액 기부해 훈훈한 감동과 함께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78세인 비올렛 라지(Violet Large)씨와 알렌(Allen)씨는 결혼한 지 35년이 넘은 아름다운 커플입니다.
남편인 알렌은 용접공으로서 일했고, 비올렛은 소매업을 통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며 살아 온
캐나다의 성실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권 우승상금으로 1,130만 캐나다달러가 돌아갔을 때, 그녀는 암에 걸려 화학 치료요법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올렛 부부는 먼저 1,100억 캐나다 달러(한화 약 121억 원)를 남을 돕는데 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단 1%도 우리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베풂을 실천한 곳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암으로 고생하고 있던 비올렛은 자신이 암 치료를 해오던 투루로(캐나다의 항구도시)와 할리팩스에 있는 병원에 기부합니다.
또한 지역 소방서, 교회, 묘지, 적십자, 구세군, 암과 알츠하이머, 당뇨병을 치료하는 기관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무려 두 페이지에 달하는 기부자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고 하니,
그 과정이 이 부부에게 어느 정도 고된 노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주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돈은 우리의 건강이나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돈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둘이 함께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분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들어왔을 때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살펴야 합니다. 나는 잘 모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내 앞에서 천국처럼 편안해하는지 아니면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는지 보면 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내세에도 살 세상과 같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강론>
(2026. 9. 21. 월)(마태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1)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셨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라는 말씀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이고,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것도 죄이고, 또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있는 죄인이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누가 구원받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남의 구원도 그렇지만 자신의 구원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위대한 사도이고 순교자인데, 그 자신은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는다.” 라고 자만하지 않고, “나도 실격자가 될 수 있다.” 라고 두려워했습니다.
3)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면 당신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있는 다음 대화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
‘용서의 은총’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고, ‘구원의 은총’도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하느님께서 차단하셨는데(창세 3,24), 그 길을 다시 개방하는 것은 차단하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그 길을 다시 개방해서 인간들을 그 길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인간 구원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3,35).>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도 만나신 것은 그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4)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일에 대해서, “마태오가 세리였기 때문에(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도로 뽑으셨다.” 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뽑으셨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이 대부분 도둑이었지만, 모든 세리들이 다 도둑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 대부분 위선자들이었지만 ‘나타나엘’처럼 위선자가 아닌 ‘진실한 사람’도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요한 1,4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눈여겨보시다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제자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마태오 사도 쪽에서 생각하면, 그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9월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 사가 축일]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1. 복음의 의미
오늘 복음은 세리였던 마태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곧바로 일어나 따르는 장면을 전해 준다. 마태오는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경멸받던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 응답한다. 세속적 안정과 인간적 평판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 아람어로 마태오 복음서를 저술하여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였고, 동방으로 선교를 떠나 순교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삶은 인간의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여 인간을 변화시키는 극적인 사례이다.
주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힘을 지닌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한 말씀은 바다를 가르는 벼락과 같았다. 레위의 마음은 더 이상 세상 재물에 붙잡혀 있지 않고, 주님의 시선에 사로잡혔다.”(In Matthaeum hom. 30,2 의역) 곧, 주님의 부르심은 인간을 묶고 있던 사슬을 끊어내고, 새로운 자유로 나아가게 한다.
2. 교부들의 묵상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태오의 회심을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일어났다. 그의 마음이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의 몸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Sermo 179,6 의역) 마태오의 즉각적인 순종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예로니모는 주님의 식탁 친교를 강조하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은 그들의 죄를 묵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들을 의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In Matthaeum 9,9 의역)라고 한다. 주님은 죄인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변화를 일으키신다.
3. 교회의 가르침
교회 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어, 각자 처지와 상태에 따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신다.”(11항 의역) 마태오의 부르심은 이 진리를 드러낸다. 주님의 부르심은 특정한 ‘의인’에게만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초대이다. 또한, 교리서는 강조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로 이끄시며,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것은 이미 하늘 잔치의 전조였다.”(545항 의역)
4. 신앙생활의 적용
오늘 우리도 마태오처럼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서 있다. 우리의 자리, 곧 안정과 습관, 타인의 시선, 나의 계산에 매여 있다면,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순간, 주님께서 약속하신 자유와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큰 순교가 아니라도, 작은 결단의 순교를 통해 주님을 따를 수 있다. 가족 안에서 양보하는 것, 공동체 안에서 기꺼이 섬기는 것, 세상 속에서 진리 편에 서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마태오처럼 “일어나 따르는” 응답의 삶이다.
5. 마침기도
“주님, 마태오 사도처럼 저희를 불러 주시는 그 음성에 지체하지 않고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매일의 삶에서 작은 자리를 떠나 새로움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자유와 기쁨 안에 살게 하소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