靜庵 趙光祖 (成宗 13년 : 1482 ~ 1519 : 中宗 14)
朝鮮 中宗 때의 性理學者. 字는 孝直, 號는 靜庵. 本貫은 漢陽, 서울 出身. 司憲府監察 趙元綱의 아들. 18歲 되던 해인 燕山君 4년에 귀양이 있던 寒暄堂 金宏弼에게 배웠다. 慕齋 金安國 · 思齋 金正國 · 服齋 奇遵 등과 교유하였다. 1515년 成均館에 천거되고 사헌부감찰 · 公曹佐郞 · 弘文館副修撰 · 敎理 · 應敎 등을 歷任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 朴元宗 · 李荇 · 金安老 등 反正 功臣들이 주장한 왕비 愼氏 廢黜論을 반대하였다. 1517년 홍문관교리 · 응교 · 부제학을 거치면서 經筵에 入侍했다. 圃隱 鄭夢周 · 寒暄堂 金宏弼을 文廟에 從祀할 것과 梅竹軒 成三問 · 醉琴軒 朴彭年 등을 贈褒해 주기를 要求하였다.
또 1518년에 大司憲으로 있으면서 賢良科를 實施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新進士類를 登用하였다. 그는 靖國功臣들의 特惠를 깎아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南袞 · 沈貞 · 洪景舟 등 勳舊派 官僚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新舊間의 충돌을 일으켰다. 이는 己卯士禍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그는 결국 綾州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賜藥을 받기 직전 지은 詩는 유명하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天日照丹衷 昭昭臨下土.)
이에 신진사류의 至治主義의 銳氣가 꺾이게 되었다. 그는 朝鮮 道學派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의리와 이욕을 분별하고 內聖外王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理氣에 대한 견해는 倫理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었으며, 理는 氣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理는 主가 되고 氣는 이에 따르는 것이라 하여 理의 일차성을 인정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태도는 知行 문제에서 드러나는데, 학문이란 지행이 倂進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양에 있어서는 敬의 중요함을 말하여, 안으로 실천한 후에야 천하의 모든 사람이 감화되어 도덕심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의 至治主義는 紀綱과 治道의 근본이 임금의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이므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개척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금정책을 합리적으로 개정하여 민생고를 덜어줄 것과 집권층의 부당한 특권을 원칙적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으로 나타났다. 또한, 鄕約의 실시와 昭格署 폐지는 그의 실천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栗谷 李珥는 그가 가장 힘썼던 바를 格君心(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음) · 陳王道(왕도를 폄) · 闢義路(의로운 길을 열어줌) · 塞利源(利의 근원을 막음)으로 설명하였다. 이 세 가지는 治道의 방법으로 言路를 開張할 것과 임금 · 신하 · 백성들의 의사소통이 일체화하도록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한 君子와 小人을 구별하여, 군자는 天理를 갖춘 義理가 있고 소인은 人欲에 빠져 利慾이 생기므로 이들이 세력을 일으키면 당쟁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誠意와 正心을 말하고 修身을 강조하는데, 이는 天德을 이루고 王道를 이루는 內聖外王 정신의 발로였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退溪 李滉 · 栗谷 李珥 등의 많은 儒學者에 영향을 주었고 士林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韓國 儒學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宣祖 元年 伸冤後 영의정에 追贈. 文廟에 配享, 綾州의 竹樹書院. 楊根의 迷源書院. 楊州의 道峯書院 · 龍仁의 深谷書院 · 熙川의 兩賢祠 등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