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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 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 요 20: 22 성령을 받으라.
요 20: 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체를 보여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 상처를 보여줌으로 제자들은 이전에 입으셨던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계심을 알고 믿을 수 있었다.
1]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의 몸은 영화롭게 변화되셨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몸으로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셨다. 그것은 며칠 전 유월절 식사 후에 하신 말씀의 성취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나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니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리라고 하셨다.
* 요 16: 17, 20, 22 –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을 달라고 하여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
* 눅 24: 41-43 –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는 약속(14: 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 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 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복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 35. 막 15: 25. 눅 23: 33)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눅 24: 39-40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 20: 19-20)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 처음 모습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나 요한도 무덤까지는 찾아갔으나 빈 무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감으로 주님을 만나 볼 수 없었다.
주님의 시신을 끝까지 찾아보려고 남아 있었던 마리아에게 주님이 그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신 일은 마리아의 사랑을 귀히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평강의 축복을 주셨다.
(1) 찾아오시는 주님
성경은 자기들의 선생님이 잡혀가실 때 등을 돌리고 도망가 버렸던 제자들에 대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지내며 이제 안식일이 지난 첫날이 될 때까지 잠잠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그날 저녁때에 가서야 한곳에 모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무덤에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무덤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특히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아 온 후 그가 제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과 주님의 분부를 전해 준 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한둘씩 늘 주님과 자주 모인 그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 행 12: 12 –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그곳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① 주님은 두려움 중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밖에는 얼씬도 못했다. 제자들은 저녁때에 모였지만 두려움으로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숨어 있었다. 이 때에 주님이 그곳에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바로의 군병들이 쫓아 올 때 큰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출 14: 13-14).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두려움이 없어야 하겠지만 두려워할 일이 있어도 그 때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두려움을 물리쳐야 한다.
* 시 23: 4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②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누가 자기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잠 24: 16 –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왜냐하면 주님이 일으켜 주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들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자주 넘어졌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계속 일으켜 주시며 붙들어 주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존재가 너무나도 귀한 것이다.
주님은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찾아오신다.
* 마 18: 20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제자들은 비록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그들의 모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한 모임임은 분명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2) 평안하게 해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 있는 곳에 들어오셔서 제일 먼저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평강이란 말은 ‘에이레네’로 이 말은 다양한 뜻을 함유하고 있다. 평안, 화평, 평화, 화목, 염려 등이다.
그 어느 쪽 말이건 이 말이 가리키는 뜻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확립되는 질서를 의미한다. 이 마음의 질서가 파괴될 때 우리는 바른 정서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영적인 마음의 선물은 이 평강이다.
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두려움을 쫓아낸다.
평화로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을 곳이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영원한 생명에서 샘솟는 깊은 마음속의 평화이다. 모든 정죄에서 벗어난 확실한 의에서 나오는 영원한 평강이다.
* 롬 8: 31-34 –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②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로 하나님과 교통케 한다.
* 욥 22: 21 -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중재자로 오셔서 그 회목 제물이 되셨다.
* 골 1: 20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③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우리로 소망 중에 살아가게 한다.
우리 인생길에는 가난, 실패, 질고 등 많은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길을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 그러나 주님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그보다 위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본 제자들은 이제 두려움은 사라지고 예수로 말미암은 기쁨이 충만했다. 우리는 이 주님의 평강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평강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생애를 보내야 한다.
요 20: 21 평강이 있을지어다 -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며 지금은 그들을 보내시기에 앞서 주시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연결하며, 결코 혼자가 아니시라는 것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 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 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는 다시 평안을 기원하신 후에 그가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의 사명이었다. 전도는 사도들의 사명이며 신약 교회의 최대 임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병 고침이나 기적 행함이 예수님의 사명이 아니었듯이, 단지 교육 사업, 자선 사업, 구제 사업 등의 선한 일들은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그것들이 비록 선한 일이지만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다.
주님의 사명이 영혼 구원의 전도이었듯이,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 오직 거기에 있다. 실상, 영혼 구원의 전도는 이웃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큰 선행이다. 죄로 인해 지옥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영혼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선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3: 34. 5: 36, 38. 6: 57. 7: 29. 8: 42. 11: 42. 17: 3, 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 요 13: 2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혹자는 13: 20이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 34. 5: 19. 17: 4). 또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1: 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繼)된다.
요 20: 22 성령을 받으라 -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창 2: 7의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모습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때에 성령을 주셨지만 제자들은 성령을 50일 이후 오순절이 되어서야 받게 된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을 받는 것은 사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언적이라고 보인다.
1]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묘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 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 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
* 창 1: 27-28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마 28: 16-20 –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새 창조는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하는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 고전 2: 1, 4 –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2]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베테'(*)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함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 속에 모신다는 뜻이다.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사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언적이라고 보인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되었다. 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2: 4).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대로, 주께서 명하신 전도의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 받은 제자들은 과연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되었다.
* 행 2: 1-4 –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
* 요 7: 39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요 16: 7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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