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와 배티 교우촌 최양업(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입니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입니다. 그는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후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학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위대한 목자요 백색 순교자입니다. 1861년 선종하기까지 12년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순회하며 목자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죽은" 착한 목자입니다. | |||||
박해시대의 배티 교우촌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동골, 새울,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여명(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한국의 까따꼼바이며, 스스로 찾아온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간 신앙의 현장이며, 수많은 혈색 순교자와 백색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의 땅입니다. | |||||
순교의 땅: 무명 순교자 묘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 경입니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될 수 있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습니다. | |||||
나의 샘터 배티 우리는 가끔 자신에게 알맞는 기도회나 피정의 길을 떠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널리 알려진 곳, 훌륭한 피정 지도자, 좋은 시설이나 환경, 분위기를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기복적인 신앙으로 기울어지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교구에는 조용한 산자락을 뒤로 하고 언제나 우리에게 편안하고 풍요로움을 안겨 주는 곳이 있습니다. 신선한 산내음·들내음과 함께 {은화}의 주인공들이 반기는 곳, 바로 "배티 성지"입니다. 이곳 배티 성지를 순례하면서 신앙 선조들의 신앙을 기리고, 묵상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자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이요 순교자이신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를 주보로 모신 "성례회"입니다. 주님과 함께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 자신을 가꾸어 보자는 소망들을 한데 모은 모임입니다. 이 모임의 일원으로 배티 성지를 순례할 때면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느낍니다. 발자국마다 선조들의 신앙, 그들의 생활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주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한 번 휘이 돌아보면 왠지 엄마 품에 안겼다 가는 듯한 곳. 청주교구의 성지, 아늑하고 조용한 이곳에 맛을 들이면 철따라 변화를 이루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자연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신비함을 느끼면서 찌든 마음의 상처를 씻을 수 있습니다. 성지 내의 1층 소성당에는 '성인 공경실'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초상화 위에 모셔진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김대건(안드레아) 성인 신부님의 유해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노라면, 온갖 잡념이 말끔히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오름을 느끼게 되며,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성체 조배실'에 가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후련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치는 '십자가의 길'은 최양업 신부님과 이성례 마리아님께서 따르고자 했던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게 하며, 그 동안 씻지 못해서 응어리진 구석구석의 때와 작은 티까지 깨끗하게 씻어 주고 성모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유난히 손이 크신 '배티 동산의 성모님' 앞에서 나름대로 마음의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른 뒤, 수녀님의 알사탕 같은 한 말씀을 가슴에 안고 내려오는 이 기분. 언제나 영적인 갈증을 채워 주시며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신부님, 수녀님의 각별하신 관심과 사랑이 우리들을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처음에는 배티 성지를 아름답게 가꾸어서 모든 이들이 와서 늘 기도하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성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사만 참석하고 그냥 돌아가는 많은 순례객들과 함께 무명 순교자 묘소를 참배하고, 비밀 통로로 교우촌을 돌아나오면서 선조들의 신앙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배티 성지를 널리 알리는 작은 안내자가 되고 싶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함께 한 우리들은 신부님, 수녀님과 함께 {은화}에 나오는 모든 곳, 최양업 신부님께서 한글 교리서를 집필하시던 장소 등을 순례한 뒤 모임 이름도 짓고, 싸가지고 간 음식도 함께 나누는 은총의 날을 갖게 되었습니다. 배티 성지에 가는 날이면, 아침 일찍 등산복을 차려입고 시외버스로 진천에 도착한 뒤, 9시 50분 양백리행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신바람이 나서 기쁜 마음으로 성지를 찾았습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묵주의 기도 5단을 바치면서 걸으면 11시 미사 시간에 딱 맞추게 됩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순례를 마친 후에 다시 걸어오면 오후 3시 30분 시내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교우촌 모니를 경유하게 되어 더욱 좋습니다. 진천에서 배티 구간은 승객이 별로 없어서 전세 버스로 여행을 즐기는 기분을 만끽하게 됩니다. 배티 성지는 우리 성례회 회원들의 목마름을 채워 주는 차고 신선한 참 생명의 샘물입니다. 그곳에 가면, 산나물이랑 구수한 시골 음식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 주시는 후덕한 회장님 댁 인심이 있어 고향을 찾은 듯한 푸근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에 이곳을 순례하면 전대사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 모든 순례자들은 돌아가신 은인들에게 보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정말 신바람 나는 순례길이지요? 하느님께서 이 크신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기도드립니다. 최양업 신부님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하시어 꼭 시복 시성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분께서 교리를 연구하고 교우들을 돌보던 소성당 초가집을 복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성례회의 알찬 만남에도 매순간마다 함께하시어 축복해 주옵소서. 아멘. | |||||
교우촌과 신앙 선조들의 삶 (1) << 교우촌과 공소집 >> 교우촌의 의미 교우촌(敎友村)은 천주교회만의 용어는 아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교우들끼리 모여 이룬 마을'이라는 의미로서의 교우촌은 개신교나 신흥 종교에서도 써왔으며, 지금에도 교우촌이나 성교촌, 신앙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교우촌은 주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박해 시대의 비밀 교회"(Crypto Church)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탄압과 추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비밀히 일구어나간 신앙 공동체가 바로 교우촌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우촌을 한국의 카타콤브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교우촌의 전통은 신앙의 자유를 맞이한 뒤에도 한 동안 계속되었고, 교우촌이나 성교촌이란 용어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사용되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는 박해 시대의 전통이 남아 있는 교우촌을 가리켜 특별히 '구교우촌'(舊敎友村)이라고 하였다. 넓은 의미로서의 교우촌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교우촌은 비밀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박해 시대의 교우촌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전후하여 변화가 있게 되었다. 먼저 1830년대 이전에 형성된 초기의 교우촌은 대부분 '임시 공동체형'으로서의 비밀 교회였다. 박해의 소문이 들릴 때마다 혹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을 때마다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1840년대 이후에는 전국으로 복음이 퍼져나가면서 포졸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우촌 신자들은 이주보다는 조심스럽게 비밀을 지킴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처럼 한 곳에 정착한 '자연 부락형' 교우촌들은 지금까지도 신앙의 줄기가 이어져 오고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공소와 공소집 교우촌은 그 규모에 관계없이 성직자의 방문으로 판공성사나 미사가 집전되면 '공소'(公所)가 된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두세 집이 모여 공소를 치르는 경우도 있고, 큰 마을 전체가 교우촌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신자들은 공소인 교우촌에 가서 성사를 보는 것을 흔히 '공소를 치른다'고 하였고, 공소를 치른 집을 공소집 혹은 공소 경당이나 강당이라고 불렀다. 초기의 공소집은 대부분 사가(私家)였지만, 이후에는 교우촌 신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공소 경당을 건립한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박해 시대의 공소집은 비록 독립된 경당이라 할지라도 아주 규모가 작았다. 판공을 치를 때도 비밀을 유지해야만 했으므로 많은 수의 신자가 한 번에 모일 수 없었다. 따라서 집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었고, 눈에 띌 정도로 커서도 안되었다. 1830년대에 반포된 <회장규조>에서 판공성사 때라 할지라도 "하루에 40명 이상의 신자들이 공소에 모이지 말 것"을 지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가 휴식 기간에 머물렀던 배티의 공소집도 아주 작은 초가집에 지나지 않았다. 제가 있는 배티는 온 마을이 신자 마을로서,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 거처는 마을 중간에 있습니다. 흙과 짚으로 지은 작은 오막살이입니다. 이곳은 사제관이면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방이 두 개인데, 하나는 제가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복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방들은 하나의 큰 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 제 방에서 미사를 드릴 때에는 이 문을 열어 놓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각 다른 방에서 미사를 드립니다(프티니콜라의 서한 중에서). 한국의 전형적인 두 칸짜리 초가집인 셈이다. 그래도 낯설은 타향에서 움막을 짓고 교우촌을 일구어나간 신앙 선조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이자 안식처였다. 더욱이 성직자들의 일정한 거처로 사용된 공소집은 관할 지역의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후에는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 |||||
교우촌과 신앙 선조들의 삶 (2) << 교우촌과 공소집 >> 박해 시대의 공소집은 비록 독립된 경당이라 할지라도 아주 규모가 작았다. 판공을 치를 때도 비밀을 유지해야만 했으므로 많은 수의 신자가 한 번에 모일 수 없었다. 따라서 집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었고, 눈에 띌 정도로 커서도 안되었다. 1830년대에 반포된 <회장규조>에서 판공성사 때라 할지라도 "하루에 40명 이상의 신자들이 공소에 모이지 말 것"을 지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와 순교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미카엘) 신부가 휴식 기간에 머물렀던 배티의 공소집도 아주 작은 초가집에 지나지 않았다. 제가 있는 배티는 온 마을이 신자 마을로서,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 거처는 마을 중간에 있습니다. 흙과 짚으로 지은 작은 오막살이입니다. 이곳은 사제관이면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방이 두 개인데, 하나는 제가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복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방들은 하나의 큰 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어, 제 방에서 미사를 드릴 때에는 이 문을 열어 놓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각 다른 방에서 미사를 드립니다(프티니콜라 신부의 서한 중에서). 한국의 전형적인 두 칸짜리 초가집인 셈이다. 그래도 낯설은 타향에서 움막을 짓고 교우촌을 일구어나간 신앙 선조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이자 안식처였다. 더욱이 성직자들의 일정한 거처로 사용된 공소집은 관할 지역 안에서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후에는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배티의 작은 공소집은 특히 성당을 겸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박해 시대의 공소집 중에서 이처럼 성당 역할을 한 경우는 여러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를 밝힐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충북 제천의 '배론 성 요셉 신학교'는 사목 중심지로서의 성당보다는 신학교로서의 의미가 더 컸고,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거처했다는 충남 합덕의 '신리 공소'는 전승으로만 내려올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배티의 성당(공소집)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을 찾게 된 것은 교회사의 중요한 소득이었다. <계속> | |||||
교우촌과 신앙 선조들의 삶 (3) << 공소 회장과 공소 예절 >> 공소 회장의 역할 교회에서 회장을 선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초기 때부터였다. 그러나 1786년 무렵에 이루어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 시절에 최창현(요한)이 총회장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절차에 따라 임명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식으로 회장이 임명된 것은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다음부터였다. 명도회 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 윤점혜(아가다) 등등.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에는 이경언(바오로)이 북경 주교의 지시대로 회장을 양성하였다. 본격적으로 회장 제도가 교회 재건과 교우촌 유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였다. 1836년 초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 신부는 각처의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는 한편 공소 회장을 임명하여 사목자 대신 공소의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회장의 임무와 권한, 교회의 가르침과 규정 등을 정리하여 한데 묶어 반포한 것이 바로 <회장규조>(會長規條)이다. 이 내용은 1857년 베르뇌(Verneux, 張) 주교에 의해 수정 보완되었다. 공소 회장은 신심이 두텁고, 성품이 온후하며 덕망이 높고, 교리 지식이 뛰어나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신자가 임명되었다.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 가운데서 회장을 역임한 경우가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일 회장이 궁핍하여 본분을 다하기 어려우면 공소 신자들이 그의 일용을 돌보도록 하였으며, 회장이 교회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거나 배교를 하게 되면 다시는 회장 소임을 맡을 수가 없었다. <회장규조>에 따르면, 공소 회장은 신부를 대신하여 성교회를 지도하도록 되어 있으며, 특별히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의무를 잘 수행해야만 하였다. 첫째, 신자들의 구령(救靈) 지도 둘째, 외교인에 대한 전교와 입교 권면 셋째, 병자 보호와 임종자 권면 넷째, 영해( 孩) 대세 활동 아울러 회장은 필요한 경우에 자신을 도와 줄 한두 명의 신자를 선발하여 신부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박해 시절 배티 공소에는 장(張) 시몬이라는 열심한 신자가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배(裵) 바오로 회장이 그를 도와 주었다. 이처럼 공소 회장은 전교 활동은 물론 예비자 교리 교육, 신자들의 신앙 지도와 생활 규제(배교, 축첩, 교회 모독 등 불순한 행위), 공소 예절, 공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또 필요한 경우에는 신자들의 생계를 도와 주거나 교우촌에 새로 들어온 가족들의 거처까지도 마련해 주어야만 했다. 박해 시대 복음 전파 활동은 신부의 몫이 아니라 공소 회장과 신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장의 역할 중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성사를 타당하게 준비하도록 인도하는 일이었다. 공소 회장 이외에도 박해 시대에는 "전교 회장" 제도가 있었다. 대부분 신덕과 교리 지식이 풍부한 신자가 전교 회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냉담자 회두도 담당하였다. 전교 회장은 일정한 관할 구역을 담당하는 일반 전교 회장과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순회 전교 회장으로 구분되었다. 전교 회장 제도는 공소 회장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자유 이후에도 변함없이 존속되었다. 공소 예절 공소집이 사가이던 독립된 경당이건, 교우들은 주일마다 여기에 모여 공소 예절을 드렸다. 배티와 같이 방이 두 칸 있으면 제대방(안방)에는 남자들이 앉고, 아랫방(윗방)에는 여자들이 앉았다. 방이 한 칸인 경우에는 남녀 좌석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앉았다.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사와 예절에 참석할 때는 모든 신자들이 버선을 신고 옷을 단정하게 입되, 남자는 망건을 쓰고 소창옷을 입으며, 여자는 머리에 흰 수건을 써야만 했다(<장주교윤시제우서>, 1857). 교회 창설 초기에는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주일과 축일의 공동 기도문과 함께 해당되는 주일·축일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바치고, {성경직해광익} 등에 나오는 복음 독서를 암송하였다. 그러다가 교우촌이 형성된 후에는 지도층 신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함께 모여 주일 예절을 지켰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로는 교회의 지침에 따라 주일과 대축일의 공소 예절에 참여하였다. 박해 시대에는 공소 예절시에 언제나 복음 독서가 강조되었다. 주일과 대축일은 십계명의 제3계명에 따른 파공일(罷工日)이었다. 그러나 농번기와 같은 때는 신부로부터 파공 관면(寬免)을 받고 노동을 할 수 있었는데, 이 관면에는 전일 파공 관면과 반나절 파공 관면이 있었다. 배티 공소의 신자들은 박해 이후에도 농번기의 주일이 되면 신부로부터 관면을 받고서야 일을 하는 교회 관습을 지켰다고 한다. <계속> | |||||
교우촌과 신앙 선조들의 삶 (4) << 공소 회장과 공소 예절 >> 물론 당시에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공소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집에서 개인적으로 공소 예절시의 기도문을 바쳤으며, 글을 모르는 신자들은 묵주 기도 15단이나 십자가의 길, 99번의 성모송을 대신 바쳤다. 또 {성경직해광익}와 같은 서적들을 구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안에 수록된 묵상과 복음 독서 등을 철저하게 준행하였다. 독서를 통한 묵상과 신심 함양 활동은 그 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성사 제일주의"로 바뀌어 갔으며, 신자들의 신앙 생활도 서적보다는 성사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변모되었다. 공소 순방 신부는 공소 순방에 앞서 판공 날짜와 판공 준비와 찰고 내용 등을 담은 배정기(排定記, 사목 서한의 일종)를 예정된 공소들에 돌렸다. 그러나 박해 시대에는 이를 빼앗길 위험이 있었으므로 인편으로 순방 날짜를 알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신부는 복사와 함께 미사짐, 이불·옷짐, 성물짐 등을 들고 다녔으며, 순방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공소에서는 영접꾼과 짐꾼을 그 앞의 공소로 보내기도 하였다. 신부가 공소를 떠날 때면 신자들은 언제나 오죽잖은 선물이라도 드리고자 하였지만, 하나라도 더 많은 공소를 순방해야만 하는 신부로서는 보따리를 늘릴 수 없었다. 최양업 신부는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각처에 흩어져 있는 공소를 순방하면서 어렵게 성사를 주었고, 신자들도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성사를 받고자 하였다. 한 사람은 15리 되는 곳에서 왔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그곳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기 집을 비워둔 채 아내와 10살쯤 되는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 길도 없는 험한 산을 넘어서 저를 만나러 왔던 것입니다. 오! 만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나 베르나르도 성인이 여기 나타나신다면, 저렇게도 빈궁한 이들한테서 얼마나 큰 열정으로 환영받을 것이겠습니까?(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교우촌 신자들은 신부를 만나 미사에 참례하거나 성사를 받는 것이 바로 구령에 지름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신부가 어느 교우촌을 순방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하루에 50리, 100리를 걸어서, 혹은 밤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 교우촌으로 가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 신자들은 신부와 헤어지기 싫어서 하루라도 더 묵고 가기를 청하거나 눈물 속에 이별을 하였다. 우리가 교우촌을 떠날 때에는 여행할 옷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집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탄식 소리로 진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제 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애정의 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그들은 저를 따라나서서 제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좀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야산 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미사와 판공성사 성사가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신자들은 1년에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하는 봄·가을의 고해성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특히 가을에는 성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찰고(察考) 즉 교리 문답 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공소 회장의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다 많은 교우들이 찰고에 통과하여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이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판공(判功)이다. 물론 한 번에 많은 신자가 한 곳에 모여 시장 바닥과 같이 떠들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외교인들에게 발각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는 찰고를 받을 수 있는 숫자와 위험성을 함께 고려하여 매 번마다 판공성사와 영성체를 하는 신자의 수를 제한하였다. 즉 시골 공소 중에서도 큰 공소에는 한 번에 40명, 적은 공소에는 한 번에 3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였으며, 서울에서는 20명이 넘지 않도록 하였다(<회장규조> 참조). 판공성사를 받는 신자수는 미사 대수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공소 신자수가 60명일 경우 한 번에 3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고 한다면 하루에 두 대의 미사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신자수가 100명이 넘는 큰 공소의 경우에는 한 번 공소를 치를 때마다 미사를 서너 대씩 드려야만 하였다. 물론 박해 시대에는 이처럼 많은 신자가 하나의 교우촌에 사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공소가 치러지는 곳으로 이웃 교우촌의 신자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와 같은 경우에는 이마저도 금지하고 자신이 직접 모든 교우촌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하곤 하였다. |
최양업(토마스) 신부 성인 만들기 운동에 동참합시다.
/한/국/천/주/교/ /배/티/성/지/ 최양업(토마스) 신부 성인 만들기 운동에 동참합시다. /한/국/천/주/교/ /배/티/성/지/ 충북 진천군 백곡변 양백리 471 (우) 365-812
충북 진천군 백곡변 양백리 471 (우) 365-812
(043) 533-5710; 0691 FAX: 533-0690
담임신부: 류한영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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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533-5710; 0691 FAX: 533-0690
담임신부: baithi@chollian.net?subject=류한영(베드로) 신부님께...">류한영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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