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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2강-3 (2012.06.29)
10-6 마음은 형상이 없다
임제록을 강의해 보면 평생 임제록만 강의하고 싶어요.
이렇게 쉽고ㆍ또 아주 간단하지만ㆍ선명하고요. 무슨 경전이나 이런 것은 아주 애매모호해요. 그리고 지극히 논리적이라서 저~~ 앞의 이야기 놓쳐버리면 연결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앞의 말 놓쳐도 상관없습니다. 연결이 필요 없습니다. 딱 한 마디 그냥 넉자. 만약에 넉자 하나 챙기면 그냥 바로 이해가되니까요. 야~ 선불교의 원형은요? 참선불교의 원형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참선불교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니까, 이것이 가슴에 얼른 와 닿지가 않으니까,
‘이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시킬까?’ 조사스님들이 이러한 여러 방법을 강구하다가 “가만히 앉아 있어라ㆍ묵묵히 앉아 있어라.” 默照 = 묵묵히 비추고 있어라. 그래 黙照禪(묵조선)입니다. 묵묵히 비추고 있어라. 그래 임제스님은ㆍ임제스님은 무엇이 진짜불교인가?ㆍ무엇이 진짜불법인가?
如何是佛法的的大意오? ‘어떤 것이 불법의 분명한 뜻인가?’ 이 생각만 하고 있고... 나중에 어떤 스승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라ㆍ가만히 앉아 있어라ㆍ앉아 있기만 해라.” 앉아 있으라고 하는 것이 몸뚱이만 앉아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다 앉아 있어야 됩니다. “몸도 마음도 다 앉아 있으라.”
금강경에서 敷座而坐(부좌이좌) 그랬잖아요.
자리를 펴고 앉으시다. 부처님께서 자리를 펴고 앉았다. 부처님께서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우리 앉는 것 하고 달라요. 우리는 그저 망상이 부글부글하면서 앉아있고, 부처님은 그냥 앉아있습니다. 앉아있는 그것뿐입니다.
그래 黙照禪이라고 하는 것은 참선. 看話禪(간화선) 보다도 바로 앞에 형님뻘 되는 참선이 黙照禪인데, 그 黙照禪은 그냥 앉으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망상이 부글부글하면 그것은 앉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대로 다 앉아야 됩니다. 그것이 진짜 黙照입니다.
그런데 몸만 앉아있고 마음은 온 천지사방으로 돌아치면 그것은 참선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것이 병통이 많이 생기니까 나중에 또 어떤 선사가 나타나가지고, 대혜선사가 나타나가지고 화두를 제시를 하는 겁니다ㆍ화두를 제시 하는 겁니다. “개가 불성이 없다.” 천지만물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사람하고 비슷한 개가 왜 불성이 없는가? 그것 생각하라. ‘개가 왜 불성이 없는가?’ ‘부처님이 왜 꽃을 들었는가?’ 이것을 생각하라. 이렇게 화두선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看話禪(간화선). 그 때부터 화두선이 나왔는데 그것을 저는 경산종ㆍ대혜종이라고 그럽니다. 그 불교는 임제종하고 다릅니다.
看話禪은 완전히 대혜종입니다. 대혜선사가 가르치기 시작한 겁니다.
그 전에도 화두가 조금씩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화두를 들고 공부 하는 방법을 제창한 것은 대혜선사입니다. 그래서 “대혜종” 그럽니다. 대혜종. 대혜종이 看話禪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黙照禪보다도 더 선배입니다. 더 원형이라고요. 임제스님의 이것은요? 黙照禪. 묵묵히 앉아있는 참선보다도 더 훨씬 형님뻘입니다. 형님뻘이 되는 이것이 진짜 원형입니다. 이것은 “앉으라ㆍ서라.” 이런 이야기 없잖아요. “화두를 들라.” 이런 이야기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네가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에서 부족한 것이 뭐가 있느냐?” 바로 그것만 제대로 보면ㆍ그것만 제대로 보면 부처이고 조사다ㆍ바로 부처이고 조사다.
거기 뭐 앉아라. 서라. 화두를 들어라. 여기는 아무 그런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짜 참선원형입니다. 선불교의 원형이 바로 이겁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제(1강-1) 그 유인물도 나눠드렸듯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선사스님들은 전부 ‘임제스님의 이 소견이야말로ㆍ임제스님의 이 사상이야말로 진짜 훌륭한 사상이다.’ ←이렇게 보고 모두 임제스님 밑에 줄을 대는 겁니다. 전부 “나는 임제스님 몇 대손이다ㆍ임제스님 몇 대손이다.” 그럽니다.
한국의 여행하는 스님이 중국 사찰에 가가지고 중국 사찰의 스님들한테 소개할 때 그럽니다. “아 우리도 임제스님 계통” 이라고 그럽니다. 임제스님 계통 이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임제스님 계통이다.” 그럽니다. 그러면 그 중국스님들이 아 그러냐? 고, 그러냐? 고 우리도 임제종이라고 반갑게 대접도 하는 그런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25쪽.
10-6 마음은 형상이 없다
道流야 心法無形하야 通貫十方하야 在眼曰見이며 在耳曰聞이요
在鼻齅香하고 在口談論하며 在手執捉하고 在足運奔이라
本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一心旣無하면 隨處解脫이로다
山僧與麽說은 意在什麽處오
祇爲道流가 一切馳求心을 不能歇하야 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道流야 取山僧見處하면 坐斷報化佛頭라
十地滿心은 猶如客作兒요 等妙二覺은 擔枷鎖漢이요
羅漢辟支는 猶如厠穢요 菩提涅槃은 如繫驢橛이니 何以如此오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일새 所以有此障礙니라 若是眞正道人인댄
終不如是니 ←2강-3
↓2강-4
但能隨緣消舊業하고 任運著衣裳하야 要行卽行하며
要坐卽坐하야 無一念心希求佛果니 緣何如此오
古人云 若欲作業求佛이면 佛是生死大兆라하니라
마음은 형상이 없다. 이것도 중요한 내용이라서...
道流야 心法은 無形(심법무형)하야, 마음의 도리는 형상이 없다.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어, 아무 형상도 없어, 그런데
在眼曰見(재안왈견)이며, 눈에 있을 때는 보는 작용을 해요.
在眼曰見이며,
在耳曰聞(재이왈문)이요. 귀에 있을 때는 듣는 작용을 해요. 들으니까 이것이 뭐가 있는 줄 알지요. 듣지 아니하면 이것은 뭐가 있는 줄 몰라요.
在鼻齅香(재비후향)하고, 코에 있어서는 향기를 맡고
在口談論(재구담론)하며, 입에 있어서는 談論. 말할 줄 알고,
그 물건이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 물건이 들어서 필기하는 겁니다. 그 물건이 들어서 말소리를 듣는 겁니다.
在手執捉(재수집착)하고, 그 물건이 손에 있을 때는 잡아요.
뭘 물건을 잡아요. 책을 잡고ㆍ연필을 잡아요.
在足運奔(재족운분)이라.
발에 있을 때는, 그 물건이 발에 있을 때는 걸어가요. 움직일 줄 알아요.
걸어 다닙니다.
本是一精明(본시일정명)이, 본래 하나의 정미롭게 밝은 것.
본래 하나의 정미롭게 밝은 = 一精明이.
分爲六和合(분위육화합)이라. 나누어져서 여섯 가지로 화합했다.
그래서 이것을 六窓猿有(육창원유)라. 이런 표현을 하지요. 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창문을 여섯 개를 내놔요. 그 방에다 원숭이를 한 마리 집어다 놨어요. 이 창문에 가서 원숭이를 부르면 그쪽으로 얼굴 내밀고, 저쪽 창문에 가서 원숭이를 부르면 거기에 또 얼굴 내밀고, 그것이 뭡니까?
여섯 창문 =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 ←이것이 六和合이라고 하는데,
나누어져서 六和合이다. 여섯 가지로 화합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한 물건이 볼 때는 보고ㆍ들을 때는 듣고, 그리고 속도가 워낙 빨라가지고요? 워낙 빠르고 나중에는 능숙해지면 운전하면서 말하고ㆍ도로보고ㆍ내비게이션 보고ㆍ라디오 듣고ㆍ전화하고, 온갖 것 다 합니다.
가면서 옆에 끼어들면 욕도 하고, 또 옆 자리에 좀 꼴사나운 것 있으면 그것 또 한 번 더 쳐다보고 가기도 하고, 야~ 이것 신기한 겁니다. 이 물건이 정말 신통방통한 겁니다. 정말. 이것이 정말입니다.
在眼曰見이요, 눈에 있으면 보는 작용.
귀에 있을 때는 듣는 작용.
코에 있으면 향기를 맡는 작용.
입에서는 말할 줄 아는 작용.
손에서는 물건을 잡고
발에서는 걸어 다녀요. 본래 한 덩어리입니다. 한 精明.
아주 정미롭게 밝은 것인데 그것이 이리저리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져서 여섯 가지로 화합한다.
그런데 형상이 없어요. 실체가 없어요.
一心旣無(일심기무)라. 그 마음이 이미 없으면
隨處解脫(수처해탈)이다. 곳을 따라서 해탈이다. 어디든지 해탈이다.
山僧與麽說(산승여마설)은, 산승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意在什麽處(의재삼마처)오? 뜻이 어디에 있느냐?
산승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뜻이 뭐냐? 말입니다.
祇爲道流(지위도류)가, 다만 도류들이 = 여러분이
一切馳求心(일체치구심)을 不能歇(불능헐)하야,
모든 馳求하는 마음. 아~~주 열심히 쫓아다닙니다. 그 좋은 보물은 제쳐놓고, 그 좋은 보물은, 정말 석굴암부처님 만 개하고도 바꾸고 심지어 이 우주하고도 바꾸지 않을 그런 보물은 그만 제쳐놓고는, 밖으로ㆍ밖으로 부단히 쫓아다니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론적으로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첫 째는 이론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이해가 돼야 됩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이해가 되고 차츰차츰 느껴져야 됩니다. ‘아~ 정말 그렇구나ㆍ그렇구나!’하고 느껴져야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 재수 있으면 눈에 사물을 보듯이 확~~ 보는 겁니다. 사물 보듯이 그렇게 보면 그것 見成. 그러는 겁니다. 그런 날이 온다고요.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도 아주 소득이 많아요. 왜? 돌아다닐 필요가 없으니까요. 친구와 안 만나면 되니까요. 어? 나한테 어마어마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 보물하고 하루 종일 놀아도 심심치 않아요. 그 보물 가지고 하루 종일 놀아도 안 심심하고, 부를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는데 밖에 나가서 괜히 돈 쓸 일이 없잖아요.
시간 낭비할 일이 없는 겁니다. 괜히 돌아다니면
數飛之鳥(삭비지조)는 必有羅網之우(필유나망지우)라고. ([자경문에는 忽有羅網之殃(홀유라망지앙)]이라고 했는데 스님은 필유나망지우라고 하십니다. 굳이 이런 것을 쓰는 이유는 지금 즉시는 괜찮은데 몇 년이 지나서 이의를 제기하는 도류들이 있어서...)
자주 나는 새는 반드시 그물에 걸릴 우환이 있다. 하하하 그래 이 불법은요? 여러 가지로 삶을 참 편리하게 해줍니다. 삶을 편리하게... 불법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면 ‘오늘 무슨 꺼리 없을까?’하고 기다리고, ‘이 친구는 왜 오늘 여태 전화도 안 오나?’하고 못 참고 나중에는 지가합니다. 그런 일이 싹없어지고 그만 조용해집니다. 무사시 귀인입니다. 일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일 없어도 조용하고 편한 겁니다. 아주 넉넉해요. 그만 마음이 아주 넉넉해요. 이 도리 하나 아니까요. 이 도리 하나 아니까 그만 마음이 아주 넉넉해요. 정 심심하다 싶으면 임제록이나 펴놓고 한 번 더듬어 봐요. 그리고 한 번 써 보기도 하고요. 여기 한글 음 다 달아놨으니까 읽기도 좋아요.
與麽說 祇爲道流가 一切馳求心을 不能歇하야
上他古人閑機境(상타고인한기경)이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뭔 말인가 하니 다른 옛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나 다른 훌륭한 분들의 부질없는 경계 = 機境. 부질없는 기경. 예를 들어서 누가 어떻게 해서 깨달았다. 뭐 “부처님이 꽃을 들어보였다ㆍ가섭이 미소했다.” ← 이런 이야기에 올라가가지고 부질없이 그것만 쫓아다닌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 밑에 이것도 아주 무서운 소리, 이것은 정말 저는 책임 없습니다.
임제스님 법문입니다. 정말 저는 책임 없습니다. 뭔 소리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가?
道流야, 여러 도 닦는 벗들이여,
取山僧見處(취산승견처)하면, 산승의 견해를 취한다면
坐斷報化佛頭(좌단보화불두)라.
보신ㆍ화신ㆍ부처님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일이다.
내 소견이라면, 그래 임제스님 책임이지 저는 책임 없습니다.
보신ㆍ화신ㆍ부처님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일이다.
十地滿心(십지만심)은 猶如客作兒(유여객작아)요.
十地滿心 = 십신ㆍ십주ㆍ십행ㆍ십회향ㆍ십지, 十地에 올라가면 바로 등각ㆍ묘각인데요. 수행이 가득 차있을 때, 교리 상으로 수행이 최고 지위에 다다랐을 때, 그것을 十地滿心. 그래요. 십지보살” 하면 원효스님도 흔히 팔지보살 이라고 그래요. 八地밖에 안 된다고 그래요. 원효스님보다 훨씬 더 높은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도 뭐라고요? 猶如客作兒다. 客作兒. 이것은 요즘 노숙자.역전에 가면 많이 있는 사람 노숙자. 또 다른 말로 하면 전국구. 하하하하하하하 아~, 전국구는 다른 사람들이네요. 아~, 요즘 전국구는 자가용 끌고 다니면서 아주 고급으로 살지요. 하하하하하하하
客作兒라는 말은 노숙자라는 말입니다.
十地滿心. 10지 보살도 노숙자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이것까지는 아직 저는 아직 괜찮아요.
等妙二覺(등묘이각)은, 등각ㆍ묘각,
이 묘각은 완전히 부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등각은 바로 부처님직전이고요. 등각ㆍ묘각 그 바로 부처자리는 뭐라고요?
擔枷鎖漢(담가쇄한)이요. 枷鎖를 짊어진 놈이다.
擔枷는 뭡니까? 죄인. 귀양살이 갈 때 목에 칼ㆍ손에 수갑ㆍ발에 오랏줄 매고, 목에ㆍ팔에ㆍ발에, 전부 칼과 수갑과 오랏줄을 다 매고, 살아가는 바로 그 놈이 등각ㆍ묘각이다. 이 세상에 제일 죄 많은 사람. 어지간한 죄 있는 사람은 枷鎖를, 목에 칼 안 채웁니다. 사형 언도 받은 사람이 목에 칼을 채우지요. 그 정도 정말 이 세상에서 ‘쓸 데 없는 놈이다.’ 이런 뜻이지요. 그 다음에
羅漢辟支(나한벽지)는, 나한이나 벽지불은
猶如厠穢(유여측예)라. 똥통의 똥이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똥통의 똥이다 = 厠穢 = 화장실의 똥이다. 말입니다.
임제스님 말씀이지, 저는 책임 없습니다. 하하
菩提涅槃(보리열반)은, 하~~ 꿈에도 그리는 보리와 열반.
如繫驢橛(여계려궐)이다. 당나귀를 옭아매는 말뚝이다.
우리는 그 말뚝에 매여가지고 옴짝달싹 못하고 있습니다. “열반” 하면 좋아해요. “보리” 하면 얼마나 좋아 한다고 보리... 보리라는 말 넣어가지고 불명 많지요. 여기도 아까 보니 보리월도 왔대요.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이 말은 옴짝달싹 못하게 당나귀를 매어두는 말뚝이라고요. 전부 거기에 매여 있는 겁니다.
이런 말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보신ㆍ화신ㆍ십지보살ㆍ등각ㆍ묘각ㆍ아라한ㆍ벽지불ㆍ보리ㆍ열반. 아~~ 근사한거잖아요. 불교의 최고급용어들입니다. 최고 고급용어들. 그런데 여기에 빠지고 이것이 좋고 그것을 연구한다고 하~~ 자나 깨나 그것 한 것 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은 내가 아니다ㆍ남이다.” 말입니다. 설사 살아있는 부처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십지보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살아있는 부처가 온다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닌데 그것 무슨 그렇게 중요하냐? 이겁니다. 불교는 자비성을 일깨워 주는 것. 진정자기의 가치. 진정자기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 불교고ㆍ더욱 선불교고ㆍ더욱 더 이 임제스님의 사상이고ㆍ임제스님의 가르침입니다. 임제스님의 가르침은 자나 깨나 그겁니다.
나 밖의 다른 어떤 위대한 존재는 인정 않습니다.
왜 거기에 팔려서 사느냐? 진짜 보물은 자기 자신인데, 자기 보물을 잘 챙겨야지 왜?... 무슨 석가ㆍ달마라 하더라도 석가ㆍ달마지 네하고 무슨 상관이냐? 석가달마면 석가달마지 네하고 무슨 상관이냐? 여기 等妙二覺, 등각ㆍ묘각. 보신ㆍ화신부처님. 十地滿心. 보살. 이것은 그냥 남이다ㆍ남의 일이다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노숙자라 그랬잖아요. 노숙자. 역전에 많이 디글디글 끓는 그 아주, 한 달 계속 목욕도 한번 못하고, 머리도 못 감는 그 노숙자. 완전히 술에 찌들려가지고 정신 거의 다 나가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런 상황에 사는 그런 인간이라고 여기다 해놨습니다.
자~ 이런 데서 우리가 확 벗어나버리고, 완전히 뛰어 넘어가서 정말 내 자신의 소중함. 진정 살아있는 부처에 뭔가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何以如此(하이여차)오?
어째서 그렇게 취급하는가? 왜 그렇게 취급하는가?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지위도류부달삼지겁공)일새.
그것은 다만 道流들, 도 닦는 여러 벗들이 3아승지겁이 空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세.
所以로 有此障礙(소이유차장애)니라.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이 장애로 남아있다. 3아승지겁 동안 열심히 수행해가지고 십신ㆍ십주ㆍ십행ㆍ십지ㆍ십회향, 이렇게 점차ㆍ점차 닦아 올라가야 뭐가 되는 줄 알고 있는데, 시간이 없다 말입니다. 시간상 없다. 3아승지겁은 본래 공한 겁니다. 본래 공한 자리인데 그것을 모르고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전부 장애로 남아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행해 간다하더라도 行行本處(행행본처)입니다.
행하고ㆍ행하고 아무리 간다ㆍ간다, 가더라도 본래의 자리입니다ㆍ본래의 자리입니다. 至至發處(지지발처)라. 아무리 수행을 많이 닦고ㆍ닦고, 3아승지겁을 돌고 돌아서 어디에 도달했다 합시다. 至至發處, 도달하고 도달했다하더라도 출발한 그 장소입니다. 내 마음 자리 거기서 그냥 맴도는 것이지요.
行行本處요 至至發處라. 기가 막힌 말입니다. 행하고 행해도 본래의 자리더라. 도착하고 도착해도 출발한 그 장소더라. 三祇劫이 없는 겁니다. 3아승지겁...
수행을 잘 해가지고 “도인이 됐다ㆍ큰스님이 됐다ㆍ아라한이 됐다ㆍ벽지불이 됐다ㆍ뭐가 됐다.” 그것은 전부 방편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런 내용들... 이것도 아라한ㆍ벽지불ㆍ등각ㆍ묘각ㆍ十地滿心ㆍ보신ㆍ화신, 이것 전부 그냥 방편으로 나열해 놓은 겁니다. 그럼 뭐냐? 사람이라고 하는 것 하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사람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동등합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진정한 사람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큰스님이니ㆍ작은 스님이니, 남자니ㆍ여자니,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 자주성. 바로 그 점을 여기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냥 일 좋아 하는 사람들이 명칭을 이렇게 만들어서, 아주 근사한 명칭을 만들어서 나열해 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경전에 별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것 전부 그것 가짜입니다. 전부 가짜입니다. 우리는 그 가짜에 빠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가짜라도 사람을 이렇게 어떤 방편으로 교화하고 제도 하는 데는 또 필요한 존재입니다. 필요한 방편이기도 해요. 그 근기에는 그 방편이 필요해요. 그 근기에는 그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방편을 쓰는 겁니다. 그러나 임제록을 앞에 놓고는 이것을 다 깨놓고 이야기해야 됩니다. 임제록을 앞에 놓고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임제록에 분명히 이렇게 해놓았는데 딴 소리 못 하는 겁니다. 이것이 진실이잖아요.
이것이 實法입니다. 실다운 법입니다.
若是眞正道人(약시진정도인)인댄,
眞正 = 참답고 바른 도인이라고 한다면,
終不如是(종불여시)니, 마침내 이와 같지 않다.
그러니까 그런데 안 속는다 이 말입니다. 진짜 도인이라면 그런 소리 안 써먹고 누가 뭐라고 어떻다하더라도, 뭐 신기한 것이 있고, 요즘도 불교TV 같은데 보면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서 뭐 즉심 성불이라고 안 쓰고, 즉심 성취라고 이러더라고요. “즉심 성취” 바로 그 자리에서 성취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미혹시키는 겁니다. 즉심 성취가 뭘 성취하는 모르겠어요.
그냥 사람입니다. 처음이나 끝이나 똑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 알아야 됩니다. 겁낼 것 없습니다.
무슨 도인이다ㆍ무슨 큰스님이다ㆍ무슨 수행을 얼마나 했다ㆍ몇 년 닦았다. 그것 이 임제록의 견해에서 보면ㆍ임제록의 견해에서 보면 그것 정말 허망한 겁니다. 참으로 허망한 것입니다. 그냥 사람입니다. 똑 같은 사람입니다. 무수한 선배스님들. 저~ 기 옛날에 열반 하셨으니까 이젠 괜찮지요. 동산스님ㆍ효봉스님 살았을 때 제가 다 한 철씩 모시고 살았거든요. 전설 같은,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전설 같은 그런 훌륭한 스님들, 동산스님ㆍ효봉스님ㆍ구산스님ㆍ경봉스님ㆍ향곡스님. 성철 스님 같은 이들은 그 아래 훨씬 그 밑이고요. 춘성스님ㆍ전강스님, 다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냥 사람입니다. 똑 같은 사람입니다ㆍ똑 같은 사람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전설과 같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인데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그냥 사람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사람인데 수행을 좋아해요. 수행하고, 아주 철저히 수행하고 공부하면서 사는 것이 그 스님의 삶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 사는 방법이 다 다르지요? 사는 방법이 다 달라요. 수행이 인연이 돼서 수행하면서 사는 사람은 수행하고, 참선할 사람은 참선하고, 염불할 사람은 염불하고, 간경할 사람은 간경하고, 그냥 각자 사는 방법입니다. 사는 형태가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냥 똑 같은 사람입니다. 똑 같은 금가지고 불상도 만들고ㆍ보살상도 만들고ㆍ아라한상도 만들고ㆍ보통 범부 중생상도 만들고ㆍ나한상도 만들고ㆍ무슨 코끼리도 만들고ㆍ무슨 짐승도 만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불상을 조성해 놓고, 또 탱화를 조성해 놓고 그 때 딱 중요한 법문 한 가지하는 겁니다.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
전단나무를 가지고 중생의 모습도 만들고ㆍ부처의 모습도 만들고,
及與菩薩羅漢相(급여보살나한상). 보살상도 만들고ㆍ나한상도 만들고
萬面千頭雖各異(만면천두수각이)라.
만 가지 얼굴, 천 가지 얼굴들이 모두 다 각각 달라요.
若聞薰氣一般香(약문훈기일반향)이라.
그런데 그 향기를 맡아보면, 전단나무가지고 만들었으니까 불상을 만들어도 전단나무향기가 나고, 아니면 삐져서 내버리는, 저기 쓰레기통에 내버려 버린 그 전단나무 나무 조각도 똑 같이 전단향기가 나는 겁니다. 불상에서만 향기가 나는 것 아닙니다. 버려버린 나무 조각에서도 전단향기가난다. 중생 모습 만들어도 거기도 전단향기가난다. 생선 모습을 만들어도 생선냄새 안 나요. 전단향기가나지요. 코끼리모습 만들어도 코끼리냄새 안 나고 전단향기가난다. 전부 똑 같은 전단이기 때문에요.
우리 본래 소재가ㆍ우리소재가 전부 부처기 때문에요.
부처라고 하는 소재를 가지고, 이런 모습도 만들고 저런 모습도 만들고, 이렇게도 살게 하고 저렇게도 살게 하고, 각자 인연 따라서 업 따라서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는 모습이 다를 뿐이지 사실은 전부 부처다. 부처로써 이렇게 저렇게 사는 겁니다. 그래 사람이 그대로 부처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든지 부처라고 하든지 딱 두 마디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냥“부처님ㆍ부처님” 이렇게 하지만, 그래서 저는 늘 주장이 人佛思想ㆍ인불사상.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사상ㆍ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하는 사상, 그것밖에 달리 없습니다.
수십 년. 50년ㆍ60년 참선했으면 부처가 열 번도 되고 남았습니다.
석가모니는 6년 했잖아요. 6년 했지만 그것이 고행할 것이 아니다. 포기했잖아요. 6년간 고행한 것 무효라고 말씀하셨어요. “6년간 그 고행은 무효다.” 절대 고행에 치우치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것 가지고 부처님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임제록을 못 만났으면 모르지만 이렇게 만났을 때, 최 상승불교ㆍ최 명품불교 안목에 대해서 확실하게 견해를 우리가 세울 필요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견해” 이것 중요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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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