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이 되자 나는 열세살로 6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대부분 남루한 옷차림에 보리밥을 먹었기에 빈부의 차가 별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졸업반이 되니 학급에서 중학 입시준비를 위한 과외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가난한 탓에 중학교를 갈 형편이 못 되었기에 과외수업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학급 60명중 나를 포함 십여명만이 과외수업을 받지 않았기에 낙오병 같았다.
정규수업인 6교시만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식은 보리밥으로 배를 채우고는 밭에 나가 호미질을 하였다.
해질녘이 되면 반 아이들이 과외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모습이 멀리 내려다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그 무렵 네 살 손위의 누나가 우울증에 걸려 방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나는 남학생을 제치고 6년 내내 일등을 차지 하였지만 중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으니
우울증에 걸릴만도 하였다.
나도 가정형편 때문에 우울했지만 누나에 이어 나까지 환자가 될수는 없었기에 나는 호미로
밭을 매고 소를 먹이는 일에 충실하였다.
그해 12월에 전국적으로 중학입시가 있었다.
아산의 영인중학교는 삼개 면에서 학생들이 모였기에 경쟁률이 2대1이나 되었다.
게다가 초등학교끼리의 합격자수 경쟁도 치열하였다.
내가 다니던 영인국민학교는 나를 학교 대표선수로 뽑았다.
입시를 위한 과외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적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었다.
담임은 내가 좋은 성적을 받는다면 누군가가 입학금을 대납해줄 것이라며 격려를 해 주었다.
나는 전체 2등으로 합격하여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중학시절엔 교내 육상부에 들었다.
육상부 활동을 하면 학교에서 간식으로 강냉이 죽을 얻어 먹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운동을 하면서도 우등생이었으니 공부에 소질은 꽤 있는 편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어느날 명문고교생 선배가 찾아와 우리에게 희망찬 충고를 해 주었다.
그는 당시 인천의 제물포 고교에 다녔는데 자신의 고교가 매년 서울대를 백명가까이나 합격시키는 명문고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영인중학교 10년 역사에 재수를 않고 당년에 명문고에 합격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나도 그 처럼 명문고에 가고 싶었지만 실력은 물론 가정형편상 진학이 불가능해 보었다.
그런데 그 즈음 온양 큰댁에서 큰 아버님이 다니러 오셨다.
큰 아버님은 장녀가 인천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으니 나도 중학을 졸업하면 인천에 가 사촌누님댁에서 공장에 다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큰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무릎을 탁 쳤다.
사촌누님댁에서 내게 침식을 제공한다면 신문배달을 해서라도 고교 진학이 가능할듯 하였다.
아버지는 북해도 탄광에 징용을 가 받은 임금을 어머니 대신 큰 아버지에게 모두 맡길 정도로 형제간의 우애가 각별하였다.
따라서 큰 아버지의 딸인 사촌 누나는 내게 친 누나와 다름이 없었다.
목표가 일단 정해지니 나는 그때부터 공부에 매진할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운동부에서도 탈퇴하고 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 흔한 과외공부 한번 받은적이 없었지만 나는 제물포 고등학교에 당당히 합격을 하였다.
첫댓글 자~~~아.
2편이 기대 됩니다......................!
사실에 근접한 내용입니다, 영인면도 나오고...
누구의 그때 그시절 인지요
소사범 본인 이야기는 아닌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치 실화 같아요.
몇편 연속 게제할게요.
많은 관람바래요.
<밭메고 소먹이고,,,>내용을 보면 미국의 조병국 얘기 같기도 하고,,,
<공부 잘하고,,,>를 보면 소 사범 얘기 같고,,???
좋게 보아주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