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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 기도와 치유-이동원 목사(지구촌 교회)
목회 간증에서부터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제 초기 신앙생활에 영향을 끼친 분들은 복음주의적 학생 운동 기관에서 파송되어 온 선교사들입니다. 제 초기 신앙의 컬러가 어떤 복음주의적 신앙의 맥락에서 받아들였던지, 교회의 외곽 선교 기관에서 받았던 영향으로 제 신앙의 틀이 형성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라든지 제자 훈련, QT, 조금 나중에 관심을 갖게 된 강해 설교 이런 방면에 일찍 눈을 뜨고 그런 방면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제게는 늘 기도가 숙제였습니다. 기도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기도에 대해서 제가 설교를 많이 했지만 “내가 정말 기도를 아는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는 그 대답이 언제나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5~16년 전에 제가 워싱턴 D.C 근교에서 이민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 제가 그 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한 1년쯤 지났을 때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때 초창기에 거기 부임하면서부터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안수집사님이셨는데 다른 교단으로 말하면 장로님과 같은 그런 역할을 했던 분입니다. 닥터 최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밤 12시가 넘었는데 그분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목사님! 큰일났습니다. 제 아내가 수술중인데 피가 멎지 않습니다.” 고지혈증 같은 것으로 혈관 확장 수술을 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 사모님은 저를 개인적으로 너무 아껴 주시고 목회에 큰 힘이 되어 주셨던, 너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아주 귀한 평신도였는데, 그분이 수술을 받다가 피라 안 멎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부가 다 의사였습니다. 그 남편이 저한테 “목사님,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제 아내가 힘들 것 같아요.” 순간적으로 암담했습니다. 제가 자다가 깨서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과 함께 속으로 ‘기도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해야지.’하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기도의 전문가로 자처할 만한 사람도 못되고, 기도에 관해서는 항상 유치원생과 같고, 기도의 그 광대한 대양을 생각할 때 저는 해안가에서 조금 기도를 알려고 몸부림치는 정도인데, 너무 기도에 대해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까?’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기도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신실한 다른 분들이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제가 그때 우리교회에서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체인이 있는 유일한 조직, 보통 교회의 당회와 같은 조직인데 우리 교회에 실행위원회라는 평신도 리더들의 모임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항상 전화로 연락되도록 조직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 그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그런 체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 그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야지.’하고 제가 첫 번째 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 최 집사님의 사모님이 수술을 받다가 피가 멎지 않는다고 하는데, 집사님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릎 꿇고 내외분이 기도 좀 해주세요. 미세스 최 집사님을 위해 좀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집사님! 부탁이 있는데, 집사님 다음 번 연락하실 분에게 지금 당장 연락해서 지금 같이 기도하자고 전화 체인을 좀 돌려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봐야겠다, 내가 그 곁에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밤 12시가 넘었는데 제 아내를 깨워서 같이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나와 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워싱턴에 온지 1년이 조금 넘었기 때문에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조지타운 병원이니까 대충 어디 있을 것이라는 감이 잡혔기 때문에 운전을 하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운전을 하면 지리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방황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이 가진 최대의 은사는 방황의 은사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전혀 헤매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대충 찾아갔는데도 정확하게 30뿐 만에 그 병원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밤 1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습니다.
3층 수술실 앞에 올라갔더니 그 남편 되시는 최 집사님이 서 있다가 환한 얼굴로, 빛나는 얼굴로 저희 부부의 손을 잡더니 “목사님, 할렐루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은 전혀 “할렐루야”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할렐루야와는 상관없는, 굉장히 무표정한 분입니다. 그래도 속은 따뜻한 분인데, “할렐루야”를 하시더니, “목사님, 15분 전에 극적으로 피가 멈췄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확신을 도저히 없고, ‘우리 집사님들이 열심히 기도하니까 우리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셔서 정말 기도에 응답하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위기의 순간에 단 한 번 교회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같이 돌아가는 시스템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 어떤 교인들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삶에서 부딪치는 그 수많은 위기, 고통, 아픔 등 이런 것들을 교회가 끌어안고 날마다 기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교회 안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때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렴풋이 들었던 단어가 왔다갔다하는데 소위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뭘까?’ 이런 생각만 하면서 다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에 제가 미국에서 섬기던 그 교회가 건축을 했습니다. 저는 늘 이 교회당 건축은 목회에 있어서 필요악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3년에 걸쳐서 건축 프로젝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생각했던 교육 목회에 근거한 이미지를 가진 교회 빌딩, 교실 80개를 갖춘, 넉넉한 교육 환경을 가진 교회당으로서의 건축 프로젝트가 3년 만에 이민 교회에서 끝난 것입니다. 끝나고 나니까 몸과 마음이 아주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목회가 이렇게 건물만 짓다가 그만두는 것인가?’하는 생각도 들고 제 안에 어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저수지가 메마른 것처럼 마음속이 고갈되어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내가 부러지거나 무슨 위기가 올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저에게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안식년을 요청했습니다. 1년 모두 안식년으로 채울 용기는 없어서 6개월 안식년을 얻었습니다.
제가 안식년을 가질 때 몇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가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배우고 싶다. 다시 기도하고 싶다.’ 우스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한지 거의 15년이 되었는데 ‘내가 기도를 모르지 않는가? 기도를 다시 배우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 기도 목회를 잘 하는 교회가 어딘지 리서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제 아내와 함께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특별히 기도 사역을 잘 하는 교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은혜 좀 받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은혜를 안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지금까지 어쩌면 틀을 가지고 해왔던 목회 이외에 다른 영역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소중히 여겼던 목회에 대해서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혹시 어떤 광대한 기도 사역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성령 사역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가 성장한 목회가 되다 보니까 누구한테 가서 기도 받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국 교회에 가면 아무도 모릅니다. 이동원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목사님들을 만나면 기도 좀 해달라고 솔직히 말하고 나도 방언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미국 사람한테 안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안수 받으면, 제가 제일 잘하는 게 한국말이니까 열심히 한국말로 기도하면 그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방언하는 줄 알고 영어로 “let's go!” 계속 하라고 그럽니다. 사실은 어떤 갈증 때문에, 제 마음 안에 있는 어떤 갈증 때문에 기도도 받고 했는데 해결 받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제 아내와 같이 가서 기도하면 은혜가 오다가 옆으로 다 갑니다. 제 아내는 별별 은사도 다 받고, 이상한 말도 하고, 통역도 하고, 뭐도 보인다고 하고...... 그런데 저는 눈만 감으면 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도 세미나에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가시적으로 경험되는 어떤 사건, 제가 그렇게 목말라 하던 것에 대한 체험을 직접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나서 좀 이상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6개월 동안에 제가 지금까지 목회했던 모든 시간보다도 더 많은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가시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초자연적인, 어떤 경험적인 사건이 내 안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안에 고갈되었던 마음의 저수지가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다시 교회에 돌아가면 교인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고 싶다. 교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기도해 주겠다. 많이 기도해 주고 싶다. 제가 기도해 주고 싶은 교인들을 위해서......’
빨리 교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빨리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아무개 이름이 막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한 교인들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고통받고 아파하고 이혼하고 또 이민생활에 갈증을 느끼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무개 집사, 아무개 장로, 아무개 권사 등 이런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이 왔다갔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불쌍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돌아가면 기도해 주자.’ 그러면서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 가지 변화를 일으킨 것이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너무너무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끝나고 나서 기도받고 싶은 사람은 남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교 딱 끝나면 뒤에 가서 정중하게 악수하던 사람이 앞에 앉아서 기도받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하고 기도를 하니까 이상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제 마음이 너무너무 기도해 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2주, 3주, 4주가 지나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도 나았고, 마음의 고통도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도만 했을 뿐 그런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도를 통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상했습니다. 소문이 나니까 더 많은 사람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저녁 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주면서 제 마음이 교인들과 동일시되어 그들의 마음의 고통을 제 고통으로 짊어지고 함께 기도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교회 안의 중보기도 사역을 하나의 사역으로서, ministry로 정착할 수 있을까?’생각하고 교회 안에 중보기도 사역 연구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잘하고 있는 미국 교회에 다시 팀을 파송하여 연구를 시켰습니다.
크게 두 개의 모델이 나왔습니다. 한 모델은 제가 속해 있는 교단인 남침례교 모델인데 뜻밖에 제가 속한 교단을 보니까 중보기도를 잘 하는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교회는 24시간을 중보기도하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회를 자랑하지만 미국에는 교회에서 하루종일 24시간 교인들을 위한, 기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의 잘 조직된 행정에 의해서,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24시간 교인들을 위해 매일 기도 제목을 조직적으로 받아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하는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오순절 교회들이 모델인데 이것은 갑자기 기도하자고 모여서 하는 것으로서 조직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모델입니다.
이 두 가지 모델을 종합해서 한국 교회의 실정에 맞는 중보기도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에도 열심히 전도했죠? 그런데 요즘 일어나고 있는 전도 폭발 클리닉 같은 운동은 교회 안에서 전도팀을 조직화해서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전도하게 만드는 운동입니다. 이처럼 중보기도 사역을 조직화시켜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중보기도하게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중보기도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많은 복을 경험했습니다. 제 목회가 커버하지 못했던 한 영역이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숙제, 즉 제자 훈련, 성경공부의 어떤 한계 같은 것이 이 기도 사역과 더불어 근거가, 기초가 형성되어 가는 모습들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 강렬하게, 그 사역을 교회 안에서 시작한 이래로 제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 중의 하나가 치료하시는 하나님, ‘야훼 라파’ 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신학의 어떤 중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제가 초창기에 신학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신학이었는데, 그분들의 신학을 다시 점검해 보니깐 은사에 관한, 은사중단주의의 입장이었습니다. 은사중단주의의 입장이란 “초대 교회에는 은사가 있었지만 성경이라는 정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더 이상 이런 은사들은 유효하지 않다.” 하는 입장에 영항을 받고 있는데 ‘내가 이러한 영항을 받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열린 안목으로 성경을 보니, 똑같은 성경이지만 저에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제게 이러한 틀을 깨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전까지 제가 굳게 믿고 있었던 은사중단주의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성경적 근거 중의 하나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이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 모든 것이 폐하리라.” 그 온전한 것을 지금까지 어떤 성경의 완성, 정경의 완성, 소위 canon의 완성과 함께 초대교회에서 유효했던 모든 은사들이 이제는 폐기되었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온전한 것이 과연 정경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가 분명히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저 자신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더 많은 성경학자들이 지지하는 것처럼 역시 온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건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사건, 그 사건이 오기 전까지 모든 은사들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제 안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별히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라는 것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오스카쿨만이 이래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에 관해서 가장 전통적인 중요한 정의 가운데 하나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러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already but not yet)’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지만 그 분이 그의 권능을 드러내실 때에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기 시작했지만, 주님의 재림까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이미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역동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나라, 그 개념을 성경 안에서 다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치료함을 받았을 때 “너희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때, 즉 예수님이 구체적인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통치하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치유 사역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장 좋은 치유는 육체의 병 치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병 치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오늘날 역사의 치유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치유 사역이 결코 지금 이 현실 안에서 완전한 것은 아닐지라도 부분적인 치료는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을 말해 주는 징후로, 싸인(Sign)으로 지금도 그 치유 사역은 정당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 사역을 향해서 신학적으로 닫혀 있었던 제 마음을 열기 시작한 일종의 신학적인 하나의 배경이었고 반성이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니까 ‘치유’란 단어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3중 사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바울도 똑같이 ‘선포하고 가르치고’라는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고치다’라는 단어 대신에 ‘권고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왜 바울은 고친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권고한다는 단어를 썼을까요? 그것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치유라는 개념을 확장시킨 것이고, 육체의 치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치유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요즘 와서 내적 치유(inner's healing)라는 단어를 많이 쓰지만 가장 오래된 개념은 영혼의 치유입니다. ‘soul's healing’이라는 단어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교부 시대를 거쳐 중세기로 올 때까지 가장 많이 쓰였던 개념은 soul's healing이었습니다. ‘바울은 폭 넓게 이 모든 것을 권고라는 단어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목표에서 이 치유 사역이 정말 본격화될 필요가 있다. 치유 사역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제가 중보기도라는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경험의 배경이고, 또 신학적인 배경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매우 새롭게 다가왔던 성경 본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12장이었습니다.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두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본문 3~4절에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라고 하였습니다. 방금 전에 야고보가 죽었으니까 아마 틀림없이 베드로도 ‘나도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4절)
또 5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본문에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6절)
어떻게 그 상황에서 잘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베드로가 잠 중독 환자였거나, 아주 민감성이 없는 둔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엄청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든가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잠잘 수 있습니까? 내일이면 사형 집행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절대 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베드로는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6절 이하에 우리가 잘 아는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석방하시고 풀어주시고 베드로가 당당하게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서 감옥을 걸어나오는 기적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이때 제 눈에 들어온 구절이 5절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저는 이 말씀이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드라마의 열쇠가 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교회가 기도했다.’, 그 다음에 ‘간절히 기도했다.’, 그 다음에 ‘지속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응답의 현장이 확인되는 순간까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적 중보기도, 특별히 개인적 중보기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지만- 교회가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치유 사역을 계속 하고 계십니까? 저는 지금도 주님이 교회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행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재정립을 도와 준 또 하나의 어떤 교리적인 각성이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 옛날에 신학교에 다닐 때 아득하게 교회의 정의 가운데 배웠던 한 대목이 있었는데 제 사전에서, 제 생각 속에서, 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파묻어 두었던 교회에 대한 정의 하나가 제가 치유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제 안에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본래 처음 이 정의를 내렸던 사람이라고 알려졌는데, 그가 내린 교회에 관한 정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연장이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입술을 열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 아픈 사람을 자기의 발걸음으로 찾아가셨고, 그들의 손을 잡으셨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계속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자신이 하시던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자신의 몸을 남겨두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흔하게 묻고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신학자들이, 소위 개혁의 비전을 가져왔던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어 왔던 중요한 표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교회 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시던 그 일을 그대로 계속해야 됩니다. 바로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를 세워 주시고, 또 이 우주적 교회의 역사가 이 땅 안에서 계속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라면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연장인 것입니다. 즉 교회가 주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시던 그 일을 그대로 계속할 수 있다면 동일한 복음, 변함없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gospel)을 증거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또 하나 주님이 하셨던 그일 그대로 불쌍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폭을 더 넓혀서 개개인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병든 역사를 짊어지고, 고통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통의 역사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서 교회가 기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하고자 하셨던 그 일을 오늘의 교회가 계속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치유의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이제 실제적인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통해서 그 치유의 역사를 지금도 계속하기를 원하신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요?
첫째,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 대답을 야고보서 5장 14절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나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장로님들이 제일 좋아하시는 구절입니다. 저는 여기서 장로가 꼭 교회 직책상의 장로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즉 교회 지도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교회 지도자를 말합니다. “병든자가 있느냐? 저는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미 신약시대에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에 수다한, 허다한 의술이 발전해 있었고 의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렇다고 결코 성경이 의학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초자연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병든자들이 있느냐 저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하라.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했습니다. 만약 교회의 리더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병 고침에 대한 어떤 능력과 기대가 없었다면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제가 이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한 후부터 저에게 일어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발견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은사는 말씀의 은사다.’ 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이 와서 기도해 달라면 기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이 사람은 절대로 낫지 않는다. 단 예의 바르게 열심히 기도하겠다.’
제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는 말씀의 은사지, 치유의 은사가 아니니까 아마 나를 통해서는 절대 사람들이 낫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이 바뀐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교회의 지도자로 부르셨다면, 치유의 은사와 상관없이 교회는 치유의 공동체이고 치유의 책임이 있다면 교회의 리더인 나에게 하나님께서 치유의 권세를 맡기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교회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러나 저는 비단 목회 지도자, 목사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 은사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이런 은사 있는 사람들을 쓰셔서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은사 있는 사람들이 교회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의 사역이 자리를 잡는다면 교회의 검증과 교회 지도자의 감독 아래서 이러한 은사 있는 사람들의 은사가 가장 효과적으로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치유하신다는 말씀의 첫 번째 의미는 교회 지도자를 통해서,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 특별히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도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행하신다는 말은 지도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기도를 믿는다면, 또 믿음의 기도를 믿는다면 우리가 믿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도자의 은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전도자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인들 가운데도 전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워싱턴에 있을 때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전도를 참 잘 하셨습니다. 이분을 만나면 거의 안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전도해 달라고 부탁하면 저는 그분에게 다시 부탁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믿게 됩니다. 그에게는 탁월한 전도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그분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집사로도 얼마든지 이렇게 사역할 수 있지만 혹시 목사가 되면 더 효과적인 전도 사역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목사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전도를 아주 많이 한다고 하십니다. 하여튼 이분한테 걸리면 전도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놀라운 전도자로서의 설교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전도의 은사를 주셨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만 전도를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전도하면 전도가 잘 됩니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입니다. 더 효율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라는 명령은 지상명령이라고 믿습니다. 누구나 전도를 해야 됩니다. 치유 사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면 치유의 효율적인 은사의 나타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쳤다면, 그리고 우리가 기도를 믿는다면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약 5:15)
저는 이것이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특별히 야고보서 5장에서 믿음의 기도를 강조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없이도 역사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효율적인 치유의 역사를 행하신다고 믿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건이 묘사될 때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 싸고 무리가 예수님을 밀고 있었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갔고 막 비비고 붐비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변에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당신의 옷자락을 터치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어떤 질문을 던지셨습니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리고 그 여인을 향하여 어떻게 선포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여인의 터치,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그것은 다른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이 호기심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과 달랐습니다. 이 여인은 ‘이분이야, 틀림없이 이분은 나를 고치실 수 있어. 이분은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자기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정말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구세주요, 자신의 소망이요, 자신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터치하는 그 순간 믿음을 통해서 주님 안에 있던 놀라운 신성의 능력이 흘러 들어가 이 여인은 고쳤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지금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고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셋째, 타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저는 세 번째 사실에 여러분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하시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타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믿음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맹목적 치유 사역 속에 뛰어든 많은 사람 가운데는 기도하다가 병이 낫지 않으면,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믿음이 없어서 안 나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못 들어 보았습니다. 상대방이 기도가 부족해서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본인의 믿음과 상관없이도 치유의 역사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타난 중풍병자의 사례를 보십시오. 이 중풍병자를 누가 데리고 예수님 앞에 왔습니까?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들’이란 누구입니까? 아픈 자, 병든 당사자가 아니라 그 병든 자를 데리고 예수님 앞에 왔던 ‘네 명의 친구들’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가 사함 받았다. 네가 이제 들고 일어나서 걸어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믿음과 상관없는 주변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면, 그리고 예수님이 터치하면, 그리고 주님의 능력이라면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그 친구들이 믿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 장관의 아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좀 고쳐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아픈 아들이 있는 현장까지 주님은 가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염려말고 가라.” 라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누가 믿었습니까? 병든 자 본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믿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왜 중요합니까?
자, 우리 주변의 다른 성도들이 아파 고통받고 있습니다. 본인이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기력조차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해 줄 수 있습니까? 그를 사랑하는,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주변의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조직적으로 날마다 기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교회 내에서 중보기도 사역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내가 아플 때 전화 한 통만 하면, 기도 제목을 접수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아니, 때로는 본인이 기도할 기력조차 느끼지 못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이 중보기도의 사역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치유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치유의 능력을 행하십니까?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서 혹은 은사가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통해서, 또는 우리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또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스템이 있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를 한두 번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사역적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중보기도가 중요합니다(행 12장 1 ~ 12절의 사례).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사도행전 12장 5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제 꼼짝없이 내일이면 붙잡혀 나가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절대절명의 위기의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기도했습니까? 교회가 기도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5절)
중요한 것은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교회가 기도했다고 해서 “이 사람이 문제를 내놓고 전 교인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소집되어 다같이 기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교인이 다 모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기도회는 개인적인 기도회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정말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고와 인생의 모든 염려의 짐을 지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하셨는데, 2천년 전에만 이 초청을 하셨던 분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날마다 짐을 져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짐을 짊어져 주십니다. 어떻게 우리의 짐을 짊어지실 수가 있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저는 오늘 교회가 아파하고 병든 사람들의 문제의 짐을 구체적으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늘 기도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기도에는 개인의 기도와는 다른 특별한 응답의 약속이 있다고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응답하시지만,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거기에는 특별한 기도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 제가 그 성서적 근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마태복음 18장 18~20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이지만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너희 가운데 나의 임재를 베풀겠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임재를 ‘아주 특별한 임재’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임재, 그리고 특별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세 사람은 그냥 어쩌다 모인 두세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은 ‘교회’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는데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과연 교회 공동체가 존재했느냐?”라는 논란은 있지만 어떤 원시적인 신약교회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시 배경과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15절부터 시작됩니다. 15~16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일대 일로 상대해서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다.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 증인 데리고 와서 권고하라.”고 한 후 그 다음 17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 앞에 보고하라.” 그 다음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두세 사람은 그냥 두세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두세 사람, 교회를 대표해서 기도하고 있는 두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땅의 사건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놀랍게 역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해도 응답하시지만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여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분 자녀를 둔 아버지에게 아들이 와서 “아빠, 이거 들어주세요.” 하면 자식을 사랑하니까 들어주겠만, 아들이 다섯이 있는데 아들들이 단체로 와서 “아빠 우리가 합의했는데요, 이건 꼭 들어줘야겠어요.” 하고 다섯 명이 만장일치로 합의가 되어서 아빠한테 어떤 문제를 제출하는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교회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저는 거기에 특별한 약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기도 제목이든지 교회에 내면 응답돼!” 이런 소문들이 교회에 돌기 시작하면 교회 기도 운동이 어떻게 전개될까요? 한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야, 너 기도실에 기도 제목 내봐. 응답돼. 나도 응답 받았거든…….” 이런 소문들이 퍼지면 교회 안에 무서운 기도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려면 언제라도 교회 안에 자기의 기도 제목을 낼 때에 그 기도 제목을 가지고 비판하지 않는다. 험담처럼 루머로 퍼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시키는 게 아닙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이 중보기도 사역을 할 때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전교인 앞에 서약을 합니다.
“저는 이 기도 제목을 가지고 신실하게 기도할 뿐 절대로 이 제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로만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속 깊은 이야기를 기도실에 제목으로 내놓을 때는 그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 제목을 내놓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 제목을 얘기했더니 그것 가지고 사람들이 날 우습게 알더라고요.” “아, 저 집에 이런 문제가 있어” 그래서 이게 쉬운 사역이 아닙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기도 사역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기도 사역이 이루어지면 한 교회가 가진 엄청난 가능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잡혔을 때 틀림없이 누군가는 이렇게 제시했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는, “헤롯 왕이 너무 돈을 좋아하니까 우리 돈으로 매수합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꺼낼 수가 있을 것이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어떤 사람들은, “자, 야고보를 잃어버렸는데 베드로 사도까지 잃어버리면 우리 교회는 끝장입니다. 우리 모월 모시에 지하 감옥을 습격합시다.”라고 전략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초대 교회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무엇입니까? 온 교회가 기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온 교회가 베드로 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빌더라.”
그 교회적 중보기도가 시작된 순간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끌어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기도회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아직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로데라는 계집아이가 나와서 “아, 베드로 사도가 왔어요.”라고 하니까 기도하던 사람들이 “아니, 그럴 리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이런 엄청난 드라마가 펼쳐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교회적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절히’라는 단어는 “내 모든 에너지가 소모될 때까지”라는 뜻합니다. 교회가 한 사람의 문제 때문에 정말 생명을 걸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내 문제를 위해서 금식하고 생명을 걸고 기도한다면, 이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가질 수 있는 애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제가 재미있는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1995년 6월 바로 이 주간에 제가 이곳에 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께서 그때도 오라고 해서 꼼짝없이 끌려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미국에서 막 돌아와서 개척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아직 제 아내가 한국에 오지 못하고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제 아이들이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저는 나와서 개척을 시작했고, 아내는 미국에서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합류할 생각으로 1년 반 동안 떨어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양수리에 오기 위해서 전날 밤에 강의 노트를 쭉 훑어보았습니다. 11시 반 거의 12시까지 제가 강의 원고를 한번 들여다보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엎치락뒤치락 거리다가 잠이 하도 안 와서 새벽 1시 쯤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왜 이렇게 잠이 안 오나?’ 그러다 갑자기 ‘하나님이 뭐 기도시킬 제목이 있나? 나한테 기도를 요구하실 제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요즘 와이프 잘 지내나? 애들은 잘 지내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가슴이 눌려 왔습니다. 그때 ‘아, 하나님이 혹시 기도를 요구하시는 게 아닐까?’해서 잠깐 무릎을 꿇고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한 30분 정도 기도하니까 마음의 답답함이 싹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조금 더 강의록을 정리하고 이곳에 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하고 오후에 집에 갔다가 다시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오후 한 네다섯 시쯤 되어서 저희 교회로 미국 교회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미국 교회 부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목사님, 절대로 놀라지 마세요.”하며 설명도 안 하고 그냥 “절대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요. 목사님 절대로 놀라지 마시고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으니까 “그냥, 사모님하고 아이가요 교통사고가 났는데요. 괜찮아요.” 그래서 괜찮다고, 얘기를 해보라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사고가 나서 사모님도 병원에 입원했고 아들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괜찮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자세한 소식을 들어 보니까 저희 둘째 아이가 운전면허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자기 친구 차를 빌려서 -정식 운전 면허를 받기 전에 미국은 그 허가증을 가지면 다른 사람이 타도 운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운전 면허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가는데 고속도로로 올라온 것입니다. 옆에 자기 친구를 태우고 뒤에는 제 아내가 타고 운전 면허 시험을 보러 가다가, 큰 트럭이 다가오니까 아직 운전이 미숙하여 옆으로 가다가 벽을 긁으면서 그냥 박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운전하던 우리 아이가 뒤돌아보니 엄마가 피를 낭자하게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 죽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멀쩡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병원에 가서 무의식 상태로 여러 시간을 헤매다가, 치료받고 회복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그냥 ‘감사하구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루쯤 지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거 언제 사고난 거지?’ 그래서 제가 다시 전화해서 미국에서 몇 시에 사고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밤중에 잠을 못 이루고 마음이 답답해서 무릎 꿇던 순간이 교통사고 나던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건을 통해서 또 하나 배운 것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무슨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고, 그 제목을 가지고 언제까지 기도해야 되는가?’ 그런데 이 질문에 관해서 중보기도 사역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안하는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부담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부담을 안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 부담이 사라질 때까지…….
여러분! 기도의 고전인「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라는 책을 보면, 웨슬리 듀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92페이지에 보면 1960년 3월 23일에 일어났던 히긴스라는 선교사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케냐의 마우마우라는 지역을 통과해서 케냐 시내로 들어오다가 밤중에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을 그 지역에서 지내고, 도시로 와서 며칠을 지내다가 안식년에 미국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안식년으로 미국에 오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이 마우마우 지역에서 그날 밤을 지낸 일이 있었습니까?”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까, 그때 한 열다섯 사람이랑 같이 있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 없다. 난 내 아내하고 가족만 차가 고장나서 밤새도록 고치려고 시도하다가 안돼서 밤중에 잠을 잤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깡패들이 습격하려고 하다가 선교사님이 15명과 거기 같이 있어서, 그냥 지나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냐고 하면서 별 생각없이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으로 순회를 하다가 텍사스에 있는 자기 모교회에 갔더니 어떤 사람 하나가 “선교사님! 1960년 3월 23일 밤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차 사고가 나서 밤새도록 고치지 못하고 어떤 지역에 있었던 그날 밤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자기는 중보기도 그룹에 있는데, 그 지도자가 너무 마음이 심란해서 “우리 히긴스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할 사람 오늘 밤에 모여서 기도하자!”하고 그날 밤에 15사람이 밤을 지새워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듀엘은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날 밤 이 중보기도 팀을 사용해서, 이 선교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로 15명의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을 대신해서 천사들을 보내어 이 사람을 지켜 주신 것이 아니냐고…….
셋째, 교회적 중보기도를 핵심 사역화해야 합니다.
교회는 중보기도를 사역화해야 합니다. 이때에 담임목사의 의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담임목사가 ‘우리교회 안에서 중보기도를 사역화하겠다.’하면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설교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려면 먼저 중보기도 사역팀이 구성되어야 합니다. 행정적인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역위원회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중보기도 사역실이 필요합니다.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아무나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철저하게 기도 제목의 비밀을 엄수해야 되며, 종일토록 기도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항상 기도할 수 있고, 기도 제목을 언제나 낼 수 있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워싱턴포스트> 신문을 봤는데 신문 전면에 탑 그림으로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젊은이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터로 개방이 되고 나서 다시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거꾸로 뒤집기 위한 반혁명 사건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반 혁명군이 모스크바를 진주해 올 때 크래믈린 앞에서, 그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던 한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신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반 혁명군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는 문구로 그의 기사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다음 <크리스천 투데이>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그 반 혁명군이 질주해 올 때 그 청년이 자기 목숨을 내던지고 몸으로 탱크 앞에 무릎을 꿇던 그 순간, 이 청년은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교회의 한 멤버였는데, 200명의 그 교회 교인들이 그 청년이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소련의 자유는 지켜졌고, 선교의 문은 계속해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이 중보기도자를 통해서 민족의 운명을 지키시고 그리고 무너져 가는 성의 한 곳을 가로막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중보기도를 하면 이 민족이 살 것입니다. 남북 분단의 장벽도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시 한번 부흥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중보기도의 대가를 지불하고 온 교회가 다시 한번 이 중보기도의 미션(mission) 앞에 엎드려 기도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받고 있는 중요한 도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중보기도의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교회 안에 중보기도의 사역이 체계화되지 않았거나, 조직화되지 않았다면 한번 더 이 중보기도의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고단한 역사가, 교회의 많은 고통받는 이 시대의 민중들과 수많은 우리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과 눈물이 치유되어서 하나님의 부흥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역사의 현장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그의 아내도 방언기도 하넴?
신유 은사도 나타나고?
지구촌 교회는 방언의 은사를 거절하지 않네?
찰자의 눈에 지금부터 이단이요
마귀교회로 보일겨
찰자가 이단시하는 빌리를 칭찬하넴?
@성도의본분 그러게요 마귀교회구만
소망교회는 어떤가요
맹박이 때문에 지탄 많이받았는데 거기도 그런가요
@관찰자 관찰자 19.08.20. 22:02 new
벌렌더 지구촌교회 같은데는 기적 없이도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기도해서
자기병이 낫는 경우는 있구요
웬만한 병은 병원에 가면 다 고치는데 기도원에서 못고치는 것이 병원에가서 고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사인 누가도 평생 바울 따라다니며 바울을 돌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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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지랄 했을까?
수없이 이적이 나타났는데
없데요!
그럼 찰자님의 눈이 동태인겨
@성도의본분 초기에는 그런거 없었어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도의본분 대변인 되지 마삼!
글구 정죄하지 마삼
-마귀교회라는 둥 ~~
님은 신앙인이 아녀
단지 마귀의 눈으로 교회를 살펴 비방하는 관찰자에 불과혀
제발 신앙인이 되시구려
@성도의본분 조엘 오스틴 소망교회도 어떤지 알아봐 주시오
@관찰자 님이 더 잘알잔아~~
난 그런데 관심 없어
님이 자랑질 하면 그런자들 찾아보지~~
이동원이도 빌리를 자랑질하네?
이동원이도 wcc가입한 교회구~~
@성도의본분 내가 언제 자랑질했슈
벌렌더가 은사주의 아니고 교회가 될수 있겠느냐 물어서
단순히 은사주의 아닌 교회도 커질 수 있다는 예를 생각나는대로 들어준것 뿐이지
@관찰자 잘 알아보고 자랑질 하슈~~
하고나서 손발들지 말구
하나님 나라를 알아가는 깊이있는 성찰이요 여정을 지순하게 드러내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간직하는 성도들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