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입국장, 12번 출구(외 2편)
정민나
산 멀리 바다 멀리 길을 켜 놓으면 넓은 설원을 지나가는 청
어떼 항구도시 오오타루
구름을 꺼버리면 눈총도 직선적이라 이곳 창가에서 황야지
대까지 아키다 코인 같은 경치는 숨쉬기 단조로워
슬리퍼 신고 한밤을 오갈 때는 기온차가 커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삿뽀로 맥주 삿뽀로 건포도
삿뽀로 난타 같은 눈 눈…… 눈의 뒷골목을 열면 주름이
다 펴지도록 하염없는 발자국……
한 사흘 눈사람으로 살아 보려면 컨셉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해요 한 칸 다다미 맛있든 싱겁든 네비게이션은 길만 켜
놓으면 가라고 하니까
맛을 음미해서 먹는 거죠 손가락 마디만큼 이것이 침묵이다
하고 그 고봉밥을 다 먹는 거예요
설경은 쌓이고 쌓여 옥수수 옆에 옥수수 천마 옆에 천마
가방 안에 한 모금 피로 회복제 챙겨 넣고
그 길에 서면 부엉이도 고양이도 안 자고 카스미저택 닌자쇼
처럼
밤새 눈이 내려요
보관함, 나
50가 ― 4292 무거운 가방을 트럭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이
곳은 비가 오는 곳 비옷을 파는 곳 우묵한 곳
아기똥풀과 나란히 안개 속을 걸어가는 나는 처진 어깨를
만져보고 두 손을 툭툭 가볍게 털어보고 단돈 이천 원에
금방이라도 뜯겨져나갈 쓰레기봉투를 힐끗 지나간다 배드
민턴 네트가 축 늘어진 아침 가장자리를
벌건 멧새 한 마리 날리며 울퉁불퉁 옥수수밭 돌담길 수평
선의 이름표를 떼어내며 까악까악
피어오르는 까마귀를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내가
맡기고 온 가방 가 ― 오십인지 나 ― 오십인지 안개가 깊어갈
수록 노란 아기똥풀이 예뻐서 무릎을 구부리고
입구에서 멀어질수록 인터쿨러 방열기가 돌아가는 감나무
도 매화나무도 얼굴이 노랗게 젖어들고
철창을 뽑아든 짐차 같은 50 ― 가
자갈자갈 세상을 밟는 소리로 벚나무를 지나고 보리수나무
를 지나고 똑같은 뒤통수가 보이는
창문들 멀어질수록 보관함 나 ― 오십은 까마득히 잊고
마음 갯벌
너는 검은 흙을 묻히고 검은 햇볕을 입히고 던지면 검은 돌
이 되는 웃음을 네 귀퉁이 울퉁불퉁 펼쳐놓고
너는 모래 같은 어머니를 쌓고 텐트 같은 아버지를 매고 자
갈밭에 앉아
발가락에 묻은 모래알 염기의 바람 속 너는 휘어지고 너는
넘어지고
뻘의 딸이라도 된 것처럼 질척질척 허리를 잡고 끈적끈적 씨
름을 하고
번쩍 들린 여름을 털썩 뻘 안으로 던져 놓고 한쪽 눌러놓은
섬이 뻘 밖으로 튕겨 나가면 두 손 두 발로 기어가 신발 속 꽉
찬 매미울음을 털어놓고
빙빙 돌다 힘이 들면 뻘 묻은 신발을 높이 하늘로 차올리고
기러기처럼 뻘 바닥이 가볍게 날아오를 때
갯벌 돛자리에 떨어지는 햇살은 펄떡이는 아이들 금 밖의 세
계를 보일 듯 말 듯 밀어내고 뻘의 손자손녀처럼
가족사진을 찍다가 물이 미는 오후 누군가 지나가다 돌멩
이를 툭 차면 펄럭 뻘 한쪽이 저물고
물고기를 잡는 가장자리 촘촘한 말뚝을 내려놓고 이제 옷
갈아입자 뻘 묻은 팔을 떼어놓고
너는 이 검은 섬 놓고 가야지 뻘 속에 빠져 더듬거리는 길을
건져 뻘 묻은 손으로 새들을 다 날려 보내고
—시집『E입국장, 12번 출구』(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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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 / 1960년 경기도 화성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꿈꾸는 애벌레』『E입국장, 12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