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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부산연합회 임제록 제2강-4 (2012.06.29)
10-6 마음은 형상이 없다
10-7 演若達多(연야달다)의 얼굴
13-1 隨處作主(수처작주)하라.
13-4 通貫十方(통관시방)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중생들 업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우리가 “업장 소멸한다ㆍ참회한다.” 그러지요? 그런데 이러한 진정견해ㆍ참다운 소견만 바로 들어가 버리면
但能隨緣消舊業(단능수련소구업)이라. 그랬습니다.
다만 능히 인연 따라서 구업을 녹인다. 일부러 참회하고, 뭐 팔 지지고 손가락 지지고 그렇게 하지 말라. 인연 따라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봄이 오면 눈이 녹듯이, 얼음이 녹듯이 봄이 오면 얼음 녹지 말라 해도 절로 녹습니다. 음지에 아무리 눈이 많이 쌓여있어도 그것 시간문제입니다. 그냥 녹습니다. 봄이 왔는데 그것 안 녹고 배깁니까?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치, 제대로 된 근본이치만 우리가 제대로 꿰뚫고 있으면 업장 그것 아무 염려할 것 없습니다. 하라 해도 저절로 아니합니다. 업장은 저절로 녹아집니다.
但能隨緣消舊業입니다. 임제록에서 이것 아주 중요합니다.
나는 본래부처인데, 본래부처 라고 하는 것을 알라고 하는 것이 임제록인데 그럼 우리가 업장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업장은 분명히 있지 않느냐?
隨緣消舊業. 이것은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인연 따라서 세월 가면 저절로 안 해야 할 것은 안 하고, 해야 할 것은 한다. 사람 철들면 저절로 하잖아요. 철들면 안 할 건안하고, 할 건하잖아요. 세상이치 알면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任運著衣裳(임운착의상)하야,
任運 = 때에 따라서ㆍ또는 상황 따라서 衣裳을 입고, 옷을 입고
要行卽行(요행즉행)하며, 가게 되면 가고
要坐卽坐(요좌즉좌)하야, 앉게 되면 곧 앉아요.
걸어가고 싶으면 걸어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앉아야 할 일 있으면 앉아요.
無一念心希求佛果(무일념심희구불과)니,
한 생각에도 마음에 佛果를 希求하는 일이 없다 말입니다. 부처자리 희구하는 것이, 부처자리 求하는 일이 없다. 부처자리가 따로 없는데, 뭐 하러 부처자리 또 求합니까? 우리가 임제록 펼쳐놓고 보니까 참 쉽잖아요. 불교는 이렇게 쉬운 겁니다. 그렇게 아등바등 몰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 괜히 업만 쌓입니다.
緣何如此(연하여차)오? 어째서 그러냐?
古人이 云(고인운),
若欲作業求佛(약욕작업구불)이면 佛是生死大兆(불시생사대조)라.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한다면ㆍ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라고 하는 것은 생사의 큰 조짐이다. 이랬습니다. 業이라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부처되기 위해서 참선하고ㆍ화두 들고ㆍ기도하고, 부처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은 전부 업만 짓는 겁니다. 왜 그런가? 금이 달리 금을 구하려고 금은 제쳐놓고 딴 짓 하는 것 하고 똑 같으니까요. 자기가 본래 금인데 어디 가서 금을 다시 구해요? 그것은 업만 짓는 것이지요. 그냥 심심해서 하면 괜찮아요.
심심해서하면 그것은 괜찮아요. 또 좌선이 취미가 있어서 “아~, 나는 좌선하면 참 재미있고 취미가 있다.” 해서 하는 것은 좋다고요. 부처되려고 하지는 마세요. 절대 부처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니까요. 그냥 좌선이 좋아, 선방이 조용하고 깨끗하고 시간되면 따뜻한 밥 주지, 또 방선하면 등산가지 요가하지 차량 잘 들어오지 해제되면 응당히 나오지 좋은 점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것이 좋아서 그냥 사는 겁니다. 부처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것은 업 짓는 겁니다. 그래서 영가 증도가 에도 보면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풀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부처되기 위해서 공을 베푼다는 것은 이것은 이뤄질 기회가 없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도 若欲作業求佛이면 佛是生死大兆라.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한다. 業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하는 짓입니다. 참선ㆍ간경ㆍ염불ㆍ기도, 다 업입니다. 부처되려고, 기도가 좋아서 하면 괜찮아요. 참선이 좋아서 하면, 그냥 그 삶이 좋아서 하는 것은 괜찮아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부처가 되기 위해서 참선하면 그것은 업입니다. 안 된다고요. 그냥 그 생활이 좋아서 하는 것은 좋다고요.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이니까요. 아~~ 이것 참,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분명히 임제스님 책임이지 저는 책임 못 없습니다.
그 다음에 다음 장 26쪽
10-7 演若達多(연야달다)의 얼굴
大德아 時光可惜이어늘 祇擬傍家波波地에 學禪學道하며
認名認句하며 求佛求祖하며 求善知識意度이로다 莫錯하라
道流야 儞祇有一箇父母어니 更求何物 儞自返照看하라
古人云 演若達多失却頭라가 求心歇處卽無事로다
演若達多의 얼굴. 그랬습니다. 아~~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능엄경에 있는 말씀인데요.
大德(대덕)아, 大德아, 좋은 호칭입니다.
時光可惜(시광가석)이어늘, 세월을 가히 아껴야 한다. 때를 가히 아껴야 한다.
祇擬傍家波波地(지의방가파파지)에, 다만 옆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아주 부산하게, 波波地하는 것은 아주 부산하게 돌아다니면서
學禪學道(학선학도)하며, 禪을 배우고 道를 배운다. 또
認名認句(인명인구)하며, 이름을 인식해가면서,
求佛求祖(구불구조)하며,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
求善知識意度(구선지식의탁)이로다. 선지식을 구해서 意度.
마음으로 헤아리는 도다. 그렇지요. 별별 경전ㆍ별별 어록ㆍ또 온갖 선지식 만나가지고 거기에서 이런 저런 소리 듣고, 거기에서 이런 저런 정보도 받고, 이런 저런 의문이 많지요. 다 엉터리다.
莫錯(막착)하라. 착각하지 말라. 그것 다 엉터리다. 착각하지 말라.
道流야 儞祇有一箇父母(이지유일개부모)어니,
그대에게 다만 일개 부모가 있다. 이것은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우리 근본이니까요. 그래 禪家에서는 진짜 우리 부모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부모는 우리들의 근본이기 때문에 一箇父母가 있다.
우리 근본.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내용입니다. 이렇게 根本이 다 있습니다.
각자 자기 진정한 참 생명이 있습니다.
更求何物(갱구하물)고? 그런데 무슨 다시 다른 물건을 구하는가?
무엇을 또 다시 구하려고ㆍ구하려고 그러는가?
儞自返照看(이자반조간)하라. 그대들은 다만 스스로 返照해보라.
잘 돌이켜서 생각해보라.
古人이 云, 옛 사람이 말하기를,
演若達多失却頭(연야달다실각두)라가,
求心歇處卽無事(구심흘처즉무사)로다. 일곱 자 게송입니다.
연야달다라는 사람이 머리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다가 머리를 구하려고 하니까 마음이 쉬는 그 곳에 곧 아무 일이 없어졌다. 능엄경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실라벌성에 연야달다라고 하는 아주 잘생긴 미남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어요. 거울을 보니까 자기 잘생긴 얼굴이 거울 속에 떡~ 있거든요. 그런데 거울에는 웬 사람이 머리가 있는데 ‘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 까닭 없이 이렇게 된 겁니다. 어느 날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이 들어버리는 겁니다. 거울보고는 아~ 여기 근사한 사람이 있는데 ‘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ㆍ내 머리는 어디 갔는가?’ 순간적으로 머리가 획 돌아버렸다니까요. 그래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내 머리 못 봤느냐고ㆍ내 머리 못 봤느냐고 하며 막 돌아다니는 겁니다. 여기는 머리가 있는데 내 머리 못 봤느냐고ㆍ내 머리 못 봤느냐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네 장안 사람들이 전부 저 사람 돌았다고ㆍ저 사람 돌았다고, 지 머리 달고 다니면서 머리 찾는다고ㆍ달고 다니면서 머리 찾는다고...
그러다가 어느 날, 야, 네 머리 거기 달려 있다고, 만져보라고, 척 만져보니까 여기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求心歇處卽無事라. 求하는 마음. 머리를 찾으려고 했던 그 마음이 쉬는 그 자리에 아무 일이 없어졌어요ㆍ아무 일이 없어졌습니다. 야~~ 참, 함축성 있는 기가 막힌 법문이잖아요. 머리는 멀쩡히 달고 있으면서 우리가 지금 머리를 찾으러 다니는 겁니다. 그것이 부처라고 해도 좋고ㆍ성공적인 삶이라고 해도 좋고ㆍ출세라고 해도 좋고ㆍ수승한 인생, 아주 뛰어난 삶, 부귀공명을 누리는 그 삶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 자리는 꼭 성불이라고 아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우리가 바라는 그 자리, 우리가 누리고 싶은 그 자리는, “바로 여기 있다ㆍ지금 현재 그대로 여기에 있다ㆍ흠소심마오?” 부족한 것이 뭐냐? 그것이 다다 말입니다. 그것이 다다... 지금 볼 줄 알고ㆍ들을 줄 알고, 아직 시간이 몇 분 남았는데 뭐가 급한지 나가는 사람, 나갈 줄 아는 사람. 급하다고 생각하고 나갈 줄 아는 야~~ 신통하잖아요. 도대체 뭐가 들어서 저렇게 한다고요. 좋다ㆍ나쁘다. 여기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냥 나갈 줄 아는 그것. 신기한 겁니다. 야~~ 참, 신기하잖아요.
그렇습니다. 연야달다 이야기. 능엄경에도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29쪽 보십시오.
13-1 隨處作主하라.
師示衆云 道流야 佛法無用功處요 祇是平常無事니
屙屎放尿하며 著衣喫飯하며 困來卽臥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니라
古人云 向外作工夫는 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儞且隨處作主하면 立處皆眞하야 境來回換不得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今時學者는 總不識法하고 猶如觸鼻羊이 逢著物安在口裏하야
奴郞不辨하며 賓主不分이라 如是之流는 邪心入道하야
鬧處卽入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 正是眞俗家人이니라
隨處作主(수처작주)하라. 임제록 부제를 隨處作主라고 해놨는데요.
바로 隨處作主가 여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隨處 = 곳에 따라서 주인을 지으라. 주인이 되라 이 말입니다. 어디 있든지 정신 빼앗기지 말고, 다른 경계에ㆍ다른 대상에 정신 홀기지 말고 자기 주인공 잘 챙기라. 隨處作主하라. 이것 크게 써서 집에 붙여 놓으세요. 글씨 예쁘고 안 예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글 딱~~ 써서 붙여 놓으세요. 隨處作主. 隨處作主. 정신 잃지 말고 살자.
저는, 높은 아파트 벽 있잖아요. 텅텅 빈 벽에 이상한 그림 그려 넣지 말고 隨處作主. 이것 써 붙여 놓고 싶어요. 옛날부터 저는 그랬어요. 그래갖고 어떤 건설업자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것 쉽지 않대요. 잘 안 된대요. 그런데 원력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이것은 돈을 들여서라도 모든 아파트 벽 좋잖아요. 아파트 큰 벽. 공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허름한 그림 그리느니 隨處作主라고 크게 써서 붙여 놓으면요? 그럼 가면서 오면서 저 隨處作主가 뭔가?ㆍ隨處作主가 뭔가? 모르는 사람은 물을 것이고, 그 옆에 혹 여기 앉은 불자가 있으면“아~ 그 隨處作主. 내 전문이다. 내가 설명해줄 께”隨處作主 설명 잘 해주는 겁니다. 야~~ 그러면요? 금방 퍼져버립니다. 교화가 금방 될 텐데, 그 좋은 포교장소가 그렇게 텅텅 비어 있으니... 그것 좀 하고 싶어요. 저는 옛날부터 그 생각 했습니다. ‘빈 벽에 隨處作主라고 써 붙여 놓으면 좀 좋겠나?’
하다못해 學而時習之면 不亦悅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님 말씀이라고 딱~ 써 붙여 놓으면 공부 할 것 아닙니까? 그것 공부 할 것이거든요. 學而時習之면 不亦悅乎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참~ 공자님의 좋은 말씀이잖아요. 그런 것을 써 붙이기도 하고요. 隨處作主. 아~~ 이런 것 써 붙여놓으면 참, 근사합니다.
師示衆云(사시중운), 임제 스님께서
示衆 = 대중들에게 보여 말씀하사대,
道流야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요,
불법은 用功處. 공부 쓸 곳이 없다. 공부 할 것이 없다.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니, 다만 平常無事. 그것뿐이다.
뭘 공부해봤자 지가 어디 가느냐? 어디 까지 간단 말이냐? 그냥 처음부터 사람에서 출발이고 사람에 이르는 것을... 用功處라고 했습니다. 공부 쓸 곳이 없습니다. 그냥 平常無事입니다. 平常無事...
그냥 평소대로 마음에 아무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屙屎放尿(아시방요)하며, 똥 누고 오줌 누며
著衣喫飯(착의긱반)하며, 옷 입고 밥을 먹으며
困來卽臥(곤래즉와)라. 피곤하면 곧 누워서 잔다. 이것이 일이라고요.
이것이 바로 불법이다 이겁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이다. 그 인연 따라서 농사지을 사람 농사짓고, 장사할 사람은 장사하고, 그냥 인연 따라서 억지 쓰지 말고ㆍ무리하지 말고ㆍ설렁설렁... 돈이 안 벌리면 그저 절약하고ㆍ또 절약하고, 그것마저도 안 되면 다니면서 얻어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인연 돼서 돈이 생기면 또 돈 생긴 대로 살고요.
愚人笑我(우인소아)나,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지, 이런 소리하면 나를 비웃지, 못 알아들으니까요.
智乃知焉(지내지언)이니라. 지혜로운 다 안다 말입니다.
智乃知焉이니라.
참, 임제스님 법문은 정말 여기에 다른 어떤 사회운동 내지 중생구제를 위한 그런 보살운동은 크게 표현이 안 되어있지만, 정말 모든 사람을 이렇게 교화를 한다면 이것도 참 아주 훌륭한 교화방법입니다.
古人이 云,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는 것은,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 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 자신 놔두고ㆍ자기 보물 놔두고ㆍ자기 부처 놔두고 밖을 향해서 뭘 한다고 하는 것은 전부 어리석은 짓이다.
儞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그랬네요.
여기 바로 나왔네요. 또 넉자ㆍ넉자입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느 곳에 있든지 곳을 따라서 주인노릇을 할 것 같으면 서 있는 그곳이, 내가 처해 있는 그곳이 그대로 진실한 행복이다. 진실한 행복과 진실한 평화다. 진짜 이것은요? 立處皆眞 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평화다. 진정한 열반이다. 어디 딴 데 가서 찾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境來回換不得(경래회환부득)하야,
경계가 오더라도, 어떤 대상이 설사 나에게 오더라도, 내가 그것과 바꾸지 아니해요.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習氣가 있고 從來. 그 동안 우리가 닦은 어떤 습기라든지, 해온 짓.
無間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악업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그것은 저절로 그 자리에서 해탈이다. 그 자리에서 해탈이면 지옥에 가서도 해탈이고, 무엇을 해도 해탈이다.
이 보물만 제대로 인식하면, 그 동안 내가 익혀온 습기ㆍ그 동안 지어온 악업.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그 악업을 통해서 내가 과보를 받더라도ㆍ과보를 받더라도 이 사람은 이미 과보에서 초월해있습니다. 지옥에 있어도 그 사람은 지옥이 아닙니다.
그대로 解脫大海입니다. 自爲解脫大海라. 저절로 解脫大海가 된다.
今時學者(금시학자)는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요즘 불교공부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마치,
羊은 나물을 코에다 갖다 대면 무조건 먹어요.
逢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라.
만나기만 하면 풀이든 나물이든 가시든 간에 무조건 입에다 갖다 집어넣어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뭐 좋다.” 하면 그것에 혹해 가지고 그것도 취하고, “뭐가 좋다ㆍ어디에 영험 있단다.” 하면 쫓아가서 안 보면 병이되고ㆍ몸살 나고ㆍ잠이 안 오고ㆍ무조건 가봐야 되고요. 이렇게 정신을 잃고 쏘다닐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觸鼻羊처럼요.
코에 닿기만 하면 무조건 긁어 먹는 겁니다. 양들은 가시를 막 그냥 훑어 먹어요. 그래서 혀에서 피가 나고, 입에서 피가 납니다. 그래 觸鼻羊입니다. 코에 닿기만 하면 무조건 먹는 겁니다. 觸鼻羊이 逢著物 安在口裏라.
뭐든지 만나기만 하면 그대로 입에다 집어넣는다.
奴郞不辨(노랑불변)하고, 종과 그 집 아들을 가리지 못하며
賓主不分(빈주불분)이라. 손과 주인을 나누지 못한다.
如是之流(여시지류)는 邪心入道(사심입도)라.
이와 같은 流들은 삿된 마음이 도에 들어가서ㆍ삿된 마음이 도에 들어가서 무슨 아주 요상하고 그런 어떤 생각을 해서 邪心이 아니라... 그래서
鬧處卽入(요처즉입)이라. 시끄러운 곳에 곧 빠져버리나니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이라.
그것은 참으로 출가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가짜 출가인 이다.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다. 그것이 속가인 이다 이겁니다.
출가 100번 해도 밖으로 쏘다니고ㆍ奴郞을 不辨하지 못하고ㆍ賓主를 나누지 못하고, 어느 것이 주인이고 어느 것이 객인지,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은 속가인 이고, 그것을 분별을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살든지 그 사람은 진짜출가인 이다. 이런 표현입니다.
13-4 通貫十方(통관시방)
道流야 卽今目前孤明歷歷地聽者가 此人處處不滯하고
通貫十方하야 三界自在하야 入一切境差別호되
不能回換하나니 一刹那間에 透入法界하야 逢佛說佛하며
逢祖說祖하며 逢羅漢說羅漢하며 逢餓鬼說餓鬼하야
向一切處하야 游履國土하야 敎化衆生호되 未曾離一念하고
隨處淸淨하야 光透十方하야 萬法一如니라
道流야,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卽今에 目前孤明歷歷地聽者(즉금목전고명역역지청자), 그랬습니다.
目前에 = 지금 우리 눈앞에서 孤明해요. 아주 환하게 그것만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작용하잖아요. 그것이 지금 보고ㆍ듣고ㆍ말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孤明입니다. 그것만이 있습니다. 그것만이 나라고요. 그것만이 나입니다. 그 놈이 들어서 이렇게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孤明입니다. 외로울 孤 = 그것뿐이다 이 말입니다. 저 앞에서 있었지요? 歷歷해. 어름하지가 않다 이겁니다. 너무 분명해요. 분명해서 나한테 손해를 끼치는지 이익을 끼치는지 환하게 있어요. 歷歷地聽者.
그러면서 말하는 것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있습니다.
聽者 = 그것이
보십시오. 법문을 벌써 여러 편 봤지만, 임제스님은 늘 거기에 우리 주인공ㆍ그 자리, 그 자리에 초점을 맞춰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말하자면 궁극적 차원입니다. 모든 사람의 궁극적 차원. 눈앞에 보이는 이런 현상적 차원은 아닙니다. 현상적 차원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차원은 아니라고요. 궁극적 차원. 모든 사람에게 있는 내용 물. 어제 그랬지요? 보자기를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자기 안에 있는 내용물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물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此人處處不滯(차인처처불체)하고,
이 사람은 어느 곳에서든지 滯하지, 막히지 아니해요. 그리고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시방을 환히 꿰뚫고 있어요.
시방에 다 통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물건은 어디 걸릴 것이 있습니까? 그 한 물건은, 이 몸뚱이는 우리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 물건은 그냥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겁니다. 지금 우리 여기 앉아서 미국이든 러시아든 아프리카든 저~ 기 브라질이든 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通貫十方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전부 화성이든 금성이든 목성이든 막 돌아다니는 겁니다. 순식간에ㆍ순식간에 몇 100억 광년을 그냥 순식간에 빛을, 그 빠른 빛도 속도가 제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물건의 속도는 제한이 없습니다. 몇 100억 광년을 순식간에 가버려요. 순식간에 갔다 옵니다. 그래 通貫十方입니다. 시방을 그냥 환하게 통하고 있습니다.
三界自在(삼계자재)하야, 3계에 자재해서
入一切境差別(입일체경차별)호되, 일체 경계에 차별해 들어가되
不能回換(불능회환)이라. 거기에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그것과 바꾸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一刹那間(일찰라간)에 透入法界(투입법계)라.
한 刹那사이에 법계에 다 들어가요. 한 刹那사이에 법계에 들어가서
逢佛說佛(봉불설불)하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이야기하고
逢祖說祖(봉조설조)하며,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이야기해요.
어디 그 뿐인가요?
逢羅漢說羅漢(봉나한설나한)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이야기하고
逢餓鬼說餓鬼(봉아귀설아귀)하야,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이야기한다.
그렇지요. 여기 오니까 아주 얌전하게 한 눈이 돼가지고 아주 충실한 공부 인이 돼가지고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돌아가면 아귀도 되고ㆍ한 바탕 할 일 있으면 아수라도 되고ㆍ또 어떤 자비심을 베풀 데가 있으면 아주 착한 보살도 되고, 그래 봉사 활동도 잘하고요. 때로는 부처도 돼가지고 “아이고 우리 보살이 부처다.” 부처대접을 받기도 하고ㆍ보살대접을 받기도 하고요. 야~~ 설법 참 기가 막히잖아요. 그러면서 나는 나대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一刹那間에 透入法界. 刹那사이에 온 법계에 다 뚫고 들어가 가지고 부처도 되고ㆍ조사되고ㆍ나한도 되고ㆍ아귀도 되고ㆍ아수라도 되고 뭐 별것 다 되는 겁니다.
이웃집 아줌마 만나면 또 그 수준에, 거기에 맞는, 거기에 필요한 이야기 나누고요. 손자만나면 손자수준에 맞게 하고, 아들을 만나면 아들에 맞게, 남편을 만나면 남편에게, 아내를 만나면 아내하고, 또 부모를 만나면 부모에게 맞는 그런 몸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런 형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말입니다. 逢餓鬼說餓鬼라.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이야기한다. 논한다. 그래서
向一切處(향일체처)에, 일체 처를 향해서
游履國土(유리국토)라. 국토에 노닐고 다닌다.
일체 처를 향해서 국토에 노닐고 다닌다. 그러면서
敎化衆生(교화중생)호되, 중생들을 교화하되
未曾離一念(미증리일념)하고, 한 순간도 우리 한 마음ㆍ한 마음을 떠나지 아니해요. 본래 주인공 자리 떠나지 않고 늘 그 사람입니다. 여기 와서 아주 착한공부 인이 돼가지고 착한대덕ㆍ착한도류가 돼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또 딴 데 가면 전혀 얼굴을 바꿔가지고 딴 모습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그 사람입니다. 계속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옷만 바뀌는 겁니다. 얼굴만 바뀌는 겁니다.
중국 기술에 “변경” 이라고 하는 것 있지요. 순식간에 얼굴만 확확 바꾸는 것. 그런 연극도 있잖아요. 그것 다 불교에서 나온 겁니다. 순식간에 얼굴만 바꾸는 영화. 그 전에 아주 감동적인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영화의 얼굴 바꾸는 그런 기술이 바로 이런 내용을 표현한 것입니다. 상황 따라서 얼굴 바꾸는 겁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입니다. 같은 사람이 얼굴만 바뀌는 겁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게 삽니다. 다 그렇게 살아요. 未曾離一念이라. 한 순간도 한 생각을 떠나지 아니하고
隨處淸淨(수처청정)이라. 어느 곳에 있든지 淸淨해요. 그래
光透十方(광투시방)하야, 그 빛은 시방을 꿰뚫고 있다. 그래서
萬法一如(만법일여)다. 아~~ 좋은 말이네요.
光透十方 萬法一如라. 萬法이 한결 같다. 온갖 현상이, 아침에 깨어나면서부터 다시 잠에 들 때까지 수 만 가지의 형상을 나투더라도 그 자리는 항상 여여한 한 물건 자리. 그 사람이 계속 그 사람이지요. 계속 그 사람입니다. 萬法一如라. 그래서 萬法도 아주 같은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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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